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3일 실패로 끝난 친위 쿠데타(내란) 음모에 동원된 군인이 1500명쯤으로 알려진다. 이 가운데 국회로 들어간 인원은 절반인 750명 쯤이다. 그날 병사들은 출동 명령에 따르는 게 당연한 일이 여기고 서둘러 총기를 챙겨 나섰을 것이다. 하지만 헬기를 타고 여의도 국회 마당 위에 들어선 순간, 이들은 적지 않게 당황했다고 알려진다. 국가를 지키려는 일인 줄 알았더니, 민주주의 파괴범이자 내란의 하수인이자 부역자로 몰릴 판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상관의 출동 명령에 따라 나선 병사들을 탓할 수는 없다. 책임은 이 젊은이들을 이용해 무한 권력을 틀어쥐려던 대통령과 국방부장관, 그리고 이들에 두 손 모아 고분고분했던 군경 지휘관들에게 있다. 만에 하나 12.3 친위 쿠데타가 성공했더라면, 그 지휘관들은 어떤 태도를 보였을까. 이즈음 우리 귀에 들려오는 민망스런 거짓말과 변명(TV를 보고 알았다는 둥, 무릎을 꿇고 말리려 했다는 둥)보다는, "위기에 빠진 국가와 민족을 구하기 위한 대의를 따라 함께 나섰다"는 뻔한 허튼 소리를 들을 것이다.
그들은 왜 '당나라 군대'가 됐나
12.3 쿠데타 과정에서 일부 병사들은 태업(怠業) 비슷한 행동을 했다고 알려진다. 동작 빠르게 움직이질 않고 속된 말로 '당나라 군대'마냥 느릿느릿 발걸음을 옮겼다. 막아서는 시민들을 군홧발로 차기는커녕 윽박지르지 않았다. 그 무렵 윤석열은 특전사령관에게 "의결 정족수가 차지 않은 것 같다. 문을 빨리 부수고 들어가 안에 있는 의원들을 밖으로 끄집어내서 데리고 나와라"고 거듭 재촉했다. 끝내 여의도 국회 유리창이 깨지긴 했지만, 단 한발의 총성도 없었다.
병사들은 1980년 5월의 광주에서처럼 피바람을 일으키지 않았다. 시민들과 의원들이 막아섰지만, 폭력적인 행동을 삼갔다. 권력자가 술기운을 빌려 저지른 친위 쿠데타는 실패로 끝났다. 그리고 '내란 수괴'란 오명이 따라붙었다. 상황이 이렇게 마무리된 데엔 이름 모를 '민주 병사들'의 숨은 노력이 한몫했다고 보인다. 국회의 계엄 해제 결의가 나온 뒤 여의도를 물러가면서 공손히 허리 굽혀 인사를 드렸던 어느 병사의 뒷모습에서 많은 사람들은 21세기 한국의 희망을 읽었다. 아울러 그 병사의 몸짓에서 군사 쿠데타는 구시대 유물이며 한국에선 더 이상 용납될 수 없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이번 쿠데타 과정에서 "나는 시민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지 않겠다"며 아예 처음부터 출동을 거부한 지휘관이나 병사들이 있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만약 그런 항명이 실제로 일어났다면 어떻게 됐을까. 쿠데타가 성공했다면, 그들은 '명령 불복종죄'로 군법재판에 넘겨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재판까지 가지 않더라도 '불명예 제대' 등 이런저런 불이익이 따랐을 것임은 말할 나위 없다. 5.16 쿠데타나 12.12 쿠데타 때를 돌아보면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박정희나 전두환의 심기를 거슬려 고초를 겪은 군 지휘관들이 한둘 아니다. 쿠데타 군에 맞서다 목숨을 잃기도 했다. '이기면 관군(官軍)이고 지면 반란군'이 되는 험악한 시절이었다.
탈영병이었던 교황 베네딕토 16세
12.3 친위 쿠데타 당시 출동 명령을 듣는 병사들이 바로 그 자리에서 "나는 못가겠다"는 말을 하긴 어려웠을 것이다. 어디로 무엇 때문에 출동하는지 모르고 나섰기 때문이다. 테러나 대북 관련 긴급사항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막상 여의도 국회의사당 마당에 내리고 주어진 임무가 반민주적임이 분명히 드러나자, 탈영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품은 병사들도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어느 전쟁에서든 젊은 병사들은 전선에서 벗어나 집으로 돌아가는 상상을 하곤 한다. 생판 얼굴도 모르는 또래 젊은이들을 겨냥해 죽기 살기로 맞서기보다는 차라리 총을 내려놓고 탈영할 것을 꿈꾸기도 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거의 끝나갈 무렵 탈영했던 독일군 사병 요제프 라칭거가 훗날의 교황 베네딕토 16세(1927-2022, 교황 재임 2005-2013)다.
나치 정권에 반감을 지녔던 청년 라칭거는 1945년 4월 독일군 방공포부대에서 도망쳤다. 그 뒤 곧 미군에게 붙잡혀 포로가 됐지만 목숨은 건졌다. 독일군 헌병에게 붙잡혔다면? 처형됐을 것이 뻔하다. 1943년 전황이 기울면서 탈영병들이 늘어나자, 나치가 만든 공포의 집단이 독일국방군 야전헌병(SA-Feldpolizei, 약칭 Fepo)이다. 이들은 전선 후방을 돌아다니며 탈영병이나 낙오병들이 눈에 띄는 대로 붙잡아 모조리 처형하는 것으로 악명을 얻었다.
나치 독일의 침략 전쟁에는 모두 1,800만 명의 독일인이 군인으로 참전했다. 이 가운데 90%쯤이 국가의 부름을 받아 총을 쥔 징집병이었다. 이들 가운데 탈영을 꾀한 젊은이들도 적지 않았다. 나치 독일의 탈영병 처리는 냉혹했다. 영국 역사학자 리처드 오버리의 최근작(Blood and Ruins, 2021)에 따르면, 독일 육군의 경우 탈영병으로 붙잡혀 처형된 숫자가 3만 5,000명에 이른다(리처드 오버리, <피와 폐허: 최후의 제국주의전쟁 1931-1945>, 책과함께, 1161쪽).
'법의 탈 쓴 불법'과 라드브루흐 공식
히틀러의 잔혹한 전쟁 수행방식을 못 마땅하게 여기면서 탈영을 한 병사의 죽음은 골수 나치 말고는 누구라도 받아들이기 어렵다. 바이마르공화국 시절에 법학자 구스타프 라드부르흐(1878-1949)는 정의롭지 못한 법을 거부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른바 '라드브루흐 공식'(Radbruchsche Formel)에 따르면 '실정법'이 정의롭지 못할 경우 그 명령은 '법의 탈을 쓴 불법'이다. 다시 말해서 '극도로 부정의한 실정법'은 법이 아니며. 그에 따른 처벌은 '법률적 불법'이다(지난날 박정희와 전두환의 잇단 긴급조치와 포고령들이 그러했다).
라드부르흐는 형식적으로는 '합법'이지만, 사실상 법적인 효력이 없으며, '법과 정의 사이의 충돌이, 법률이 결함 있는 법으로 간주되어 정의에 자리를 내줘야 할 만큼 참을 수 없는 정도에 이르면, 정의가 실정법에 우선한다'고 했다. 나치 독일의 잘못된 법 집행을 비판적으로 다뤄온 연구자 헤린더 파우워-스투더(오스트리아 빈대학, 윤리학․정치철학)가 꼽은 사례 글을 보자.
[법무부 서기였던 푸트파르켄은 괴히트라는 한 상인이 공중화장실 벽에 '히틀러는 대량학살자이며 전쟁은 그의 책임'이라는 문구를 써놓았다며 나치 당국에 그를 신고했다. 괴히트는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당했다. 종전 뒤 푸트파르켄은 튀링겐 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살인의 공범으로 무기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라드부르후는 이 사건에서 정의가 실정법을 대체했다는 결론을 이끌어냈다](헤린더 파우어-스투더, <히틀러의 법률가들: 법은 어떻게 독재를 옹호하는가>, 진실의힘, 2024, 264쪽).
이재승(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에 따르면, 실제로 전후에 독일연방(서독) 법원은 지난 나치 정권 아래서 탈영병을 무조건 사살해도 좋다는 독일국방부의 명령이 잘못 됐다고 못 박았다. 판결문엔 '라드브루흐 공식'에서 빌려온 문구가 보인다.
[정의에 대한 실정법의 모순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에 이르러서, 법률이 '부정의한 법'으로 정의에 양보해야 하는 경우 법률은 한계에 직면한다. 그 법률은 법적 성격을 상실하며 전혀 법이 아니다](이재승, <국가범죄>, 앨피, 2010, 95쪽).
하지만 서독 법원들은 탈영병에게 사형을 내리곤 했던 나치 판사들에 대해선 면죄부를 안겼다. '당시의 실정법에 따라 판결을 내린 것'이라는 논리에서였다. 패전 뒤 서독의 탈나치화 과정에서 나온 어긋나는 판결들은 두고두고 논란을 불렀다(같은 맥락에서, 윤석열 탄핵소추안을 두고 헌법재판소가 어떤 결론을 내릴지, 혹시나 논란을 불러일으키지나 않을지 관심을 갖고 지켜볼 일이다).
"내가 독일인이라는 게 부끄럽소"
지난 글에서 '히틀러의 장군들' 얘기를 했었다. 히틀러는 소련 침공을 2개월 앞둔 1941년 3월30일 자신의 집무실인 베를린 제국수상청에 250명쯤의 장군들을 불러 모았다. 그 자리에서 히틀러는 유대인을 포함한 적대세력에 대한 무자비한 처형을 주문했다. 동부전선에서 300만 독일국방군을 이끌었던 '히틀러의 장군들'은 주군이 바라는 대로 '처형'을 강조하는 훈시를 잇달아 내려 보냈다. 에리히 회프너(동부전선에 투입된 제4기갑부대장)도 그 가운데 하나다. 그의 명령을 들어보자.
"모든 전투는 적을 가차 없이 그리고 완전히 절멸하려는 확고한 의지로 수행돼야 한다. 특히 오늘날 러시아 볼셰비즘 체제를 지지하는 자들에게는 더더욱 그렇게 해야 한다" (볼프람 베테, <독일국방군>, 미지북스, 2011, 135쪽).
나치 독일이 유대인을 비롯한 민간인과 소련군 포로들을 집단학살할 때 모든 독일 젊은이들이 손에 피를 묻히진 않았다. 탈영병은 저마다 다른 이유와 사정이 있었겠지만,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히틀러의 침략전쟁과 그에 따른 민간인 학살을 비롯한 전쟁범죄의 하수인이 되길 거부하는 마음들을 지녔을 것이다. 병사들뿐 아니다. 지휘관들도 그랬다. 한 영관급 장교가 독일 점령지 폴란드에서 아내에게 쓴 편지 하나를 읽어보자.
"내가 독일인이라는 게 부끄럽소. 소수의 독일인이 살인․방화․약탈을 통해 우리의 이름에 먹칠을 하고 있소. 우리가 그들을 당장 멈추게 하지 않으면 그들은 독일인 전체에 재앙을 초래할 것이오. 이 범죄는 아마도 상부의 암묵적인 승인 아래 행해지고 있는 것 같소](볼프람 베테, 143-144쪽).
위에 옮긴 글은 헬무트 슈티프(독일 육군 참모부 작전국 제3과장)가 바르샤바에서 그의 아내에게 보낸 편지 내용의 일부다. 독일이 패전 위기에 몰리자, 일부 지휘관들은 히틀러를 암살함으로써 뒤늦게나마 잘못된 상황을 바로 잡으려 했다. 1944년 7월 동프로이센 라슈텐부르크(지금은 폴란드 영토)의 '늑대소굴'(Wolfschanze)이라 일컬어지던 군 최고 지휘소에서 시한폭탄으로 히틀러를 죽이려 했지만 실패했다. 위 편지를 썼던 슈티프도 그 암살 모의에 가담했다가 처형됐다.
히틀러의 심기를 거스른 장군들
위에서 보듯이, 독일국방군의 모든 지휘관들이 나치 학살을 지시 또는 방조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폴란드 제8군사령군 요하네스 블라스코비츠 장군(대장)은 나치친위대 특무대원들의 폴란드 민간인 학살을 못 마땅하게 여겼고, 육군총사령관 발터 폰 브라우히취 장군에게 거듭 항의했다. 비무장 민간인을 죽여선 안 된다는 전쟁윤리적인 측면보다는 엄정해야 할 군 기강을 흩트릴 수 있다는 것이 그의 항의 이유였다.
바로 그 때문에 블라스코비츠 장군은 히틀러로부터 신임을 잃었다. 전쟁기간 내내 일선부대 지휘관으로 있긴 했지만 육군 원수로 진급하지 못했다. 독일 패전 뒤 뉘른베르크에서 전범재판을 받다가 1948년 감옥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뉘른베르크에서 전범으로 기소된 피고인들은 한결같이 자신의 죄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무죄를 주장했다. 재판 초기에 자살한 블라스코비츠 대장은 법정에서 동료들의 전쟁범죄를 비난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다만 스스로 죽음으로써 독일 침략전쟁의 희생자들에게 사죄를 했다고 짐작된다.
히틀러의 심기를 거스른 장군은 또 있다. 육군 원수 게오르크 폰 퀴흘러는 동부전선에서의 민간인 학살에 항의했다가 사령관 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1944년 1월 북부집단군 사령관을 끝으로 전쟁이 끝날 때까지 퀴흘러는 이렇다 할 군 보직을 맡지 못했다.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지만, 마음속으론 집단학살을 못 마땅하게 여긴 장군들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다른 장군들은 침묵하면서 침략전쟁에 뛰어들었다.
역사가들은 지난날 독일국방군(Wehrmacht)의 엘리트였던 이들을 가리켜 '히틀러의 장군들'이란 집합명칭을 붙였다. 오늘의 독일연방군(Bundeswehr) 병사들이 자랑스럽게 여길만한 이름과는 거리가 멀다. 그 장군들은 제1차 세계대전 때 계급이 고작 상병이었던 히틀러를 마음속으론 '꼬마 하사'(kleiner Gefreiter)로 낮춰 보면서도, 군 통수권을 지닌 그의 명령을 충실히 따랐다. 이를 두고 독일 역사가 볼프람 베테(프라이부르크대, 전쟁사)는 "독일 장군들은 히틀러와 한통속이었다"고 비판했다. 다시 말해서, '히틀러의 장군들'은 나치 전쟁범죄의 공범자(부역자)가 됐다.
12.3 망상(妄想) 함께 한 '윤석열의 장군들'
안타깝게도 12.3 친위 쿠데타를 계기로 21세기 한국에서도 '히틀러의 장군들'을 떠올리는 상황이 벌어졌다. 12.3 '내란 수괴'로 탄핵된 윤석열과 그의 충암고 1년 선배 김용현 국방장관, 이 두 주모자로부터 친위 쿠데타 계획을 들었던 수방사령관, 방첩사령관, 정보사령관, 경찰청장 등이다. 군복을 벗은 전 정보사령관도 '윤석열의 장군들'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그는 롯데리아에서 현직 후배들과 햄버거를 함께 먹으며 내란 모의를 했다고 알려진다. 영화 같은 얘기다.
이들 '윤석열의 장군들'은 주군의 뜬금없는 내란 계획을 처음부터 함께 했다. "그건 아니지요"라며 막아서기는커녕 순순히 따랐다. 끝내는 '내란 중요 임무 종사' 혐의로 법정에 서야할 운명이다. 히틀러를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았던 소수의 독일 장군들처럼, 윤석열의 심기를 건드릴 각오를 하고 좀 더 강경하게 그의 망상(妄想)을 지적하고 나섰더라면? 그들이 현재진행형으로 겪고 있는 '내란 공모자'로서의 어려운 처지에 빠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의 오판으로 말미암아 지금 대한민국은 긴장 상태다. 헌법재판소가 윤석열의 탄핵소추안을 어떻게 결론 내릴지 시민들의 눈길이 쏠려 있다. 윤석열을 옹호하는 자들은 12.3 폭거를 '대통령의 고도의 정치행위'라는 주장을 늘어놓는다.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다'라며 독배를 마시고 죽었다고 잘못 알려졌지만, 히틀러나 윤석열처럼 폭력적으로 권력을 휘두른 경우는 어떠할까. 히틀러처럼 민간인을 학살하라는 전쟁범죄적 명령, 또는 윤석열처럼 국회의원들을 붙잡아 가두라는 반민주적 명령이 '고도의 정치행위'이며 따라서 '불법'이 아니라는 주장은 앞에서 살펴본 '라드브루흐 공식'에 비춰볼 때 그야말로 궤변에 지나지 않는다.
히틀러는 지지율이라도 높았지만...
옛성현의 말씀을 되새겨 보며 글을 마쳐야겠다. 2,400년 전 맹자(孟子, 기원전 372-289 생존 추정)는 "걸왕과 주왕이 천하를 잃은 것은 그 백성을 잃었기 때문이고, 그 백성을 잃은 것은 백성들의 마음을 잃었기 때문"이라 했다[맹자집주(孟子集註) 이루 상(離婁 上) 9]. 맹자의 깊은 뜻을 감히 풀어쓴다면, 백성들의 마음을 얻도록 노력하는 것이 정치인에 주어진 기본적인 덕목이다. 안타깝게도 윤석열은 그러질 못했다.
히틀러만 해도 1930년대 독일 경제를 크게 일으켰기에 독일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지금도 적지 않은 독일인들은 "히틀러가 침략전쟁만 벌이지 않았다면, 비스마르크 이후 최고의 독일 정치인이었다"고 여긴다). 지지율도 무척 높았다. 히틀러의 침략전쟁 오판은 1930년대 후반의 잇단 성공(체코와 오스트리아 병합 등)과 높은 지지율을 바탕으로 한 오만함 탓이 컸다.
독일국방군 고위 장성들 가운데는 히틀러 예찬론자가 적지 않았다. 알프레트 요들(독일국방군 작전부장, 육군대장)도 그 가운데 하나다. 그는 히틀러가 1938년 9월 뮌헨 협정을 통해 총 한방 쏘지 않고 체코 주데텐 지역을 갖게 되자, "총통의 천재성과 세계대전도 불사하겠다는 단호함이 다시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도 승리를 획득하게 만들었다"고 일기에 썼다(귀도 크놉, <히틀러의 매니저들>, 울력, 2018, 210쪽). 그런 히틀러가 1년 뒤 (제2차 세계대전으로 번진) 폴란드 침공 모험을 꾀하자, '히틀러의 장군들'은 군말 없이 따랐다.
히틀러와는 달리, 윤석열의 지지율은 20%를 겨우 턱걸이하는 수준을 보여 왔다. 논문 표절, 주가조작 등 부인 김건희에게 따라붙은 여러 범죄혐의는 사람들의 마음을 더 멀어지도록 만들었다. 지지율이 그렇게 낮은데도 몇몇 '윤석열의 장군들'과 손잡고 12.3 내란을 꾀하는 오판을 했다. '친위 쿠데타'라는 비상수단으로 (지난날 민주화로의 길고 고단했던 기억을 지닌) 21세기 한국인들의 마음을 얻을 것이라 여겼다면, 그야말로 얼빠진 판단이었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지지율이야 오르내릴 수 있다고 치자. 문제는 잘못된 권력자와 그의 몇몇 참모들이 내리는 오판(誤判)은 장기간에 걸쳐 많은 사람들이 아주 힘든 상황으로 내몬다는 점이다. 20세기 전반기에 히틀러와 '그의 장군들'이 그랬고, 21세기 초 윤석열과 '그의 장군들'이 그러고 있다.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비교할 걸 비교해야지, 히틀러와 윤석열을 비교하느냐고. 틀린 말은 아니다. 둘은 무엇보다 국제정치에서의 체급(영향력)이 다르고, 피해자(희생자)의 규모와 범죄의 양상도 다르다. 하지만 시․공간의 차이를 떠나 둘 다 권력자가 품는 망상(妄想)으로 말미암아 혼란과 고통의 역사를 기록했다는 공통점을 지녔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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