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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600만 사망설의 출발은 아이히만의 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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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600만 사망설의 출발은 아이히만의 입이었다

[김재명의 전쟁범죄 이야기 109] 독일의 전쟁범죄-홀로코스트 37

1933년 1월 말 히틀러가 독일 총리에 오른 뒤 베를린 지하 벙커에서 자살하는 1945년 4월 말까지 12년은 '야만과 광기의 시대'였다. 나치의 폭주 기관차는 멈추었지만, 죽은 이들이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는 논란으로 남았다. 500만~600만 유대인을 포함한 1200만 명이 나치 전쟁범죄의 희생양으로 추정될 뿐이다. 유대인들은 홀로코스트의 최대 희생집단임을 내세워 나름의 이득을 챙겨왔고 앞으로도 그럴 태세다.

'홀로코스트'(holocaust)와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Endlösung der Judenfrage)은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이지만, 시점과 대상이 다르다. 홀로코스트의 언어적 뿌리는 그리스어 holokauston으로, 신에게 '모든 것(holos)을 불태워(cautos)' 제물을 바친다는 뜻이라 한다. 한문투로 쓰자면 번제(燔祭)다. 히틀러 정권이 유대인을 비롯한 유럽 민간인들에게 저질렀던 집단학살(genocide)을 가리킨다. 희생자의 절반 가까이는 유대인이지만, 나머지 절반은 비(非)유대인이다.

이에 견주어 '유대인 문제에 대한 최종 해결'은 1939년 전쟁이 터진 뒤 "유럽 땅에서 유대인을 없애버려야 한다"면서 1945년까지 이어졌던 집단학살이다. 시점으로 치자면 홀로코스트의 후반부에 벌어진 전쟁범죄다. 1942년 1월 베를린 교외 반제(Wannsee) 호숫가에서 나치 차관급 간부들이 모여 '최종 해결'에 입을 모으기 전에도 이미 많은 유대인들이 죽었지만, 절대 다수의 유대인 희생자들은 특히 1942년 이후에 생겨났다.

holocaust가 Holocaust로 바뀐 까닭

'홀로코스트' 희생자의 다수는 유대인이지만, 그들이 다는 아니다. 300만 명에 이르는 소련군 전쟁포로를 비롯해, 폴란드인, 공산주의자(사회주의자), 여호와의 증인, 가톨릭교도, 장애인, 성소수자, 집시(신티족, 로마족)를 비롯한 여러 다른 집단에 속한 개인이 희생됐다. 이들은 수용소(노동수용소, 포로수용소, 절멸수용소), 게토(ghetto) 등에서 총살, 치클론B 독가스, 굶주림과 전염병, 의료실험과 안락사 등으로 죽어갔다. 나치의 전쟁범죄가 없었다면 살았을 생목숨들이었다.

그럼에도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나치의 유일한 희생집단인 것처럼 홀로코스트를 독점하려는 모습을 보여왔다. 흔히 '유대인 홀로코스트'란 표현에서 '유대인'을 굳이 넣을 필요가 없다며 빼버리고, holocaust라는 일반 명사의 앞머리 알파벳을 아예 대문자로 바꿔 Holocaust라 표기하는 것을 고집한다. 그런 속사정을 잘 모르는 일반인들은 '이게 뭐지?' 하며 헷갈리기 마련이다(글 끝에서 다시 살펴보겠지만, 팔레스타인을 비롯한 중동의 아랍인들은 유대인들이 '희생자 기억'을 독점하려는 데는 또 다른 꼼수가 숨어 있다고 본다).

'홀로코스트'와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은 학살 수단에서도 차이가 난다. 홀로코스트 전반부의 학살은 아인자츠그루펜(Einsatzgruppen, 기동학살부대)가 동유럽에서 130만 명의 유대인을 포함한 200만 명을 사살했던 것처럼, 학살자는 총을 들고 희생자를 마주 보고 죽였다. 학살자가 받는 심리적 부담을 덜고 더 많은 이들을 죽이는 '효율적' 대안이 독가스다. 후반부의 희생자들은 대부분이 치클론B 독가스로 죽었다. 유대인 최종해결을 다룬 반제회의(1942)는 유대인 숫자를 1100만 명으로 잡았고, 그 가운데 절반쯤이 희생당했다고 보면 크게 틀리지 않는다.

▲ 전쟁 중 300만 명의 소련군 포로들이 학살당한 것으로 알려진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이송된 소련군 포로들. ⓒAuschwitz-Birkenau State Museum Archive

유대인에 앞서 정신 장애인 학살

적지 않은 유대인들(특히 이스라엘과 프랑스 유대인)은 Holocaust말고도 그들의 고유 언어인 히브리어로 '쇼와'(Shoah, 재앙)라는 용어를 더 쓴다. 특히 1985년 유대계 프랑스 감독 클로드 란츠만의 9시간짜리 대작 다큐 '쇼와'가 큰 관심을 모은 것도 계기가 됐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1948년 대량난민으로 쫓겨난 참상을 가리켜 아랍어로 '나크바'(Nakba, 대재앙)라 일컫는 것과 똑같다.

홀로코스트의 알파벳 맨 앞글자 h를 H로 바꾼 데서 짐작되듯이, 미국이나 이스라엘의 유대인 연구자들은 (나치의 전쟁범죄가 여러 다양한 집단에게 저질러졌음에도) 유대인들의 고난과 희생에 초점을 맞춰왔다. 앞서 살폈듯이 유대인들만 피해를 입은 것은 아니다. 정신 장애인들과 집시들도 나치의 폭력에 희생됐다. 그 숫자는 각각 20만 명 이상으로 알려진다.

'아리안의 타고난 우월함'임을 내세우던 나치의 눈길로는 정신 장애인들은 '밥만 축내는 벌레' 쯤으로 여겨졌다. 폴란드를 침공하던 바로 그날(1939년 9월1일), 히틀러의 지시를 받은 총통부는 친위대 의사들로 하여금 전부터 계획해오던 'T4 작전'(Aktion T4)을 실행에 옮기도록 했다. 정신 장애인들은 나치의 유대인 집단학살에 앞선 1차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이었다. 영국 저널리스트이자 역사저술가인 폴 존슨의 글을 보자.

[친위대는 유대인 학살을 시작하면서 일산화탄소 가스와 치클론B라는 시안화계 살충제 등 다양한 독가스를 실험했다. 최초의 가스실은 1939년 후반에 브란덴부르크에 있는 안락사 시설에 마련됐다. 이곳에서 환자 4명을 먼저 시험한 사실에 대해 히틀러의 주치의 카를 브란트가 보고하자, 히틀러는 일산화탄소 가스만 사용하라고 지시했다. 그 뒤 5개의 안락사 시설에 가스실을 새로 마련했다. 가스실은 '샤워실'로 불렸다. 나중에 (아우슈비츠에서) 대량학살을 저지를 때 썼던 방식과 같다.](폴 존슨, <유대인의 역사>, 포이에마, 2014, 827쪽)

"홀로코스트는 없었다"고 우기는 역사 부정론자들은 히틀러가 빼도 박도 못할 결정적인 '전쟁범죄의 증거'를 남기지 않았다는 사실을 꼽는다(성노예 '위안부' 문서가 없다고 우기는 일본 극우들과 닮았다). 실제로 히틀러는 '유대인 절멸'을 말로만 떠들었을 뿐 학살을 구체적으로 명령하는 문서를 남기지 않았다. 홀로코스트 연구자 라울 힐베르크(버몬트대, 1926-2007)의 글을 보자.

[아마도 히틀러는 유대인을 죽이라는 명령에 서명한 적이 결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가 촌평과 질문 혹은 '바람'의 행태로 행한 발언들의 기록은 있다. 그때 그가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 혹은 그가 진정 살인을 뜻한 것인지는 언어의 문제인 동시에 어조의 문제였다. 그가 저녁식사 자리에서 '소름 끼치는' 결정에 대하여 '차갑게',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을 때, 듣는 사람들은 히틀러가 '진심으로'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라울 힐베르크, <홀로코스트: 유럽유대인의 파괴 2>, 개마고원, 2008, 1394쪽)

"총통이 서명한 문서 보여달라"는 의사 파면

히틀러는 안락사란 이름을 빌린 처형(학살) 지침을 내리면서 범죄의 증거가 될 문서로서가 아닌, 말로만 했다. 안락사 실행을 떠맡게 된 한 친위대 소속 의사는 "총통이 서명한 문서를 보여 달라"고 했다가 곧바로 파면됐다. 그 자리에 앉은 다른 의사도 친위대 상부로부터 '정신 장애인을 제거하라'는 명령을 말로만 전해 받았다.

헤린더 파우어-스투더(오스트리아 빈대학, 윤리학․정치철학)는 히틀러 시대의 독일 법률가들이 어떻게 나치 정권의 잔혹행위를 감싸주었나를 비판적으로 다룬 역작(Justifying Injustice, 2020)을 냈다. 그의 책에서 '안락사' 관련 대목을 보자.

[나치 법은 실제로 중대한 구조적 결함을 드러냈으며, 정권 최악의 범죄와 연결돼 있다. 정치적 동기에 의한 소급입법 외에도, 최악의 참사가 벌어진 건 히틀러의 지시가 비밀리에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유대인 학살에 대해서는 해당 법규는 말할 것도 없고 아무런 서면 명령도 없었다. 안락사 프로그램의 법적 토대가 된 것은 히틀러가 총통비서실장인 필리프 보울러와 자신의 주치의 카를 브란트에게 보낸 비공식 서한 한 통뿐이었다.](헤린더 파우어-스투더, <히틀러의 법률가들: 법은 어떻게 독재를 옹호하는가>, 진실의 힘, 2024, 269쪽)

1939년 9월1일자로 작성된 히틀러의 그 서한은 사실상 '안락사'로 위장한 학살 길을 터준 것이나 다름없다(보울러는 1945년 5월 자살했고, 브란트는 1948년 6월 교수형). 정신 장애인 처형은 1941년 8월에 잠시 멈췄다. 독일 교회가 독가스 학살 방식에 항의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나치 정권의 야만적인 학살 정책을 한때나마 중단시킨 단 하나의 사례로 꼽힌다. 하지만 정신 장애인 학살은 그 뒤에도 쉬쉬하며 이어졌다.

나치에 학살된 정신 장애인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는 정확히 알기 어렵다. 연구자마다 추정이 조금씩 다르다. 라울 힐베르크는 "약 10만 명의 독일인 성인과 어린이가 '안락사 작전'으로 목숨을 빼앗겼다"고 썼다(라울 힐베르크, 1397쪽). 20세기 전반기 유럽의 혼란상을 다룬 영국 역사가 이언 커쇼의 역작(To Hell and Back: Europe 1914-1949, 2015)에 따르면, '안락사' 희생자 규모는 20만 명쯤이다(이언 커쇼, <유럽 1913-1949: 죽다 겨우 살아나다>, 이데아, 2020, 595쪽).

'반사회분자'로 찍힌 집시도 '제거'

홀로코스트 희생자 가운데는 집시(신티, 로마족)도 빼놓을 수 없다. 잘 알려졌듯이, 집시는 그들 나름의 언어와 문화를 지녔지만 독자적인 종교는 없었다. 포장마차를 타고 유럽 곳곳을 돌아다니는 유랑민족이었다. 나치의 엄격한 눈길로는 집시들은 '반사회분자'이었고 '제거' 목록에 올랐다. 급기야 1942년에 독일 점령지 전역에서 집시들이 붙잡혀 수용소에 갇혔다. 라울 힐베르크의 글을 보자.

[독일, 오스트리아, 체코, 폴란드, 벨기에, 북부 프랑스, 네덜란드로부터 2만2000~2만3000명이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수용소(제2수용소)로 보내졌다. 그곳에는 '집시수용소'라고 불리던 특별구역이 있었다. 비아위스토크 지역에서 두 번에 걸쳐 이송되어온 집시 2700명은 티푸스 발병 가능성 때문에 도착 직후 학살되었다. 마지막 가스 학살은 1944년 8월과 10월에 벌어졌고, 부헨발트로 보내졌다가 아우슈비츠로 되돌아온 800명 역시 학살되었다.](라울 힐베르크, 1403쪽)

친위대 총사령관 하인리히 힘러는 유대인을 멸시할 때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집시 페스트를 격퇴해야 한다"는 말을 거듭하곤 했다. 일부 집시들은 수용소에서 요제프 멩겔레(1911-1979) 같은 친위대 소속 의사들의 비인간적인 생체 실험으로 숨졌다(연재 52 참조). 나치에 희생된 집시는 적어도 20만, 많게는 50만 명에 이른 것으로 알려진다.

▲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여성 수감자들. 1940년부터 5년 동안 유대인 110만 명을 포함한 130만 명쯤이 아우슈비츠로 강제 이송된 것으로 추정된다. ⓒ김재명

친위대 장교가 증언한 아이히만의 '600만 학살설'

나치 독일의 전쟁범죄로 사망한 숫자는 연구자마다 다르지만 대체로 1200만 명쯤으로 얘기된다. 유럽 전역의 유대인 희생자 600만, 소련군 포로 300만, 폴란드 비유대계 민간인 250만~300만 명 등을 합쳐서다. 1942년 유대인 문제의 최종해결을 논의했던 반제 회의는 유럽 유대인 숫자를 1100만으로 잡았다. 유대인 600만 희생이 사실이라면, 절반쯤만 '해결'한 셈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 가장 많은 사망자를 낸 나라는 소련이다. 적어도 2000만 명쯤이 죽은 것으로 알려진다. 이 가운데는 독일군에 포로로 잡혔다가 굶주림과 노예노동, 총살 등으로 죽은 300만 명의 소련군 장병들이 포함돼 있다. 소련 다음으로 큰 피해를 입은 나라는 폴란드다. 유대인 300만, 비유대인 300만 합쳐 희생자 규모는 600만 명으로 추산된다. 일부 연구자는 폴란드 희생자 규모를 550만으로 잡는다. 이 경우에도 유대인 연구자들은 '유대인 희생자 300만 명'을 고집한다(유대인 300만, 비유대인 250만).

아우슈비츠 수용소장 루돌프 회스는 패전 뒤 도망쳤다가 영국군에 잡혀 심문을 받을 때 '최종 처리'를 위해 아우슈비츠로 끌려온 유대인이 250만 명이라 했다. 아돌프 아이히만 중령의 보고서에 그렇게 쓰여 있었다는 것이다. 아이히만은 나치가 만든 악명 높은 보안기구인 제국보안본부(RSHA)의 유대인 전담부서(제4국 B실 4과) 책임자였다(그의 보고서는 패전 무렵 폐기돼 없다). 아우슈비츠의 높은 사망률을 감안할 때 사망자도 거의 같은 규모로 짐작할 수도 있다. 하지만 회스는 감옥에서 <고백록>을 쓰면서 딴 소리를 했다.

[나 자신은 얼마나 많은 유대인들이 죽었는지 알지 못하며 어림짐작도 할 수 없다. 그런데 '총계 250만'이란 숫자도 너무 높여서 잡은 것이 아닌가 한다. 심지어 아우슈비츠는 학살한 다음 이를 처리하는 능력에도 한계가 있었다. 그렇기에 예전의 억류자들에 의해 제공된 숫자는 상상의 산물이거나 근거가 부족한 것이라 본다.](루돌프 회스, <아우슈비츠 수용소장 헤스의 고백록>, 범우사, 2006, 288쪽)

유대인 희생자 규모가 600만 명이라는 설은 "아이히만 중령에게서 전해 들었다"는 한 정보장교의 진술에서 비롯됐다. 1945년 11월 친위대 정보장교 출신인 빌헬름 회틀은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의 증인 자격으로 내놓은 진술서에서 "1944년 8월말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만난 아이히만으로부터 '살해된 유대인이 600만 명'이란 말을 들었다"고 썼다.

회틀이 전하는 아이히만의 말에 따르면,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수용소에서 400만 명이 죽었고, 나머지 200만 명은 소련에서 총살로 죽었다는 것이다(Yale Law School, Nuremberg Trial Proceedings Volume 3, ⇒https://avalon.law.yale.edu/imt/12-14-45.asp). 이런 회틀의 진술을 바탕으로, 뉘른베르크 전범재판 기소장에는 유대인 희생자를 572만 명으로 꼽았고, 1946년 9월에 열린 선고 공판도 '유대인 600만 명이 학살됐다'고 했다.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으로 굳어진 600만

아이히만으로부터 들었다는 '600만 학살설'을 전한 빌헬름 회틀(1915-1999)은 한 마디로 수상쩍은 인간이다. 오스트리아 출신인 회틀은 23살에 비엔나 대학에서 역사학 박사학위를 딸 무렵 이미 나치 당원이었다. 악명 높은 보안국(SD) 소속의 친위대 장교로 들어가 1944년엔 유럽 중부 및 남동부 지역의 정보·방첩 지휘관에 올랐다. 독일 패망을 눈앞에 둔 1945년 3월 재빨리 미군 첩보조직인 OSS(미 CIA의 전신)에 선을 댔고, 미군 포로가 됐다.

미국은 당시 만 30세였던 친위대 정보장교의 쓰임새를 높이 샀을까,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증인으로 세웠다. 그리곤 미 육군 방첩대(CIC) 요원으로 채용했다. 그런 '약삭빠른 전향자' 회틀의 입에서 나온, '아이히만의 말'을 전하는 형식의 600만 학살설에 얼마만큼 진실이 담겼을까는 독자들의 판단에 맡긴다.

다른 어디도 아닌, 뉘른베르크 전범재판부가 선고공판에서 짚은 '유대인 600만 학살설'은 그 뒤 정설처럼 굳어졌다. 1948년 이스라엘 독립국가 선언문에서도 '600만 명이 희생됐다'는 구절이 보인다. 그 뒤로 유대인 주류사회는 줄곧 600만 학살설을 받아들였다. 1961년 4월 아이히만 재판이 벌어질 무렵 예루살렘에서 야드 바셈(Yad Vashem, 홀로코스트 관련 기구)이 발행된 소식지(Yad Vashem Bulletin)에도 1939년 유럽 유대인 825만 5000명 가운데 595만 7000명이 학살됐다는 통계가 실렸다.⇒https://www.yadvashem.org/yv/pdf-drupal/en/eichmann-trial

소식지에 따르면, 폴란드 유대인 325만 가운데 285만, 소련 유대인 210만 가운데 150만, 루마니아 85만 명 가운데 42만 5000, 헝가리 40만 가운데 20만, 독일 19만 가운데 13만, 프랑스 30만 가운데 9만, 체코 31만 가운데 24만 명 등이 학살됐다(각국별 유대인 숫자는 1939년 기준. 출처는 통계학자․인구학자인 야코프 레슈친스키가 1955년에 쓴 'The National Aspect of Diaspora Jewry'). 레슈친스키는 1946년 6월 열린 세계유대인총회에서, 1939년 8월의 소련 영토 안에서 죽은 유대인 150만 명을 포함해 모두 597만8000명의 유대인이 사망했다고 발표한 바 있다(라울 힐베르크, 1705쪽).

야드 바셈 기념관의 홀로코스트 연구자들이 중심이 돼 펴낸 <홀로코스트 백과사전> 인터넷 판은 유대인희생자 규모를 적게는 560만, 많게는 590만 명쯤으로 잡고 있다. 미국의 홀로코스트 기념관(US Holocaust Memorial Museum)에서 운용하는 인터넷 판에서 추산하는 희생자 규모는 600만 명이다.

힐베르크, "정확한 통계 내놓기는 불가능"

폴란드 출신의 라울 힐베르크는 홀로코스트의 선구적 연구자로 높이 평가를 받는다. 그는 필생의 역작(The Dstruction of European Jews, 1961)을 준비하면서, 전쟁 뒤 미군이 압수한 독일쪽 문서들을 세심하게 살펴보고 나름의 면밀한 작업 끝에 유대인 희생자 규모를 510만 명이라 했다. 유대인 게토에서 80만 명, 아인자츠그루펜(기동학살부대)의 총살형 140만 명, 수용소에서 290만 명쯤이 희생됐다는 것이다(라울 힐베르크, 1721쪽).

연도별로 나눈다면, △1933-1940년 10만 명 이하, △1941년 110만 명, △1942년 260만 명, △1943년 60만 명, △1944년 60만 명, △1945년 10만 명 이상이다(라울 힐베르크, 1722쪽). 지난주에 살펴본 6개 절멸수용소에서의 독가스실 처형과 아인자츠그루펜(기동학살부대)의 마구잡이 총살형이 함께 일어났던 1942년에 가장 많은 피를 뿌렸다.

힐베르크에 따르면, 나라별 유대인 사망자는 폴란드 300만 명 이하, 소련 70만 명 이상, 루마니아 27만 명, 체코슬로바키아 26만 명, 헝가리 18만 명 이상, 독일 13만 명, 리투아니아 13만 명 이하, 네덜란드 10만 명 이상, 프랑스 7만 5000명, 라트비아 7만 명, 유고슬라비아 6만명, 그리스 6만 명, 오스트리아 5만 명 이상, 벨기에 2만 4000명, 이탈리아 9000명 등이다(라울 힐베르크, 1722쪽). 하지만 힐베르크는 '사실상 정확한 통계를 내놓기는 불가능하다'고 여긴다. 어디까지나 추정치라는 것이다. 그 이유를 들어보자.

[오늘날까지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500만 명에서 600만 명 사이의 수치를 제시한다. 계산법도 대부분 똑같다. 독일 기관과 위성국 당국과 유대인 평의회의 파편적인 자료에서 사망자 수를 뽑아내어 합산하거나, 전쟁 전 통계 수치(유대인 숫자)에서 전후 통계 수치(생존 유대인 숫자)를 빼는 방법이 동원되고 있다. 가정 위에 가정이 세워지는 과정이 이어지면서 작은 오류들이 쌓이고 또 쌓일 수 있다. 사정이 이러하므로 사실상 정확한 통계를 제시하기란 불가능하다.](라울 힐베르크, 1706쪽)

▲ 아우슈비츠 수감자들의 가방들. 수용소에 닿자마자 곧바로 가방과 소지품을 빼앗겼다. ⓒ김재명

벤츠 "600만이란 숫자는 너무나 추상적"

독일의 이름난 홀로코스트 연구자인 볼프강 벤츠(베를린기술종합대, 독일현대사, 반유대주의 연구소장)도 힐베르크와 마찬가지로 정확한 집계의 어려움을 솔직히 털어놓고 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패망 무렵 자신들의 전쟁범죄 흔적을 지운 것처럼) 나치 독일도 막판에 대부분의 관련 문서를 없앴다. 그래도 독일 전역에 퍼져 있던 게슈타포(비밀경찰) 사무실들에서 찾아낸 파일을 비롯, 나치가 미처 폐기 못한 전쟁범죄 증거들은 곳곳에 널려 있었다. 전승국들은 그런 문서들을 챙겼고,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증거 자료로 활용했다. 연구자들이 홀로코스트 희생자 규모를 대충이나마 짚어볼 수 있었던 것도 압수된 1차 문서들을 이리저리 맞춰본 덕이다.

벤츠는 나치의 유대인 학살이 우리 인류사에서 '유일무이한 전쟁범죄'라는 점은 분명하지만, '증명된 최소 수치'를 놓고 볼 때 600만이란 유대인 희생자 숫자가 '너무나 추상적'이라 했다. 손에 넣을 수 있는 1차 자료가 충분치 못한 탓이다. 이런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벤츠는 유대인 희생자 규모를 적어도 530만 명, 많게는 620만 명쯤으로 추정한다.

[홀로코스트 희생자 수치는 (대충) 적당하게 표현할 수는 없다. 게다가 그 수치란 것도 너무나 추상적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민족학살의 차원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것을 거론할 수밖에 없다. (유대인 희생자 620만 가운데는) 폴란드 유대인 270만 명, 소련 유대인 220만 명, 헝가리 유대인 50만 명, 독일 유대인 16만 5000명, 오스트리아 유대인 6만 5000명, 프랑스와 벨기에 유대인 3만 2000명, 10만 명 이상의 네덜란드 유대인, 그리스 유대인 6만 명, 같은 수치의 유고슬라비아 유대인, 14만 명이 넘는 체코슬로바키아 유대인, 거기에다 루마니아의 학살로 죽은 유대인들과 알바니아․노르웨이․덴마크․이탈리아․룩셈부르크·불가리아에서 강제 이송된 뒤 살해된 유대인들이 더해져야 한다.](볼프강 벤츠, <홀로코스트>, 지식의 풍경, 2002, 157-158쪽)

벤츠와 힐베르크의 유대인 희생자 집계를 보면, 폴란드는 비슷하지만 소련에서 큰 차이가 난다. 힐베르크는 70만 명의 소련 유대인이 희생됐다고 봤지만, 벤츠는 220만 명으로 집계했다. 헝가리 유대인 희생자도 힐베르크는 18만 명, 벤츠는 50만 명으로 다르다. 전체 희생자 규모에서도 110만 명이나 차이가 난다(힐베르크 510만 명, 벤츠 620만 명).

1990년에 타계한 미국인 역사학자 루시 다비도비치는 유대인들의 전쟁 전 출생과 사망 기록을 바탕으로 펴낸 <유대인과의 전쟁>(The War Against the Jews, 1975)에서 유대인 희생자가 593만 3900명이라고 구체적인 숫자를 내놓았다. 하지만 손에 넣을 수 있는 자료의 한계를 떠올리면, 그가 내린 결론이 딱 맞다고 고집 부리긴 어려울 듯하다.

큰 틀에서 보면, 전쟁 중에 아돌프 아이히만의 입에서 나왔다는 600만이란 숫자가 어느덧 금기의 영역처럼 자리 잡은 모습이다. 600만 밑으로 함부로 줄였다간 유대인들이 벌떼처럼 덤벼들고, 크게 늘린다면 반유대 성향의 단체들로부터 비난받기 마련이다. 홀로코스트 희생자 규모는 민감한 사안이다. 연구자들도 연구 외적인 환경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다.

바로 앞에서 살펴본, 1961년에 나온 유대인 소식지(Yad Vashem Bulletin)에는 적어도 650만 명, 많게는 700만 명으로 추정한다는 주장이 실렸다. 독일 패전 뒤 80년 세월이 지나는 동안 지역 연구가 활발해지고 새로이 찾아낸 자료들이 늘어나면서 희생자 규모가 조금씩이나마 커지는 흐름이다. 이 경우에 뺄셈은 없다. 기존의 600만 설에 숫자를 더할 뿐이다. 600만을 훌쩍 넘어 700만 희생설이 기정사실처럼 굳어질 날도 언젠간 올 듯하다.

유대인들은 왜 '희생자 기억'을 앞세우나

여기서 짚고 넘어갈 점 하나. 유대인 홀로코스트 희생자 규모가 커지는 것은 새 자료의 발굴 영향도 있지만, 한편으로 유대인의 발언권이 미국과 중동에서 커지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을 듯하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유대인들은 걸핏하면 홀로코스트를 입에 올리며 희생자 집단임을 강조한다. 중동 현지 취재 때 만난 유대인들은 "우리 이스라엘은요, 홀로코스트의 아픔을 딛고 세워진 나라지요"라는 말들을 하곤 했다. 그러면서 '팔레스타인에 대한 강공책은 유대인의 존립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논리를 슬쩍 덧붙이길 잊지 않았다.

유대인들이 버릇처럼 '피해자 기억'을 강조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여기엔 또 다른 노림수가 있어 보인다. 20세기 중반 이후 21세기 현재까지 이스라엘은 국제사회로부터 '중동의 깡패국가(rogue state)'란 비난을 무릅쓰면서 비무장 민간인들을 겨냥한 마구잡이 폭력을 휘둘러 전쟁범죄의 희생양으로 삼아왔다. '문명의 세기'라는 21세기에 팔레스타인을 무단(武斷) 통치하고 있다. 20세기 전반기 일본이 한반도에서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중동 지역의 생각이 깊은 사람들은 유대인의 홀로코스트를 다르게 본다. 유대인이 '피해자 기억'을 강조하는 것은 주변 아랍인들에게 폭력을 휘둘렀던 그들 자신의 '가해자 기억'을 흐리게 만들거나 잊고자 하는 의도가 깔려 있다고 여긴다. 원고가 길어져 '죽음의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의 모습을 다음 주에 살펴보려 한다. 벼랑 끝에 내몰려도 삶의 의지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은 이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독자들과 함께 기억하고 싶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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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명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kimsphoto@hanmail.net)는 지난 20여 년간 팔레스타인,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시리아 등 세계 20여 개국의 분쟁 현장을 취재해 왔습니다. 서울대 철학과를 나와 <중앙일보>를 비롯한 국내 언론사에서 기자로 일했고, 미국 뉴욕시립대에서 국제관계학 박사과정을 마치고 국민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2022년까지 성공회대학교 겸임교수로 재직했습니다. 저서로 <눈물의 땅 팔레스타인>, <오늘의 세계 분쟁> <군대 없는 나라, 전쟁 없는 세상> <시리아전쟁>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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