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00년 전에 일어난 일 때문에 일본이 (용서를 받으려고) 무릎을 꿇어야 한다는 생각을 받아들일 수 없다"(지난 4월 미국 방문 중 <워싱턴포스트>와의 인터뷰). "일본은 이미 수십 차례 과거사 문제에 대해서 반성과 사과를 했다"(지난 3월 일본 방문을 앞둔 국무회의 중). 둘 다 윤석열 대통령이 했던 말이다.
국내의 비판 여론은 거셌다. 일제 침략전쟁의 피해 당사자들과 그 유족들로 이뤄진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회원들도 반발했다. "대한민국 대통령보다는 일본 총리가 더 어울릴법한 망언 중의 망언이다" 그들의 볼멘소리를 더 들어보자. "언제 우리 국민들이 일본에 무릎을 꿇으라고 했는가. 한국 대법원 판결을 존중해 피해자들에게 사죄하고 판결을 이행하라는 것이, 그렇게도 지나치고 불편한 것인가." (대법원은 2018년 10월31일 일본 전범기업 신일철주금에게 배상책임을 묻고 피해자들에게 1억 원씩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대통령실도 도쿄 한일 정상회담 바로 뒤 언론 브리핑에서 "역대 일본 정부는 일왕과 총리를 포함해 50여 차례 사과했다. 사과를 한 번 더 받는 게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실제로 일본의 사과 횟수는 곧 살펴보겠지만 대통령실 브리핑보다 더 많다. 문제는 사과보다 훨씬 많은 망언(妄言)들을 내뱉어 우리 국민들을 화나게 했을 뿐더러, 사과의 진정성을 의심하게 만들곤 했다는 점이다.
'사과' 횟수보다 훨씬 잦은 '망언'
한국 외교부 웹사이트에 접속해보면 사과-망언 관련 자료들이 깔끔하게 정리돼 있다. 외교부 홈페이지(https://www.mofa.go.kr/www/main.do)의 검색란에 '2018 일본개황'을 치면, 일본의 사과와 망언 기록이 나온다. 이에 따르면, 사과(과거사 반성)는 71건, 망언(역사왜곡)은 177건으로 사과보단 망언이 훨씬 많다(<2018 일본개황>에서 과거사 반성 언급은 247-257쪽. 역사왜곡 언급은 258-283쪽).
문제는 일본의 사과 행태다. △지난날 저지른 전쟁범죄를 두고 그런 일이 없다고 잡아떼거나, △사과를 하더라도 '립 서비스' 수준으로 사과의 진정성이 없거나, △사과 뒤 곧바로 망언을 하는 일들이 쳇바퀴처럼 되풀이돼 왔다는 점이다. 총리가 사과를 하면 각료가 뒤집는 망언을 하고, 그런 사실을 선거에서 훈장처럼 내걸고 홍보하는 일들이 '일본식 사과'의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특히 아베 신조 전총리는 사과를 했다가 망언으로 뒤엎고 필요에 따라선 다시 '립 서비스' 수준의 사과를 하는 '현란한 곡예'를 보였다(이에 대해선 본 연재에서 다시 살펴볼 예정임).
사과와 망언 사이를 오가는 이중주의 불협화음를 내온 일본에 발맞추는 한국의 '신친일파'들은? 기회 있을 때마다 "위안부는 자발적인 매춘부"라는 망언을 내뱉곤 해왔다. 일본의 극우파와 같은 맥락의 망언을 할지라도, 번복이나 사과는 없다. 이들의 뇌세포는 '친일'로 딱딱하게 굳어 토론을 통한 설득은 아예 통하지 않는다. 망언인 것 자체를 부인하니 사과를 할 리가 없다.
예외적으로 망언 뒤 딱 한번 사과를 했던 인물이 있다. <반일 종족주의>의 대표필자 이영훈(낙성대경제연구소 이사장, 이승만학당 교장)이다. 그는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로 있던 2004년 9월, MBC 100분 토론에서 "일본군 성노예가 '사실상 상업적 목적을 지닌 공창 형태'였다"고 말했다가, 나흘 뒤 피해자 할머니들에게 무릎 꿇고 큰 절로 사과를 했었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그 뒤 줄곧 실증주의로 포장한 특유의 '학술적' 망언으로 일본인들을 기쁘게 해주었다. 지난날 그들이 저질렀던 전쟁범죄의 죄의식을 덜어주고 '위안'해주는 망언들이다. 번복이나 사과는 없었다(본 연재 14회 참조).
히틀러 명령서가 없다고 홀로코스트 부인할까
일본의 극우파들과 한국의 '신친일파'는 입을 모아 일제 강점기의 강제동원을 부인한다. 일본정부, 특히 군대가 '위안부' 강제연행에 어떻게 관여했는지를 보여주는 공문서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러 연구자들의 끈질긴 노력으로 진실은 하나둘씩 드러났다. 가장 최근의 일로는, 한신대 하종문 교수가 그의 신간 <진중일지로 본 일본군 위안소>(휴머니스트, 2023)에서 일본군 공문서가 있다는 사실을 밝혀낸 바 있다(본 연재 13회 참조).
"그들(강제연행을 부인하는 자들)은 말합니다. '일본군이 강제로 조선 여성을 연행했다면, 그 명령서가 반드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문서는 한 통도 발견되지 않았다.' 홀로코스트 부정론자는 말합니다. '나치가 유대민족 절멸작전을 실행했다면, 히틀러의 명령서가 반드시 남아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문서는 한통도 발견되지 않았다.' 히틀러의 명령서가 발견되지 않은 것은 모든 전문가가 알고 있는 것으로, 부정론자가 말하는 것처럼 놀랄만한 일은 결코 아닙니다"(다카하시 데츠야, <일본의 전후책임을 묻는다> 역사비평사, 2000, 147-148쪽).
위에 옮긴 글은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인 다카하시 데츠야(도쿄대, 철학)가 이른바 '부정론자들'을 비판한 글이다. 일본 극우들은 (전쟁범죄의 증거물들이 불태워지거나 뒤로 빼돌려져 없을 걸로 믿고) 명백한 증거가 부족하다고 우기며 전쟁범죄를 아예 부인하려든다. 그러면서 '위안부' 강제성이 없다는 주장을 거두지 않는다. 그들은 강제가 있었느냐 없었느냐, 그것도 '좁은 의미에서의 강제연행'이 있었느냐 시비를 건다. 밤에 자고 있는 데 문을 박차고 들어와 끌고 가는 따위의 강제연행은 없었다고 우긴다.
걸핏하면 '실증주의'를 내세우는 <반일 종족주의>의 대표필자 이영훈이나 이우연(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위원)도 일본 극우와 같은 주장을 펴왔다. 2020년 2월 JTBC '막나가쇼'의 진행자 김구라가 이우연을 만났을 때 그는 이런 망언을 남겼다. "일본 군인이 끌고 갔다는 증거는 없다. 위안부 주장은 80년 된 주장 아니냐. 기억이라는 게 1년만 돼도 안 나는데... 위안부는 성노예가 아니라 성노동자라고 생각한다."
류석춘, "위안부는 매춘의 일종, 궁금하면 해볼래요?"
이영훈이나 이우연의 '위안부' 망언과 비슷한 이야기들은 많이 나와 있다. 그 가운데 2019년 9월 류석춘(전 연세대교수, 사회학)의 망언 파문은 기억에도 새롭다. 사회학과 전공과목 '발전사회학' 강의 시간에 류석춘은 '위안부는 매춘의 일종'이라는 주장을 폈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이 매춘에 종사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위안부가 됐다"라는 막말이었다. '사실과 다르지 않느냐'고 묻는 여학생을 바라보며 류석춘은 "궁금하면 한 번 해볼래요?"라는 가벼운 입놀림으로 파문을 더 키웠다.
같은 자리에서 류석춘은 "정의기억연대(정의연)가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일본군에 강제로 동원당한 것처럼 증언하도록 교육했다"고 주장하면서 심지어 "정의연 임원들은 북한과 연계돼 북한을 추종하고 있다"는 등 반공 프레임을 내걸었다. 듣는 이에 따라선 매우 거슬리는 막말이었다. 그냥 넘길 일이 아니라고 판단한 수강생들은 류석춘의 망언을 녹취해 언론사에 넘겼고, 뉴스를 본 많은 시민들이 분노하게 됐다.
수강생들, 연세대 동문들, 나아가 많은 시민들에게 역겨움을 안겨준 류석춘의 막말은 끝내 법정으로 번졌다.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왜곡된 사실을 말해 피해자들에게 정신적 고통을 줬다며 명예훼손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눈에 비치는 극우파의 겉모습은 공격적이고 당당하다. 하지만 법정에 선 류석춘은 심약하고 불안해하는 모습이었다. 말을 떨며 왔다 갔다 했다. '위안부'가 매춘의 일종이라 말한 것은 '단순 의견 표명'이었다면서, "내 의견은 전혀 근거가 없지 않다. 허위가 아니다"라고 버텼다. 하지만 곧 "허위라 하더라도 허위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다"고 한발 물러섰다.
"극우는 테러하는 안중근, 난 연필 하나도 못 던져"
법정에서 말을 떨었던 류석춘은 그 스스로 심약한 지식인이라는 사실을 밝힌 적이 있다. 2006년 경향신문이 주관한 '진보개혁의 위기' 좌담회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좌파, 진보가 우리 보고 극우, 수구라고 하던데, 극우는 테러하는 안중근 같은 사람이고, 나는 연필 하나도 못 던진다."
여기서 류석춘은 극우냐 수구냐를 떠나, 그 자신의 정체성을 의심하도록 만드는 말을 했다. '테러하는 안중근'이란 표현은 일본의 '넷(net)우익'이라 불리는 극우 유튜버 패거리들이 즐겨 쓰는 상투어다. 박정희를 겨눈 김재규의 총격이 있기 딱 70년 전인 1909년 10월26일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을 우리는 '열사'라 부른다. 일본인들은? '테러범'이다. 좀 더 길게 표현하자면 '조선 테러범 안중근'이다. 류석춘의 '정신적 모국'이 일본이 아니라면, '테러를 하는 안중근'이 아니라 '의거(義擧)를 하는 안중근'이라 말해야 옳았을 것이다. 류석춘의 정체성이 어디에 있는가를 의심해보게 만드는 대목이다.
류석춘 망언 재판의 속도는 매우 느리다. 2023년 6월 현재 아직껏 1심에 머물고 있다. 지난해 11월 말 1심 검사는 "학문의 자유는 보호받아야 하지만, 표현의 자유가 인격을 침해할 순 없다"며 1년6개월을 구형했고, 선고를 앞둔 상태다. 재판이 질질 끄는 동안 류석춘은 2020년 1학기를 끝으로 정년퇴임을 해 이렇다 할 불이익 없이 사학연금을 챙기게 됐다. 그가 받았던 불이익이라면 연세대에서 겨우 '정직 1개월'의 솜방망이 징계를 받았을 뿐이다. 아니 하나 더 있긴 하다. 정년퇴직 교수들에게 흔히 주어지는 '명예교수'란 직함을 받지 못했다.
퇴임을 바로 앞둔 2020년 6월 류석춘은 보수 우파의 주요 지지기반인 노년층을 상대로 '틀딱TV'라는 듣기 민망한 이름의 유튜브를 개설했다(무슨 까닭에 노년층을 비하하는 비속어로 이름 붙였는가는 본인의 자유의사이니 따질 필요는 없다). '틀딱TV'를 연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연세대 학생들 사이에선 "2차 가해를 하려는 것이냐"는 차가운 반응이 나왔다.
류석춘 지키기 나선 <반일 종족주의> '신친일파'
여기서 짚고 넘어갈 대목은 <반일 종족주의>를 공동 집필한 '신친일파'들이 류석춘을 옹호하고 나섰다는 점이다. 대표필자 이영훈은 자신의 유튜브 '이승만TV'에서 류석춘 망언 녹취록을 제보한 학생을 가리켜 '인생의 패배자'라 낙인찍었다. '연세대 학생들에게 전하는 강의'란 제목을 붙인 동영상 전반부에서 이영훈은 <반일 종족주의>에서 그가 펼쳤던 주장대로 "일본군 위안부는 공창제로 매춘의 일환이었다"고 주장했다. 이어 후반부엔 망언 녹취록 제보 학생을 가리켜 '1960년대 말 중국의 문화혁명 당시 대학생들이 모택동 어록을 흔들며 그들의 선생에게 고깔을 씌었던 홍위병'이나 다름없다고 비난했다.
이우연(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위원)도 나섰다. 그는 페이스북에서 "일본군 위안부는 성매매 종사자로 보아야하기 때문에 매춘부라고 표현한 것은 아무 문제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한 비판이 쏟아지자, 이우연은 바로 다음날 아래와 같은 명문(?)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위안부가 살아있는 신이냐. 위안부 대부분은 10대가 아니라 20~30대였다. 위안부가 생명의 위협을 받았다는 근거는 무엇이냐. 위안부는 하루에 6명 내외의 군인을 상대했을 뿐이다."
"뚫린 입이라고 막말을 하느냐?" 2004년 9월 MBC 100분 토론에서 이영훈이 '위안부' 관련 망언을 한 나흘 뒤 할머니들에게 사죄하러 갔을 때 들었던 말이다(본 연재 14회 참조). 흔히 "입은 비뚤어졌어도 말은 똑바로 하자"는 말이 그냥 나온 게 아닐 것이다. 하룻밤에 6명의 군인을 상대했을 뿐이라고? 만에 하나, 먼 친척이라도 누군가가 지난날 그 살벌했던 일제 강점기 시절에 '위안부'로 끌려가 성적 학대를 당했다고 상상해보면 어떨까. 바로 지난주 글에서 수전 손택의 생각을 함께 살펴봤듯이, '타인의 고통'이라고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는 일은 아닐 것이다.
이우연의 막말은 또 있다. 생명의 위협을 받았다는 근거는 무엇이냐고? 일본군에게 성노예가 되길 강요당한 '위안부'가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는 일화들은 '위안부' 할머니들이 남긴 증언 곳곳에 있다는 사실을 모르진 않을 것이다. 몰랐다면 이제라도 마음을 비우고 피해 당사자 할머니들의 마음을 헤아리며 읽어보라. 문옥주 할머니의 증언에서도 확인된다. 술에 취한 군인이 방에 들어와 빼든 칼에 죽을 뻔 했다가 겨우 위기를 넘겼던 일이 생생하게 기록돼 있다(여성가족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구술자료 재정리 자료집> 2016년, 415쪽 참조).
일본 극우 돈으로 국제회의 참석
2019년 7월2일 이우연은 또 하나의 망언 기록을 남겼다.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UN인권이사회에서 "일제 식민지 시기에 강제동원은 없었다"고 주장해, 소식을 들은 많은 한국인들의 분노를 자아냈다. 그 자리에서 이우연은 "조선인은 강제동원된 게 아니라 자발적으로 노무자가 됐다. 조선인 노무자들의 임금은 높았고, 전쟁 기간 자유롭고 편한 삶을 살았다"고 했다.
이우연이 어떻게 스위스로 가게 됐을까. 그 배후는 일본 극우파 슌이치 후지키다. 국제경력지원협회(ICSA)라는 수상쩍은 단체를 이끌고 있는 슌이치는 한국에도 그런대로 얼굴이 알려져 있다. 2019년 7월 한국에서도 상영된 '위안부' 관련 다큐멘터리 '주전장'(主戰場, 감독은 일본계 미국인인 미키 데자키)에서 듣기 민망한 망언을 서슴없이 내뱉었던 자다.
슌이치가 속한 ICSA는 국제사회에서 '위안부'의 실체를 부정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의심되는 극우 성향의 단체다. 슌이치는 2017년 9월에 열렸던 36차 UN인권이사회에서 "한국의 '위안부' 단체들이 북한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고, 그들이 위안부 문제를 제기하는 이유는 일본을 헐뜯고 돈을 요구하고, 한미일 공조에 균열을 내기 위해서다"라고 주장했다.
원래 이우연은 UN인권이사회 발언자 명단엔 없었다. 일본 극우 인사인 슌이치 후지키의 발언 순서에서 대신 나와 발언한 것으로 알려진다. 문제의 망언 한 달 뒤 한국 <와이티엔>(YTN)이 슌이치와 인터뷰한 바에 따르면, "이우연의 논문을 읽고 그 내용이 정확해서 그에게 유엔에 가지 않겠느냐 부탁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우연의 스위스 제네바 왕복 항공료와 5박6일 체류 비용을 댔다는 것이다. 강성현(성공회대, 역사사회학)교수는 제네바 국제회의장에서의 상황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그때 후지키 슌이치가 이우연의 양복 옷깃을 매만지고 먼지를 세심히 털어주자, 멋쩍은 듯 웃는 이우연의 모습은 한일 역사수정주의자들의 관계의 본질, 연대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강성현, <탈진실의 시대, 역사부정을 묻는다> 푸른역사, 2020, 45쪽).
사실 이우연이 제네바에서 했던 주장을 뜯어보면 새로운 것은 아니다. 늘 해오던 상투적인 망언에 지나지 않는다. 문제는 일본 극우 인물이 대는 돈을 받아 스위스로 가선 그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했다는 점이다. 그런 이우연을 두고 사람들은 이렇게 물어보기 마련이다. "당신은 한국인인가? 일본인인가?" 겉으론 '세계인' 또는 '자유인'인척 하는 신친일파에게 국적은 오히려 걸림돌로 거추장스럽게 여겨질까.
"조선 청년에게 일본은 하나의 '로망'이었다"
슌이치가 봤다는 이우연의 논문은 어떤 내용이길래 극우파인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을까. 시점으로 보면, 딱 바로 그 무렵에 출간된 <반일 종족주의>(미래사, 2009)에 실린 이우연의 글 세 편일 가능성이 크다. 글 제목을 '강제동원의 신화' '과연 강제노동 노예노동이었나' '조선인 임금차별의 허구성'으로 단 그의 주장의 요점은 제목에 나와 있는 그대로다.
이우연에 따르면, 일제 강점기에 있었다는 강제징용은 '허구'이며, '노예노동'도 아니었고, 조선인과 일본인 노무자 사이의 임금차별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 허구의 얘기들을 사실인양 다룬 한국 역사교과서는 '역사왜곡'을 저질렀다고 주장한다. 독자분들이 읽기 거북하더라도, 참고삼아 <반일 종족주의>에서 이우연이 펼친 주장(망언)을 옮겨본다.
[징용이 실시될 때도 많은 조선인이 브로커에게 고액을 주고 일본으로 밀항을 시도하였다. 당시 조선인 청년에게 일본은 하나의 '로망'이었다. 따라서 조선인 노무동원을 전체적으로 볼 때 기본적으로는 자발적이었고, 강제적인 것은 아니었다. 강제연행이었다고 말할 수 없다. 당시에는 강제연행이나 강제징용이라는 말조차 없었다](이영훈 외, <반일 종족주의> 미래사, 2009, 69-70쪽).
독자들의 인내심을 요구하는 이우연의 주장이 그야말로 허구라는 것은 본 연재 11~13('일제의 강제동원 무엇이 문제인가' 상·중·하)에서 이미 살펴봤다. 이우연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대한민국 대법원의 판결을 '황당한 판결'이라 비난했다. 2018년 10월 대법원에서 일본 전범기업 신일본제철이 피해자들에게 1억원의 위자료를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린 것을 두고 '명백한 역사왜곡에 의해 근거한 황당한 판결'이라 주장했다(69쪽). 인용문 가운데 '의해 근거한'이란 부분은 교정을 제대로 보지 못한 것으로 이해하고 넘어가면 되겠지만, 대법원의 판결을 비방하는 오만한 행태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몸으로 때우는 생계형 친일?
무엇을 믿고 저러는 걸까. 이우연의 뒤에는 그가 연구위원으로 몸 담고 있는 낙성대경제연구소의 '신친일파'들이 있지만, 더 뒤에는 말할 것 없이 일본 극우가 있다. 이우연은 앞서 살펴보았듯이 심약한 지식인인 류석춘과는 달리 행동파다. 한국의 '신친일파'들 대부분이 연구실에 앉아 컴퓨터를 만지작거리는 편이라면, 이우연은 몸으로 때우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일본대사관 앞에서 수요집회를 중단하라는 맞불집회를 열고 "소녀상을 철거하라!"며 목청을 높이곤 한다. 그런 시위를 벌이다가, 분노한 시민들의 욕설과 더불어 발길질을 당한 적도 있다.
이우연의 겉모습은 류석춘과 마찬가지로 책상물림처럼 보인다. 그런 이우연이 자주 현장에 나가 몸으로 때우는 배경을 두고 사람들은 궁금증을 품기 마련이다. '신친일파' 가운데 그가 유독 튀는 이유가 뭘까 하고 말이다. 대학교수를 비롯해 4대보험이 되고 퇴직금이 나오는 번듯한 직장을 가진 다른 '신친일파'들과는 달리, 이우연은 넉넉한 고정 수입원이 없는 것으로 알려진다. 그렇기 때문에 물불 가릴 여유가 남들보다는 적다는 얘기다.
일본 극우파들도 이우연의 그런 상황을 이용해 그들이 바라는 바를 얻어내 실리를 챙기려는 모습이다. 스위스로 그를 데려간 것도 그렇고, 일본 전역을 도는 순회 강연자로 초빙하는 등 접촉이 잦다. 역사학자 강만길(고려대 명예교수)은 <우리 역사를 의심한다>(서해문집, 2002)에서 친일파들이 생겨난 원인과 배경을 풀이하면서, 특히 일제 강점기 말기에 '직업적 친일'을 하는 자들이 급증했다고 한탄했었다. 21세기의 '직업적 친일' 또는 '생계형 친일'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인가.
윤창중, "사실은 제가 토착왜구입니다"
돌이켜 보면, 2020년 전후로 한국의 '신친일파'들은 매우 활동적인 모습을 보였다. <반일 종족주의> 판촉 행사들이 잇달아 열었다. 이우연이 스위스 제네바에서 문제의 망언을 내뱉은 바로 뒤인 2019년 7월18일 대구에선 <반일 종족주의> 북 콘서트가 열렸다. 마이크를 잡은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은 이렇게 말했다. "사실은 제가 토착왜구입니다."
윤창중이 누구인가. 박근혜 정부에서 첫 청와대 대변인이던 2013년 5월, 박대통령의 미국 첫 순방길에 워싱턴 호텔에서 인턴 여직원을 성추행해 물러나고도 지저분한 화제를 모았던 바로 그 사람 아닌가. 그런데 윤창중 그 자신이 토착왜구라니? 앞에서 살펴본 류석춘처럼 가벼운 입을 지닌 그가 그저 청중들을 웃기자고 한 얘기였을까. '농담 반, 진담 반'이란 우리말이 있지만, 이 경우가 딱 그런 것 같다. 자리가 <반일 종족주의> 북 콘서트였던 만큼, 농담 속에 그 자신의 속내를 불쑥 드러내 '같은 패거리'로 눈도장 찍으려는 마음이었으리라.
21세기 한국의 '신친일파'엔 류석춘, 이우연, 윤창중 말고도 여러 얼굴들이 떠오른다. 1992년 1월 8일부터 매주 수요일 구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려 올해로 31년을 넘긴 수요집회를 훼방 놓는 등, 길거리의 친일 돌격대 노릇을 하는 이들의 언행은 참으로 상스럽고 지저분하다. 2019년8월 한일관계가 불편해진 것을 문재인 정부 탓으로 돌리며 "아베 신조 수상님께 진심으로 사죄드린다"고도 했다. 소녀상 바로 옆에서 말이다.
지저분한 관련 내용들을 다루다 보니 글이 또 길어졌다. 다시 읽어보니 글이 덩달아 지저분해진 느낌이다. 독자들의 정신건강을 위할 겸 그 원고들을 털어내고 줄였다. 다음 글에선 △한·일 '역사전쟁'에 염치없이 끼어든 미국인 친일파 하버드대 교수의 망언, △일본 기업으로부터 거액의 연구자금을 받고 일본인과 연구주제를 함께 '구상'(構想)했다는 '신친일파'의 문제점 △사과와 망언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일본 정치권에 대해 독자들과 함께 살펴보려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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