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북한)이 9월 13일 무기급 핵물질인 고농축 우라늄(HEU) 제조 시설을 공개한 것을 두고 판이 박힌 분석이 넘쳐난다. 국내외 대다수 언론과 전문가들이 조선의 의도가 미국 대통령 선거를 두 달여 앞둔 상황에서 대선에 영향을 미치고 차기 행정부의 관심을 끌어 협상 국면에서 몸값을 올리려고 한다는 데 있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조선이 이후에도 단거리 발사체를 연이어 발사하면서 이러한 분석은 계속 이어진다.
하지만 이러한 분석은 정확하지도 않고 문제 해결에도 도움이 안 된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누누이 강조하지만, 조선은 미국에 협상 시한으로 제시한 2019년이 지나면서 30년 가까이 최고의 목표로 삼았었던 대미 관계 정상화의 미련을 접었다. 이로 인해 핵카드의 근본적인 용도도 '대미 협상용'에서 '핵 억제력 확보'로 바뀌었다. 그래서 조선의 의도를 대미 협상용으로 분석하는 것은 각주구검(刻舟求劍)에 불과하다.
미국 고위 관료들의 180도 달라진 발언은 이를 잘 보여준 바 있다. 2022년 초에 조선은 하루가 멀다 하고 각종 미사일을 시험 발사했었다. 그러자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은 "우리로부터 주목을 받기 위해 미사일 시험 발사를 지속하는 것"이라며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할 것"이라고 말했었다.
그런데 이로부터 1년 후 정반대의 분석이 나왔다. '아시아의 차르'로 불리며 오바마 행정부와 바이든 행정부의 아시아 정책을 총괄한 커트 캠벨은 2023년 1월 국무부 부장관으로 지명된 직후 가진 상원 외교위원회 인준청문회에서 이례적인 발언을 내놓았다.
그는 '조선의 위험을 줄이기 위한 창의적 방안이 없느냐'는 질문을 받고 "조선은 미국과의 외교에 더 이상 관심이 없다"고 답한 것이다. 조선이 미국의 관심을 끌기 위해 툭하면 미사일을 쏘는 것이라고 여겼었는데, 그게 아니었다는 것을 인정한 셈이다.
그럼 선거는 어떨까? 조선은 미국 대선에도, 한국의 대선에도 관심을 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상대의 선거에 관심을 갖는 동기는 '관계 중시'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조선은 남북관계나 북미관계를 더 이상 중시하지 않는다. 아예 관심이 없을 수는 없겠지만, 자신의 전략 노선에선 한참 후순위로 밀어놓았다.
2020년 11월 미국 대선에선 대북정책이 주요 쟁점으로 부상했지만, 조선은 철저하게 침묵으로 일관했다. 조선의 근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 즉 핵무력을 "국체"로 삼는 "새로운 길"을 공식화한 8차 노동당 대회도 미국 대선 2개월 후에 치러졌다.
2022년 3월 한국 대선을 앞두고는 선뜻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 벌어졌다. 대선이 다가오면서 조선은 연이어 각종 미사일을 시험발사했다. 그러자 문재인 당시 대통령은 "대선을 앞둔 시기"라는 점을 들면서 "우려"를 표했고,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였던 이재명은 "남측의 정치 지형에 영향을 주고 있고, 특정 진영에 도움이 되는 것이 분명하다는 점을 분명히 지적한다"며 규탄의 목소리를 냈다.
조선의 미사일 발사로 안보 위기가 고조되면 도움을 받는 쪽은 국민의힘의 윤석열 후보였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조선은 한국의 보수적이고 대북 강경 성향의 대선 후보를 돕고자 미사일을 쏘아댄 것일까? 이러한 해석보다는 조선이 한국의 대선에 관심을 끄고 한미일의 군비증강에 맞선 국방력 강화에 나선 것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이번 미국 대선도 마찬가지이다. 상당수 언론과 전문가들은 조선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당선을 선호할 것이라며, 7차 핵실험과 같은 모종의 행동을 취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는다. 하지만 조선이 누구를 선호한다기보다는 누가 되더라도 대응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렇다면 조선이 이번에 HEU 제조 시설을 공개한 의도는 무엇일까? 그건 핵 억제력의 기본인 '3C'를 떠올리면 알 수 있다. 다량의 HEU 시설을 통한 핵무기 증강 '능력(capability)', 이를 공개함으로써 자신의 능력을 외부에 보여주려는 '전달(communication)', 전쟁이 벌어지면 이들 능력을 사용하겠다는 것이 '빈말'이 아니라는 것을 상대가 믿게 하려는 '신뢰(credibility)'를 과시하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현지지도에 나선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발언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많은 이들이 분석하는 것처럼 조선의 의도가 대미 압박용이었다면, 미국 본토를 겨냥한 '전략핵무기'를 언급하는 게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주로 한국을 겨냥하는 '전술핵무기' 제작을 강조했다. 이는 연말연시에 조선이 한국을 '제1의 주적'으로 규정한 것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발언으로 풀이할 수 있다.
이러한 일련의 흐름은 어지간해선 조선의 핵 폭주를 멈출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폭주를 멈추게 하려면 조선의 의도에 대한 아전인수식의 해석을 멈추는 것부터 해야 한다. 조선의 의도가 대미 협상용이라거나 내부의 불만을 외부로 돌리기 위한 것이라는 분석이 이에 해당한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핵무력을 비롯한 조선의 국방력 수요를 낮추는 것 외에는 길이 없다고 생각한다. 2021년 8차 당대회 이후 조선이 가장 중시하는 것은 '군사력 균형'과 '전략적 균형'이다. 조선이 적대세력으로 간주하는 한미일과의 군사력 격차를 핵무력 증강을 통해 최대한 상쇄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한국의 비핵 군사력은 세계 5위에 올라섰고, 미국의 군비증강은 매년 최고치를 갈아치우고 있으며, 일본도 본격적인 재무장에 나선 상황이다. 또 이들 세 나라는 사실상의 동맹으로 치닫고 있고 연합훈련과 유엔사도 확대·강화되고 있다. 이럴수록 조선의 국방 수요는 늘어나게 되고 한반도 문제는 악순환의 늪에서 헤어 나올 수 없게 된다.
이러한 지적이 조선의 핵 폭주를 두둔하고자 함이 아님은 물론이다. 그 반대이다. 조선의 핵능력 강화가 정녕 우려스럽고 불안한 일이라면, 한미일이 '힘에 의한 평화'에만 매달릴 것이 아니라 '군비통제에 의한 평화'도 진지하게 고려할 때가 되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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