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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 놀이터'를 만드는 사람의 황홀한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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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 놀이터'를 만드는 사람의 황홀한 고백

[프레시안 books] 주은경의 <어른에게도 놀이터가 필요하다>

참여연대 1호 정년퇴직자로 2년 전 참여연대 아카데미느티나무 원장으로 은퇴한 주은경. 나는 저자를 자신이 기획한 시민드로잉에 수강생으로 함께 참여하여 10여 년간 그려온 45점의 그림과 테라코타를 전시한 생애최초이자 은퇴기념인 개인전에서 처음 만났다. 참여연대는 권력감시기구로 익숙하지만 부설 교육기관인 아카데미느티나무는 아무리 창의적인 교육프로그램을 기획한다 한들 지역에 사는 나에게는 그림의 떡일 뿐이었기에 아는 바 일천했다. 그래서 통인동 참여연대 지하에서 저자를 만났을 때 이 분이 원장이었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소탈해서 다소 낯설었다.

당시 개인전에서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빨래 연작과 기도하러 들어간 산사의 신발이 가득한 그림,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은 '나의 다순구미 마을'이었다. 목포에 있는 '다순구미'는 '따뜻하고 양지바른 언덕'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은 '다순구미 마을'은 집집마다 제각기 크기와 모양을 달리하는 창문들이 마치 호기심 가득한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귀를 쫑긋 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관람후기에 쓴 기억이 난다. 그 그림은 누군가가 소장했겠지만 아트포스터로도 제작되어 많은 이들에게 갔고 서울대 중앙도서관에도 걸려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 따순 그림은 40여 년간 교육기획자로 살아온 경험을 풀어놓은 책표지도 장식했다. '시민교육기획 노트' 표지로 쓰여서 그런지 따뜻한 초록의 하늘은 시민교육의 무궁한 가능성과 확장성을, 하늘 아래 다닥다닥 붙어있는 집들은 옹기종기 어깨를 기대고 앉아있는 모습, 삼삼오오 두리반에 둘러앉아 머리를 맞대는 모습으로 다가왔다. 어쩌면 그 그림을 그린 화가로서의 저자의 시선은 저마다 색깔과 형태와 크기와 바람을 달리 하는 시민들을 마주할 때의 시선과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그가 추구하는 시민드로잉의 방향이 짐작되는 작품이기도 하다.

<어른에게도 놀이터가 필요하다>, 이토록 적확하고도 매력적인 제목이라니! '시민교육기획 노트'라는 부제는 다소 딱딱할 것 같은 인상을 주기도 하지만 책장을 펴면 한시도 손에서 책을 놓을 수 없다. 재밌다. 재밌어도 너무 재밌다. 소설도 아닌데 좀 신기하지 않은가. 그런데 난 이 책이 한 편의 거대한 서사시로 느껴졌다. 앉으나 서나 교육 기획만을 생각하는 한 사람과 그 곁에 빙 둘러선 조력자들, 그리고 직계 방계로 뻗어가는 수많은 점인 시민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한편의 집단창작 오페라를 보는 느낌이었다.

20대 초반 노동야학을 시작으로 수십 년간 노동운동가로, 다큐멘터리 작가로, 성공회대 노동대학을 비롯한 시민교육기획자로 살아온 이력답게 이 책을 처음 받아든 사람을 흠뻑 빠져들게 만드는 힘이 대단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책을 읽으며 꽤 여러 번 눈물을 흘렸다. 나는 이 책이 모든 영역에서 기획자로 일하는 사람들, 아니 공급자든 수요자든 시민교육에 관심있는 모든 이들에게 길잡이가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림 그리고, 춤추며, 연극하는 시민교육기획자 그리고 교육기획과 방송, 두 날개로 날았다고 할 만큼 이 일들을 좋아하고 즐겼다'고 자신을 소개한 저자는 "직업은 당신의 진정한 기쁨이자 세상의 깊은 허기가 서로 만나는 장소"라고 직업의 정의를 근사하게 내린 신학자 프레데릭 뷔히너의 말대로 살아온 진정 행복한 사람이다. 뷔히너는 기쁨과 허기를 일치시키는 마음의 안테나가 필요하다고 했는데 세상의 깊은 허기와 자신의 기쁨을 일치시키는 힘은 다름 아닌 측은지심을 넘어선 인간에 대한 애정과 깊은 이해, 역사와 인간에 대한 믿음에서 나온다. 가장 잔인하고 가장 분노하게 만든 1980년 광주항쟁이 만들어낸 아이러니는 인간과 역사에 대한 낙관이 아니던가. 그리고 많은 청년들이 그러했듯 저자의 사회적 영성을 일깨운 계기이기도 했다.

"남의 평가나 시선에 상관없이 내가 좋아하는 걸 느끼고 표현하는 즐거움은 예술과 놀이의 본질 아닐까? 이것은 시민들이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해 필요한 자신감과 연결된다."(p.90)며 '모든 시민은 예술가다'를 모토로 시민드로잉, 도시 노마드(춤), 시민연극을 기획하고 그 자신이 참여자로 진행자로 시민들과 함께 배우고 함께 모색하고 성장했다. 이것이 다른 기획자들과의 큰 차별성이다. 시민들이 예술적 경험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고 타인과 소통하며 이후 참여자들 스스로 동아리 운영을 경험하며 서로 성장하는 민주주의 훈련의 장이 된다는 '시민은 교사, 예술가, 정치가'라는 아카데미느티나무 교육철학을 대변한다.

시민연극이 몸짓과 언어로 감정과 생각, 사유를 표현하는 것이라면 도시 노마드는 몸이 느끼는 오감의 감각으로, 시민드로잉은 자신의 시선을 마주하며 내적인 힘을 발견하는 기회가 된다고 강조한다. '참여자들과 서로 에너지를 주고받으며 더 깊은 자신과 타인을 만난다'(p.109)는 것이 공통점이다. 성찰하고 잘 표현하면 자신으로부터 해방되어 타인과의 연대, 즉 사회적 연대로 확장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한 사람의 내면을 가장 잘 반영하는 것은 자주 사용하는 어휘에 있다고 생각하는데 저자가 가장 많이 사용한 어휘는 성찰, 소통, 공감, 만남, 재발견, 표현, 질문, 스스로, 성장, 리추얼(제의)과 같은 것들이다.

과거에는 세상을 비판적으로 이해하고 저항하는 실천적·비판적 지성이 요구되었다면 자신이 처한 삶의 문제를 구조적으로 이해하고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지성, 타자를 만나고 공감할 수 있는 감성, 내면의 목소리를 들으며 성찰하는 영성의 통합교육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저자가 말하는 사회적 영성이란 '행복할 수 있는 능력이자 진정 자신의 내면이 원하는 대로 자신의 목소리로 자유롭게 살 수 있는 힘'이자 '자신과 타인의 존재를 깊이 인정하고 사랑하는 능력'(p.172-173), 즉 시민적 자존감을 일컫는 것으로 이해된다. 시민교육에서 '영성'을 말하는 것이 다소 생경하기도 하지만 정신적 허기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의 처지를 놓고보면 그 어떤 가치보다 중요하게 와 닿기도 한다.

독립된 개인의 느슨한 연대, 나는 우리 사회의 개인과 개인, 개인과 사회의 관계맺기는 이렇게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는다. 저자가 말하는 지성과 감성, 영성의 조화로운 시민교육은 독립된 개인으로 서게 하고 느슨한 다양한 만남을 통해 세계를 더 확장시켜 나가게 만들 것이다. 지금은 질 높은 프로그램, 정보와 사람이 넘쳐나는 시대다. 그렇기에 점으로 흩어져 있는 각각의 것들을 연결하고 이어주는 능력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제 4부 '느슨한 만남이 나의 세계를 확장할 때-일상이 정치다'는 시민교육이든 행사기획이든 시민과 시민의 연결을 중시하는 기획자라면, 또는 동아리의 리더이거나 동아리 참여자들에게도 매우 솔깃하고 알찬 내용들로 꽉 차 있다. 시민의 정치공론의 장을 어떻게 만들 수 있는지, 시민소모임이 어느 단계에서 주로 좌초하기 쉬운지 시민의 정치참여와 행동을 어떻게 일상에 연결시켜낼 수 있는지 등등의 구체적이고 매우 실증적인 고민들이 담겨있어 나로서는 가장 신나게 읽었던 장이다.

가끔 시민단체의 교육프로그램이 문화센터나 주민자치센터의 프로그램과 뭐가 다르냐 싶지만 스웨덴이나 독일의 사례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민주, 자유, 권리와 같은 전통적이고 일반적인 민주주의 교육을 많이 했다. 그러나 최근엔 개인의 자기개발 욕구가 커져서 이런 분야는 공교육 영역으로 넘겼다."(p.233)는 스웨덴이나 보이텔스바흐 협약을 준수하고 투명하게 예산지출만 한다면(극우·극좌 제외) 집권정당이나 관련기관장의 정치적 성향에 좌우되지 않는다는 독일의 사례는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방향이자 당도해야 할 지점이다.

정권이 바뀌면서 낡은 이데올로기가 재부상하고 시민, 민주, 평화, 인권과 같은 낱말이 들어간 사업지우기에 혈안이 되었다는 우리의 현실에서는 아직도 먼 얘기지만 피플파워의 중요성을 강조한 김동춘 교수의 '시민들의 정치노동이 필요하다'는 말에서 무릎을 치게 된다. 정치노동, 자신과 타인의 경제적 정치적 권리 확장을 위한 창조적 노동이고 정부가 정치적 중립성을 갖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다. 이제 본 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시민교육의 자생력을 높이기 위한 방법을 모두가 함께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시민단체는 아주 오래 전부터 시민을 대상으로 한 교육, 교양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지 않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나는 지금도 참여자일 뿐인 자리에 가서도 스텝 마인드를 버리지 못하고 기획자의 세심한 손길에 감동받거나 아쉬워한다. 이제는 시민단체뿐만 아니라 노동인권교육이나 페미니즘 교육, 부모교육, 정치교육 등 다양한 분야의 교육을 기획하고 이제는 마을단위 자치조직에서도 기획의 역할이 많아졌다. 교육이든 행사든 강사와 참여자만 있지만 실은 기획자의 보이지 않는 손길이 거쳐가지 않은 것이 없다.

흔히 교육의 주체는 교사, 학생, 학부모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시민교육의 주체는 강사와 참여자, 그리고 기획자가 아닐까. 그만큼 기획자의 능력과 애정, 헌신이 교육의 성패를 가르는 열쇠가 된다. 기획이 뭐 별거인가. 여성들은 일상을 기획해본 경험이 많다. 집안의 대소사도 기획이고 가족모임을 여는 것도 기획이다. 어떤 장소에서 어떤 음식으로 어떤 프로그램으로 진행할 것인가 하는 기획은 그날 가족모임의 화기애애에 지대한 역할을 한다. 친구들과 여행을 기획하는 것도, 작은 동아리를 운영하는 것도, 북콘서트나 소공연을 기획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한번이라도 기획을 해본 사람은 안다. 기획은 보이지 않는 깨알노동이고 잘해야 본전이라는 것 말이다.

5부에서는 이런 경험을 가진 사람이라면 무릎을 치게 될 것이다. 편안하고 환대받는 느낌을 주는 장소 세팅부터 다과준비, 전체 교육(행사)의 흐름을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하고 하다못해 쓰레기통의 위치까지 고민해본 기획자라면 누가 수고했다 해주지 않아도 "내가 나를 알아주면 된다"(p.263)는 저자 주은경의 따뜻한 위로와 격려에 울컥해질 것이다. 교육기술자나 관리자가 되지 않으려면 교육연출가, 교육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이 필요하다는 저자의 조언은 마치 큰언니에게 조곤조곤 지혜를 전수받는 느낌이다.

"사회가 답답할수록 지치지 말아야 한다. 더 많은 일상의 공간에서 슬픔, 분노, 기쁨을 함께 나누며 몸으로 표현하고 놀았으면 좋겠다."(p.102)는 저자의 바람처럼 개인과 개인을 연결하고 더 큰 개인들이 연결되어 소통, 공감을 통해 함께 배우고 성장하는 사회, 일상의 공부가 놀이이자 예술이 될 수 있는 시민교육이야말로 민주주의 가치를 더욱 굳건히 하는 근본적인 힘이 될 것이다.

모든 시민이 기획자라는 저자의 모토대로 그의 교육을 거쳐간 많은 이들이 각자 서있는 자리에서 스스로 기획하고 운영하고 확장해감으로써 느슨한 연대는 더욱 확장되고 든든해졌다. 이것이 바로 세상의 깊은 허기가 조금씩 채워져 가는 과정이 아니겠는가. 자신을 종합예술가로 인식하는 자부심이야말로 대상과 방식은 달라도 1980년부터 일관되게 '교육'이라는 기둥을 붙잡고 한 길을 걸을 수 있는 내적인 힘이었을 것이다. '직업을 나의 진정한 기쁨과 세상의 깊은 허기가 서로 만나는 장소'로 생각하고 살아온 사람에겐 직책을 내려놨어도 소명은 남아있다며 '나는 앞으로 일궈갈 나와 우리의 시간이 궁금하다'(p.313)고 말하는 저자는 참 행복한 사람이다. 그 소명을 어떻게 일구며 경작(culture)해 갈지 함께할 시민들의 시간이 나도 참 궁금해진다.

저자가 60세 은퇴기념이자 첫 개인전에서 "느티나무도 참여연대도 다순구미 마을 같은 곳이 되면 좋겠다"고 한 말처럼 이 책이 나와 타인, 개인과 개인을 연결하고자 하는 많은 이들에게 다순구미마을 같은 등대가 될 것이라 믿는다. 참으로 시의적절한 때 큰 선물을 받았다. 세상을 좀 더 살만한 곳으로 만들어가는 교육기획에 대한 모든 것, 이 책의 타이틀로 손색이 없는 이 엄청난 작업을 해준 저자에게 깊은 감사와 존경을 전한다.

*소셜칼럼니스트 강미숙은 <당신은 어떤 세상을 살고 있습니까-지극히 사적인 정치에세이> (강미숙 지음, 한길사 펴냄)을 썼습니다. 이 글은 필자의 페이스북에도 게재됐습니다. (편집자주) 

▲<어른들에게도 놀이터가 필요하다> (주은경 지음, 궁리 펴냄) ⓒ궁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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