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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의 마지막 친서에 '바보'가 두 번 등장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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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의 마지막 친서에 '바보'가 두 번 등장한 이유

[정욱식 칼럼] 김정은-트럼프 친서 분석 (하)

한미클럽이 공개한 27통 친서의 마지막 편은 김정은 위원장이 2019년 8월 5일자로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에게 보낸 것이다. 이 친서를 보면 '바보'라는 표현이 두 번 등장한다.

한번은 "각하께서 우리의 관계를 오직 당신에게만 득이 되는 디딤돌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면, 저를 주기만 하고 아무런 반대급부도 받지 못하는 바보처럼 보이도록 만들지는 않을 것"이라는 문장에서 등장한다. 또 한 번은 편지 말미에 "우리는 남쪽의 바보들을 약간 놀라게 했고 이는 퍽 재밌었다"라는 부분이다.

필자가 '바보'를 핵심어로 뽑은 이유는 국가수반의 친서에서 이런 표현 자체가 나온 것이 대단히 이례적일 뿐만 아니라 김정은의 당시 심정을 너무나도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과거지사가 아니다.

당시 김정은의 낙담은 이후 안보는 핵무력으로, 경제는 자력갱생으로, 외교는 중국과 러시아 중심으로 삼겠다는 결심의 바탕이 되고 말았다. 즉, 오늘날 '강 대 강'으로 치닫고 있는 한반도 정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2019년 여름에 있었던 일을 복기할 필요하다.

2019년 2월말 2차 북미 정상회담이 '하노이 노딜'로 끝나면서 120시간 넘게 열차를 타고 평양에서 하노이를 오갔던 김 위원장은 큰 충격을 받았다. 이에 미안함을 느꼈는지 트럼프는 3월 22일자 친서를 보내 달래기에 나섰다.

트럼프는 "위대한 국가를 세운 김일성 주석의 탄신 기념일을 앞두고 따뜻한 안부 인사를 전하고자 편지를 쓴다"며, "위원장님과 제가 공통된 목표를 계속 견지한다면 앞으로 다가올 수개월, 수년 동안 무엇인가 함께 성취할 수 있다는 큰 희망과 기대를 갖고 있다"고 적었다.

아마도 이 편지를 받은 김정은은 '미워도 다시 한 번'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는 심사숙고를 거쳐 80일 후에 보낸 답장에서 "우리 사이의 심오하고 특별한 우정은 (중략) 북미관계의 진전을 이끌 마법과도 같은 힘으로 작용할 것으로 믿는다"며, "거기에 희망을 걸고 있고", "마주 앉을 날이 언젠가 올 것"이라고 썼다. 이 대목에선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던 김정은의 심정을 읽을 수 있다.

이틀 후 트럼프도 "전적으로 동의한다"고 화답했다. 다만 묘한 신경전도 벌어졌다. 김정은은 정상회담을 선호한 반면에 트럼프는 "수 주이내 우리 협상팀이 다시 만나도록 하자"며, 실무회담을 제안한 것이다. 실제로 트럼프 행정부는 북한에 수 차례에 걸쳐 실무회담을 제안했지만, 북미 정상회담을 선호한 북한은 묵묵부답이었다.

반전은 6월말에 찾아왔다. 당시 트럼프는 G-20 정상회담이 열리는 일본 오사카를 거쳐 서울을 방문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서울로 출발하기 직전인 6월 29일 오전에 "김 위원장이 이것을 본다면, 나는 비무장지대(DMZ)에서 그를 만나 악수를 나누고 인사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트위터를 날렸다. 그런데 트럼프는 정상회담에 앞서 실무회담부터 갖자고 했었고, 미국 국무부는 바로 직전까지도 북미 정상이 만날 계획이 없다고 밝혔었다.

이랬던 트럼프가 왜 갑자기 DMZ 회동을 제안한 것일까? 트럼프는 G-20 정상회담에서 자신의 활약상에 대한 미국 언론의 보도가 많지 않다고 불만을 토로했었다. 미국 언론의 관심은 민주당 대선 후보 TV토론에 맞춰져 있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트럼프는 깜짝 제안의 효과를 톡톡히 봤다. 그의 트윗을 계기로 미국 언론의 헤드라인이 바뀐 것이다.

트럼프의 제안이 진심인지 농담인지 헷갈린 김정은은 정식 외교문서를 요청했다. 그러자 트럼프도 바로 친서를 썼다. "저는 (60월 30일) 오후에 디엠제트 근처에 있을 것인데, 군사분계선 남쪽 편에 있는 평화의 집에서 오후 3시 30분에 만날 것을 제안"한 것이다. 김정은이 이 제안을 수락하고 문재인 대통령이 트럼프와 동행하면서 판문점 번개팅이 성사되었다.

▲ 지난 2019년 6월 30일 문재인 (오른쪽)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왼쪽) 미국 대통령,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판문점에서 만났다. ⓒ로동신문

당초 트럼프는 "특별한 의제도 없고", "2분간 인사만 나눠도 좋다"고 했지만, 북미 정상 간의 만남은 40여분의 회담으로 이어졌다. 이 자리에서 트럼프는 8월로 예정된 한미연합훈련을 취소하겠다고 약속했고 김정은은 북미실무회담에 응하겠다고 화답했다. 그리고 북한은 8월에 실무회담을 갖자고 미국에 제안했다.

그런데 김정은은 아무리 기다려도 한미연합훈련을 취소하겠다는 발표를 듣지 못했다. 오히려 김정은이 들은 보고는 남한이 F-35A를 비롯한 첨단무기를 계속 도입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또 존 볼턴 당시 백악관 안보보좌관에 따르면, 볼턴은 7월 24일 정의용 청와대 안보실장과 회동을 갖고 연합훈련을 실시하기로 합의했다. 김정은의 '권언'은 이 와중에 나왔다.

그는 7월 25일 실시된 단거리미사일 시험 발사를 지도한 자리에서 "남조선 당국자들이 세상 사람들 앞에서는 '평화의 악수'를 연출하며 공동선언이나 합의서 같은 문건을 만지작거리고 뒤돌아 앉아서는 최신 공격형 무기반입과 합동군사연습 강행과 같은 이상한 짓을 하는 이중적 행태를 보이고 있다"며, "바른 자세를 되찾기 바란다는 권언을 남쪽을 향해 오늘의 위력 시위 사격 소식과 함께 알린다"고 말했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는 김정은의 권언보다는 단거리 미사일 발사에 주목했다. 정경두 당시 국방장관은 이를 "도발"과 "위협"으로 규정하면서 북한이 계속 도발하면 김정은 정권과 북한군을 "적으로 간주하겠다"고 말했다. 또 국방부는 8월 초에 11일부터 연합훈련을 실시한다고 발표했다.

그러자 김정은은 8월 5일에 트럼프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내 "나는 도발적인 연합군사훈련이 중요한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북미실무회담에 앞서 취소되거나 연기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며 "이 훈련은 누구를 겨냥한 것이냐"고 물었다.

자신은 "한국을 공격하거나 전쟁을 시작할 의도가" 없는데, 왜 남한은 "잔혹한 동족상잔의 전쟁이 있을 것이라는 전제하 자신들이 대비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소란을 피우느냐"고 주장했다.

문재인 정부를 바보라고 표현한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나왔다. "우리와의 관계를 개선시켜 군사적 긴장을 완화하는 방안을 강구하는 편이 오히려 더 현명할 것"인데, 왜 첨단무기 도입과 연합훈련을 계속하냐는 푸념이었다.

김정은은 또 "나는 미군이 이러한 남한의 편집광적이고 매우 과민한 행동에 관여하고 있는 것이 더욱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너무 기분이 나쁘다. 이 감정을 당신에게 숨기고 싶지 않다"고 썼다.

"저와 제 인민들이 당신과 남한 당국의 결정과 행동을 이해하기 매우 어렵다"며, "당신측이 골칫거리로 인식하는 (북한의) 미사일 위협과 핵문제의 가장 중요한 원인은 우리의 안전을 위협하는 당신측과 남한군의 군사적 행동들"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이러한 요인들이 제거되기 전까지는 이전과 다른 결과를 기대할 수 없다"며, 북미실무회담을 연기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처럼 김정은은 한미에 대해 실망감과 배신감을 품고 있을 때, 트럼프는 자랑을 늘어놓고 있었다.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본인 덕분에 북한의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발사도 없어졌고 억류된 미국인들과 유해도 돌아왔으며 심지어 자신이 "3차 세계 대전"도 막았다고 말했다.

김정은은 친서에서 이를 언급하면서 "각하께서 해주신 것이 무엇이며, 나는 우리가 만난 이후 무엇이 바뀌었는지에 대해 인민들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하냐?"고 따졌다. '바보 취급하지 말라'는 자괴감 섞인 문장은 이러한 맥락에서 나왔다. 그리고 조바심을 드러냈던 이전 친서들과는 달리 "우리는 그때와 다른 상황에 처해 있고, 서두를 이유가 없다"고 썼다.

김정은이 실무회담 연기를 결정한 것은 한미연합훈련 때문만은 아니었다. 실무회담의 의제가 "제가 간절히 원했던 제재 완화 문제에 대한 것도 아닐 것"이라는 판단도 작용했다. 실제로 10월 5일 스웨덴 스톡홀름에 열린 실무회담도 '노딜'로 끝났다.

결정적인 이유는 제재 문제에 있었다. 회담에 앞서 트럼프는 "제재는 유지되어야 한다"고 말했고, 미국 협상팀도 "동시적·병행적 이행"에 제재는 예외라는 입장을 고수했다. 그러자 북한은 "생존권과 발전권", 즉 제재 문제에 대한 미국의 태도 변화가 없다는 이유로 '노딜'을 선언했다. 김정은의 불길한 예감이 적중한 것이다.

돌이켜보면, 2019년 8월에 트럼프의 취소 약속에도 불구하고 한미가 연합훈련을 강행한 것은 치명적인 과오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8월에 연합훈련 대신에 북미실무회담이 열렸다면, 이후 상황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9월에 훼방꾼 존 볼턴 당시 국가안보보좌관이 경질되었기에 더욱 그러하다.

또 많은 이들은 한반도 평화프로세스 좌초의 가장 큰 원인을 '하노이 노딜'에서 찾고 있지만, 오히려 그해 여름에 있었던 일이 더 크게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전자는 김정은에겐 '충격'이었지만, 후자는 그에게 '결심'의 배경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김정은의 결심이란 바로 남북관계와 북미관계에 대한 미련을 접고 핵무력을 정치·안보·경제·외교를 아우르는 '국체(國體)'로 삼기로 한 것을 말한다.

※ 이 글은 필자가 10월 8일자 <한겨레>에 쓴 글을 보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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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욱식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는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북한대학원대학교에서 군사·안보 전공으로 북한학 석사학위를 받았습니다. 1999년 대학 졸업과 함께 '평화군축을 통해 한반도 주민들의 인간다운 삶을 만들어보자'는 취지로 평화네트워크를 만들었습니다. 노무현 정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통일·외교·안보 분과 자문위원을 역임했으며 저서로는 <말과 칼>, <MD본색>, <핵의 세계사> 등이 있습니다. 2021년 현재 한겨레 평화연구소 소장을 겸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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