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새 정부가 출범한지 8개월이 되었다. 10년, 20년 집권을 이어가겠다던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정부의 수명은 5년을 넘지 못했다. 새 정부가 내놓은 국정과제만 놓고 보면 최소한 노동정책과 산업정책은 문재인 정부 후반기 정책을 거의 계승하고 있다.
"윤석열 정부 국정과제가 문재인의 그것과 비슷하다니 그런 황당한 얘기가 어디 있나?" 하지만 두 정부의 국정과제 문서자료만을 나란히 놓고 비교하면 실제로 싱크로율은 90%가 넘는다. 5년 전 자료를 그대로 가져다 베낀 게 아닐까 의심될 정도이니 말이다.
새로울 것이 없는 대안들
이런 일이 왜 벌어진 것일까? 촛불 정부 흔적이 거의 사라진 문재인 정부의 정책을 새 정부가 바꿔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것일 수도 있지만, 이미 낡아버린 과거의 프레임을 대체할 새로운 정책을 제시할 역량이 부족했던 탓이 크다.
그래서 윤석열 정부 인수위는 새 정부 국정과제를 수립하는 과정에 기존 정부에서 업무를 맡아 왔던 공무원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문재인 정부 정책의 흔적이 강하게 묻어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국정과제 속의 내용은 활자 속에 있는 것일 뿐, 현실에서 벌어진 일은 많이 달랐다. 정확히 말하면 윤석열 정부는 작년 11월 즈음부터 본격적으로 다른 행보를 걷기 시작했다. 문재인 정부 흔적 지우기, 아니 어쩌면 문재인 정부와 반대로 가기를 시전하는 것으로 보인다.
6월 1차 파업에 이어 11월에 시작된 화물연대의 안전운임제 쟁취를 위한 2차 파업을 힘으로 제압하는 과정에서 윤석열 정부는 국정지지율 상승이라는 꿈에도 그리던 것을 얻어낸 것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낡은 프레임을 대체할 새로운 대안을 내놓지는 못하고 있다.
숙명여대 권순원 교수가 좌장을 맡은 '미래노동시장연구회'가 몇 달 동안 세미나를 한 뒤 내놓은 대안이라곤 고작 노동시간을 어떻게든 늘려보겠다는 것, 임금체계에서 성과급제를 도입하겠다는 것으로 이미 기존 정권에서 한번쯤 내놓았거나 검토했던, 새로울 것이 하나도 없는 정책들이었다.
5~6년 사이 격변을 겪은 지구촌
윤석열 정부가 내놓은 정책은 실패가 예정되어 있는 대안이다. 우선 '미래노동시장'의 핵심이라 할 젊은 세대들이 호응하지 않는다. 청년 노동자들은 노동시간을 연장해서, 그러니까 자기 몸을 갈아서 임금소득을 늘리는 방식을 선호하지 않는다. 오히려 현재 퇴직을 앞둔 베이비붐 세대에 익숙한, 낡고도 낡은 방식이며 더 이상 작동 가능하지 않다.
문재인 정부 출범부터 불과 5~6년 지난 것에 불과하지만 그 사이에 많은 것이 변화했다. 5~6년 전만 해도 '정규직 전환'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라는 말이 상당수 비정규직의 마음을 설레게 했지만, 그 사이 엄청난 속도로 증가한 플랫폼 노동에게 '정규직 전환'이란 완전히 낯선 슬로건이다.
기후위기가 산업의 전환을 추동하거나 가속시키는 요인이 되며, 산업전환 과정에서 일자리와 노동조건의 엄청난 격변을 불러올 수 있다는 것도 비교적 최근에 알게 된 얘기이다. 코로나19 팬데믹을 겪으며 '사회적 거리두기' '봉쇄(Lock-down)'라는 상황에서 산업과 경제활동의 격변을 겪기도 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전쟁과 하이퍼 인플레이션은, 그렇지 않아도 팬데믹으로 시작된 공급망(Supply Chain) 위기를 더 극한으로 몰아붙였다. 그 결과 지난 수십년간 지속된 저성장·저물가·저이자율의 시대가 저물고 고물가·고이자율 시대를 열어버렸다. 더 큰 문제는 앞으로의 경제상황이 점점 더 예측불가능한 지경으로 빠져들고 있다는 점이다.
낡은 것은 수명을 다했는데
당연히 노동과 일자리 문제도 엄청난 격변을 겪었으며 지금도 급변하고 있다. 앞서 얘기한 것처럼 비정규직 문제의 경우 '정규직 전환'만이 아니라 '온전한 노동기본권 보장과 확장'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시대로 진입하는 중이다.
이를테면 코로나19 팬데믹 시기 '필수노동자'로 분류되며 재조명된 이들 중 배달·배송·모빌리티·간병 노동자들 대부분이 특수고용 또는 플랫폼 노동자들이었다. 노조를 결성해 노동조건 개선을 위해 싸우고 있긴 하지만, 자본가들은 이들의 노동자성을 부정하고 정부는 노동기본권은 물론이고 산재보험·고용보험 등 안전망에서까지 배제시켜왔다.
하지만 이들의 노동과 헌신 없이는 팬데믹을 버텨낼 수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지자, 정부는 서둘러 이들의 산재보험·고용보험 가입을 추진할 수밖에 없었다. 보험료 산정을 위해 실소득 파악을 위한 시스템이 중요해지자, 그동안 한사코 나서려 하지 않았던 국세청까지 동원해 세금과 보험료 부과 체계를 만들어냈다.
노동자와 사용자가 1대1 대응이 되어야만 노동법 적용이 가능하다는 '전속성' 논리 역시 완전히 낡은 것이 되어 박물관 전시 대기순번을 받은 상태이다. 우선 투 잡, 쓰리 잡에다 'N잡러'라는 단어까지 만들어지는 시대에 책임지는 사용자가 하나 이상일 수 있다는 것은 상식이다.
최근 급증하는 플랫폼노동으로 오면 문제가 더 심각해진다. 배달의민족·쿠팡이츠·요기요 등 여러 개의 플랫폼을 이용해야만 최소 생계비를 벌 수 있는 라이더들, 다수의 업체로부터 콜을 받아야 하는 대리운전 기사들에게 1대1 대응이라는 '전속성'을 요구하는 것은 완벽한 난센스 아닌가.
새로운 프레임은 여전히 미완성
윤석열 대통령이 당선되고 인수위가 가동되던 시절, 배달하다가 죽고 다치는데도 산재보험법의 '전속성 기준' 때문에 보상을 받지 못하는 사고가 이어지자 라이더유니온을 비롯한 플랫폼 노동자들의 투쟁이 전개되었다. 거짓말처럼 인수위와 여당이 적극적으로 나섰고, 2~3개월 만에 산재보험 전속성 기준 조항 폐지가 국회 문턱을 넘는 일이 벌어졌다.
많은 이들의 뇌리에 강하게 박힌 사건은 아니었지만, 이 법 개정은 윤석열 대통령 취임 이후 벌어진 첫 번째 노동법 개정으로 기록되었다. 올해 7월 1일부터 전속성 기준이 폐지되면 특수고용과 플랫폼노동을 합한 산재보험 가입자 규모는 무려 100만이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사소한 법조항 하나 개정한 것으로 치부할 수 없는 상당한 변화를 몰고 올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갈 길은 멀다. 이것은 산재보험 가입 자격에 대한 조건일 뿐, 고용보험이나 다른 노동기본권에까지 적용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투 잡, 쓰리 잡을 뛰는 노동자가 한 곳의 일자리에서 해고되면 구직급여를 받을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한국은 이런 종류의 '부분 실업'을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곳에서 과거의 프레임이 얼마나 낡았는지 다시 폭로된다. 한국은 부분 실업만 인정하지 않는 게 아니라 실업자로 인정받는 것 자체가 힘들다. 지난 4주 동안 적극적으로 구직활동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일자리를 얻지 못한 경우에만 실업자로 인정되어 구직급여 수급자격이 부여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계에서 한국만 유일하게 '실업보험(Unemployment Insurance)'이 아니라 '고용보험(Employment Insurance)'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실업자로 인정받았다 하더라도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실업급여'가 아니라 '구직급여'를 지급하는 곳이 이곳 대한민국 아닌가.
1주일에 1시간 이상만 일해도 취업자로 분류되며, 구직활동을 하지 않는 취업준비생과 고시생들은 모조리 실업자에서 제외된다. 만일 유럽의 실업률 계산 기준을 따를 경우 두 자릿수로 치솟아올라야 마땅할 한국의 공식 실업률이 여전히 3~4%대에 머물러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런 낡은 프레임 역시 도대체 어디에서 쓸모를 찾을 수 있을까.
100년 역사의 ILO 협약을 뒤늦게 비준해 추가된 글로벌 스탠다드가 한국 현실에 어떻게 적용될 것인지, OECD 최악의 산재사망율 오명을 갓 태어난 중대재해법이 씻어줄 수 있을 것인지도 관심거리다. 5~6년 전만 해도 없었던 이들 제도가, 코로나19와 전쟁·인플레이션이라는 격변의 시기를 거치며 어떻게 작동될 것인가.
노동자운동의 핵심도 바뀌었다
다시 강조하지만 윤석열 정부의 미래노동시장연구회는 번지수를 완전히 잘못 찾았다. 온통 노동시간과 임금체계 얘기만 늘어놓았는데, 청년 노동자들이 많이 포진한 플랫폼·특수고용 부문에서 대체 노동시간은 무엇이고 임금체계란 무엇이란 말인가.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쉴 권리(휴식권)'와 '적정임금 보장'인데 연구회 발표문 어디에서도 이런 단어를 찾아볼 수 없다.
연구회가 내놓은 대안은 오로지 조직된 노동자운동을 약화시키고 파괴하기 위한 목적에 맞춰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또한 넌센스가 아닐 수 없다. 이들이 중심적으로 다루는 조직노동자운동은 노동시간·임금체계와 같은 개념들이 정상적으로 계측 가능한 부문, 이를테면 철도·지하철이나 현대차·대우조선과 같은 공공부문과 대기업 정규직의 얘기이다.
하지만 지난해 '노동'과 관련해 세상의 눈과 귀를 가장 집중시킨 사건들은 무엇이었나? 누구나 화물연대의 안전운임제 투쟁과 대우조선 하청노동자 투쟁을 얘기할 것이다. 여기에 산재보험 전속성 기준을 폐지시켰던 라이더와 대리기사 등 플랫폼 노동자들을 보태면, 이들 모두 연구회가 강조하는 노동시간·임금체계 따위가 정상적으로 작동되는 부문과는 거리가 멀지 않은가.
위기의 시대, 누가 새로운 틀을 짤 것인가
이탈리아의 혁명가 안토니오 그람시는 "낡은 것은 죽어가고 있는데 새로운 것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상태"를 위기(Crisis)로 정의한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윤석열 정부 5년의 기간은 노동정책도, 그리고 노동도 모두 위기 국면을 겪을 수밖에 없다.
노동시간과 임금체계가 심하게 요동치기 시작할 것이다. 고용보험·산재보험을 비롯한 사회보험의 작동 원리도 변화할 것이며, 따라서 노동자들의 운동도 달라지고 노사관계를 비롯한 모든 관계들의 격변이 따라올 것이다. 미래노동시장연구회가 그런 대안을 내놓아서가 아니라, 낡은 것을 대체할 새로운 틀이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위기는 결국 새로운 것을 잉태하기 위한 고통의 시간인 바, 이 위기를 어떻게 살아내느냐에 따라 새로운 시대의 내용과 주인공이 달라지게 될 것이다. 새로운 틀을 짜낼 역량을 가진 세력이 향후 몇십년 간의 노동 관련 쟁점을 주도하게 될 것이다.
2023년 <인사이드경제>는 이렇게 '낡은 틀에 갇힌 새로운 노동' 그리고 이 노동을 담아낼 '새로운 틀'에 대한 일련의 시리즈를 시작할 예정이다. <인사이드경제>는 해답을 갖고 있냐고? 그런 걸 갖고 있었다면 한가하게 글이나 쓰고 있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부딪혀볼 생각이다. 어설픈 답이나마 내어놓고 독자들에게 호된 꾸지람 받아가면서 토론을 하다보면, 최소한 정답에 가까운 오답에는 이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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