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가호적
'남궁혁'
1972년, 원경은 수원법원 앞에서 서류 하나를 잡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것은 수원법원이 판결로 승인해준 가호적이었다. 박헌영과 아지트키퍼 사이에서 혼외자로 태어나 숨어 살아온 원경이 출생 31년 만에 대한민국 법으로 보호받는 국민이자 시민이 된 것이다.
"한산스님, 그리고 아버지, 어머니, 저도 이제 이 땅의 국민이 됐습니다."
가호적을 받아든 원경은 하늘을 올려보며 속으로 소리 질렀다. 그러고 나자, 무심천 출생으로부터 지하로 잠적한 아버지와 친정에 잡혀간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를 따르는 공산당원들 사이에서 자라난 어린 시절, 1950년 아지트 습격사건과 홀로 버려져 수제비를 만들어먹고 살아남은 세월, 한산스님을 만나 들어간 지리산과 삭발, 한국전쟁과 함께 목격한 수많은 학살의 현장들, 인천상륙작전 후 다시 들어간 지리산에서 보낸 빨치산 생활, 광양경찰서에서 보낸 한 달, 이현상 아저씨의 죽음, 아버지의 죽음과 복수를 위한 특수부대 대리입대, 탈영과 정식 불교귀의, 어머니와 만남과 음독자살, 방황의 나날들과 국토건설단 생활 등 그간의 파란만장했던 자신의 짧고도 긴 30여년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나가면 제일 먼저 호적부터 만들어야겠다."
현판사건으로 감옥에 있으면서 원경은 여러 책을 읽고 많은 생각을 했다. 특히 결심한 것은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서든 호적을 만들어야겠다는 것이었다. 어머니의 증언 등을 통해 박헌영의 아들이라는 원적을 찾으려고 노력해 볼까도 생각했지만, 그럴 경우 자신의 신분이 밝혀지고 세상이 시끄러울 것 같아 포기했다. 대신 오랫동안 절에서 생활한 만큼 절과 스님들의 도움을 받으면 될 것 같았다.
수원 중심가에는 정조가 계획도시 화성을 건설하면서 궁으로 쓰기 위해 지은 600여 칸 규모의 화성행궁이 있다. 행궁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불교를 포교하기 위해 세운 수원포교당이 있다. 감옥에서 나온 뒤 원경은 이곳에서 생활했다. 아니 단순히 이곳에서 생활한 것이 아니라 주지실과 주지자리를 '점령'해 버렸다.
"정각, 아이고 얼마 만인가? 어서 오게"
정각(소설가 김성동의 법명으로 1972년은 종교소설 당선작인 <목탁조> 때문에 승적을 박탈당하기 전이었다)이 어느 날 수원포교당에 찾아가자 원경이 주지실을 차지하고 있었다. 원경을 보자, 몇 년 전 그를 안성 칠장사에서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이 났다. 당시 정각은 아버지 등이 한국전쟁 중 처형당한 좌익집안 문제 등으로 고민을 하다 승려의 길을 택한 뒤 괴로워하고 있던 때였다.
"나, 성진이야."
원경은 절밥도 훨씬 많이 먹었고 나이도 6살 많아 정각을 보자마자 반말을 했다. 정각은 성진을 보는 순간 스님이라기보다는 '천군을 질타하는 장수의 풍모'라는 느낌이 들었다. 보자마자 반말까지 하니 더욱 그런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 속에는 깊은 슬픔과 바닥 모를 어둠을 간직하고 있어, 자신과 비슷하게 '맺혀 있는 것이 많은 중생'이구나라고 생각했다.
"성진, 아니 언제 주지가 되셨어요?"
"임명장 받은 것은 아니고 내가 쳐들어 와 주먹으로 차지해 버렸지."
"아이고! 어쩐지 들어오는데 포교당 분위기가 살벌하다 했더니…"
"허허허!"
원경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호방하게 웃었다.
"그런데 성진스님이 언제부터 주지자리 같은 걸 탐하셨습니까?"
"내가 도저히 호적 없이 살기가 뭐해서 가호적을 내려고 하는데, 그러려면 주지자리가 필요해서…"
"아 그런 사연이…"
"제가 호적이 없어 새로 호적을 내려고 하는데 스님, 좀 도와주십시오."
원경은 수원포교당을 차지한 뒤 강원도에서 가깝게 지냈던 스님 등 주변의 스님들을 찾아가 이들의 보증을 받아서 가호적 신청을 했다. 신청을 하려면 적합한 사유가 있어야 하는데 자신의 이야기를 그대로 쓸 수는 없었다. 그럴 듯한 이야기를 만들어야 했다.
"북한에서 태어나서 한국전쟁 때 혼자 내려온 것으로 하면 어떨까요?"
아는 스님이 좋은 아이디어를 내주었다.
"그럽시다. 한국전쟁 중 언제? 아, 1.4 후퇴 때로 하면 되겠네요."
북한에서 태어나 1951년 1.4 후퇴 때 혼자 내려온 것으로 하기로 했지만, 나이가 문제였다. 1951년에 내려왔다면 10살 때인데 혼자 내려왔다고 하기에는 너무 어렸다. 그리고 자신의 생년월일인 1941년으로 신고를 했다가는 예비군훈련을 받아야 하는 것도 문제였다. 예비군 훈련을 면제받으려면 35살이 되어야 하니 1937년생으로 하기로 했다. 그러면 1.4 후퇴 때도 14살이라 이야기가 되는 것 같았다. 박헌영의 아들 박병삼은 1937년에 원산에서 태어나 1.4 후퇴 때 혼자 월남한 '천애고아 실향민' 남궁혁으로 다시 태어났다(원경은 2000년 수원지방법원의 호적정정허가를 통해 박헌영과 정순년의 자 박병삼으로 법적으로 자신의 신분을 회복했다).
43. 납치
"나는 오늘 19시를 기하여 국회를 해산하고 정당 및 정치활동의 중지 등 현행헌법의 일부조항 효력을 정지시킨다."
1972년 10월 28일 밤, 원경은 수원 포교당에 어둠속에 누워 며칠 전 있었던 박정희의 10월 유신 발표를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의 신분을 생각해, 정치문제와 가능한 거리를 두고 살아왔지만, 다시 반동과 벌거벗은 폭력이 시대가 시작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해졌다. 10.17 비상계엄조치와 함께 통행금지시간이 밤 12시에서 10시로 당겨진 만큼 밖에는 오가는 차량이나 사람이 없이 적막이 흘렀다. 평소 일찍 잠자리에 들고 일찍 일어나는 것이 습관이 된 원경은 잠이 들었다.
"늦으셨습니다."
11시가 넘었을 때 원경은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에 잠이 깼다. 같이 방을 쓰는 스님이라고 생각해 잠결에 인사를 했지만 아무 소리가 없었다. 이상한 느낌이 들어 불을 켜자 군화가 보였다.
"어떤 새끼야!"
어려서부터 배운 무술과 UDT 출신답게 본능적으로 몸을 일으키며 돌려차려고 하자, 계급장이 없는 군복을 입은 건장한 청년은 놀라 뒤로 물러섰다. 갑작스러운 소동에 밖에 있던 일행들이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군복을 입은 두 명이 들어오고 마지막으로 사복을 한 사람이 들어왔다.
"우린 수경사(수도방위사령부의 약자)에서 나왔습니다. 몇 가지 물어볼 것이 있으니, 여기는 그렇고 옷을 입고 나가시지요."(원경은 이들이 수경사라고 말했지만 군 수사기관인 보안사-현재 기무사-에서 나온 것이라고 회상했다.)
대장처럼 보이는 사복을 한 사람이 점잖게 용건을 밝혔다. 갑작스러운 방문에 당황했지만, 원경은 옷을 입고 그를 따라 나섰다. 그를 따라 나서며 "혹 내가 군대시절 잘못한 것이 있나?" 빠르게 머리를 돌려봤다. 원경이 그를 따라 나가자, 뒤에 남아 있던 병사들은 방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원경의 물건이라는 것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뒤지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성진스님, 무슨 일입니까?"
밖으로 나가자 스님 한분이 놀라서 물었다.
"별 일 아닙니다. 이분들과 차 한 잔 하고 오겠습니다."
밖으로 나가자 당시로는 고급차인 뉴코티나가 세워져 있었다. 검은 천으로 가렸지만 준장표시가 달려 있었다.
"우리가 타고 온 차인데, 조용한 곳에 가서 이야기하시지요."
사복 입은 사람이 앞에 타자, 처음 방에 들어왔던 청년이 뒷문을 열어주며 정중하게 말했다. 정중한 태도에 깜빡 경계심을 놓고 뒤 자리에 탔다. 원경이 타자 군복을 입은 건장한 청년들이 원경의 좌우로 탔다. 군복을 입은 다른 한 친구가 시동을 걸어 차가 출발하자마자, 오른 쪽에 앉은 친구가 수갑을 꺼내 원경의 손목에 채웠다.
"야 이 빨갱이 새끼!"
수갑이 채워지자마자 양쪽에서 가슴과 옆구리 등으로 주목과 팔꿈치공격이 날아들어왔다. 원경이 차에 타자마자 이들의 태도가 표변한 것이다.
'빨갱이 새끼라니? 군대 시절의 문제가 아닌가? 혹시 이놈들이 내 출신을 아는 것인가?' 원경은 무술로 단련된 몸으로 이들의 공격을 받아내며 속으로 여러 생각을 했다. 비상계엄까지 선포된 마당에 이러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은 것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생겼다.
"야 이 새끼야 내려!"
이들은 서울 쪽으로 달려가던 차를 어느 나지막한 산 밑의 불 꺼진 공장 옆 공터에 세운 뒤 원경을 끌어내렸다. 그리고는 마구 짓밟기 시작했다.
"시팔, 이대로 죽은 수는 없지."
원경은 엎어진 채로 발로 사복 입은 놈을 차서 넘어트렸다. 넘어진 대장의 목에 수갑을 걸로 당기자 그는 숨을 쉬지 못하고 헉헉거렸다.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죄진 것 없다. 헌데 개 새끼들아, 니들 왜 이래? 문제가 있거든, 나를 정식으로 경찰서로 끌고 가서 정식으로 취조해야지 이게 뭐야. 너희들이 원하는 것이 뭐야?"
"야 인마, 대장님 풀어주고 이야기하자."
놀란 군인들은 원경이 대장의 목을 더 조를까 봐,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고 원경을 달래기 시작했다. 원경이 진정하는 기색을 보이자, 본색을 드러냈다.
"너 이 새끼, 남궁혁이 아니라 박헌영 빨갱이새끼 자식이잖어?"
결국 올 것이 오고 만 것이다. 하늘이 노랬다.
"어떻게 이들이 내가 박헌영 자식이라는 것을 알았지?"
그 경위가 어찌된 것인지 모르지만, 자신의 정체를 들킨 것이다. 이제 부인해 보아야 소용이 없을 것 같았다.
"그래 맞다. 헌데 우리 아버지는 김일성이 죽였고 나는 호적도 없는데 어떻게 하냐? 가호적이라고 만들어 살아야지. 씨발놈들아, 내가 살 수 있는 길이 그것 밖에 더 있냐?"
원경은 그간의 한을 토해 내듯 절규했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귓속말을 하더니 원경을 달랬다.
"알았다. 네 말대로, 가서 정식으로 조사를 할 터니, 대장님 풀어줘라."
원경이 다시 차에 타자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두 군인이 양 옆에 탔다.
"이 새끼가 깡을 부려! 너 한 번 죽어봐라!"
두 군인은 다시 원경을 양쪽에서 무차별로 패기 시작했다. 열을 받은 원경은 운전석이 있는 앞쪽으로 몸을 기울여 수갑 찬 손으로 핸들을 확 틀었다. 차는 왼쪽으로 급회전을 하고 도로 밑으로 떨어지려다가 간신히 섰다.
"너희 개새끼들, 다 죽기 싫으면 내 수갑 풀어! 시발 난 오늘 죽어도 잃을 것 없는 사람이야."
놀란 대장은 부하들에게 수갑을 풀어주라고 지시했다. 구타가 그쳤고 차는 안양에 들어서 '신진여관'이라는 간판을 단 건물로 들어갔다. 이곳에서 원경은 자신의 출생을 비롯한 가족관계와 성장과정에 대한 조사를 받았다. 박헌영 아들이라는 그의 존재가 대한민국의 공안기관에 처음으로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조사 다 끝났으니 나가도 된다. 우리가 보고 있으니 사고치지 말고 얌전하게 잘 살아라."
"자는 사람 잡아와서 차비도 없으니, 택시 값은 주시지요."
"이 놈, 역시 박헌영 피를 받아서 그런지, 배짱 하나는 대단하구만."
"수원 포교당 갑시다."
택시비를 받아 택시를 타고 수원으로 향하자 긴장이 풀린 탓인지 온 몸이 안 아픈 곳이 없었다. 그리고 끝나지 않는 자신의 기이한 운명에 눈물이 흘렀다. 그러나 눈물을 닦고 생각해보니 이제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살 필요가 어느 정도는 없어졌다는 점에서 묵은 체증이 가라앉듯이 홀가분하고 시원한 생각이 들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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