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말에 정의당은 "다당제 민주주의 정치교체를 위한 제3정치 연대"를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정의당은 기초의원 중대선거구제 전면 도입 같은 정치제도 개혁을 이 연대의 한 축으로 제시하면서 동시에 정의당의 대선 기조이기도 했던 "불평등, 기후위기, 차별의 극복"을 또 다른 축으로 제안했다. "다당제 민주주의 정치교체와 노동, 녹색, 평등과 공존의 가치에 동의하는 모든 정치세력, 노동·시민사회 후보들과 제3정치연대를 구성"하여 지방선거에서 "후보 단일화 및 공동정책과 슬로건, 지역별 통합 선대본을 추진"하겠다는 것이다.
정의당의 이 구상은 대통령선거가 끝나고 진보정당운동에서 나온 가장 적극적인 메시지이다. 그 내용도 시의적절하다. 그러나 이 방침이 힘 있게 추진되기 위해서도 새삼 아프게 짚어야 할 것들이 있다. 이는 지방선거를 앞둔 탓에 아직 심도 깊게 진행되지 못하는 정의당의 제20대 대선 평가와도 관련된다.
가장 신랄하게 지적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정의당이 다당제 민주주의를 주창함에도 더불어민주당, 국민의 힘, 두 당이 독점하는 정치가 아닌 다당 구도가 발전해야 하는 이유를 시민들에게 설득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정의당이 단지 "다당제 민주주의"의 당위를 계속 되뇌는 것이 아니라 다당 정치가 발전해야 할 살아 있는 증거가 되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것이다. 대선 전에도 이것이 정의당의 가장 큰 문제였고, 대선에서도 이는 극복되지 못했으며, 지금도 답보 상태이다.
물론 말로는 "불평등, 기후위기, 차별"을 이미 강조하고 있고, "노동, 녹색, 평등과 공존의 가치" 역시 표방한다. 하지만 대중정당이라면 굳이 이런 말을 매번 반복하지 않아도 유권자들이 거의 자동으로 정의당에서 이를 연상할 수 있어야 한다. 안타깝게도 정의당은 한국 정치에서 아직 이런 위상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노동계급 정당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진보정당
제6공화국 대선에서 진보정당은 늘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러나 이번 대선에서 정의당을 비롯한 진보정당들이 거둔 성적은 역대 다른 대선들과 비교해도 특히 저조했다. 만약 정의당 등이 뭔가를 좀 달리 했다면, 결과가 달랐을까?
제20대 대선에서는 이런 식의 평가는 별 의미가 없다고 본다. 전략이나 구호가 약간 더 나았다고 결과가 달라지기에는 기본 구도 자체가 너무 힘겨웠다. 2012년 대선만큼이나, 아니 어떤 점에서는 그때보다 더 강력하게 양대 정당 후보의 구심력이 작동했기에 진보정당 후보들의 지지를 크게 확대하기는 어차피 불가능했을 것이다. 후보로 누가 나왔든, 핵심 정책이나 구호로 뭘 내세웠든 말이다.
하지만 득표에는 크게 변화가 없었을지라도 뭔가를 더 남기는 선거는 가능했고, 또한 절실히 필요했다. 물론 진보정당들은 이번 대선에서 양대 진영에 흡수되지 않고 완주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상당히 중요한 것을 남기기는 했다. 2012년 대선처럼 이마저도 못했다면, 진보정당운동은 더 큰 위기에 빠졌을 것이다. 정의당 심상정, 진보당 김재연, 노동당 이백윤, 세 후보는 이 점에서 최소한의 역사적 역할을 했다.
그러나 진보정당운동의 반등을 위해 미래의 자원으로 더 남길 수 있고 더 남겨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게 분명히 있다. 정의당이 내세웠던 구호로 표현한다면, "불평등, 기후위기, 차별"을 극복할 정당은 진보정당뿐이라는 점을 확실히 각인시켜야 했다. 완주를 통해 다당 정치의 진심을 증명할 뿐만 아니라, 유권자들의 뇌리에 이런 인상을 뚜렷이 새김으로써 양대 정당 말고 다른 정당이 더 존재하고 성장해야 할 필요성을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을 만들어야 했다. 한데 아무리 봐도 이 점에서 진보정당들은 실패했다.
기후위기 쟁점과 관련해서는 한국 사회 여론 지형 전체에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있겠고, 주로 여성 문제가 부각된 차별 쟁점 관련해서는 더불어민주당이 선거전 막판에 진보정당의 성취를 재빨리 흡수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불평등 쟁점과 관련해서는 이런 상황 논리가 통하지 않는다.
특히 정의당은 이번 대선을 계기로 여성과 소수자들의 정당일 뿐만 아니라 노동계급의 정당임을 드러낼 수 있었고, 반드시 그래야만 했다. 오늘날 불평등 문제란 자본주의 사회가 계급 사회임을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것에 다름 아니며, 이런 현실을 교정하자면 노동계급을 대변할 정당이 반드시 필요하다. 역사 속에서 진보정당은 이런 노동계급 정당으로 인정받음으로써 가장 기본적이면서 또한 가장 강력한 존재 의의를 확보해왔다. 이는 21세기 한국 사회의 진보정당들에도 예외일 수 없다.
정의당은 우선 핵심 공약과 구호를 통해 이 과제에 도전할 수 있었다. 실제로 정의당 내 대선 후보 경선이나 심상정 후보의 초기 선거운동에서는 이런 도전을 이끌만한 진지한 비전들이 여럿 나왔다. 기존 근로기준법 적용 대상을 훨씬 뛰어넘어 노동권을 보장한다는 "일하는 시민 모두를 위한 신노동법"이 제시됐고, 국가가 어떠한 수단을 동원해서든 의무적으로 완전고용을 보장해야 한다는 일자리보장제 구상도 나왔다. 이들은 하나같이 21세기에 노동계급 정당이고자 하는 세력이 진지하게 고민하고 추진해야 할 내용이었다.
그러나 선거전이 본격화하면서 전면에 노출된 것은 이런 비전들이 아니라 "주4일제"였다. 정의당 심상정 후보의 플랜카드에 큼지막하게 박힌 핵심 구호가 다름 아닌 "주4일제 복지국가"였다. 물론 노동시간 단축은 전통적으로 노동계급의 가장 중요한 요구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지금 난마처럼 얽힌 노동 문제를 풀어나가기 위해 첫 번째로 강조해야 할 고리가 노동시간 단축인지는 더 따져봐야 한다. 게다가 노동시간 단축이 하필이면 "주4일제"로 표현된 것도 논란거리다. "주4일제"란 주로 사무실에서 일하는 화이트칼라에게 친숙한 노동시간 표현 방식이다.
결과적으로 "주4일제 복지국가" 구호는 정의당이 여전히 정규직, 화이트칼라를 주된 지지 집단으로 설정한다는 인상을 주었다. 또한 당장의 일자리나 노동 안전 등이 관심사인 계층에게는 상당히 태평한 정치 세력이라는 느낌마저 주었다. 국회에서 무엇보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을 위해 노력해온 정당에게는 상당히 억울한 평가일 수 있고, 제20대 대선 정의당 공약집에 실린 신노동법, 일자리보장제 같은 풍부한 대안을 무시한 처사라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게 착시라 하더라도 이 착시를 유발한 것은 정의당 자신이다.
한편 정의당을 비롯한 진보정당들에게 상당한 기회였으나 결국 무산되고 만 또 다른 아쉬운 계기가 있었다. 민주노총과 진보정당들이 참여한 진보진영 단일후보 운동이 그것이다. 대선을 앞두고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진보진영 후보 단일화를 이뤄내자는 주장이 제기됐고, 실제로 구체적인 단일후보 선출 방안을 놓고 협상이 전개되기도 했다. 그러나 진보정당들이 1월까지도 좀처럼 이견을 좁히지 못한 탓에 이 시도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돌이켜 보면, 이 기회를 살리지 못한 것은 커다란 실책이었다. 어떻게든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참여하는 방식으로 진보진영 단일후보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면, 어땠을까? 그랬더라도 진보정당이 받은 득표 총합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대선 이후에 진보정당운동이 마주하게 된 전반적인 가능성의 양상은 전혀 달랐을 것이다. 적어도 ‘노동계급 정치세력'이 다당 정치의 필수 구성 요소로서 널리 인정받았을 것이며, 따라서 정의당이 내놓은 "다당제 민주주의 정치교체를 위한 제3정치 연대" 같은 구상의 위상도 지금과는 확실히 달랐을 것이다.
원내정당 체질에서 벗어나 새 정당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
왜 이런 한계와 실패가 나타났는가? 나는 특히 정의당과 관련해 지난 십수 년 동안 쌓여온 원내정당 체질을 지적하고 싶다. 국회 내에서 몇몇 국회의원이 벌이는 활동이 당 일상활동의 거의 전부가 되어버린 것이 근본 문제라는 이야기다. 앞에 지적한 이번 대선의 두 문제, 즉 "주4일제" 구호와 진보진영 단일후보 무산도 이와 직결된다.
다른 훌륭한 노동 공약들이 있었음에도 "주4일제"만 부각된 것은 사회관계망서비스 여론 때문이었다. 정의당 내 대선 후보 경선 때부터 일부 사회관계망서비스를 중심으로 심상정 후보의 "주4일제" 공약에 유독 호응하는 여론이 일었다. 이런 서비스에 상대적으로 더 빈번히 접속하는 젊은 화이트칼라의 성향이 반영된 결과였다. 다른 정책에는 별다른 반응이 없는데 "주4일제"만은 일정한 반향이 있으니 정책 결정자 입장에서는 이를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주4일제 복지국가"가 대선에서 정의당을 대표하는 비전이 되었다.
여기에서 문제는 사회관계망서비스 말고 정의당이 노동 정책에 관해 소통할 수 있는 다른 창구가 없었다는 점이다. 평소에 플랫폼 노동자들이나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함께 실천하고 토론하는 통로가 마련되어 있었다면, 이런 곳에서 확인하는 반응은 또 달랐을 것이다. 그랬다면 비록 일부 사회관계망서비스에서 특정 정책이 별난 호응을 받았다 하더라도 다른 곳의 반응까지 포함해 보다 종합적인 결론을 내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 통로가 없었다. 일상시기에 노동 현장과 접촉해 이런 교류의 장을 만들어놓지 못했던 것이다.
진보진영 단일후보 무산 역시 근본 원인은 일상활동에서 찾아야 한다. 대선을 코앞에 두고 정의당과 진보당이 벌인 신경전만 따져서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 누가 더 잘못했는지, 누가 더 오만하고 어리석었는지 따지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결국은 일상시기에 서로 교류하고 연대하며 신뢰를 쌓지 못했기에 비상시기에 아무것도 함께 이뤄낼 수 없었던 것이다. 평소에 진보정당연합이라는 틀을 만들어 공동실천의 경험을 축적하지 못한 데서 원인을 찾아야 한다. 그래야 앞으로 똑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을 수 있다.
다른 진보정당은 몰라도 정의당은 이 경우에도 원내정당에 매몰된 탓이 컸다. 진보당, 녹색당, 노동당 등이 원내 정당이었다면, 정의당이 그토록 교류와 연대에 무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머지 정당들이 다 원외에 있고 정의당의 시야는 원내에 갇혀 있었기에 진보정당연합이 필요하다는 생각 자체가 별로 없었다. 그리고 이런 한계가 대선 같은 결정적인 국면에 발목을 잡았다.
이런 점에서 정의당은 원내정당 체질에서 벗어나 새로운 정당 모델을 다시 구축하지 않는 한 앞으로 미래를 열 수 없을 것이다. "불평등, 기후위기, 차별을 극복"하는 정당이라고 자임하는데도 그렇게 인정받지 못하는 이유가 이 문제와 직결됨을 확인해야 한다. 이 사실을 직시하고 이와 정면대결하지 않는다면, 모처럼 내놓은 "다당제 민주주의 정치교체를 위한 제3정치 연대"도 일회적인 선언이나 제안에 그치고 말 것이다.
현실정치 논리로 봐도 그렇다. 더불어민주당은 원내에 170석 이상을 지닌 야당이 됐다. 100석도 안 되는 의석으로 원내에서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던 제18대 국회(2008-2012, 이명박 정부 시기)의 민주당이 아니다. 유권자 입장에서도 원내 거대 야당이 있는데 굳이 조금 더 센 이야기를 하는 6석짜리 야당에까지 눈길을 보내며 ‘다당 정치'에 손을 들어줄 이유가 없다. 정의당이 존재 의의를 지니려면, 같은 무대에서 노는 약소 세력이 아니라, 전혀 다른 무대에서 다른 역할을 하는 세력이 되어야만 한다.
앞으로 정의당을 비롯한 진보정당운동 전반의 최대 약점이 될 리더십 문제와 관련해서도 이 점은 중요하다. 민주노동당이 만들어낸, 가장 유망했던 두 지도자 중에서 이제는 노회찬도 없고, 심상정도 예전 같지 않을 것이다. 새로운 지도자군이 대두해야 하는데, 이들이 성장할 무대는 결코 여의도 국회는 아닐 것이다. 노동운동을 비롯한 사회운동들과 함께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내고, 불가능할 것만 같은 진보정당들의 교류와 연대를 성사시키며 신뢰를 일궈가는 과정에서만 그런 지도자군이 부상할 것이다.
당장 지방선거를 앞둔 지금부터 정의당은 이런 시대적 요청에 답해야 한다. 정의당은 "다당제 민주주의 정치교체를 위한 제3정치 연대"라는 자신의 제안이 실은 자당의 일대 변신을 요구한다는 점부터 뼈저리게 확인해야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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