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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포라 신화의 허구, 홀로코스트 희생자의 뿌리는 중동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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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포라 신화의 허구, 홀로코스트 희생자의 뿌리는 중동 아니다

[김재명의 전쟁범죄 이야기 74] 독일의 전쟁범죄-홀로코스트 ②

'어떤 사람이 유대인인가'라는 문제는 오랫동안 논란이 됐던 사안이다. 1970년 이스라엘 재판소에서 이스라엘 시민권을 확보할 수 있는 유대인의 정의는 △유대인을 어머니로 둔 사람, △조부모 가운데 유대인을 둔 사람,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이다. 만약 어떤 한국인이 종교를 유대교로 바꾼다면, 이스라엘 법에 따라 '유대인'이 될 수도 있다(이스라엘은 이중 국적을 허용하는 나라다).

이스라엘이 '중동의 깡패국가'라고 손가락질을 받아도, 1인당 국민소득은 한국보다 높다. 이스라엘 법무부는 전세계로부터 몰려드는 '가짜 유대인'을 걸러내는 문제로 머리가 아프다. 제3세계의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는 이스라엘에서 제2의 삶을 꿈꾸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러려면 스스로를 '개종한 유대인'으로 꾸미는 것도 한 가지 묘책(?)이다. 개중에는 팔레스타인 서안지구의 팔레스타인 원주민 땅을 빼앗아 차지하려는 시커먼 속셈을 지닌 '예비 불법 정착민'들도 있다. 하지만 그 복잡한 유대교 교리를 다 외우고 이민 심사과정을 헤쳐 가는 게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누가 유대인인가

'어떤 사람이 유대인인가'는 20세기 중반 독일에서 특히 엄청난 관심을 끌었다. 유대인이냐 아니냐는 삶과 죽음을 가르는 잣대였기 때문이었다. '독일 민족의 순수한 혈통을 지킨다'는 명분 아래 1935년 9월13일 나치 독일은 악명 높은 '뉘른베르크 인종법'을 만들었다. 유대인으로 찍힌 사람은 독일 시민권을 빼앗겼다.

그 인종차별법은 일반 독일인과 유대인 사이의 결혼을 막았다. 혼외 성관계조차 못하게 했다. '아무리 그래도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질 순 없다'며 이를 어기면? '중범죄자'로 여겨져 감옥이나 강제수용소로 보내졌다. 동성애는 더더욱 금지됐다. 나치 시절 유대인 연인들은 그야말로 '야만의 시대'를 살아가야 했다.

그렇다면 누가 유대인인가. 나치 독일이 규정한 유대인은 '완전한 유대인'과 '혼혈인'(Mischling)로 나뉜다. 100% 완전한 유대인은 △혈통상 인종적으로 완전한 유대인 조부모를 세 명 이상 둔 사람, △조부모가 유대교를 믿는 사람이다(당사자가 유대교를 믿든 안 믿든 상관없었다). '혼혈인'은 유대인 조부모를 한 명이나 두 명 둔 사람으로 다음 사항에 해당되면 '유대인'이다. △유대인과 결혼한 사람 △유대인과의 혼인으로 태어난 사람 △유대인과의 혼외 관계로 태어난 사람 △유대교 공동체에 속한 사람 등이다(명칭만 '1급 혼혈인' 또는 '2급 혼혈인'으로 나뉘었고, 나치에게 끌려가 죽기는 마찬가지였다).

규정이 애매하고 포괄적이었기에 "당신은 유대인이야"라고 찍히면 그냥 '유대인'이 됐다. 이에 따라 독일의 유대인 숫자는 56만으로 집계됐다(유대인임을 숨긴 이들도 적지 않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적지 않은 숫자의 유대인 젊은이들이 독일국방군으로 총을 잡았다는 사실로 짐작할 수 있다). 유대인 판정을 받은 이들은 '제국(Reich) 시민'이 못 되고 2등 시민으로 떨어졌다(이즈음 이스라엘 시민권을 지녔음에도 '2등 시민'으로 차별 받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처지와 같다. 이들은 이스라엘 총인구의 20% 쯤이다).

당연히 반발이 컸다. 제1차 세계대전 참전 군인과 유가족들도 그러했다. 그 전쟁에서 독일제국을 위해 싸우다 숨진 유대인은 1만2000명쯤이다. 부상병은 더 많았다. 이들 참전 유족이나 당사자들은 "독일을 위해 싸우다 죽고 다쳤는데 이제 2등 시민으로 차별 대우를 하느냐?"는 불만을 품었다. 유대인 공무원들은 "독일 유대인을 상대로 한 무지막지한 조치를 거두어들이라"고 볼멘소리로 항의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대다수 유대인들은 나치 정권의 험악한 기세에 밀려 불만을 속으로 삼켜야 했다. 1940년대 들어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수용소행 기차들이 바삐 움직일 때에 유대인 참전 군인들과 유가족들은 수용소로 가는 순번에서 뒤로 미루어졌다. 하지만 그야말로 잠시 늦춰졌을 뿐이다. 끝내 죽음으로 가는 과정은 일반 유대인들과 같았다.

▲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수용소로 이어지는 기찻길. 이곳에서만 유대인 100만 명이 죽은 것으로 알려진다. ⓒ김재명

세 부류로 나뉜 유대인

전세계 유대인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는 유대인 사회 안에서조차 논란 사항이다. 대체로 전세계 유대인 총인구는 1500~1600만, 이스라엘 유대인은 680만, 미국 유대인은 600만 명쯤으로 보면 크게 틀리지 않는다.

유대인은 세 부류로 나뉜다. △터키계 카자르인의 후손인 아쉬케나짐(Ashkenazim, 최대 1200만 명), △아브라함의 후손인 세파라딤(Sepharadim, 최대 450만 명), △에티오피아계인 팔라샤(Falasha, 2만 명) 등이다. 유대인의 다수를 차지하는 아쉬케나짐은 폴란드와 독일 등 유럽에 살던 유대인들을 가리킨다. 지금의 미국 유대인들과 이스라엘의 엘리트 집단이 대부분 아쉬케나짐 출신이다. 이들은 유럽인들과 피를 섞으며 오랫동안 머물렀기에 겉모습도 전형적인 백인이나 다름없는 사람들이 많다.

세파라딤 유대인은 지난날 정복자인 로마제국에 맞섰던 고대 유대인들의 후손이다. 혈통상 선조는 아브라함이다. 이들은 예루살렘에서 쫓겨나 중동이나 유럽의 이베리아 반도(스페인과 포르투갈) 등으로 흩어졌다. 그런 사실을 말해주는 지명이 '몬주익'이다. 몬주익은 '유대인의 산'이란 뜻이다. 1992년 황영조 선수가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던 바르셀로나 올림픽 주경기장이 자리한 곳이 바로 몬주익이다.

세파라딤 가운데 절반쯤을 차지하던 이베리아 유대인들은 15세기에 일어난 기독교도들의 국토회복운동(Reconquista, 이베리아반도에서 무슬림 세력을 몰아내려는 운동)으로 말미암아 큰 위기를 맞이했다. "유대교를 버리고 기독교로 개종하든지, 싫으면 떠나라"는 압박을 받았다. 일부는 개종을 해 눌러 앉았지만, 다수 셰파라딤은 스페인에서 북아프리카와 중동으로 옮겨갔다. 세파라딤 가운데에서도 특히 예멘이나 오만 지역 출신의 유대인들을 (동쪽 방향이라는 뜻을 지닌) '미즈라히'라고 일컫는다.

유대인도 다 같은 유대인 아니다

말로는 '유대인 운명 공동체'라고 하지만, 이스라엘에서 어디 출신의 유대인인가를 둘러싼 차별과 갈등은 늘 문제가 돼 왔다. 아쉬케나짐은 이스라엘 상층부를 이루는 갑이고, 세파라딤은 을이다. 특히 미즈라히는 천민처럼 알게 모르게 멸시를 받곤 한다. 사례 하나를 보자.

1995년 11월4일 지중해변 텔아비브 시청 앞 광장에서 10만 명이 모인 가운데 중동평화를 기원하는 정치집회가 열렸었다. 그 집회가 끝나자말자 총성이 세 번 잇달아 울렸다. 이스라엘의 집권 좌파 정당인 노동당 지도자이자 오슬로 평화협정(1993)을 이끌었던 이츠하크 라빈 총리를 겨냥한 총격이었다. 총리는 등에 총알 1방이 박힌 채 병원으로 실려가는 길에 숨을 거두었다.

라빈을 죽인 암살범 이갈 아미르(25)는 "오슬로 평화협정에 따라 이스라엘 땅의 일부라도 팔레스타인에게 넘어가는 것을 막으려 범행을 저질렀다"고 주장했다(무기징역을 받고 지금도 복역 중이다). 그는 예멘에서 살다가 이스라엘로 옮겨온 '미즈라히' 출신이다. 아쉬케나짐 출신의 여자와 결혼하려 했지만, 여자의 아버지가 "미즈라히와 결혼해선 안 된다"며 반대하는 바람에 헤어졌다. 프로파일러는 그의 범행 동기 밑바닥에 개인적 좌절감이 깔려 있음을 알아챘다. 이렇듯 유대인도 다 같은 유대인이 아니다.

"유대인은 우리 선조가 베푼 은혜 기억해야"

유대인들을 팔레스타인 땅으로 이끈 '마법의 주문'은 매우 길다. 요약하자면 다음 두 가지다. 첫째, 기원전 2100년쯤 유대인의 선조인 아브라함이 그가 믿는 유일신 야훼(여호아)로부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가나안(지금의 팔레스타인) 지역에 대한 소유권을 받고 그곳에 살았으니 그 약속은 지금도 유효하다는 것이다.

둘째, 2000년 전 예루살렘에서 침략자들에게 강제로 쫓겨나 그들이 히브리어로 말하는 갈루트(galut, 유배) 또는 디아스포라(diaspora, 이산離散)가 됐지만, 20세기 들어 야훼의 뜻에 따라 오랜 시련을 끝내고 '약속받은 땅'으로 돌아오는 알리야(aliyah, 귀환)로 나라를 세울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이스라엘 땅'(Eretz Israel)에서 나름의 안정된 삶을 누렸던 다윗과 솔로몬 시대를 빼고는 별로 내세울 게 없는 어두운 기록들로 차 있다. 기원전 6세기 유대인들은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잡혀가는 이른바 바빌론 유수(幽囚)의 치욕을 겪었다. 노예 상태로 있던 유대인들을 원래 살던 곳으로 돌려보낸 이가 바빌로니아를 멸망시킨 페르시아의 키루스 2세였다. 몇 년 전 이란에 갔을 때 그곳 사람들은 "이스라엘은 우리 이란의 선조들이 베푼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지나가며 하는 말이 아닌, 뼈있는 말로 들렸다.

고대 로마제국의 지배에 저항한 3차에 걸친 반란(서기 66년, 115년, 132년)은 유대인들이 지금의 팔레스타인 지역을 떠나 전세계로 퍼진 결정적인 계기였다(유대인 반란군이 끝까지 저항했던 마사다 요새는 이스라엘 학생들의 애국심을 키우는 필수 견학코스다).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 뒤 바그다드에 갔더니, 그곳에 유대인 시너고그(synagogue, 유대인 예배당)가 있었다. 이란 테헤란에도 유대인들의 옛 주거지역 흔적들이 있어 놀랐다.

유럽의 유대인들은 현지 토착민들의 멸시와 경계 속에 폐쇄적인 공동체를 꾸려가면서 종교적 정체성을 이어 나갔다. 그들만의 예배를 위한 작은 시너고그를 세웠다. 유대인 연구자들의 길고 긴 설명을 한 문장으로 줄이자면, 서유럽에 머물던 유대인들은 개종을 강요하거나 억압을 하는 지역들을 피해 이곳저곳 옮겨 다녔고, 그나마 유대인들을 너그럽게 대했던 폴란드를 비롯한 동유럽 쪽으로 많이 가게 됐다는 것이다(폴란드에 유대인들이 많이 살게 된 이유를 설명하는 이 대목은 논란거리다. 아래 글에서 다시 살펴보자).

▲ 독일 부헨발트 수용소 안의 여윈 수감자들. 체력이 떨어져 더 이상 노동을 할 수 없게 되면 처형장으로 끌려갔다. ⓒPrivate H. Miller

나치 희생자의 다수는 동유럽 유대인들

1933년은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 총리에 올랐던 해다. 바로 그 무렵 나온 미국 유대인협의회 연감(The American Jewish Yearbook)에 따르면, 1933년 현재 유럽의 유대인은 약 950만 명이었다. 국가별로는 폴란드 300만, 소련 252만, 루마니아 98만, 독일 56만, 헝가리 45만, 체코·슬로바키아 36만, 오스트리아 25만, 프랑스 25만, 리투아니아 15만 명 등이다.

이들 유럽 유대인 가운데 87%에 가까운 약 825만 명의 유대인들이 동유럽 지역(폴란드, 루마니아, 소련, 헝가리, 루마니아, 그리고 발트 3국인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에 살고 있었다. 소련 유대인 252만 명 가운데 절반 가까운 110만 명은 폴란드와 국경을 맞댄 우크라이나에 살았다. 폴란드 300만과 우크라이나 110만을 합하면 이 두 지역의 유대인은 유럽 전체 유대인의 43%쯤이다.

12년 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유럽 유대인 희생자가 600만으로 집계됐다. 유럽 유대인 950만 가운데 3분의 2가 숨진 셈이었다. 특히 폴란드 유대인의 피해가 컸다. 1933년 폴란드 유대인 숫자는 300만 명이고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던 1939년 폴란드 유대인숫자는 335만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5년 뒤인 1950년 통계로는 4만 5000명에 그쳤다. 엄청난 차이가 난다. 물론 이들 가운데는 다른 곳으로 피란을 가거나 국내에 숨어 지내면서 목숨을 건진 사람들도 있다. 유대인 연구자들의 집계상으론 폴란드 유대인 300만, 우크라이나 유대인 90만 명이 전쟁 중에 숨졌다.

유럽 유대인들의 뿌리는 카자르

여기서 크게 논란이 되는 사실이 있다. 지난날 로마에 반기를 들었다가 흩어졌던 고대 유대인들의 후손들(셰파라딤)이 나치 학살 희생자의 다수를 차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홀로코스트 희생자의 다수는 아쉬케나짐이다. 19세기 프랑스의 이름난 철학자이자 역사학자 에르네스트 르낭(1823-1892),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유대인 역사가'로 일컬어지는 살로 W. 배런(미 컬럼비아대, 역사학, 1895-1989)을 비롯한 여러 연구자들은 아쉬케나짐 유대인들의 선조가 살던 곳은 (2000년 전 팔레스타인이 아니라) 카자르(Khazar) 지방이라 말한다.

카자르는 지금의 우크라이나를 비롯한 남러시아 초원지대의 옛 이름이다. 8세기 무렵 그곳에는 카자르족이 왕국을 이루고 살고 있었다. 740년 무렵 카자르 왕국의 불란(Bulan) 왕은 유대교를 국교로 삼기로 결정하고 자신이 다스리던 국민들을 유대교로 집단 개종시켰다. 카자르 왕국은 세계사에서 유대인이 아니면서도 유대교를 국교로 받아들인 단 하나의 독특한 보기를 남겼다. 왜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

아서 쾨슬러(Arthur Koestler, 1905-1983)는 헝가리 유대인 출신의 영국 소설가이자 비평가다. 한국에는 그의 소설 <한낮의 어둠> 번역판이 있다(후마니타스, 2010년). 혁명에 참여했던 사람들 사이의 갈등을 중심으로 전체주의 체제의 문제점을 다룬 소설이다. 말년에 파킨슨 병을 앓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쾨슬러가 남긴 책 가운데 이스라엘에선 쉬쉬 하며 금서 목록에 올려진 것이 하나 있다. <제13지파>(The Thirteenth Tribe)라는 책이다.

쾨슬러는 전문 역사학자는 아니지만, 바로 앞에 소개한 프랑스 역사학자 에르네스트 르낭과 미 역사학자 살로 배런 등의 연구 결과물들을 독자들이 읽기 쉽게 잘 정리해냈다. 이 책에 따르면, △유대인 인구의 75%를 차지하는 아쉬케나짐 유대인은 8세기 카자르 왕국을 세웠던 터키(돌궐족)계 카자르인의 후손들이고, △아쉬케나짐의 뿌리가 지금의 우크라이나를 포함해 카스피해로 이어지는 지금의 러시아 남부 지역이라는 것이다. 쾨슬러는 당시 카자르 왕국의 상황을 이렇게 풀이했다.

[8세기 초 세계는 기독교와 이슬람교를 대표하는 두 초강대국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들의 이념적 교리는 선전과 파괴, 군사적 정복이라는 고전적인 방법을 추구하는 '힘의 정치'(power-politics)와 관련돼 있었다. 카자르 제국은 적국이나 동맹국으로서 두 세력 가운데 어느 쪽과도 동등함을 입증해보인 제3세력을 대표했다. 카자르왕국은 기독교와 이슬람교 중 어느 쪽도 받아들이지 않고 독립성을 유지했다. 그 어느 쪽이든 한 종교를 선택한다는 것은 로마 황제나 바그다드의 칼리프의 권위에 자동적으로 종속되기 때문이다](Arthur Koestler, <The Thirteenth Tribe : The Khazar Empire and its Heritage>, Random House, 1976, 58쪽).

카자르 왕국의 지배계층이 유대교를 받아들인 까닭은 (이슬람이나 기독교를 믿는 주변 국가들 사이에서) 오늘날의 스위스처럼 중립국으로 남기를 원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기독교를 믿는 서쪽의 유럽 세력과 남쪽의 신흥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강한 압력을 받자, 카자르 나름의 종교적 정체성을 확립함으로써 내부적 결속을 강화할 필요를 느꼈다고 풀이된다. '카자르 제국과 그 유산'이란 부제목을 단 책에서 쾨슬러는 카자르 지배층의 당시 생각을 이렇게 적고 있다.

["(카자르의 지배자들이) 유대교를 받아들이는 데 정치적 동기가 작용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슬람교를 받아들이는 것은 (이슬람 지역 지배자인) 칼리프에게 정신적으로 종속되는 것을 뜻했고, 그렇다고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것은 로마 제국의 종교적 신하가 될 위험성이 있었다. (카자르 지배층의 생각에는) 유대교가 기독교와 이슬람교 모두가 존중하는 성스러운 책을 바탕으로 하는 명성 있는 종교였다. 유대교는 카자르의 지배자를 이교도 야만족보다 우위에 서게 해줄 뿐만 아니라 칼리프와 로마 황제의 간섭으로부터 지켜주는 역할을 했다](Arthur Koestler, 59쪽).

쾨슬러에 따르면, 카자르 왕국은 상대적으로 문명화된 지역이었고, 호전적으로 신앙을 맹신하는 지역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개종이나 기타 다른 이유로 위협받는 비잔티움 통치하의 유대인들의 주기적인 탈출을 (카자로의 집단이주를) 이끈 천국이 되었다"고 덧붙였다.

▲ 8세기에 유대인 국가로 바뀐 카자르 왕국 지도. 13세기 몽골족을 피해 폴란드 쪽으로 옮겨간 카자르 인들은 20세기 나치 홀로코스트의 희생자가 됐다.

몽골족 피해 왔다가 나치에 당했다

그렇다면 카자르인들이 어떻게 폴란드를 비롯한 동유럽으로 옮겨가게 됐을까. 유대교를 받아들인 카자르 왕국은 10세기 말 슬라브족의 침략을 받고 지도에서 사라졌다. 그 뒤 13세기에 아시아로부터 몽골족이 유럽으로 쳐들어오자 두려움을 느낀 카자르인들은 지금의 독일과 폴란드 등 동유럽 쪽으로 옮겨갔다. 부모가 나치 학살 때 살아남아 1948년 이스라엘에 닿은 폴란드계 유대인의 아들 슐로모 산드(텔아비브대, 역사학, 1946년생)는 그의 역작 <만들어진 유대인>(The Invention of the Jewish People, 2009)에서 카자르인들의 이주 과정을 이렇게 그렸다.

[13세기 초 칭기즈칸과 그 아들들이 이끈 몽골인들의 폭풍 같은 침략에서는 그들이 가는 길에 눈에 띈 모든 것이 파괴되었다. 사람들이 도주하는 바람에 대평원에서는 수백 년 동안 사람들이 살지 않았다. 그러한 이주민들 중에는 카자르 유대인들도 많았다. 그들은 우크라이나 서부지역으로 들어갔고 자연히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땅으로도 들어갔다. 카자르 왕국은 역사의 망각 속으로 가라앉았다](슐로모 산드, <만들어진 유대인>, 사월의책, 2022, 421쪽).

폴란드 음악가의 고난을 다룬 영화 <피아니스트> 장면에 보이듯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폴란드에 300만이 넘는 유대인이 살게 된 것도 그런 사정으로 이해된다. 13세기에 동쪽에서 밀려드는 몽골족의 살육을 피해 폴란드를 비롯한 동유럽으로 옮겨갔던 카자르인들은 20세기 중반에 더 잔인한 괴물(나치 히틀러 집단)을 만나 홀로코스트의 대량 희생자가 됐다.

디아스포라 신화의 허구

여기서 짚고 넘어갈 중요한 역사적 사실 하나. 아쉬케나짐의 카자르 기원설에 따르면, 현대 유대인 인구의 75퍼센트를 차지하는 아쉬케나짐 유대인들은 바빌로니아와 로마제국에 정복당해 반란을 일으켰다가 예루살렘에서 쫓겨난 세파라딤 유대인들의 디아스포라(diaspora)와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2000년 전 떠났던 팔레스타인 땅으로 돌아가 이스라엘을 세우자는 시오니즘의 주창자들이 디아스포라 신화를 만들었고, 결과적으로 그 허구의 논리에 따라 팔레스타인 토착민들을 쫓아낸 셈이 된다.

따라서 역사적으로 볼 때 현재 유럽과 미국에 퍼져 있는 유대인들의 다수는 '약속의 땅' 이스라엘(팔레스타인)로 돌아갈 권리를 주장하기 어렵다. 그들이 제대로 뿌리를 찾아간다면 지금의 우크라이나를 비롯한 남러시아 지역이 될 것이다. 이는 오늘의 유대인들 사이에서 매우 민감한 주제다. 아서 쾨슬러는 <열세 번째 지파>를 출간한 뒤 유대인 시오니스트들로부터 인신공격이나 다름없는 맹렬한 비난을 받았다. 이스라엘이 이 주제를 얼마나 예민하게 여기는가를 짐작해볼 수 있다.

그 옛날 로마제국에 정복당해 반란을 일으켰다가 예루살렘에서 쫓겨난 유대인 디아스포라와 동유럽 땅에서 벌어진 유대인 홀로코스트가 직접 관계가 없다는 대목은 유대인들의 정체성을 뒤흔들기에 충분하다. 또한 선조가 살던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시오니즘과도 정면으로 부딪친다.

하지만 이스라엘 교과서에선 이에 대한 서술이 전혀 없다. 교실에서도 이야기되지 않는다. 이스라엘에 갈 때마다 유대인 젊은이들에게 물어봤지만, '처음 듣는 얘기'라며 고개를 갸우뚱할 뿐이었다. 마치 일본 학교에서 '위안부' 성노예 문제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기에 젊은이들이 일제 침략전쟁의 '더러운 과거사'를 잘 모르는 상황을 떠올린다. 중동판 역사의 부인이자 왜곡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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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명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kimsphoto@hanmail.net)는 지난 20여 년간 팔레스타인,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시리아 등 세계 20여 개국의 분쟁 현장을 취재해 왔습니다. 서울대 철학과를 나와 <중앙일보>를 비롯한 국내 언론사에서 기자로 일했고, 미국 뉴욕시립대에서 국제관계학 박사과정을 마치고 국민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2022년까지 성공회대학교 겸임교수로 재직했습니다. 저서로 <눈물의 땅 팔레스타인>, <오늘의 세계 분쟁> <군대 없는 나라, 전쟁 없는 세상> <시리아전쟁>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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