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장관들에게 '전사가 돼 적극적으로 싸우라'고 주문했다고 합니다. 이 말을 듣고 매우 걱정이 됐습니다. 현재 한국 사회의 큰 문제 중 하나가 주장과 선동이 넘쳐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치인과 관료들이 먼저 경청의 자세로 국민들의 이야기를 듣고 지지자들 뿐아니라 비판세력들과 토론하면서 화합의 정치, 협치를 구현해야 하는데, 장관들에게 나서서 싸우라니요."
개인이 아닌 공공을 위한 공공선을 추구하는 시민교육, 정치교육을 하는 '공공선 거버넌스(Common Good Governance)' 원장을 맡고 있는 강치원 전 강원대 교수는 프레시안과 인터뷰에서 우리 사회가 '무한경쟁'과 '각자도생'이 지배하는 사회로 치닫고 있는 것에 대해 정치인을 비롯해 사회지도층의 책임이 크다고 말했다.
주장과 선동만 난무하고 토론은 사라진 한국 사회
토론 전문가이기도 한 강 원장은 우리 사회에서 "토론의 실종"도 이런 우리 사회의 흐름을 보여주는 한 측면이라고 강조했다.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 두 분이 토론이 가능했고, 토론을 즐겼던 대통령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자기 철학이 명확한 두 대통령이라서 그 당시 한국 사회가 어느 방향으로 나갈지 토론이 활발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과의 대화', 노무현 대통령의 '평검사와의 대화' 모두 일회성 이벤트에 그쳤습니다. 특히 노무현 대통령 때 '검사와의 대화'는 토론 기술에 능한 사회자가 있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대통령과 검사들이 직접적으로 부딪히는 인상만 남기고 끝나지 않았을 것이고, 노 대통령께서 의도하신 대로 국민들도 대통령의 검찰 개혁에 대한 의지를 잘 이해하고 이를 지지해 조금 더 힘있게 밀어부칠 수 있지 않았을까요. 문재인 대통령 때 탈원전 정책에 대해 배심원제를 통해 결정 내린 것도 결과적으로 윤석열 정부가 손쉽게 이를 뒤집을 수 있게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국민들에게 탈원전 정책의 내용, 필요성, 경로 등에 대해 알리고 공론화하는 과정이 부족했습니다."
그러다가 이제는 대통령이 정부 관료들에게 "전사가 되어 싸워라", "스타 장관이 되라"고 주문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정부와 여당에 대해 비판적인 목소리를 듣기 보다는 이런 세력과 싸워서 이겨 지지자들이 열광하는 정치와 행정을 하라는 주문인 셈이다.
강 원장은 '공공선 거버넌스'에 대해 "우리 사회가 자유 경쟁을 통해 지나치게 개인선을 강조되고 있는데 이를 극복하고 공공선의 사회로 가자는 목표와 지나친 주장과 선동을 넘어서 거버넌스와 협치, 공론의 사회로 가자는 목표"를 갖고 있다고 설명했다.
사교육 천국 한국 vs. 교육비 공짜인 독일
공공선, 공공성을 추구하는 사회로 가기 위해서는 교육과 종교기관(교회)가 공적 기관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강 원장은 특히 한국 사회에서 교육이 개인의 투자라는 차원에서 인식되며 대학 입시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대학 교육, 취업까지도 사교육 시장이 지배적인 것에 대해 독일의 경험을 이야기하며 공공성을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1990년대 초에 하이델베르크대학 객원교수로 독일에 체류할 때 초등학생인 아이가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고 해서 알아보니, 독일에 사설 피아노 학원이 없었어요. 대신 지자체나 공공기관에서 피아노 레슨을 운영해서 여기를 통해 신청을 하니 지자체에서 고용된 피아노 선생님이 초등학교 음악실로 오라고 해서, 거기서 피아노를 배웠어요.
독일이 대학 교육까지 공짜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더 나아가 대학원, 박사과정까지 교육비를 국가가 부담하고 직업 교육도 국가가 부담합니다. 이렇게 국가 교육을 통해 미용사가 되고, 의사가 되고, 교사가 된 사람들과 사교육을 통해 미용사가 되고, 의사가 되고, 교사가 된 사람들 중 어느 쪽이 다른 사람들과 사회를 생각할까요? 교육비를 국가가 부담하건, 개인이 부담하건, 결국 국민의 돈입니다. 교육비의 국가 부담은 돈을 쓰는 방식과 철학이 공공성이라는 뜻입니다."
한국전쟁 이후 압축적 산업화와 민주화를 통해 어느덧 세계 경제규모 10위권의 선진국 반열에 오른 한국 사회의 이런 '빠른 성장'의 그늘이 이처럼 파편화된 개인의 자유를 강조하는 사회가 됐다는 지적이다.
"어떤 분들은 젊은이들이 너무 이기적이라고 비난하기도 하지만, 사실 기성세대의 책임이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빨리빨리 문화' 속에서 아이들을 차로 학교 정문까지 데려다주고, 하교하면 다시 학원까지 데려다주면서 '열심히 공부해서 너 잘 되고, 너 잘 살아라' 이렇게 교육시켰죠. 어렸을 때부터 공동체의 가치나 윤리보다는 다른 사람을 제치고 승자가 되라고 가르쳤죠."
찬반 양론의 미국식 토론 vs. 공론을 만들어가는 유럽식 토론
강 원장은 갈수록 개인화되는 우리 사회가 지나치게 미국 사회를 닮아가는 것에 대해서도 이의를 제기했다. 미국과 유럽의 토론 문화를 통해서도 두 사회의 다른 지향점을 확인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미국은 찬성과 반대 양론이 경합하는 토론 방식을 주로 합니다. 그러나 유럽은 그룹형 토론입니다. 양당제인 미국과 다당제인 유럽의 정치 질서의 차이가 토론 방식에서도 나타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찬반 토론은 찬성과 반대 중 어느 하나로 가는 것이고, 그룹 토론을 통해서 전혀 새로운 합의가 만들어질 수도 있습니다. 또 찬반 토론은 표면적으론 어느 한쪽으로 의견이 모아진 것 같지만 패자 쪽에서 승복을 하고 생각을 바꾸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룹 토론을 통해 차이가 아니라 합의할 수 있는 부분을 확인해 나가는 과정은 그 자체가 공론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참여재판도 미국은 배심제, 독일은 참심제입니다.
개인이 강조되는 사회는 토론을 안 합니다. 자유와 경쟁이 중요한데 왜 토론을 합니까? 반면 공공선이 강조되는 사회에서는 토론이 필요합니다. 다수의 합의를 만들어나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1980년 5월을 앞두고 서울대와 고려대의 대학원생들이 군부독재에 반대하는 시국성명을 작성, 발표하는 과정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붙잡혀 혹독한 고문을 당했던 강 원장은 기독교 신자로서 "교회의 공공선"에 대해서도 강조했다.
"제가 아직도 잊지 못하는 장면 중 하나가 전두환 정권 시절에 서울시내 대학생, 대학원생들의 시국 성토대회가 열렸어요. 그러니까 경찰들이 시위대를 진압하기 위해 난입하고 최루탄을 쏘고 난리가 났죠. 학생들이 흩어지고 깃발들이 다 쓰러졌는데 깃발 하나가 딱 서 있었어요. 그게 한신대 깃발이었는데 "주여, 오늘 우리 여기에"라는 글귀가 쓰여진 깃발이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교회, 종교도 많은 부분 개인화 됐습니다. 이런 흐름을 거슬러서 해야할 일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종교는 공공선을 추구해야 하고, 약자의 편에 서야 합니다."
이런 목적으로 지난 7월 출범한 공공선 거버넌스는 내년 5월 "파시즘의 어제와 오늘"이라는 주제로 국제 심포지엄을 개최한다. 신학과 정치, 사회 과학, 문화, 전쟁, 국제정치, 그리고 우리 역사 등 여섯 개 분과로 나뉘어 우리나라 최고의 전문가 31명이 참여한다. 첫날 독일 보쿰대학교 신학부 트라우고트 예니헨 교수의 기조강연은 동시통역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또 내년 하반기에는 교육의 공공성 강화를 위한 교육 개혁을 논의하는 심포지엄도 기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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