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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판 '극우-보수 삼각동맹!' 그들이 파시스트와 손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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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판 '극우-보수 삼각동맹!' 그들이 파시스트와 손 잡았다

[기고] 민주주의안의 극우와 마주하여② 극우주의의 도전과 그 공모자들

문제의 제기- 극우⋅보수의 동맹으로 극우가 날개를 단다

극우주의는 때를 만나 출현하고 득세하지만, 후퇴하기도 실패하기도 한다. 시대 화두를 둘러싼 극우주의 자신의 고유한 답변과 능력은 물론 그 성공의 주요 변수이다. 그들은 다른 역사적 대안들과 경합해야 하고 여러 갈림길에 놓인다. 하지만 자체의 힘만으로 성공하기 어렵다는 것 또한 중요한 정치적 진실이다. 극우주의의 준동과 발전 과정에는 언제나 공모자들이 존재한다. 파시즘이든 극우 포퓰리즘이든 기존 보수 세력, 그 지도자들이 이들과 협력하고 그리하여 '극우-보수 동맹'이 형성됨으로써 비로소 극우 세력은 날개를 달게 된다.

이 극우-보수 동맹의 형성과 작동방식을 들여다 보는 것은 극우주의 연구에서 매우 중요한 주제다. 극우-보수 동맹은 파시즘뿐만 아니라 트럼프가 주도한 미국 우익포퓰리즘 극우화의 결정적 변곡점으로 알려진 의회무장폭동 과정(2021년 1월 6일) 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로버트 팩스턴의 말을 들어보자.

"파시즘의 권력장악 과정은 언제나 보수엘리트층과의 공조를 통해 이루어졌다."(팩스턴, [파시즘], 교양인,2005,229)

"국가지도자나 당지도자, 정부 고위관료와 같은 전통적 엘리트의 묵인 또는 적극적 동의가 없었다면 파시스트들은 결코 권력을 잡지 못했을 것이다."(48)

"보수파들이 파시스트들의 정치적 테크닉들을 빌리기 시작하고 파시스트들의 결집된 열정에 손을 내밀며 파시즘 추종세력을 흡수하고자 할 때 파시스트들은 벌써 권력에 아주 가까이 접근한 것이다."(459)

체제 위기가 필연적으로 파시즘을 결정짓지는 않는다. 위기와 마주한 사회는 여러 정치적, 경제적 선택지에 열려 있다. 팩스턴은 파시스트-보수 동맹의 대표적 사례로서 나치의 폭력이 횡행하고 그들이 약진하던 독일에서 나치와 보수파들의 공모에 주목한다.

경제정책의 실패와 우파적 대안으로서 파시즘

먼저 당시의 경제정책 측면을 돌아 볼 필요가 있다. 대공황 시기 터무니없이 긴축정책을 밀어 부친 것이 독일경제를 가라앉게 하고 나치의 약진을 불러온 최대의 정책 실패였다. 이 망하는 정책의 키를 쥔 자가 바로 하인리히 브뤼닝이었다. 그는 중앙당(온건 보수 성향) 소속으로 '기아(飢餓) 총리'라 불릴 만큼 시대착오적인 긴축정책(임금과 가격하락, 공공지출 삭감 등)을 추구하여 경제를 나락에 빠트리고 대량 실업과 대중의 삶의 불안을 가져 왔다.

그런데 매우 충격적인 것은 당시에 독일 사회민주당도 이 긴축정책 기조에 동조하고 있었다. 반면 유일하게 나치당(민족사회주의노동자당)만이 긴축기조에 적극적으로 반대했다(마크 블라이스, [긴축-그 위험한 생각의 역사], 부키,2016, 346-348). 경제공황 및 대중의 삶의 불안과 마주하여 서민, 노동자, 중산층을 겨냥한 나치의 남다른 확장정책 대안, 열광적인 민족지상주의 호소, 그리고 사람들이 언급하기를 꺼리지만 지도자로서 히틀러의 비범한 능력이 바로 나치가 국민 대중을 사로잡게 한 이유들이었다. 그런 면에서 나치즘은 '대중독재'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겠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칼 폴라니의 통찰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는 [거대한 전환]에서 어떻게 자유주의의 실패가 파시즘을 낳았는지, 파시즘이 뉴딜, 국가사회주의와 함께 경제적 자유주의 실패에 대한 '반동적 개혁'의 대안으로 출현했는지 통찰한 바 있다. 파시즘과 뉴딜은 '고삐풀린 자본주의를 통제하라'는 당대 시대정신을 공유하는 가운데 전체주의와 민주주의로 갈라졌던 것이다(이병천, "칼 폴라니 거대한 전환으로 가는 길", 시민과 세계45, 2024). 그람시 또한 파시즘이 자유주의의 위기에 대한 우파적 대안으로서 '수동혁명'의 성격을 갖는다고 지적한 바 있다.

나치 돌격대 문제를 둘러싸고

경제정책 실패자인 브뤼닝이 독일이 베르사이유 조약에 따른 배상금지불 부담에서 해방되는 데 기여한 건 사실이다. 대공황 대책이 아니라 이것이 브뤼닝의 최대 국정목표였다. 보수주의자이면서도 사회민주당의 지지를 받기도 했던 브뤼닝은 약진하는 나치와 히틀러를 무시할 수 없었지만 끝내 수상 자리를 나치당에 주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브뤼닝은 단호하지 못했고 망설이기도 했지만, 나치의 폭력 사태를 억제하기 위해서 나치당의 나치돌격대 단체 행동을 금지한 인물이었음도 짚어야만 한다(1932년 4월 13일).

나치가 대중의 지지를 얻으면서 약진하고 있는 상황이므로 이 금지 조치는 결코 만만한 일은 아니었다. 결정은 거듭 연기되었다. 돌격대를 재무장시 인적자원으로 활용하자는 생각도 있었다. 또 히틀러에게 미리 일정 기간의 최후통첩을 주자는, 그래서 긴장도를 낮추자는 안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국가안정성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요인을 제거하고 국가권위를 확보한다는 목적으로 즉각적인 조치가 취해 졌다(이른바 '대통령 내각'아래 대통령 긴급령으로 공표). 이에 따라 친위대와 그에 속하는 모든 참모부와 시설들, 돌격대 예비대, 자동차 돌격대, 해양 돌격대 및 기수 돌격대, 항공단, 위생단, 지도자 학교, 돌격대 병영, 병기창들에 대해 돌격대 금지가 공표되었으며 이에 따른 경찰 조치들도 발표되었다(자세한 것은 칼 디트리히 브라허,[바이마르 공호국의 해체 2], 나남, 337-350).

프란츠 폰 파펜(Franz von Papen)이 후임 수상으로 들어서자 사태는 완전히 달라 졌다. 그는 권위주의적 성향을 가진 귀족정치가로서 대자본과 융커의 이익을 대변했다. 하지만 국민들로부터, 각 정당으로부터도 지지가 미미했다. 폰 파펜은 악마와 손을 잡듯이 1932년 6월 16일 나치돌격대의 폭력 행동에 대한 금지조치를 해제한다. 나치 돌격대 규모는 1932년말경 약 200만에 달했다고 한다. 이 해제 조치로 나치는 1930-32년의 헌정위기 동안 가장 폭력적인 시기를 연출하게 된다(팩스턴, [파시즘], 230-2).

보수파 지도자들이 파시즘이라는 대안을 선택하다

돌격대 금지 해제는 시작에 불과했다. 폰 파펜의 총리 기간은 짧았고(1932년 7월-11월), 슐라이허가 새 수상으로 임명되었다. 그들은 바이마르 공화국 최후의 두 수상이 된 셈인데 서로 치열한 경쟁자 관계였다. 관직 경쟁자에게 자기 자리를 빼앗겼다는 생각을 견디지 못한 나머지 폰 파펜은 비밀모임('쾰린회동', 1933년 1월 4일)에서 히틀러와 손을 잡게 된다. 히틀러를 통해 권력을 회복하는 길을 모색한 것이다. 파펜-히틀러 회동의 거래 내용은 히틀러가 수상, 자신은 부수상이라는 안이었다. 폰 파펜은 이 비밀거래 안을 가지고 힌덴부르크 대통령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고 마침내 1933년 1월 30일, 히틀러가 대망의 수상으로 취임하는 데 일등공신 역할을 한 인물이 되었다(자신은 부수상)(팩스턴, [파시즘], 224, 236, 269).

마침내 히틀러가 정권을 잡자 잘 알려진 국회의사당 방화사건이 발발하고 입법권을 행정부에 위임하는 전권위임법이 통과되었으며 미증유의 광기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히틀러를 쉽게 통제할 수 있을 것이라 꿈꾸었던 파펜과 보수파들의 구상은 거대한 몽상으로 산산 조작이 났다. 이후 부수상 폰 파펜은 히틀러의 대대적 숙청작업에서 살해당할 위기를 맞기도 하지만 살아 남았고 히틀러 곁을 떠나지 않았다.

도대체 폰 파펜, 나아가 기득권 보수파들의 머릿 속에는 무슨 생각이 들어 있었던 것일까. 팩스턴은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집권과정에서 필연적인 요소란 아무 것도 없었으며 결정적인 문제는 "보수파 지도자들이 파시즘이라는 대안을 선택했다"(236-237)는 데 있었다고 예리하게 짚고 있다. 그려면서 사태를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집권은 모두 필연적인 사건은 아니었다...히틀러를 총리의 자리에 앉히기로 결정한 것은 폰 파펜이었다. 자신의 경쟁자인 슐라이어와 온건 좌파를 모두 배제시킬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정치 및 경제체제의 위기가 파시즘이 들어설 틈을 열어 주기는 했지만, 파시스트들을 실제로 그 틈 안에 밀어 넣어 준 것은 소수 강력한 기득권 지도자들의 불행한 선택이었다(268-269, 고딕은 인용자)."

또한 유사한 취지에서 벤저민 카텃 헷(B.C.Hett )([히틀러를 선택한 나라-민주주의는 어떻게 무너졌는가], 이선주역, 눌와, 2022)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 준다. 팩스턴의 설명과는 다소의 차이가 있다.

"히틀러가 유일한 해결책으로 등장했던 1932년과 1933년 초의 위기와 교착 상태는 국민의 절반 이상을 대표하는 정치인을 배제하고 가장 가벼운 타협조차 하지 않으려고 했던 우파 정치인들 때문에 빚어졌다. 결국 보수적인 정치인들(후겐베르크, 브뤼닝, 슐라이허, 파펜과 힌덴부르크)은 그들 입맛에 맞는 조건으로 권력을 유지할 유일한 방법으로 나치를 끌어 들였다. 히틀러 정권은 그 결과였다."(277-8)

위의 설명들은 흔히 파시즘 출현의 조건으로 많이 이야기되는 '정치적 교착' 상태라는 것의 구체적 실상이 어떤 것이었지를 잘 일러 주고 있다. 오로지 자신들의 사익에만 눈먼 기존 보수 세력의 조력과 통탄스런 공모가 나치즘에 날개를 달아 주어 마침내 거대한 인류적 비극과 야만을 낳게 했던 것이다.

결론 -독일의 거울에 비춘 한국

윤석열이 2024년 12.3 비상계엄을 선포한 이래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 선고를 앞두고 있는 오늘 한국의 상황은 나치가 약진하던 지난 날 독일과는 다르다. 비상계엄 형태를 취한 윤석열의 친위쿠데타는 87년체제의 제도적, 정치적, 문화적 빈틈을 파고 들었다. 그것은 행정부와 국회의 교착상태에서 위기에 몰리고 극우유튜브에 빠진 수구보수권력이 헌정질서를 파괴하면서 자기 위기를 타개하고 영구집권을 도모한 극우적 반동이다. 넓게 같은 극우주의라 해도 그 성격도 배경조건인 위기의 성격도 매우 다르다. 윤석열의 친위 쿠데타는 벌거벗은 민낯의 퇴행적 반동성을 보여주고 있을 뿐 대안 우파 또는 '대중독재'적 성격은 찾아볼 수 없다. 지도자로서 윤석열의 무능과 무책임, 바닥을 기는 그 저열함은 차마 눈뜨고 보기 어렵다. 광장의 극우는 태극기와 성조기를 같이 흔들고 있으며 거기에는 파시즘과 극우 포퓰리즘의 공통 요소인 민족주의가 빠져 있다.

윤석열의 내란은 대안우파적 성격을 갖지 못한, 민주주의안의 퇴행적인 극우 반동이며 그런 의미에서 한국에서 'K-트럼프의 시간'은 아직 오지 않았다. 12.3 비상계엄은 자체 허점, 군 내부의 균열, 그리고 의회와 광장의 민주적 회복력으로 실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후 정국은 매우 새로운 국면으로 나아갔다.

내란죄로 구속기소되었던 윤석열은 법원과 검찰의 노골적 공모행위로 풀려나 의기양양하게 관저로 되돌아갔다. 국민의힘이 지지율을 회복했고 거리의 극우가 창궐하고 있다. 대통령 권한대행(최상목), 법원과 검찰 권력이 국민의힘과 합세해 윤석열을 비호하고 나아가 내란에 동조하는 행위를 서슴치 않고 있다. 윤석열과 국가기관안의 극우 동조자들, 극우가 주류가 된 국민의힘, 거리의 극우로 구성된 한국판 '극우-보수 삼각동맹'의 등장과 그 위세야말로 12.3 계엄 못지 않은 충격이다.

한국의 극우주의와 독일 파시즘간의 중대한 차이와 역사적 거리에도 불구하고 바로 여기에, 즉 보수정당과 고위 관료들이 자기 살 길을 위해 극우지도자 및 극우세력과 공모한다는 점에 양자를 이어주는 놀라운 공통점이 발견된다. 윤석열이 광장 극우의 폭발적 에너지를 풀어 놓아 서부지법 폭동같은 일이 일어 났다. 그리고 국민의힘은 윤석열에 동조하고 극우운동에 기생함으로써 보수정당의 위기를 타개하고자 도모하고 있다.

극우-보수 삼각동맹의 결집도에 비하면 반극우·민주헌정주의 연대의 결집도는 약하고 느슨한 편이다. 반극우 연합정치의 목소리도 나오지만 힘을 받지 못하는 것은 민주당의 책임이 크다. 민주당의 이재명은 사법리스크에 걸려 있는 데다 중도보수노선을 선택해 국민의힘과 감세경쟁을 벌리면서 저변넓은 연합정치의 길을 스스로 차단했다. 지금은 민주화 이행기 "민주헌법 쟁취 국민운동본부"와 같은 연합체, 반극우 연합체가 없다.

지금은 헌재의 시간이다. 헌재의 탄핵심판 선고가 예정보다 훨씬 늦어지고 있다. 무슨 까닭일까? 한국 민주주의의 운명이 8인 재판관의 손에 달려 있다. 한국 민주주의의 성공과 회복력, 그리고 그 허점과 취약성, 실패에 관한 온갖 이야기들이 이 심판에서 판가름이 난다. 윤석열을 탄핵하여 단죄해야 할 요건은 명명백백하며 차고도 넘친다.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재판관들이 기본적 상식과 합리성만 있다면 답이 나온다. 늦었지만 헌재가 단호하고 신속한 파면 결정을 내려 자기 소임을 다하기를 촉구하고 기대한다.

▲윤석열 대통령 탄핵심판 사건이 헌법재판소에 접수된 지 95일째인 19일 서울 종로구 헌재 건너편에서 윤 대통령 지지자가 탄핵 각하를 촉구하는 가운데 보행자와 대통령 지지자가 뒤섞여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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