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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영의 아들이 박헌영의 딸을 만나다

['박헌영의 아들' 원경 대종사 이야기] 52~53화

52. '이정상'

"성진, 조용히 이야기 좀 했으면 하는데요."

김성동은 심각한 얼굴로 원경에게 말했다.

"정각, 오랜만에 만났는데, 무슨 얘기를 하려고 그리 심각한 표정을 짓나?"

"뜸들이지 않고 이야기할게요. 문인들 밥 사고 술사고 그러는 것 그만하세요."

"밥 사는 것이 어때서?"

"돈 낭비고요. 좋은 소리 듣지도 못해요. 제가 얼마 전 문인 몇 놈들과 대판 싸웠습니다."

"정각이 싸움을? 왜?"

원경은 정각이 싸웠다는 이야기에 놀라서 물었다.

"성진스님 때문이지요."

"아니 나 때문에? 왜?"

"어느 자리에 갔더니 이놈들이 당신이 돈 자랑한다고 조롱을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러면 얻어먹지를 말아야지 잔뜩 얻어먹어 놓고는 뒤에서 욕하느냐고 더러운 놈들'이라고 욕을 한 바가지 해주고 나왔어요."

원경은 자기에게 밥과 술을 얻어먹으며 아부하던 문인들이 뒤에서 자기를 욕했다는 이야기에 충격을 받았다.

"스님, 당신이 법명을 따온 <구운몽>처럼 그런 것들 다 허망한 꿈같은 거예요. 그 놈들 돈 떨어지면 다 사라질 놈들이에요."

"…"

"성진, 그리고 툭하면 마음에 안 드는 놈 끌고나가 주먹으로 패고 무용담처럼 이야기하는데, 그런 것도 그만하세요. 깡패도 아니고. 이정 선생님을 생각해서라도 그런 짓 하지 마세요."

▲ 원경과 깊은 우정을 나눠온 김성동 작가가 원경스님 입적 후 필자와 만나 이정상 등 원경과의 사연을 이야기하고 있다.ⓒ손호철

김성동은 작심을 하고 평소 하고 싶었던 말들을 토해냈다.

"박헌영 선생님도 단순히 아버지로서가 아니라 그 역사적 의미를 알고 모셔야지요. 사상가, 혁명가로서 박헌영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사람 만나는 것도 좋지만, 책을 읽고 공부해야 해요. 어린 시절 기구한 운명 때문에 제대로 공부 못 했지만, 그럴수록 더 노력해야지요. 성진 돌봐준 김삼룡 선생님 보세요. 제대로 교육을 못 받았지만, 혼자 엄청나게 공부해서 일본유학파, 유럽유학파, 최소한 경성제대 나온 인텔리들도 다 머리를 숙이게 만들고, 조선공산당 최고 이론가가 됐잖아요."

원경은 아무 말도 못하고 듣고만 있었다.

"성진, 지금은 신륵사 주지로 잘 나가고 있지만, 언제까지 그럴 것 같아요? 그렇게 되지도 않는 놈들에게 술 사주는데 낭비하지 말고, 아버지를 위해 쓰세요."

"아버지를 위해 <이정전집>을 준비하고 있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다른 것을 만들어야 해요."

"그게 뭔데?"

"'이정상'이요."

"이정상? 그게 뭔데?"

"예. 이정상을 만들어 매년 진보적인 작가들과 학자, 운동단체들에게 상을 주는 거예요. 그러면 박헌영 선생님의 이름은 계속 거명되고 기억될 수밖에 없어요. 문인들 대접해주는 돈을 아껴서 기금을 만들어 그 기금으로 이정상을 주는 것입니다."

"알았네. 생각해 보겠네."(최근 만난 김성동은 "이정상은 결국 실현되지 못 했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러나 반공주의가 지배하는 우리 사회에서 이정상을 준다고 할 때, 받겠다고 나설 문인, 학자들이 얼마나 될지 의심스럽다는 점에서 이정상은 현실성이 약하고 지나치게 이상주의적인 구상이다).

53.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서

"곧 모스크바공항에 착륙합니다. 시트벨트를 매주시기 바랍니다."

원경스님은 만감이 교차했다. 아버지가 조선의 독립과 혁명을 위해 공부했던 곳이자 배다른 누이가 살고 있는 모스크바에 도착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뛰었다. 소련 동구의 사회주의 체제가 무너지지 않았으면 상상도 못했던 것이 현실이 된 것이다.

1928년 29살의 박헌영은 일본 감옥에서 똥을 먹는 미친놈 흉내를 내 병보석으로 풀려난 뒤 두만강을 건너 소련으로 탈출했다.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모스크바에 와 공산주의자들의 세계최고의 학교인 국제레닌학교에 입학했다. 이로부터 63년이 지난 1991년, 원경은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 이곳에 온 것이다. 비록 호적은 아버지의 자식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어렵고, 여러 어려움 때문에 박병삼이 아니라 남궁혁으로 가호적을 얻었지만, 9촌 조카가 나서 영해 박씨 족보에 박헌영의 아들로 자신을 올리기로 했고, 러시아에 있는 아버지의 흔적과 혈육을 찾아 온 것이다.

레닌그라드 거리 49번지. 모스크바 국제레닌학교의 자리다. 그는 아버지가 세계 각지에서 선발되어 온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다니던 레닌학교의 교정을 걸었다. 교정을 거닐자 조국해방과 노동자해방을 위해 세계 각국 청년들과 밤새워 토론을 하던 아버지의 뜨거운 가슴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박비비안나. 박헌영이 열렬한 공산주의자였던 주세죽과 결혼한 뒤 일본감옥에서 미친놈 흉내를 내고 풀려나 소련으로 도주하는 과정에서 낳은, 원경보다 13살이 많은 박헌영의 딸이다.

그는 원경만큼 파란만장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평범한 삶을 살지도 않았다. 대부분의 유년기를 육아원에서 보낸 데다, 러시아에서 자란 만큼 성장과정에서 아버지 박헌영을 만나지 못했다. 게다가 1930년대 후반 주세죽이 위험분자로 몰려 유배를 가면서 어머니와도 멀어졌다. 하지만 좋은 음악교육을 받고 무용수로 활약하다가 은퇴했다.

▲ 러시아를 방문한 원경 스님이 박비비안나 가족과 만나 혈육의 정을 나누고 있다. ⓒ원경스님

원경은 처음으로 누이를 만났지만 언어의 차이 등으로 말이 통하지 않았다. 통역을 통해 자신을 소개하고 바비안나의 삶에 대해 물었다.

"누님, 모르시겠지만, 저는 원경이라고 하는 박헌영 선생님의 아들입니다. 선생님이 주세죽 씨와 헤어진 뒤 저의 어머니와 살다가 저를 낳았습니다. 헌데 누님은 어떻게 살아오셨는지요?" 

"나는 어려서부터 부모님과 떨어져 육아원에서 생활하고 자랐어요. 하지만 육아원에서 우리를 아주 잘 대해줬고, 아주 즐거운 기억이 대부분이에요. 어느 날부터 어머니가 찾아오지 않아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 싶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유배를 간 것이더군요. 2차 대전이 끝나고 조선이 해방된 후인 1946년, 그러니 내가 18살 때, 어머니가 아버지에 대한 <프라우다> 신문 기사를 오려 보내며 이분이 네 아버지라고 해서, 아버지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지요."

"누님, 아버지는 언제 만났나요?"

"1946년 아버지가 모스크바를 방문해서 처음 봤는데, 전혀 아버지라는 것이 실감이 안 났어요. 1949년 아버지가 북한 부수상으로 모스크바를 다시 방문해 내가 출연하는 발레를 구경한 뒤 북한에 초청해 최승희 무용소에서 한국 민속무용을 배웠지요. 아버지는 내가 한국에 남기를 원했지만 내가 한국어를 못하는데다가 러시아에서 하는 무용 일을 너무 사랑해 그럴 수 없었어요. 한참 뒤에 아버지의 비극적 죽음을 알게 됐지요."

▲ 박길룡 전 북한 외무성 차관이 러시아에서 원경을 만나 박헌영이 1957년 7월 19일 처형당했다는 것을 알려줬다. ⓒ원경스님

"그랬군요. 어머니는요?"

"1938년 스탈린 정권에 의해 위험분자로 몰려 중앙아시아로 유배 갔던 어머니는 1953년 나를 보기 위해 몰래 모스크바로 왔다가 병사했어요. 나는 당시 지방공연 중이어서 남편이 대신 임종을 지켜봤어요. 그래도 무덤이라도 있는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행복한 편이지요."

"나무석가모니불"

"…"

"누님, 저를 보니 기분이 어떠세요?"

"나에게 동생이 있다는 것을 생각도 전혀 못 해 본 상황에서 동생을 만나니까 마치 아버지를 만나는 것 같이 기뻐요."

통역을 통해 누나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뒤 원경은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누나에게 해주었다. 누나는 동생 원경의 비극적인 삶에 눈물을 흘렸다. 환갑을 넘긴 박헌영의 딸과 50대에 들어선, 박헌영의 배다른 아들 원경 간의 극적인 만남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원경은 누님 비비안나와의 만남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태어나면서부터 다른 문화권에서 살아왔으니까 서로 언어도 통하지 않고 그저 눈만 쳐다보고 손만 잡고 있는데, 참 뭐랄까 불쌍하고 가련하고 그랬어요. 그런 생활을 해본 사람, 그런 고통을 받은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거예요."

박비비안나는 그해 12월 원경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원경과 함께 아버지의 고향인 예산을 찾아 그곳의 흙을 가져다가 모스크바에 있는 어머니의 묘에 뿌려줬다. 주세죽은 1989년 소련 정부에 의해 복권이 됐고 2007년 노무현 정부에 의해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 러시아에 있는 박비비안나에게 전달된 주세죽 훈장 ⓒ영해박씨 종친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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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철

화가를 꿈꾸다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로 진학했다. 독재에 맞서다 제적, 투옥, 강제 징집을 거쳐 8년 만에 졸업했다. 어렵게 기자가 됐지만, '1980년 광주 학살'에 저항하다 유학을 갔고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일하며 진보적 학술 활동과 사회운동을 펼쳐왔다. <국가와 민주주의>, <한국과 한국 정치>, <촛불혁명과 2017년 체제> 등 이론서와 <마추픽추 정상에서 라틴아메리카를 보다>, <레드 로드-대장정 13800KM 중국을 보다> 등 역사 기행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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