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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산악열차를 타러 와서도 지리산의 건강을 바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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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산악열차를 타러 와서도 지리산의 건강을 바랄 거예요"

[기고] 김혜련 외 <벗자 편지>

지난달, 창고에서 뭉그적거리며 캠핑 텐트를 꺼내었다. 그리고 따뜻한 구들방 아랫목에 앉아 잠깐 생각했다. '아… 내일 아프다고 빠질까?'라고.

그 내일은 바로 남원시의회 앞에서 하는 캠핑 밤샘 농성이 있는 날이었다. 내일은 이 따뜻한 아랫목을 떠나서 시청 앞에서 잠을 자야 한다니. 이 가혹한 일을 누가 하자고 했냐면 바로 나였다.

아침마다 자루 하나를 들고 길을 나선다. 집 뒤편에 이어진 지리산 둘레길을 걸으며 마른 나뭇가지를 가득 주워 담는다. 밥을 짓고 방을 데울 땔감이다.

지리산의 아침은 황홀하다. 게으름을 피우다 해가 뜬 후에 나서면 안개를 놓치고 만다. 나는 새벽안개가 미처 떠나지 않은 이른 시간이 좋다. 신은 아침 안개의 얼굴을 했다던 릴케의 시구절이 떠오른다. 굽이굽이 쌓인 산 사이로 매끄러운 안개가 헤엄쳐 오른다. 오늘도 떠오를 태양을 맞이하며, 하얀 카펫의 주름을 솜씨 좋게 다듬는 손길처럼 보인다.

나는 내 일상이 좋다. 하루도 거르고 싶지 않다. 하루라도 집을 떠나면 다음 날은 하루치 밀린 살림이 약간의 균형을 깨뜨린다. 아침 안개를 보러 서두르는 발걸음, 슬렁슬렁 장작을 줍는 산책길, 구들 앞에 쪼그려 앉아 불을 피우고, 구들장을 오븐 삼아 냄비를 넣고 밥을 짓는… 그리고 테라스에 앉아 햇살로 몸을 데우며 뜨끈한 밥을 먹는 일상.

내 일상은 아침 산책길에서 만나는 지리산 존재들의 고고한 일상 없이는 돌아가지 않는다. 잠시 아픈 척할까 망설이긴 했어도, 아랫목의 유혹을 이겨내고 밤샘 농성에 간 이유도 아마 이것일 테다. 내 일상을 지키려면 누굴 지켜야 하는지 안다.

2년 전부터 오가던 케케묵은 남원시 산악열차 사업은 올해 가속화됐다. '지리산 산악열차 반대 남원대책위'의 매주 집회도 2년이 되었다. 남원시와 철도기술연구원이 협약 예정인 이 사업은 계획서부터 문제가 많았다. 열차 인근 주민이 한 명도 빠짐없이 하루에 한 번 이상 열차를 탄다고 경제성 평가의 편익을 부풀리지를 않나, 자연공원법을 피하려 어색하게 꼼수를 부린 결과 열차는 설계 변경도 없이 정원이 고무줄처럼 늘었다가 줄었다. 지리산의 생물 다양성과 서식지 파괴는 말할 것도 없었다.

남원시의회에서 이 사업안을 본회의 안건으로 올렸고, 본회의에서 이 안건이 가결되면 이제 남원시의 손을 떠나고 만다. 남원시를 비롯한 다른 지리산권 시군구의 사람을 모아 본회의 전날 밤샘 농성을 열었다. 어떻게든 가결을 막아야 했다.

텐트 예닐곱 개가 시청 앞을 지킨 다음 날, 활동가들은 본회의장에 들어서려 했지만, 청원경찰에 의해 저지되었다. 그날의 장면이 선명하다. 좁은 계단에 활동가와 경찰들이 스크램블 된 모양. 마구 뒤엉켜서 누구 한 명 계단 아래로 굴러 떨어지지나 않을까 아래서 사람들이 발을 동동 구르고, 계단 위에 엉킨 사람들은 서로 짓눌려 비명을 지르는 광경. 활동가들은 의원 이름을 외치며 당장 나오라고 아우성치었다.

본회의에서 만장일치로 안건이 가결된 것이다.

뒤늦게 얼굴을 비춘 의원들과의 면담에서 두 볼이 불도록 울다 나왔다. 며칠 후 팔과 다리에 퍼런 멍이 든 친구들의 근황을 접하며 눈알을 댕그르르 굴렸다. 다시 따뜻한 구들방 아랫목으로 돌아오긴 했는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막막했다.

남원시청 앞에서 캠핑은 우아한 편이었다. 이제 정말 산악열차 예정지인 정령치 도로에 나가서 드러눕거나, 나무 위에서 며칠을 버티다 핼쑥해질 나를 상상했다.

그리고? 그러고도 막지 못한다면?

결국 내가 올라탄 나무도 베어지고, 요란하게 몇 달에 걸쳐 공사가 진행되고, 야생동물들의 귀가 멀고, 스트레스를 받은 나무들이 다음 해 열매를 못 맺고, 매일 그 위로 강철톱니 기어가 관광객을 실어 나르는 장면들이 머릿속에 스쳐갔다…

그뿐일까? 국립공원 1호인 지리산에 그런 산악열차가 놓인다면 앞으로 다른 지역의 산들은 어떻게 되려나? 우후죽순 개발이 퍼져, 모든 산꼭대기마다 허옇게 맨살이 드러난 모습을 상상하기까지 이르렀다. 그날의 여파는 한 마디로 '상심'이었다.

'며칠 더 농성할 걸….' 후회를 반복했다. 뭘 훔쳐먹은 사람처럼 메스껍더니, 이튿날 새벽엔 벌떡 일어나 여러 차례 구토했다.

그날 이후로 산악열차는 일상을 침범했다. 꼭 마음속에 멈추지 않는 열차 한 대가 폭주하는 것 같았다. 기쁘게 장작을 줍고, 구들을 떼던 일들은 '후딱' 해치울 수 없는 번거로운 노동이 됐다. 밥 해 먹기가 손이 많이 가니 그냥 가스 불을 켜고 싶었다. 기계처럼 국토교통부에 민원을 넣고, 웹자보를 만들어 배포하기만도 눈코 뜰 새가 없었다.

일상이 차츰 무너지는 와중에 주위 사람들한테 자꾸 짜증이 나고, 괜히 울고 싶은데 눈물은 안 났다. 뭐랄까… 혼자 싸우는 기분. 누군가에게 응답을 못 받고 계속 기다리기만 하는 기분. 텅 빈 우체통을 내내 들여다보는 것처럼. 혼자 기다리다, 길길이 날뛰다, 초연해져서 획 뒤돌아갔다가도, 엉엉 울면서 다시 돌아오는 이상한 드라마. 그 드라마 속에서 미처 문장이 되지 못한 이런 단어들을 내레이션처럼 읊조렸다. 죄책감. 좌절감. 무력감. 두려움… 지켜야 할 것들을 지키지 못할 것 같은 마음.

▲ <벗자편지>(김혜련·똥폼·문홍현경·상이·풀·아랑·칩코·김정희 지음, 니은기역 펴냄) ⓒ니은기역

▲ <벗자편지>(김혜련·똥폼·문홍현경·상이·풀·아랑·칩코·김정희 지음, 니은기역 펴냄) ⓒ니은기역

그러다가 편지가 온 것이다. 그 텅 빈 우체통에 말이다. 여덟 명의 여성 농부들의 편지를 엮은 책이었다.

사실 어이없게도 나 역시 공동 저자여서 무슨 책인지는 잘 알았다. 책이 당장 내일 인쇄 예정이니 마지막으로 최종원고를 확인해달라는 편집자의 메일이었다. 내 원고는 질리도록 읽어서 또 확인하는 건 미루고 싶었다. 메일을 못 본 체하다가, 나흘 뒤쯤 무슨 바람이 든 건지 다른 농부들의 편지가 궁금해졌다.

책 제목은 <벗자 편지>(니은기역출판사 펴냄)이다. 일상의 감각을 밀어내고 소비로 채우려 하는, 자본주의의 허울을 '벗자'는 의미였다. "나를 둘러싼 가장 가까운 것을 지키는 일은 왜 하찮아 보일까? 일상에서가 아니라면, 대체 우리는 무엇에서 더 높은 가치를 찾아야 하는 걸까?"라는 물음으로 글은 시작했다.

다른 농부들의 글을 읽으면서 나는 이게 편지였다는 걸 새삼 실감한 것이다. 하필 내가 우체통을 들여다보는 이 시기에 최종원고가 나온 우연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그 편지들의 수신인이 오직 나 하나인 양, 천천히 소중하게 글을 읽어 내려갔다.

한 농부가 물었다. 무언가를 하기 위해서 밥을 먹는 게 아니라, 밥 먹는 것 자체만을 목적으로 둔 적이 있느냐고. 우린 건강한 몸을 원하지만, 그 건강한 몸으로 보통 다른 무언가를 하기 위한 수단으로 그를 필요로 할 뿐, 건강한 몸 자체를 목적으로 두지 않는다면서. 밥을 먹을 때, 네가 먹는 생명의 몸을 느끼면서 오롯이 밥만 먹어보라고 했다.

나는 문득 그 문장에서 황홀한 아침 산책길의 향수를 느꼈다. 고구마를 입에 욱여넣으며 웹자보를 만들다가 멈추었다. 고구마의 몸을 느끼고 감사하면서, 또 생명을 내어준 고구마에 깊이 감사하면서 '먹기'만 집중하고 싶어졌다.

내가 기를 쓰고 산악열차를 막는 이유는 일상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그렇다면 반대로 내가 무너졌을 때 나를 지키는 것 역시 일상이라는 걸 왜 몰랐을까? 일상을 충실하게 살아가기. 밥을 해치우듯 먹고 다른 일을 찾을 게 아니라, '밥 먹기'가 곧 '살아가기'라는 걸 깨닫기.

지리산 산악열차를 타고 싶은 사람들도 결국 나와 같은 걸 원하지 않을까? 그들이 정말 원하는 건 지리산을 손쉽게 구경하고 넘치는 사진첩에 기억을 쌓아두는 일이 아닐 테다. 지리산의 싱그러움과 건강함 자체, 활력이 넘치는 지리산의 일상 그 자체일 테다. 눈을 감으면 분명히 느껴질 것이다. 건강한 지리산을 소비의 수단으로만 여길 게 아니라, 지리산의 건강함 자체를 응원하는 마음이, 지리산을 떠나고도 지리산이 내내 그 모습을 유지하길 바라는 마음이 분명 있을 것이다.

남원시를 떠난 산악열차 사업안은, 다량 민원에 못 이긴 국토교통부에 의해 보류되었다는 소식을 전해야겠다. 다행히 내가 아직 정령치 도로 위에서 잠을 자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내 일상도 조금씩 회복 중이다. 밥 먹을 때 일 생각이 나면, 다시 밥으로 돌아오려 한다. 온전히 그 생명과 하나 되는 일이 나를 다시 일으켜주리라 믿으면서.

일상이 무너진 누군가의 우체통에도, 이들의 편지가 때늦지 않게 닿길 바란다.

* 이 글은 웹진 <나비>의 '기후@나비'에 동시 게재됩니다.(☞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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