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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호의 우리말 바로 알기] ‘훈민정음’과 ‘한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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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호의 우리말 바로 알기] ‘훈민정음’과 ‘한글’ 이야기

금년은 훈민정음이 세상에 나온 지 577돌이 되는 해이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반포했을 당시에는 배우고 익히기 어려운 한자와 구별하여, 주로 백성들이 일상적으로 쓰는 글이라는 뜻에서 언문(諺文)이라고도 불렀다. 세종대왕은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고 해서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고 하여 ‘소리’를 바르게 표현하고자 하는 것에 방점을 찍었다. 한자어로 표기할 수 없는 의성어(짹짹, 꾀꼴꾀꼴, 졸졸졸)나 의태어(흔들흔들, 휘청휘청, 껑충껑충)까지도 표현할 수 있고, 심지어는 귀신의 소리까지도 표현할 수 있다고 하였다. 한자어로 인한 번거로움을 없애고, 백성들이 모두 자신의 의사를 직접 표기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었음이 서문에 잘 나타나 있다. 흔히 언문에 대해 '한글을 낮춰 부르는 말'이라는 오해가 있으나, 사실 '언문'이라는 명칭을 처음 사용한 것은 창제자인 세종대왕 본인이었다. 최만리의 ‘훈민정음 반대상소문’에도 ‘언문’이라는 표현이 있는 것으로 보아, 세종께서 당시에 ‘언문’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했던 것으로 본다. 최만리는 이두로 잘 표현하고 있는데, 굳이 글자를 만들어서 번거롭게 하느냐고 반문하였다. 이에 대해 세종은 “너희들이 사성칠운을 알아?”하면서 역정을 내기까지 한 것이 <세종실록>에 그대로 기록되어 있다. 이런 면으로 보아 세종은 상당히 음성학에 조예가 깊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훈민정음 반포를 반대하는 신하들을 모두 하옥시켰다가, 다음날 풀어주는 아량을 보이기도 했다. 감옥에 가둔 것은 임금의 지엄함을 보임이요, 다음날 풀어준 것은 임금의 아량을 보여준 것으로 유명하다. 사실 훈민정음 창제에 찬성했다가 반대하는데 서명한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바로 옥사를 면하게 해 주었으니 참으로 명판결이 아닐 수 없다. 다만 최만리의 ‘훈민정음 반대상소문’을 많은 사람들이 나쁘다고만 하는데, 세종은 그 글을 아들 문종에게 보여주며 “글은 이렇게 써야 한다.”라고 하였다. 논리가 정연하고 군더더기가 없다는 뜻이다. 이에 문종도 고개를 끄덕이며 잘 쓴 글임을 인정했다고 한다.

한편 지금은 한글이라고 하여 세계인이 배우고자 하는 글자가 되었다. 세계 7대 언어의 반열에 들었다. 참으로 고무적인 일이다. 한국은 다른 나라를 정복하거나 침략한 것도 별로 없는데, 오로지 문화로 세계의 7대 언어가 된 것이다. 이 속도로 가면 곧 5대 언어가 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이제 한국어는 한류의 한 분야가 되었다. 구한말에는 '나라의 글'이란 뜻으로 '국문(國文)'이라 불렀다. 구한말 뿐만 아니라 50년 대에 태어난 사람들은 국문이라는 표현을 많이 하면서 자랐다. 한글과 국문이 거의 대등하게 사용되었다. 일제강점기를 전후하여 '한글'이라는 이름이 등장했는데 정확한 기원을 알기는 어렵다. 누구라고 지칭하기도 힘들다. 구한말 1877년에 선교사 존 로스 목사가 처음으로 한글 띄어쓰기를 적용한 <조선어 첫걸음>이라는 교재가 나왔고, 1896년 헐버트나 주시경 등이 한글 띄어쓰기를 현실에 적용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면서 한국어에 관한 명칭이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그 전에는 ‘배달말’, ‘한말’ 등으로 쓰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현재 쓰이는 '한글'이라는 이름은 창시자가 불분명하지만 대체로 주시경이 약 1912년 경에 저술한 《소리갈》(음성학)이라는 책에서 처음 쓴 것으로 보고 있다. (고영근 2003) 한편, 최남선이 처음으로 한글이라는 명칭을 사용했고, 주시경이 이에 동의하였다고 하는 학설(박승빈, <한글맞춤법통일안 비판>, 1936(고영근, 2003에서 재인용)도 있다. 하지만 최남선이 <아이들보이>라는 책에서 ‘한글풀이’라는 글을 쓴 것이 1913년으로 주시경보다 약간 시기적으로 늦었다. 잔술한 바와 같이 주시경이 헐버트와 독립신문에 한글 띄어쓰기를 주장한 것이 1896년도이므로 시기적으로 누가 한글이라는 이름을 지었는지는 명확하게 구명하기가 어렵다. 명칭에 관한 정확한 기록이 없는 관계로 누구라고 속단하기는 어렵다.

끝으로 세종대왕이 기역, 니은, 디귿이라는 이름을 지은 것으로 아는 독자들이 많은데, 사실상 당시에는 명칭이 없었다. 기역, 니은, 디귿이라는 명칭은 최세진(1473 ~ 1542)이라는 학자가 <훈몽자회(한자 학습교재)>(1527년, 중종 22년 간행)라는 책에서 처음으로 이름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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