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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성에서 은하를 생각하다…'별 볼 일 있는 과학자'의 은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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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성에서 은하를 생각하다…'별 볼 일 있는 과학자'의 은하 이야기

[최준석의 과학자 열전] 정애리 연세대 천문우주학과 교수

연세대 천문우주학과 정애리 교수는 은하 진화 연구자다. 사전 취재를 위해 자료를 검색하니, 외부 초청 강연이 보인다. 카오스 재단 강연 동영상 제목은 '하늘엔 내 이름을 딴 은하가 있다'이다. 출판사 사이언스북스가 주최한 2012년 '책 대 책' 토론회에서 미국 천문학자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 얘기를 한 텍스트도 있다. 6월 8일 연세대학교 과학관 6층 연구실로 정 교수를 찾아갔다. 방이 깔끔했다. 그럼에도 그는 "요즘 머릿속이 복잡해서 책상 위가 엉망이다"라고 말했다.

어떻게 물어볼까 생각하다가, 은하 진화 연구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석사 때 은하 진화 연구를 시작했다라고 말했다. 

"은하가 재밌었다"던 학생 전파망원경을 잡고 우주를 보다 

정애리 교수는 연세대학교 천문대기학과(천문 전공) 1993학번이다. 대학 4학년 때 '은하와 우주' 과목을 들었다. 은하가 재밌었다. 그래서 연세대 대학원 석사과정에 진학, 은하 공부를 했다. 지도교수는 변용익 교수. 변 교수는 당시 연세대에 막 부임한 젊은 교수로 주로 광학파장에서 은하를 연구했다. 그는 정애리 석사과정 학생에게 "이명현 박사와 석사 연구를 해보면 어떻겠느냐"라고 했다. 공식적인 지도교수는 변용익 교수로 하되, 실질적으로는 이명현 박사의 지도를 받도록 하자는 말이었다. 이명현 박사는 당시 연세대 연구교수로 일했고, 정애리 교수가 학부 4학년 때 흥미롭게 들은 과목인 '은하와 우주'를 가르친 사람이다. 네덜란드에서 전파 파장을 이용하여 은하를 관측하는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정애리 학생은 그렇게 해서 전파 망원경을 사용해서 은하를 연구하게 되었다.

▲정애리 연세대 천문우주학과 교수 ⓒ최준석

석사 때 연구는 큰곰자리(Urusa major)에 있는 은하그룹(galaxy group)의 분자 가스 관측이다. 정 교수 말을 들으니, '은하 그룹'이 어느 정도 크기를 말하는 것인지 궁금하다. 정 교수는 "은하그룹은 은하 수 개에서 수 십 개가 묶인 중력계이다. 우리 태양계가 거주하는 우리은하도 '우리은하그룹', 혹은 '국부은하그룹'으로 불리는 그룹에 속한다"라고 했다. 국부은하그룹에서 가장 큰 은하는 안드로메다은하이고, 그 다음이 우리은하다. 그리고 그 밖에 작은 은하들을 포함하여 '우리은하그룹'에는 60-70개의 은하가 있다. 아니, 국부은하그룹에 속하는 은하 수가 60개인지, 70개인지를 정확히 모른다는 것인가? 정 교수는 "관측 기술이 발달하면서 그전에는 보지 못했던 작은 은하를 새로 발견하고 있다"라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석사 때인 1998년 큰곰자리 은하그룹 관측을 위해 미국 애리조나주의 킷픽(Kitt peak) 국립천문대에 갔다. 하루 24시간 씩 7일간 관측을 했다. 킷픽 국립천문대는 애리조나 투산 인근에 있고, 미국의 대표적인 국립천문대 중 하나다. 비교적 뛰어난 관측조건 덕분에 정부가 운영하는 망원경 뿐만 아니라 특정 기관의 사설 망원경이 20대 가까이 있고, 이 중 전파망원경도 2대 포함되어 있다. 큰곰자리 은하그룹은 지구에서 천문단위로는 18 메가파섹, 일반인에게 익숙한 단위인 광년으로는 5400만 광년 떨어져 있다. 전파 파장에서는 낮과 밤이 따로 없어 24시간 우주를 관측할 수 있다. 정애리 석사과정학생은 전파망원경 한 대를 갖고 관측했다. 

전파망원경 여러 개를 갖고 동시에 관측하는 '간섭계'(interferometer)의 경우 서로 다른 망원경을 통해 들어온 빛을 합성하는 과정이 필요하므로 바로 결과를 보기 힘들다. 이와 달리 전파 망원경 한 대로 관측하면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다. 7일간 하루 24시간 전파망원경의 관측 시간을 따낸 것이었기에 부지런히 관측을 했다. 혼자 다 할 수 없었고, 당시 애리조나 킷픽 천문대에는 그의 연구를 지도한 이명현 박사와, 다른 두 명의 천문학자가 와있었다. 정 교수는 "석사 때 나의 연구는 이 세 사람이 계획하고 있던 연구다. 학생인 내가 투입되면서 그 계획을 실현했다"라고 말했다. 세 사람은 이명현 박사, 그리고 이 박사가 네덜란드 유학 때 알게 된 마크 베르헤이옌(Marc Verheijen) 박사(현 네덜란드 그로닝헨 대학교 교수), 윤민수 박사(현 미국 매사추세츠대학교 교수)다. 정애리 교수의 당시 연구 얘기를 옮겨본다.

"1959년 네덜란드계 미국 천문학자인 슈미트(Maarten Schmidt)가 제안한 이론이 있다. 은하에서 별이 태어나기 위해서는 성간 가스(interstellar gas)가 필요한데, 성간 가스 표면밀도와 단위 면적당의 별 형성률 사이에 선형적인 관계가 있을 거라는 논문이었다. 이후 여러 관측자가 이 가설이 옳은지를 관측을 통해 검증했고, 1990년대 로버트 케니컷(Robert Kennicutt) 연구가 대표적이다. 이를 위해서는 광학 외에도 성간가스를 볼 수 있는 전파 관측이 필요하다. 그런데 케니컷 연구만하더라도 은하를 분해해서 보지 않았기 때문에 슈미트 이론을 정확하게 검증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 즈음 전파 기기와 관측 방법이 발전하면서 외부은하도 한 대의 망원경으로 성간 물질을 분해해서 볼 수 있게 되었다. 킷픽 천문대에 위치한 전파망원경을 이용하여 관측한 큰곰자리 그룹 은하의 분자가스 영상이 석사 연구의 핵심이었다. 이 자료를 통해 은하그룹 환경에서도 슈미트 이론이 유효함을 확인하였다."

이후 박사공부를 하기 위해 미국 컬럼비아대학교로 갔다. 석사 때 함께 연구했던 세 연구자들 제안으로 뉴욕 컬럼비아대학교 대학원 천문학과에 지원하였고, 입학 허가를 받았다. 컬럼비아대학교 천문학과 대학원은 학생들에게 처음 두 해는 여러 연구자와 짧은 연구를 경험하고 3학년 때 지도교수를 정하게 한다. 유학 당시 전파 연구를 고집했던 것은 아니지만 전파 자료와 은하에 여전히 흥미를 느껴 네덜란드계 미국인인 재클린 반 골콤(Jacqueline van Gorkom) 교수 지도를 받기로 했다. 반 골콤 교수는 은하 진화를 이해하기 위해 주로 수소 원자(HI) 관측 자료를 사용하는 전파 천문학자다.

정애리 교수의 박사 학위 주제는 처녀자리 은하단의 전파간섭계 관측이다. 처녀자리 은하단은 수 천 개 은하와 은하단물질(intra cluster medium)이 조밀하게 분포하는 환경으로, 은하들이 어떤 매커니즘을 통해 진화 방향이 바뀌는지를 연구했다. 처녀자리 은하단은 석사 때 관측했던 큰곰자리 은하그룹보다 은하들의 공간 분포 밀도가 높다. 그러면서도 지구로부터의 거리는 조금 더 가깝다. 때문에 은하단 환경 내에서 은하가 진화하는 모습을 자세하게 관측할 수 있는 대상이다.

'생물'처럼 살아 있는 은하 관찰하기

은하는 크게 타원 은하, 나선 은하, 렌즈형 은하로 나눌 수 있다. 타원 은하는 계란 모양이고, 나선 은하는 나선팔이라는 게 있어 회전하는 모습이 뚜렷하다. 렌즈형 은하는 타원은하와 나선은하의 중간형으로, 나선 은하와 같이 납작한 원반(disc) 모양은 있으나 나선팔이 보이지 않고, 성간물질도 많지 않다. 정 교수 말을 들어본다.

"어떤 은하가 큰 비율을 차지하는지는 환경에 따라 다르다. 은하가 조밀하게 분포하는 은하단 중심과 같은 환경에서는 타원은하와 렌즈형 은하가 90%다. 반면 은하그룹보다도 밀도가 낮은 환경에서는 나선은하와 형태를 분류하기 힘든 불규칙 은하가 거의 대부분이다. 서로 다른 모양의 은하가 은하단 내에서 처음부터 그런 모습으로 만들어지는 것인지(nature), 아니면 은하가 은하단 내의 다른 환경에 진입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모양으로 진화하는 것인지(nurture)가 궁금했다. 즉 본성(nature)이 더 중요한가 혹은 양육(nurture)이 더 중요한가 하는 '본성 대 양육'에 대한 질문이 존재해왔다. 또한, 만약 타원은하와 렌즈형 은하와 같이 조기 유형(early type)의 은하와 나선은하와 같이 후기 유형(late type) 사이에 변화가 가능하다면 어떤 기작을 통해 진화하는지도 중요한 질문이다. 관측 자료를 통해 이에 대한 해답을 찾는 것이 나의 박사학위 논문 주제였다. 은하에 영향을 주는 메커니즘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내가 박사 때 특히 기여한 부분은 충차압(Ram pressure)이 은하 진화에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보인 거다. 박사 때 연구는 내 논문 중 가장 많이 인용되고 있다."

개별 은하들은 은하단 내에서 은하단의 중력을 느끼면서 궤도 운동을 한다. 이 과정에서 은하는 은하 사이를 메우고 있는 뜨거운 플라스마 가스인 은하단 물질(intracluster medium)에 의한 충차압을 느낀다. 충차압의 '충차(ram)'는 성문을 부수기 위해 사용되었던 병기에서 비롯되었다.

은하를 구성하는 별들 사이에는 성간 물질(ISM, interstellar matter)이 있다. 매우 높은 가스체인 별은 충차압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는다. 하지만 별에 비해 밀도가 극히 낮은 성간물질은 충차압에 의해, 있던 자리에서 밀려날 수 있다. 성간물질의 밀려나는 현상은 전파망원경으로 관측할 수 있다. 정애리 교수는 컬럼비아대학교 박사과정 때 전파망원경으로 은하에서 밀려나는 성간물질 영상을 고분해능으로 다수의 은하에서 관측하였다. 당시 관측은 미국 뉴멕시코에 위치한 전파간섭계인 VLA(Very Large Array)를 활용했다.

▲그림1

정 교수가 보여주는 이미지를 보니, 은하단 중심으로 향하는 은하 뒤쪽으로 성간물질이 밀려나 있는 모습이 또렷하다(그림1 – 배경을 이루는 컬러 사진이 광학망원경으로 본 은하모습이며, 흰색 등고선이 전파망원경으로 본 은하의 중성 수소 성간가스다. 왼쪽 하단의 막대기는 약 4.8 킬로파섹, 즉 1만5600광년에 해당한다). 이런 이미지는 처음 본다. 오토바이를 타고 달릴 때 옷이 바람에 날리는 것처럼, 은하의 성간물질이 은하단 사이를 유영할 때 날린다니.

은하는 은하단 중심으로 빠른 속도로 갔다가 천천히 빠져나온다. 이 과정에서 은하는 많은 성간 물질을 잃어버린다. 심한 경우 성간물질의 90%를 잃어버리기도 한다. 그렇게 되면 그 은하는 더 이상 별을 만들기 힘들게 된다. 은하의 나선 팔 형태도 덜 뚜렷해지고, 새로운 별을 만들지 못함에 따라 나이가 든 별들이 주로 남아 은하 색깔이 붉어진다. 은하단 중심으로 들어갈 때는 나선은하였으나, 이 과정을 거친 은하는 렌즈형 은하로 진화할 수도 있다. 더불어 은하 사이의 중력적 병합과 같은 추가적인 메커니즘이 작동해 타원 은하로 진화할 수도 있다.

▲그림2

정 교수가 그래픽을 보여줬다(그림2 – 주황색은 은하단 물질의 분포를 볼 수 있는 엑스선 영상이며, 푸른색은 은하들의 중성수소 가스 분포를 보여준다). 처녀자리 은하단 내 은하들 50여개 모습을 집어넣은 것으로 은하단내 위치에 따라 은하의 중성수소가스 형태가 다른 게 뚜렷하다. 정애리 교수는 "이 이미지 하나가 은하단 내에서 은하 진화를 잘 보여준다. 이 그림이 들어간 2009년 논문이 내 박사학위의 종합편이나 마찬가지다"라고 말했다. 박사학위 때 연구는 2009년 천문학 저널(Astronomical Journal)에 표지 논문으로 나왔다(그림3). 정애리 교수는 "내 연구 중 가장 인용이 많이 된 논문"이라고 말했다.

▲그림3

2007년 2월 박사학위를 수여 받았지만, 박사학위심사를 마친 건 그보다 빠른 2006년 9월이었다. 2006년 10월부터 3년간 미국전파천문학관측소(NRAO)가 전파천문학을 연구하는 우수한 박사후연구원을 대상으로 선정하는 젠스키 펠로(Jansky Fellow)가 되어 연구를 할 수 있었다. 처음 2년은 메사추세츠 대학교 윤민수 교수가 있는 애머스트(Amherst)에서, 그리고 나머지 1년간 미국 뉴멕시코 주 소코로에 가서 살았다. 소코로 인근에는 박사과정 때 주로 활용했던 전파간섭계 VLA가 있다. VLA는 영화 '콘택트(1997)'에서 조디 포스터가 주인공으로 분한 엘리 애로웨이 박사가 외계인으로부터 신호를 받는 천문대로 등장해 일반인에도 알려져 있다. 소코로에는 VLA운영센터가 있다. 정애리 교수는 "학생으로서 운영센터와 VLA를 수십 번은 찾았다. 소코로에서 살아보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2009년 두 번째 박사후연구원은 SMA(Submillimeter Array)펠로로 선정되어, 보스턴 인근 케임브리지에 있는 CFA(Centre for Astophysics)에서 일했다. CFA는 하버드대학과 스미소니언이 공동으로 운영한다. 같은 시기인 2009년 연세대학교로부터 교수직 제의를 받았지만 연세대 교수로 일하는 걸 1년 늦추고 2010년 봄까지 미국에 머물렀다.

정애리 교수는 하버드-스미소니언 천체물리연구소에서 일할 때부터 새로운 전파망원경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하와이 빅 아일랜드의 마우나키아 산에 위치한 SMA 전파 간섭계(Submilimeter Array)다. 이때 시작한 연구는, 충차압이 분자 형태의 성간가스에 미치는 영향을 알아내는 것이다. 박사 때 원자 형태의 중성수소가스를 연구했다면, 이제 분자 형태의 성간 가스를 연구하게 됐다. 밀도가 상대적으로 높은 분자가스가 별이 형성되기에 더 적합한 조건을 가지고 있기에, 은하 진화를 궁극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충차압이 분자 성간 물질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시기에 시작한 연구는, 연세대 교수가 된 뒤 학생들과 함께 수행할 연구의 씨앗이 되었다.

정 교수가 2017년 영국 천문학 학술지(Monthly Notice of the Royal Astronomical Society)에 낸 논문이 있다. 그는 이 연구에서 은하의 성간물질을 이루는 수소 원자 뿐 아니라(박사 때 연구), 분자도 같은 방식으로 충차압을 받는다는 걸 입증했다(그림4 – 검은색은 별의 분포, 녹색은 중성수소가스 분포, 푸른색은 최근에 별이 형성된 지역, 붉은색은 현재 별이 탄생하고 있는 지역을 보여준다. 노란색 등고선은 단일 전파망원경으로 관측한 분자가스 분포이고, 그 가운데 하얀색 등고선이 SMA로 관측한 분자가스 분포다. 그림 왼쪽 아래 1 분각(arcmin)은 물리적인 크기로 약 4.8 킬로파섹, 즉 1만5600광년에 해당한다. 분자가스가 중성수소와 규모는 다르지만 그림의 오른쪽 아래쪽으로 꼬리를 보이는 등 형태가 유사한 걸 알 수 있다.)

▲그림4

정애리 교수는 "분자가스에 미치는 충차압의 영향에 대해서는 학계에 다양한 의견이 있었다. 관측 대상과 방식에 따라 여러 결론이 혼재하였다. 일반적으로 은하원반 안쪽에 자리잡고 있는 분자가스는 충차압을 받기 힘들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우리는 분자가스도 압력을 받는다는 걸 알아냈다. 충차압이 가스의 분포와 역학에 미치는 영향은, 충차압에 의한 은하 진화를 이해하는 핵심적인 정보다"라고 말했다.

정애리 교수의 2017년 논문은 수십 명이 참여하는 국제 공동 연구의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 캐나다 맥마스터대학교 천문학자 토비 브라운 박사(NRC 허즈버그 천문천체물리학연구센터 근무)는, 정애리 교수가 VLA로 관측한 처녀자리은하단 은하의 일산화탄소 영상을 관측하는 연구를 제안하였고, 2020년 관측에 들어갔다. 남미 칠레에 있는 세계 최고 전파망원경 간섭계인 ALMA에서 관측을 하였고, 첫 번째 자료 공개 논문이 2021년 12월 천체물리학저널(ApJ)의 증보판(supplement)으로 나왔다. 정애리 교수도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으며, 앞으로 연이어 공동연구의 결과가 논문으로 나올 예정이다.

블랙홀은 은하의 진화에 어떻게 관여할 수 있는가?

교수가 된 뒤에 그가 새로 개척한 연구 주제가 있다. 활동적인 은하들의 분자 가스 연구다. 활동적인 은하 중에서도, 활동은하핵(Active galactic nucleus)이라고 불리는 초거대 질량 블랙홀을 중심에 갖고 있는 은하를 연구했다. KVN(한국우주전파관측망)이라는 전파간섭계를 이용하여 관측했다. 정 교수가 몸 담고 있는 연세대학교와, 울산대학교, 그리고 제주도에 각 한 대 씩, 모두 세 대의 전파망원경을 연결해서 관측하는 초장기선 전파간섭계다. KVN은 한국천문연구원이 운영한다. KVN은 500 킬로미터의 직경을 가진 망원경의 분해능을 얻을 수 있는 장비로, 블랙홀과 같이 작은 영역에서 큰 에너지가 방출되는 대상을 연구하기에 적합하다. 정 교수는 KVN을 이용해서 특히 은하단 중심에 위치한 블랙홀을 연구해왔다. 정 교수 설명을 다시 들어본다.

"역학적으로 비교적 안정된 은하단에서는 은하단 물질, 즉 뜨거운 플라스마 가스가 효율적으로 식는다. 이때 은하단 물질이 은하단 중심에 있는 거대 타원 은하로 유입될 수 있는데, 중심까지 도달할 경우 은하 중심에 있는 블랙홀의 먹이가 된다는 이론적인 제안이 있다. 이런 과정이 실제 일어날 수 있는지를 관측으로 증명하고 싶었다. 이론이 사실일 경우 은하단 물질이 활동은하핵을 통하여 은하단 중심에 있는 은하의 진화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뜻이 되며, 이는 은화 진화 측면에서 중요한 문제다. 거대 타원은하 내부에서 거대 블랙홀이 어느 정도까지 커질 수 있는지, 블랙홀이 은하 진화에 어떠한 방식으로 관여할 수 있는지, 초거대 질량 블랙홀의 형성과 은하 진화 차원에서 궁금한 문제다."

정애리 교수 그룹은 이 연구를 위해 은하단 중심 가까이에 '냉각류'(cooling gas flow)'가 존재하는, 즉 은하단 물질이 효율적으로 식고 있는 은하단을 선별했다. 이는 은하단의 X선 표면 광도 분포를 보면 된다. 은하단 중심에서부터 외곽으로 거리에 따라 X선 광도가 얼마나 급격히 떨어지는지가 관건이다. 급격히 떨어지는 경우에는 은하단 중심에 '냉각류'가 발달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정애리 교수 그룹은 '냉각류'가 발달한 은하단의 경우에는, 은하단 중심의 타원은하에 있는 활동은하핵이 아주 작은 제트(mini jet)를 가질 확률이 높다는 걸 밝혔다. 제트는 블랙홀의 회전축을 따라 방출되는 물질이며 특히 작은 규모의 제트는 블랙홀이 최근 활성화되었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 정 교수는 "은하단의 냉각류가 실제 거대 타원은하의 중심 블랙홀까지 도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하였다"라고 설명했다.

최근에는 냉각류가 발달한 아벨1644 은하단 중심에 대한 다파장 연구를 했고, 논문은 천체물리학저널에 게재될 예정이다. 천체물리학저널(APJ)은 천문학 분야의 최상위 학술지다. 이 연구는 KVN(한국), ALMA(칠레), VLA(미국 뉴멕시코)의 전파 관측자료와, 은하단 물질의 분포를 볼 수 있는 X선 영상을 이용한 결과다. 엑스선에서 관측되는 특정 구조(sloshing), 즉 가스의 충격(shock)을 따라 분자가스가 구름의 형태로 발견되었다. 은하 중심에서는 중성수소와 분자의 형태로 흡수선이 관측되었는데 이는 차가운 가스가 있다는 걸 암시한다. 또한 초장기선 전파간섭계인 KVN로 초거대질량 블랙홀 주변에서 미니 제트를 관측할 수 있었다. 이 모든 자료를 종합적으로 판단할 때, 아벨1644 중심에서 효율적으로 식고 있는 은하단 물질로부터 분자가스가 형성되고, 그 분자가스가 거대 타원 은하의 중심에 도달하였으며, 그 결과 블랙홀 활동을 촉진했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정애리 교수는 "이 연구는 내가 사용해온 다양한 스케일의 전파간섭계와 파장이 모두 이용된 결과라 의미가 있다. 더 나아가 은하 진화 분야에서 향후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한 메가파섹 스케일과 파섹 스케일 구조의 연관성을 다루었다는 측면에서 과학적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정애리 교수는 현재 자신의 연구 키워드가 '원자에서 분자까지'라고 말했다. 관측자로써 원자선 혹은 분자선을 통해 얻는 성간물질에 대한 부분적인 이해를 극복하고, 은하 진화에 관여하는 성간물질에 대한 종합적인 이해를 얻는 것이 목표라고 한다. 8월에 국제천문연맹(IAU) 회의가 부산에서 열리는 걸 알고 있느냐고 내게 물어왔다. 날짜를 확인해 보니 8월 2일에서 11일까지 부산 벡스코에서 예정되어 있다. 작년에 예정됐던 행사가 코로나 대유행으로 한 해 늦춰져 올해 개최된다. 정애리 교수는 국제천문연맹 총회에서도 자신이 목표하는 바가 반영된 학술발표를 할 예정이다. 천문학자가 된 건 어려서부터 별을 보는 걸 너무 좋아했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자랐기에 별이 쏟아지는 하늘을 보고 자라지 않았음에도, 우리가 어디에서 왔나하는 질문을 가슴에 품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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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준석

뒤늦게 '과학책'에 빠져 8년 이상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문과 출신의 중견 언론인. <주간조선>에 '과학 연구의 최전선'을 연재했고, 유튜브 채널 '최준석과학'을 운영한다. <나는 과학책으로 세상을 다시 배웠다> 저자이며, 조선일보 인도 뉴델리 특파원의 경험을 살려 <인도 싫어하거나 좋아하거나> 등 다수의 책을 썼고, <떠오르는 인도>를 우리말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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