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역사상 이런 3·1절 기념사는 없었다."
윤석열 대통령의 제104주년 3·1절 기념사를 접한 많은 사람들이 쏟아낸 탄식이다. 윤 대통령은 "지금 일본은 과거의 군국주의 침략자에서 우리와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고 안보와 경제, 글로벌 어젠다에서 협력하는 협력 파트너로 변했다"면서 "복합 위기와 심각한 북핵 위협 등 안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한미일 간의 협력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고 말했다.
미래에 압도된 나머지 윤 대통령의 기념사에선 진보와 보수를 초월해 역대 대통령들이 과거사에 대한 일본의 반성과 사과를 촉구한 구절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한마디로 '과거는 묻지 말고 미래로 가자'는 취지이다.
문제는 제대로 된 과거사 청산 없이 과연 미래지향적인 한일관계가 만들어질 수 있느냐에 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기에 국민들의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한일관계 강화를 추진했다가 역풍을 맞은 경우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는 조언을 윤 정부는 무시로 일관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를 덮고 그려나가겠다는 한일, 혹은 한미일 관계의 미래 역시 크나큰 문제를 잉태하고 있다. 바람직한 한일관계의 미래는 한국과 일본이 태평양 건너에 있는 미국의 동맹국들이면서도 지정학적·지경학적으로 동아시아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위치에 있다는 자각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
이러한 자각은 어렵고 더디더라도, 한일이 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꾸준히 추진하고 미국과 중국의 경쟁에 충돌로 비화되지 않도록 완충과 가교 역할을 해야 한다는 과제로 연결된다. 한반도나 대만, 혹은 두 곳 모두에서 전쟁이 발발하면 가장 큰 피해를 입을 나라는 한일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한일 정부의 선택은 미국 주류의 전략에 완전히 포섭되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미국 주류는 적극적인 협상을 통해 북핵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이를 이용해 한미일 군사협력을 강화하는 데에 맞춰져왔다. 그 본질적인 목표는 중국을 포위·억제·봉쇄하는 데에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미국은 이에 더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삼아 미국의 아시아 동맹체와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를 연결하는 데에 몰두하고 있다. 이로 인해 냉전시대에도 찾아보기 힘들었던 '태평양-대서양 동맹 네트워크'가 부상하고 있다.
필자가 지난주 <한겨레>에 쓴 것처럼, 미국이 동맹·우방국들을 향해 요구하는 것은 '미국의 이익에 복무하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의 이익의 핵심은 바이든 행정부가 외교정책의 핵심 목표로 내세운 "미국 중산층의 재건"이다.
이를 위해 바이든 행정부는 중산층 재건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반도체, 배터리, 전기차 등을 미국에서 생산하라고 동맹국들을 회유·압박하고 있다. 경쟁자인 중국에 투자하면 불이익을 주겠다는 엄포도 숨기지 않고 있다. 안보는 같이 지키고 경제는 미국부터 챙기겠다는 것이 이른바 미국의 '경제안보론'의 핵심 기조인 것이다.
하여 묻지 않을 수 없다. 윤 정부가 과거를 덮고 가겠다는 한미일의 미래 속에 과연 희망의 근거는 있는가? 무역적자를 비롯한 경기침체가 본격화되면서 '잃어버린 30년'을 경험해온 일본의 전철을 밟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를 기우로 만들 수 있는 정책과 비전은 있는가? 윤 정부 출범이후 한미일 군사협력은 크게 강화되고 있는 왜 많은 사람들은 갈수록 안보불안을 호소하고 있는지 생각해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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