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진보진영 입장에서, 이번 서울시교육감 보궐선거는 분명 어려운 선거였다. 한 편에서는 전임 조희연 교육감의 직 상실 판결로 인한 책임론을 안고 싸워야 했고, 다른 한 편에서는 선거일이 공휴일이 아니었던 만큼 낮은 투표율로 인한 불리한 여건을 이겨내야 했다. 조전혁 후보의 당선을 정말로 깊이 우려했던 많은 시민들이, 진심으로 선거 결과를 기뻐했던 것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다만 다양한 가치를 담보하는 '진보교육'의 이상을 지지하는 이들이라면, '보수교육감을 막아냈다'는 사실 하나에만 만족할 수는 없다. 그런 이유로, 이번 서울시교육감 선거를 되짚어보며 일련의 과정들이 진보교육 의제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어떤 함의를 갖고 있는지를 살펴보려 한다. 이러한 비판 및 논평은 단순히 교육감 개인에 대한 문제제기를 넘어, 관심에서 벗어난 여러 교육 의제들을 환기하여 여론을 형성하고 당선된 교육감이 임기의 방향성을 올바르게 설정하는 데 있어서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교육감 선거에서는 당연히 교육 자체에 대한 논의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은 없겠지만, 우리의 교육감 선거에서 이 원칙이 지켜진 적은 많지 않았던 것이 현실이다. 이번 서울시교육감 보궐선거 그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았으며, 심지어 몇몇 의제에서는 '조용한 후퇴'가 일어난 경우도 있었다. 이번 선거가 매우 촉박한 일정 하에서 치러졌다는 점은 감안해야 하겠으나, 심지어 지금 화제가 되는 교육 현안의 수가 적지 않으며, 그 중요성도 낮지 않다는 점도 같이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지금의 교육 현장에는 고교학점제로 인한 변화, 의대 쏠림과 의대 정원 확대, 학교에서의 딥페이크 범죄, 사교육 창궐로 인한 격차 확대 등 시급하고 중대한 현안이 산적해 있다.
그럼에도 '진보진영'의 이번 서울시교육감 보궐선거는 후보 선출 및 선거운동 과정의 전반에 있어 윤석열 정권의 대일외교나 역사교육 정책 심판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선출된 후보는 일반 시민이나 학생, 학부모들을 대변하는 대신 조직 구성에 도움이 되는 유력하고 유명한 인사들의 지지를 얻는 일에 신경쓸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런 현실 인식이 잘 집약된, 정근식 후보의 선거운동 도중 한 대담에서의 발언을 아래에 인용한다.
"제가 이번에 선거를 하면서 우리 나라의 종교계 지도자들을 다 뵈었습니다. 그분들 한분 한분 말씀이 다 가슴에 와닿는 말씀, 또 우리나라 대기업을 이끄는 총수들 몇 분 만났습니다. 그 분들이 우리 나라의 교육을 평가하는데 너무나 감동적인, 40년 동안 교육계에 있었던 저보다도 더 정확하게 문제의 핵심을 찌르는 걸 보고 우리 교육이 참 그렇구나,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그분들로부터 배우고, 또 우리 학생들로부터 배우고, 우리 선생님들로부터 배우면서 함께 가는 그런 교육감이 되어야 한다."(500만 유튜버 주최 정근식 후보 초청 교육토론회 중, 2024.10.07)
'서울대 중장년 남성'들이 외치는 '다양성과 서열화 해소'
여태까지 '진보교육감'들에 대한 많은 논쟁이 있었지만, 대체적으로 많은 진보교육감들은 학벌주의나 대학 서열화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정근식 교육감에게는 그러한 문제의식이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먼저, 민주진보 단일후보로서 서울시교육감을 역임한 세 명의 인사는 모두 '서울대 학부 출신 교수'였다는 점부터 환기해야 할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정근식 후보는 예비후보로 출마선언을 하며 만든 포스터에서 본인 약력의 첫 네 줄을 '서울대 명예교수, 서울대 학사, 석사·박사, 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및 통일평화연구장' 으로 채웠다.(정근식 전 서울대 교수, 서울시교육감 보궐선거 출마 기자회견, 오마이뉴스, 2024.09.14) 이는 학벌주의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여러 교육 시민단체나 유권자들을 대표하여 '민주진보 교육감'이 된 사람의 태도로서 적절하다 보기 어렵다.
선거운동이 명망가들 중심으로 이뤄진 데다 교육감 본인의 학벌주의에 대한 문제의식까지 흐릿하니, 그 결과는 인선에 그대로 나타난 것처럼 보인다. 정근식 교육감은 인수위원회 격의 공약추진위 구성 과정에서, 자신의 서울대 학부 76학번 동기 박순성 동국대 명예교수에게 위원장을 맡겼다. 박순성 교수는 북한 경제 전문가로서, 정근식 교육감과 마찬가지로 유·초·중등교육 관련 경력이 전혀 없다. 인수위 부위원장은 안승문 전 예비후보로, 교사 출신이지만 마찬가지로 서울대 학부 79학번 출신으로서 관리직 및 시민사회에서의 경력이 더 긴 인물이다.(인수위 없는 '정근식호', 공약추진위 오늘 출범…100명 규모 예상, 뉴시스, 2024.10.25) 대입정책 개편 구상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을 것으로 보이는 김경범 전 예비후보 역시 서울대 학부 출신의 서울대 교수이다. ([단독] 정근식 인수위 25일 출범 .. 위원장에 박순성 전 동국대 교수, 에듀프레스, 2024.10.24)
유치원 및 초중등교육 정책을 결정하는 공적 기구가 대학 동문회처럼 작동하면서, 그 중에서도 박사 학위를 가진 서울대 학부 출신 5·60대 남성이 요직을 독점하고 학생·교사·학부모의 교육 3주체로서 실무자나 당사자 정체성을 가진 이들은 배제된 것이다. 이런 인사 기용에서 세대, 출신 학교, 종사 직역의 다양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인식은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이러한 다양성의 부재는 단순한 인선의 문제를 넘어, 진보교육의 핵심 아젠다인 '다양성 확보와 대학서열화 완화'의 진정성과 근거 자체가 허물어지는 일로 이어지게 된다. 말로는 다양성이 중요하고 대학서열화를 해소해야 한다 주장하면서, 실제 인사권은 전부 명문대 출신 중장년 남성 위주로 행사하면 학생들이 이를 어떻게 바라볼까. 학생들이 명문대 진학에 목을 매며 끝나지 않는 경쟁을 이어가는 데는 다른 이유가 없다. 명문대 출신들이 고위직, 그리고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 사안에 대한 결정권을 독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기 때문에 무의미한 경쟁을 감수하는 것이다. 학생들은 어른들의 행동을 보면서 자신의 행동방식을 결정한다. 문제의 원인인 자신들은 전혀 바뀔 생각이 없으면서 입시 경쟁에 매달리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고 개탄만 하고 있으면 과연 지금의 현실이 나아질 수 있을까?
진보교육의 원칙은 사라졌다
서울시교육감은 천만 도시의 교육행정을 책임지는 자리로서, 그 직무가 광범위한 만큼 정치적 성격을 배제할 수는 없다. 교육자들의 정당 가입 금지 원칙에 대해 찬반이 있겠으나, 그러한 원칙은 교육감이 기본적으로 정치인보다는 교육자로서 행동할 것을 요구하는 취지에서 나왔으며 그 취지 자체를 부정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조희연 전 교육감은 학생인권조례에서 '성적 지향 존중' 조항을 삭제하라는 요구에 대해 교육자로서의 정체성을 중심에 두고 '교실에서는 모든 학생이 차별을 받아서는 안 되고, 성소수자 학생 역시 예외가 될 수 없다'는 취지의 답을 한 적이 있다.
그에 비해 정근식 교육감은 같은 질문에 대해 "오해가 될 부분은 고칠 필요가 있다. '성적 지향 존중'을 삭제해야 한다는 보수 의견도 들어볼 의사가 있다." (정근식 "이재명 사람? 盧·文에도 임명장 받아…뉴라이트 교육 단호히 반대", 뉴시스, 2024.09.26), "지난해 (성중립화장실에 대해) 약간 부적절하다는 판단 하에 (중학교 대상 교육)자료에서 제외한 것으로 보고를 받았다.(...) 문제가 있는 것은 다시 만들 필요가 없다" (2024.10.22 국회 교육위원회 국정감사 발언 중)는 입장을 피력했다.
이는 학생들을 돌보아야 하는 교육자로서의 책무를 중심에 두는 대신, 정략적 당리당략 계산에 보다 치중한 발언으로 보인다. 지금 수많은 성소수자 학생들은, 지금도 교육현장에 만연한 차별과 혐오로 인해 정신적으로 고통받으며 학교, 심지어는 세상을 등지는 형편이다. 정근식 교육감의 이러한 행보는 무엇보다도, "장애인, 사회적 소수자, 다문화 등 사회적 약자를 위한 교육정책을 펴겠다" (정근식 "현장 중심 교육감 되겠다…혁신교육 계승·강화", 연합뉴스, 2024.09.26) 는 본인 스스로의 반복되는 언급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행위이다.
고교서열화 문제에서도 중요한 후퇴가 있었다. 정근식 교육감이 후보 시절 한 인터뷰에서 "(특목·자사고) 문제는 현행대로 하기로 논쟁이 어느 정도 다 끝나지 않았나. 폐지하거나 더 늘리진 않을 것이다."(정근식 "AI 디지털교과서 도입 유예해야", 경향신문, 2024.10.09)라 말하며, 특목고 및 자사고 존치 입장을 공식화한 것이다.
물론 그간 특목·자사고 지정해제 시도가 법원의 판결 등으로 번번이 가로막히는 등의 현실적 어려움을 생각하면, 존치 입장을 낸 것 자체만으로 크게 문제를 삼고 싶지는 않다. 다만 상술하였듯 정근식 후보는 민주노총이나 참교육을위한학부모회 등 300여개에 달하는 교육시민단체가 참여한 '민주진보교육감추진위원회'를 통해 단일후보로 선출되었다. 다시 말해 정근식 후보가 개인 자격으로 교육감 단일후보가 된 것이 아닌 이상, 단일화 추진기구에 참여한 단체들을 대표하는 입장에서 선거운동에 임해야 할 책무가 있었다. 특목·자사고 존치와 같은 핵심 사안에 대한 입장 변화는 교육감 후보가 인터뷰에서 단발적으로 제시할 화두가 아니며, 단일화 참여 단체들, 그리고 진보교육의 대의를 지지하는 시민들과의 공적 논의가 반드시 선행되어야만 했다는 지적을 해야 할 것이다.
교육을 모르는 진보교육감
다음으로, 정근식 교육감에게는 기본적으로 유·초·중등 교육에 대한 경력과 경험이 전혀 없다. 대학 교수였던 만큼 직접적 경력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하더라도, 정근식 교육감의 경력에서는 교육 시민단체 자문위원 역할과 같은 간접적인 이력조차도 찾아보기가 어렵다. 그러다 보니 교육 현장의 구체적 현안에 대한 교육감 본인의 언급은 대부분 원론적인 수준을 벗어나지 않았다. '교권과 학생 인권은 충돌하지 않는다, 방과후 학교를 강화해 교육 격차를 줄이겠다, 구시대적인 객관식 문항 또는 줄세우기식 평가를 지양하고 학생들의 창의력을 기르기 위해 논·서술형 문항이나 토론을 장려하겠다'는 수준의 원론적 주장 외에는, 후보 개인의 철학이나 견해가 담긴 구체적 주장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교육감이 모든 사안에 대해 '만기친람'할 수는 없겠지만, 누구나 할 수 있는 수준의 원론적인 진단과 인상비평만으로 꼬일 대로 꼬인 교육의 난맥상을 조금이라도 풀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물론 정근식 교육감이 단일후보 경선에서 승리하며 캠프의 뒷받침을 받을 수 있게 된 뒤에는 현안에 대한 발언이 더 구체화되기는 했지만, 실제 그 내용은 단일후보 캠프에 참여하게 된 기존 '진보 교육계' 명사들의 의제를 반복하는 것 이상이 되지 못했다. 이후 인용할 한 인터뷰에서의 발언을 살펴보면 정근식 교육감 역시 이를 잘 알고 있으나, 이를 본인이 극복하고 보완해야 할 문제로 보지는 않는 것 같다.
"초‧중등 교육 현장의 실무에는 약한 것 맞다. 그러나 현장에 대해선 잘 아는 분들이 너무 많다. 그런 문제들은 현장을 잘 아는 분들께 맡기고 저는 시민사회와 교육 공동체 사이에 필요한 소통을 하고, 더 나아가서 우리의 미래가, 우리의 미래 세대가 어떻게 가야 하는지에 대한 방향 제시 역할을 하려 한다." (정근식 "이번 선거는 '보수 vs 진보' 아닌 '상식적 국민'과 뉴라이트의 대결", 프레시안, 2024.10.01)
서울시교육감은 교육평론가가 아닌, 서울시 전체의 교육수장으로서 산하의 방대한 기관과 조직을 책임지는 행정가이다. 현재의 교육도 모르면서 어떻게 미래 교육에 대한 방향을 제시할 수 있을까. 총론 수준에서는 옳은 정책이라도, 각론 수준에서 실무진 관료들이나 일선 학교, 사교육, 학부모와 학생들의 각종 '해킹' 시도로 인해 그 취지를 완전히 잃는 지금 교육정책의 현실을 고려했을 때, 이는 '해킹' 시도를 감시할 책임이 있는 교육감으로서의 직무 수행에 대한 기대를 품기는 어려운 발언일 것이다.
더 많은 '조용한 후퇴'를 막기 위해서
선출직 공무원이란 결국 시민의 총의를 대표하는 자리이고, 때문에 그의 공약 또는 발언,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선출직의 인사권은 무엇보다도 그 대표성을 중심에 두고 행사되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고 선출직 공무원이 특정 정무 그룹이나 후보 개인의 임의적 판단에 의한 결정으로 일관하거나, '서오남'(서울대학교 학부 출신 중·장년 남성) 등 특정 집단 중심으로 인사권을 행사한다면, 이는 선출직 공무원으로서의 본분을 저버리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물론 이 글의 주 목적은 현상을 짚는 것이기에, 원인에 대한 논평은 간단하게만 정리하고 넘어가려 한다.
정근식 후보의 '성적 지향 존중 삭제' 발언에 대해서는 권김현영 교수, 김규진 작가 등이 비판의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다만 그 시도는 "그래도 조전혁 후보만큼은 막아야 하지 않겠냐"는 목소리로 인해 묻히고 말았다. 모든 유권자는 '좋은 교육감'을 요구할 권리가 있음에도, 단지 '조전혁보다는 나은 교육감 후보'라는 이유로 후보에 대한 비판과 정견에 대한 기본적인 검증 요구조차도 차단된 것이다.
결국 이 모든 문제를 정근식 교육감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고 넘어갈 수만은 없다. 이 글에서 짚은 '진보적 의제에서의 조용하지만 분명한 후퇴, 당사자성이 부족한 명망가들의 선거에서의 약진, 대표성을 도외시하는 임의적 의사 결정'과 같은 일은 이번 선거에서만 일어나는 특이한 풍경이 아닌, 최근 선거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는 결국 모두가 지금 당장 진영전에서의 승리만을 추구하다 보니 당사자 중심으로 구체적 현실을 논의하는 공간이 실종되고, 이를 바탕으로 '나의 삶을 대변할 수 있는 좋은 정치인'을 길러내고 골라내는 프로세스가 버려졌기 때문에 벌어진 일일 것이다.
건강·교육·주거와 같은 우리 삶의 핵심 문제는 결국 민주적 참여를 기반으로 모든 시민의 차별 없는 접근을 보장하는 공공영역의 개선을 통해서만 풀어갈 수 있다. 이는 결국 정치 없이는 우리 삶이 개선되기 어렵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정치가 그 기능을 하지 못하고, 대중이 정치를 외면할수록 쌍을 이루는 민간영역을 통한 각자도생의 욕망 역시 강해질 수밖에 없다. 정치의 역할, 그리고 'res publica', '공공의 것'에 대한 공론장을 복원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어쩌면 뻔하고 진부한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조용한 후퇴'를 막기 위해서 소수 명망가의 시혜를 기대할 수는 없다는,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노력해야만 우리가 쌓아올린 공공성과 진보성을 지켜낼 수 있다는 원칙을 다시 한 번 환기하면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