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를 제대하고 나서도 제대로 국방의 의무를 수행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었습니다." (1980년대 야학연합회 사건으로 연행 및 강제징집 당했던 박제호 씨)
"저뿐만 아니라 녹화공작을 당했던 대부분의 사람에게 그 일은 자랑스러운 기억이 아니라 부끄럽고 아픈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1980년 강제징집된 후 83년 보안사에 강제로 연행된 권형택 씨)
2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가 군사정권 시기 자행된 강제징집 및 프락치 강요 공작 사건이 "국가 공권력에 의한 중대한 인권침해 사건"이라고 결론 내렸다. 또한 2020년 12월부터 2022년 7월4일까지 진상규명을 신청한 대상자 중 187명을 중대한 인권침해를 당한 피해자로 인정했다.
진실화해위는 23일 서울시 중구 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이 같이 밝혔다. 기자회견에 참석한 '프락치 강요 사건' 피해자 9명은 1971년 위수령부터 1989년 10월까지 정부가 소위 운동권 학생들을 강제로 징집하고 고문·협박 등을 통해 '프락치'(정보망원)로 활용한 과거 기억을 떠올리며 울분을 토했다.
"친구·동지에 대한 배신"을 강요받아온 피해자들은 30년이 넘는 시간이 넘어서야 국가폭력 '피해자'라는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동안 강제징집, 프락치 사건에 대한 조사는 5공 특위 청문회,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등에서 진행되었으나 개인별 피해 사례를 조사해 인정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또한 이번 조사에서 진실화해위는 5공화국 당시 국군보안사령부(보안사, 현 국군방첩사령부)가 작성한 개인별 존안자료 2417건을 확보해 강제징집 및 녹화·선도 공작 관련자 2921명을 처음으로 확인했다. 이는 기존 확인된 것보다 훨씬 큰 규모다.
강제징집은 정부기관이 조직적으로 참여한 '집단수용'
진실화해위는 박정희 정권에서는 1971년 위수령 발동 이후 "대학생들이 집단으로 강제징집을 당했다"라며 "입대 후 강제징집된 대학생들의 병적기록표에는 ASP(Anti-government Student Power, 반정부학생세력)라는 표식을 붙여 일반 병사들과 따로 분류해 집중 감시"한 사실을 확인했다고 전했다.
또한 5공화국 시기 집중적으로 이뤄진 강제징집은 "국방부-내무부-병무청-법무부-문교부-대학 등이 총동원된 조직적 합작품"이라고 진실화해위는 밝혔다. 국가기관들이 조직적으로 헌법과 법률을 어겨가며 대학생들을 "집단수용했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진실화해위에 따르면, 5공화국 시기 내무부는 대학 재학생 중 '소요관련자' 전원을 입영대상으로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국방부는 소요관련 대학생 특별조치 방침을 정해 강제징집을 지시했다. 국방부는 이 과정에서 병역법에서 정한 '징병종결처분' 없이 강제징집을 지시하는 직권남용을 저지르기도 했다고 진실화해위는 지적했다.
진실화해위 관계자는 "5공화국은 수형생활을 6개월 이상 하게 되면 현역병 입영 대상에서 제외했는데, (강제징집 대상자는) 별도로 지침을 만들어서 다시 현역병으로 입영시켰다"라며 "3년 형을 선고받은 피해자가 형을 살고 나와도 다시 3년간 군 생활을 하는 등 총 6년간 사회와 격리한 것"이라고 말했다.
경찰은 입영대상자의 신병을 체포 등을 통해 확보했고, 병무청에 입영대상자 및 예정시기를 통보했다. 대검찰청 또한 '학원사범 처리기준'을 지방검찰청과 지청에 내려보내는 등 강제징집에 참여했다.
진실화해위는 체포 및 강제징집의 근거인 위수령(1971년)과 대통령 긴급조치 9호(1975년), 계엄포고령 10호(1980년) 등은 모두 위헌, 위법이며 강제징집 과정에서 자행된 불법 체포 및 감금 등도 모두 불법 행위라고 판단했다.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수 있다'라는 말에 "전향자"로 낙인찍힌 피해자들
보안사는 강제징집 이후에도 피해자들을 대상으로 전향을 강요하고 양심에 반하는 프락치 활동을 강요했다고 진실화해위는 발표했다.
특히 '녹화공작'을 추진했던 보안사 심사과가 의문사 논란 등으로 폐지된 이후에도 1987년까지 '선도업무'라는 명칭으로 공작을 지속했다는 사실이 이번 조사결과 밝혀졌다.
진실화해위는 보안사 문건을 통해 과거 정부가 1989년 10월 입대자까지 관리했음을 확인했으며 이는 "프락치 강요 공작이 첫 직선제로 출범한 노태우 정권 시기인 1990년까지 이어진 것으로 드러난 것"이라고 지적했다.
녹화공작이란 보안사가 대학생들을 군에 강제 징집한 뒤 시위계획 첩보 등을 수집하도록 강요한 일을 말한다. 복무 중은 물론 전역 이후에도 프락치 공작은 지속되었다. 보안사는 '근원발굴'이라는 명목으로 강제 전향자를 학원·노동·종교 분야에 침투시켜 정보수집 활동을 지시했다.
피해자들은 강제징집 이후에도 보안사 분실에 끌려가 불법체포, 구금, 폭력 등의 피해를 입었다. 진실화해위는 조사과정에서 피해자가 "여기 온 지 아무도 모른다,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수 있다"라는 말에 "공포에 떨었고 전향하지 않을 수 없었다"라고 진술했다고 전했다.
진실화해위에 따르면 피해자 황모 씨는 "대공분실에 끌려가 모른다고 할 때마다 벽에 있는 핀침을 빼내 손톱 밑을 찔렀다"라며 "지금은 트라우마로 손톱과 발톱을 짧게 깍지 못하고, 바늘만 봐도 고통스럽다"라고 진술했다.
고문 등을 당한 피해자들은 소속 대학에 침투 공작을 강요받았으며, 학교서클 동향과 지하서클 연계조직을 파악해 보안사에 보고했다. 진실화해위는 이는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고 친구와 동료, 선후배를 배반하도록 강요하는 반인권적인 일이 국가공권력에 의해 벌어진 것"이라고 다시 한번 확인했다.
'밀정' 논란 김순호 경찰국장 보안사 자료 존재 확인...다음주 조사 여부 결정
진실화해위는 이번에 확보한 보안사 존안자료 문건을 통해 2388명의 녹화공작 대상자 명단을 확보했다. 명단에는 박래군 인권재단 사람 상임이사, 유시민 전 노무현재단 이사장 등 저명인사를 포함해 윤영찬, 기동민 등 현역의원도 포함됐다.
'밀정' 논란이 제기된 김순호 행정안전부 경찰국장 또한 보안사 존안자료 문건에서 확인된다고 진실화해위 정근식 위원장은 말했다. 김순호 국장은 1980년대 인천부천민주노동자회(인노회) 동료들을 밀고한 대가로 대공특채로 경찰에 들어갔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김 국장은 본인도 '녹화공작'의 피해자였다며 지난 8월 30일 진실화해위에 진실규명신청서를 제출했다.
다만 김순호 국장과 진실화해위 차원의 조사에 대해서는 "(이 사건은) 피해자였다가 가해자가 될 수 있어 (조사는) 굉장히 어려운 숙제"라며 "다음주 중으로 진실화해위 차원의 조사 결정을 내릴 것"이라고 정근식 위원장은 말했다. 진실화해위는 신청서 접수 90일 이내에 조사개시 또는 각하 결정을 내려야 한다.
15년 전, 사과하지 않은 정부 이번에는 사과할까
진실화해위는 국가(국방부, 행정안전부, 교육부, 병무청)가 피해자에게 사과하고, 재발 방지책으로 병역법 등을 개정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또한 "프락치 강요 공작으로 인한 피해자들은 국가의 위법한 공권력에 의해 불법구금, 사찰 강요 등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라며 "정부가 피해자에게 사과하고 경제적, 사회적 피해에 대한 회복조치를 취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더 나아가 진실화해위 조사활동 종료 후에도 개인별 피해 사실을 규명할 조사기구 설치, 피해자 명예회복 및 배·보상 특별법 제정이 필요하다고 국방부에 권고했다. 더불어 피해자들에 대한 신체적·정신적 고통 치유를 위한 '의료 접근권'을 강화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실제로 기자회견에 참석한 피해자들은 여전히 정신과 진료 등 치료를 받고 있다고 전했다.
한국외대 81학번으로 입학해 1984년 보안대로 강제로 끌려간 서지석 씨는 "군대에 가서 의문사하는 학생들이 많았고 '요구한 대로 적지 않으면 죽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너무 무서웠다"라며 "40년이 지나도 정신과에 가고 있다. 우리 같은 피해자들 중 정신과 치료를 받는 사람이 너무 많다"라고 말했다.
다만 정부는 과거 2007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가 정부 사과 방안을 마련할 것을 제안했지만 사과하지 않았다. 정근식 위원장은 "국방부, 행정안전부, 경찰청, 교육부, 병무청 등 국가는 피해자들에게 공식적으로 사과해야 한다"라고 이날 기자회견 중 여러차례 강조했다.
진실규명 신청은 올해 12월 9일까지다. 진실화해위와 17개 시청·도청과 시청·군청·구청, 재외공관에서 우편이나 방문접수가 가능하다. 이번 1차 발표 이후로도 진실화해위는 강제징집, '프락치' 강요 사건에 대한 조사를 지속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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