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까지 케이팝을 바라보는 시선은 대체로 호의적이었다. 글로벌 팝스타로 거듭난 방탄소년단을 필두로 미국 시장 진입 장벽을 낮춘 케이팝은 다양한 그룹이 거둬들인 상업적 성과와 문화적 영향력을 통해 세계 대중음악 시장의 대안으로 자리잡는 듯 했다. 최고와 최초, 최다 기록 갱신 소식이 나날이 들리는 가운데 인재 양성, 음악 제작 등 질적으로도 향상을 꾀했다. 개선점이 많아도 해결할 수 있다는 희망이 부풀었다. 2022년까지는 그랬다.
올해는 분위기가 달라졌다. 2023년 케이팝을 요약하는 단어는 '위기'다. 올해 초 가요계의 가장 큰 이슈는 케이팝의 역사를 상징하는 기획사 SM엔터테인먼트의 경영권 분쟁이었다. 틱톡 바이럴의 위력으로 순식간에 세계 시장에 이름을 알린 걸그룹 피프티피프티는 전속 계약 분쟁에 휩싸여 만신창이가 됐다. 말도 많고 탈도 많던 방탄소년단 군 복무 문제는 멤버들의 전원 입대로 마무리됐다. 연이은 거대한 사건 앞에 오늘날 케이팝을 이끌어가는 대표주자들의 입에서 케이팝 위기론이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하이브 방시혁 의장은 일관되게 케이팝 위기론을 주장해왔다. 연초 SM 경영권 분쟁 당시에는 세계 음악 시장에서 여전히 작은 케이팝의 비중, 아프로비츠 및 라틴팝 등 경쟁 장르의 등장을 주 요인으로 꼽았다. 박진영 JYP엔터테인먼트 창립자이자 현 대표 프로듀서와 함께 출연한 tvN <유퀴즈 온 더 블럭(이하 유퀴즈)>에서는 강렬한 팬덤 소비를 위기론의 근간으로 주장하며 라이트 팬덤 확장을 과제로 꼽았고, 같은 시기 <매일경제>와의 단독 인터뷰에서는 "케이팝에서 케이를 떼야한다는 말을 자주 한다"며 더 넓은 소비자층 공략의 의지를 분명히 했다. 박진영 프로듀서 역시 케이팝의 단계가 현재 3단계, 현지 인원과 현지 언어 결합 구조로 향하고 있음을 주장하며 그 해답 중 하나로 자사의 글로벌 오디션 <에이투케이(A2K)>를 제시했다.
우려와는 달리 2023년은 케이팝의 상업적 전성기였다. 음반 수출액은 1월부터 10월까지 약 3209억 원으로 연간 최고치를 경신했다. 코첼라, 롤라팔루자 등 유명 음악 페스티벌 무대 헤드라이너를 케이팝 그룹이 장식했고, 꿈만 같던 북미 미식축구 경기장과 일본 돔 경기장에 다양한 팀이 입성하여 성공적으로 투어를 마무리했다. 빌보드, 영국 오피셜 차트에서 케이팝 음악을 찾는 것도 어렵지 않았으며 정상의 소식도 심심찮게 들려왔다. 이런 상황에서 케이팝 업계 최전선의 인물들이 위기를 공식화하는 모습은 현재의 성과에 만족하지 않는 진취적 CEO 이미지 강화, 투자자들을 안심시키는 강한 리더십 확립의 전략적 결정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 매번 증명을 요구받는 케이팝에 이정도 불안감은 적당하다는 시선도 있다.
나는 현재 케이팝이 심각한 위기에 처했다고 생각한다. 경영 문제와 시장의 변화 때문이 아니다. 위기론을 인식하고 있는 케이팝 기획사들이 가져가는 창작의 방향과 제작 과정, 결과물에서 어딘지 모를 공허함을 느낀다. 2010년대 중후반 글로벌 시장에 새로운 대안으로 떠오른 케이팝은 빠르게 기성세대의 길을 걷고 있다. 소비를 지적하기 전에 창작의 과정부터 폭넓게 짚어볼 필요가 있다.
오늘날 케이팝의 가장 모순적인 행보가 바로 '케이' 떼기다. 케이팝의 케이는 한국 국적 가수의 한국어 음악을 지칭하는 알파벳 이니셜로 출발하여 현재는 한국 사회의 고유한 정체성을 함축하고, 그 사회 구조로부터 개발된 연습생 육성 및 컨베이어 벨트 시스템의 제작 과정과 팬덤 형성을 통한 조직적 소비 유도 과정을 모두 포함하는 복잡한 단어가 됐다. 한때는 한국인과 한국어가 케이팝의 필수 요소로 여겨지던 때도 있었으나, '유퀴즈'에서 박진영 대표 프로듀서가 설명한 대로 해외 현지 아이돌 그룹 육성과 데뷔, 운영 모두 케이팝의 발전 단계라 할 수 있다.
일본과 미국의 아이돌 육성 시스템과 유행하는 대중음악 양식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고도화한 체제가 역으로 세계 음악 시장에 새로운 움직임으로 여겨지며 역수출되고 있는 상황이다. 기획사들의 팬 확보를 위한 노력과 그 결과로 형성된 거대 팬덤, 지지자들을 바탕으로 거리낌없이 흡수하고 참고하던 창작 방향은 올해 테일러 스위프트로 대표되는 팬덤 경제와 다양한 장르 및 지역 기반의 공동체 중심 음악 소비, 거리낌없는 참고와 흡수를 통한 키치의 재미, 고전적 의미의 대중성 해체를 일찍이 예고한 바 있다. 여기에 케이팝의 치열한 생존 경쟁과 한국 사회의 피로감, 큰 무대를 향한 고진감래 서사가 서구 사회에 독특하게 받아들여지며 케이팝은 한국의 대중음악 의미를 넘어 세계 속에서 주목받게 됐다.
그런데 올해 케이팝의 결과물을 살펴보면 그들이 부지런히 쫓았던 영미권 팝스타와 지난 유행을 위탁 생산하는 경우가 많았다. 성장 서사와 사회 투영의 메시지는 사라지고, 오직 양식에만 충실했다. 하이브는 이 경향의 선두주자였다. 소년에서 청년으로 나아가는 투모로우바이투게더는 타이틀곡 '체이싱 더 필링(Chasing The Feeling)'에서 위켄드(The Weeknd)를 의식했고, 엔하이픈은 '스위트 베놈(Sweet Venom)'에서 선배 그룹에 이어 마이클 잭슨을 오마주했다. 정국은 정규 앨범 <골든(Golden)>으로 영미권 남성 솔로 팝스타의 대체재를 자청했다. 나일 로저스를 초빙한 르세라핌은 충분한 설명과 전개 없이 모든 금기를 거부한다는 구호를 외쳤다. 음악적 완성도와 멤버들의 퍼포먼스는 세계적인 수준이었다. 하지만 정서와 철학이 제거된 음악을 팝의 대안으로 주목하며 들을 필요는 줄어들었다. 그룹에 부여된 고유의 서사를 따라가는 것도 어느 순간 부자연스러운 결합처럼 여겨지며 높은 진입 장벽의 원인으로 지적받고 있다.
이수만 프로듀서 이후의 SM은 맥락 부재를 뼈저리게 체감했다. 이수만 프로듀서가 추진하던 'SM 컬쳐 유니버스(SMCU)'가 사라지자 당장 '무한확장' 체제를 바탕으로 등장한 엔시티, '광야'로 대표되는 세계관의 주인공 에스파의 기획 방향이 희미해졌다. 그나마 계획된 음반과 오랜 제작 과정을 통해 확보하고 있는 작곡 및 프로듀서진의 저력으로 그룹의 개성을 유지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기존 양식 활용과 동어반복으로 과거 그룹이 내걸었던 웅장한 크기만큼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긴 무리였다. 다행히 보아, 태민, 태연처럼 경력과 경험을 갖춘 솔로 가수들과 무게를 덜고 나타난 신인 보이그룹 라이즈의 활약으로 시름을 덜 수 있었다. 양식보다는 정신적 공백이었다.
아프로비츠와 라틴 팝이 현재 대중음악 시장에서 승승장구하는 원인과 정반대다. <뉴욕타임스>의 음악 기자 존 카라마니카는 '팝캐스트'에서 아프로비츠, 라틴팝, 케이팝 장르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로 "영미권 대중음악에서 들을 수 없는 이야기와 리듬"을 꼽았다. 아프로비츠는 영국 서아프리카 이민자들을 주축으로 독특한 박자와 전자음악 요소 결합을 통해 힙합과 알앤비 시장을 중심으로 세를 넓히고 있다. 원래 라틴 팝 시장에서도 변방 신세였던 멕시코는 전통의 마리아치 밴드 반주에 랩을 얹은 신예 음악가들의 활약으로 단숨에 '레히오날 멕시칸(Regional Mexican)' 장르를 대세로 끌어올렸다. 영어로 노래하지 않아도, 기존 영미권 백인들의 팝 음악과 완전히 다른데도 이들의 음악은 세계 시장에서 널리 통용된다. 지역 기반의 강한 지지를 이끌어내는 선명한 정체성과 진실한 삶의 경험 덕이다. 맥락 없이 기계적인 이야기와 지난 시절의 팝 양식만 반복하는 케이팝은 고전할 수밖에 없다.
세븐틴, 스트레이키즈, 에이티즈 등 자체 작사 작곡 시스템과 눈을 사로잡는 대규모 퍼포먼스를 선보이는 팀들이 세계 시장에서 좋은 성과를 거둔 데는 이와 같은 배경이 있다. 서투르지만 처음부터 차근차근 자신의 것을 만들어온 이들의 맥락이 엔터테인먼트와 결합하였을 때의 위력이다. 같은 맥락에서 올해 가장 마음에 와닿았던 케이팝 곡은 하이키의 '건물 사이에 피어난 장미', 아이브의 '오프 더 레코드(Off the Record)', 있지의 '벳 온 미(Bet On Me)'였다. 너무 어린 나이에 우상으로 살아가고자 고군분투하는 이들의 눈물 섞인 웃음이 케이팝의 매력을 일깨웠다.
케이를 제거한 성공도 있다. 올해 글로벌 시장에서 가장 성공한 케이팝 싱글 '큐피트'의 주인공 피프티피프티다. 2020년대 초 도자 캣, 리조, 방탄소년단, 두아 리파의 디스코 리바이벌 유행을 뒤늦게 가져와 무해하게 살균한 이 노래는 숏 폼 플랫폼의 휘발성 콘텐츠, 스트리밍 서비스의 무작위 개인 맞춤 추천 기조에 정확히 부합하며 누구도 예상치 못한 대성공을 거뒀다. 물론 그 이후 벌어진 전속 계약 분쟁과 갈등, 공중분해 사건은 너무도 '케이'스러웠지만 말이다.
독특한 경우는 뉴진스다. 뉴진스는 케이의 시스템과 지향으로 케이를 떼어버리고자 하는 팀이다. 민희진 대표를 주축으로 음악을 담당하는 비스츠앤네이티브스와 함께 결속된 어도어의 제작 과정은 민 대표가 두각을 드러냈던 이수만 프로듀서-유영진 이사 아래 2010년대 실험과 확장을 거듭하던 SM 시기의 계승이다. 그러나 <겟 업(Get up)> 앨범의 '슈퍼 샤이(Super Shy)'와 '쿨 윗 유(Cool With You)', 'ETA' 등 음악은 최근 영미권에서 가장 화제로 떠오르는 브레이크비트와 개러지, 숏폼 플랫폼의 미감을 담고 있으며, 이국적인 뮤직비디오와 이들에게 따라붙는 '유학생 감성'은 그 어떤 그룹보다도 '탈-케이' 적이다.
뉴진스처럼 케이의 속성을 구분하여 취사선택에 실패한 것이 케이팝 위기의 원인이다. 케이팝이 글로벌 시장에 발맞춰 제거해야 할 케이의 속성은 한국어와 한국인으로의 정체성이 아니라 케이팝을 낳은 한국 사회의 모순된 시스템이다. 살인적인 컴백 스케줄에 쫓기며 기획과 제작을 납품하는 현실에서는 비슷비슷한 스타일, 아티스트의 개성에 의존하는 음악이 범람할 수밖에 없다. 셀 수 없이 많은 데모 트랙 중 옥석을 골라 선정, 가공하는 작업이 우선시되는 가운데 작가주의는 실종됐다. 이를 덮어주었던 새로운 아이디어나 창작의 가능성 역시 자본의 논리 앞에 무력화되거나, 그 자체의 모순으로 일회성 활용에 그치며 사라진다. 창작의 실종은 서사의 공백으로 연결된다. 좋은 밑그림을 그려도 소수에 집약된 결정권 구조가 혁신에 제동을 건다. 민희진 대표, JYP 이지영 이사의 스쿼드(SQUAD)를 제외하고 대다수 기획사 결정권자들이 남성인 상황도 짚어볼 문제다. 대중 앞에 서기 위해 구슬땀을 흘리는 아이돌 그룹 멤버들은 청춘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기 위해 몸과 마음을 모두 갈아 넣는다. 그 과정에서 함부로 아픔을 이야기하지 못하고 병들어가는 이들도 많다.
2023년의 케이팝 위기론은 근본적인 제작 구조와 창작의 자세에 질문을 던지는 깊이까지 파고들어갔을때 의미가 있다. 세계가 왜 동북아시아의 작은 나라의 대중음악에 귀를 기울였는지, 그 산업 구조와 제작 환경에 영감을 받아 어떤 미래를 만들어나가고 있는지를 냉철한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2010년대 말의 붐과 팬데믹 특수는 이제 끝났다. 홍지상이 작곡, 영케이가 작사한 하이키의 '서울'에서 케이팝의 잔인한 오늘과 찬란한 내일을 동시에 듣는다. "이 도시에서 난 웃고 있을 거야. 이루게 될지 부서지게 될지 걱정할 시간에 더 달릴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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