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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퇴행 초래한 '반지성', 尹대통령이 먼저 손 내밀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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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퇴행 초래한 '반지성', 尹대통령이 먼저 손 내밀어야

[최창렬 칼럼] 반지성과 반정치 퇴치하려면

민주주의는 '다수의 지배(rule by many)'를 기본 원리로 하는 체제이다. 인민에 의한 지배라는 민주주의 체제는 항상 다수의 전제를 걱정해야 했다. 다수 지배 민주주의가 안고 있는 원천적인 난제인 다수의 횡포(the tyranny of majority)에 대한 견제는 소수 의견의 보호임은 말할 것도 없다.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반지성주의를 민주주의 위기로 지목했다. 반지성주의를 "국가 내부와 국가 간의 집단적 갈등에 의해 진실이 왜곡되고, 각자가 보고 듣고 싶은 사실만을 선택하거나 다수의 힘으로 상대의 의견을 억압하는 것"으로 정의했다. 반지성주의는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을 해치고 있으며 직면한 문제의 해결을 가로막고 있다"고도 했다.

반지성주의는 집단의 힘으로 지성을 가로막고 독재정치에서 상대를 폭력과 갖은 수단을 동원하여 배제하고 탄압하는 기제이다. 집단의 힘과 극단의 편향이 반지성을 지탱하는 동력이다. 칼 포퍼의 <열린사회와 그 적들>에서 전체주의와 극우주의 등의 적(敵)이 이에 해당한다. 미국의 반공주의인 매카시즘, 한국의 군사정권이 반공이데올로기를 동원하여 민주화를 탄압한 것들이 대표적이다. 세계적인 반지성주의는 지금도 도처에서 인류의 자유와 역사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

당면한 정치 프로세스의 관점에서 본다면 집권당이 된 국민의힘은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는 정치공간에서 의회 소수정파로서 입법을 통한 정책에서 한계를 절감할 것이다. 결국은 야당을 설득하고 최소한의 합의를 모색하는 것 이외에 왕도는 없다.

반지성의 외연을 확장하면 극단적 편향을 내장하고 있는 '내로남불'과 팬덤정치도 반지성주의의 범주에 포함된다. 인사청문회에서 후보자를 감싸는 정당과 이의 대척에 있는 정당들의 반대논리, 정파 간의 보편을 벗어난 상식 밖의 대립은 반지성이 초래하는 대표적 정치퇴행들이다. 반지성은 우리 사회 곳곳에서 독기를 뿜어내고 있다.

통합이 시대의 화두이지만 의견이 다른 정파를 적으로 인식하는 한 통합은 이루어질 수 없다. 미시적으로는 여소야대의 상황을 협치가 아니면 도저히 타개해 나갈 수가 없다. 정면돌파는 가능하지도 효율적이지도 않다. 반지성주의의 퇴치가 해법이라면 당장 집행력을 가진 행정권력이 입법권력에 손을 내밀어야 한다. 국민 여론에 눈 감으면서 반지성주의를 논하는 것은 사변적 유희에 다름 아니다.

또 하나 유념할 것이 있다. 다수의 횡포라는 측면에서 다수결 민주주의에서 합의제 민주주의로의 변화가 정치적 진전이지만 여야 정당 간 합의가 그들의 담합과 야합에 의해 종종 민심과 배치될 때도 많다는 사실이다.

반지성주의는 정치공간에서 사회에 존재하는 보편적 평균 수준을 벗어난 강변과 견강부회를 동원하여 갈라치기를 통해 지지를 끌어내는 전형적 구태를 의미한다. 윤 대통령이 다수 의석을 가진 민주당을 의식하여 확증편향에 의한 갈등과 다수의 억압을 언급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정권을 담당한 현실 정치인이 단순히 사회학적 접근과 분석적 차원에서만 언급했다고 보기 어렵다. 취임사는 향후 정치의 방향을 제시하는 중요한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2019년부터 보다 노골화되고 본격화된 진영 대결은 과거의 안보나 이념적 차원을 넘는 상대에 대한 증오를 내포하고 있다. 마치 조선시대 당쟁이 처음에는 공존의 틀에서 기능하다가 인조 이후 숙종 대에 와서는 상대에 대한 살육을 서슴지 않았던 당쟁의 경로와 비슷하다. 당시의 살육이 지금의 증오와 혐오로 대치됐을 뿐이다.

문재인 정권 기간 동안의 집권세력의 과도한 진영논리를 탓하는 것은 이제 무의미하다. 그래서 주권자는 정권을 교체했다. 반지성주의에 의한 한국정치의 왜곡을 바로잡기 위해 집권세력이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한다.

세계 10대 경제대국, 선진국 등의 장밋빛 진단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는 대결과 과도한 경쟁, 기득권 블록의 편협한 이기주의 등이 체화되어 있다. 진영의 이익에 압살된 정치가 이를 바로잡을 생각과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다. 한국사회에 반지성주의는 엄연히 존재한다. 이를 극복하지 않으면 한국사회의 질적 발전은 지속가능하지 않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5월 10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잔디마당에서 열린 제20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선서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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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렬

최창렬 용인대 교수는 다양한 방송 활동과 신문 칼럼을 통해 한국 정치를 날카롭게 비판해왔습니다. 한국 정치의 이론과 현실을 두루 섭렵한 검증된 시사평론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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