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김일성을 향한 복수의 다른 길을 찾다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김일성을 향한 복수의 다른 길을 찾다

['박헌영의 아들' 원경 대종사 이야기] 34~35화

34. 음독자살

"여기가 어디지요?"

눈을 뜨자 보이는 것들이 희미했다. 시간이 흐르며 초점이 맞자, 흰 옷을 입은 간호사였다.

"아 정신이 드셨네요. 여긴 원주의료원입니다."

눈을 뜬 원경은 자신의 팔에 수액을 주사하는 주사바늘이 꽂혀 있고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내가 왜 이러고 누워있지?"

몸 움직이려 했지만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아직 일어나시면 안 됩니다."

간호사는 놀라서 원경을 저지했다.

"제가 얼마나 이렇게 누워있었지요?"

"14일 입니다. 스님, 살아나신 것이 기적입니다. 몸이 워낙 건강해 살아나셨지 안 그러면 이미 저 세상으로 갔을 것입니다. 그리 약을 많이 드셨으니…."

"아~ 목숨을 끊는 것까지도 내 맘대로 되지 않으니, 아 기구한 내 인생아."

원경은 눈물을 흘렸다.

▲ 원경이 음독 후 2주만에 께어난 원주의료원 ⓒ손호철

얼마 전 생후 처음으로 어머니를 만났지만, 원경은 즐겁지가 않았다. 서먹서먹하고 정이 들지 않았다. 특히 자신에게 어머니가 있었다는 사실 그 자체가 너무 충격적이었다. 아버지는 그래도 5살 때 여러 번 봤고 계속 이야기를 들었지만 어머니는 본 적도 없고 아무도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다. 따라서 어머니라는 존재는 그의 삶 속에, 아니 생각 속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한데 갑자기, 그것도 어린 아이를 업고 나타나자 원경은 너무 큰 충격에 빠졌다.

게다가 어머니의 기구한 사연을 듣고 보니 자신의 인생이 너무 비참하고 덧없이 느껴졌다. 왜 나는 남처럼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학교에 다니고 사람답게 살지 못하는 것인가? 정식 결혼이 아니어서 호적도 없이 태어났고 산과 절을 전전하다가 군대마저도 남의 이름으로 가야했다. 게다가 대신해 군대 가준 친구가 사고를 쳐 대리입대가 발각이 돼 탈영을 했고 한산스님의 권유에 따라 진짜 중이 되기 위해 제대로 머리를 깎고 수계까지 받았지만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다. 그 같은 상태에서 어머니까지 나타나 그의 가슴에 풍랑을 일으켰다.

"잠을 잘 못 이루는데, 수면제 좀 주세요."

원경은 원주 시내의 약국을 다니며 수면제를 사모으기 시작했다. 원주 시내에는 한 처사가 꿈에 부처님의 현몽을 받고 약수터에 지은 영천사가 있다. 원경은 이 절에 앉아 불경을 외어 보았지만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원경은 다시 시내로 나가 수면제뿐 만이 아니라 청산가리의 일종인 비상도 구했다. 수면제와 소주를 같이 먹으면 효과가 더 있을 것 같아 소주도 한 병 사서 승복 안에 숨겼다.

절로 들어온 원경은 소주 한 병을 한 번에 들이켰다. 하지만 술이 취하기는커녕 정신은 더욱 맑아졌다. 원경은 비상을 꺼내 미리 준비한 배춧잎으로 쌌다. 비상을 그냥 먹으면 목구멍만 타고 죽지 않는다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면제 40알을 한꺼번에 움켜쥐었다.

이를 삼키려고 하자, 수많은 얼굴들이 눈앞으로 지나갔다. 자기와 생사고락을 같이 한 한산스님이 제일 먼저 떠올랐다. 이어서 혜화장에서 봤던 안경을 쓰고 양복을 입은 아버지 박헌영, 지리산에서 같이 생활한 이현상 아저씨, 어려서 자기를 키워준 큰아버지 부부와 김삼룡 아저씨 부부, 이주하 아저씨와 정태식 아저씨, 스승인 송담스님, 성월스님 등 자기를 거둬 준 수많은 스님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머니가 나타났다. 그리고 노근리와 영산면에서 학살당해 썩어 가던 수많은 민초들이 떠올랐다.

"한산스님, 송담스님, 못난 제자는 이제 떠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원경은 손에 쥐고 있던 배추잎과 수면제를 입 안에 털어 넣었다. 

▲ 원경이 어머님을 만난 뒤 신세를 한탄하며 음독한 원주 영천사 ⓒ손호철

35. 울릉도에서 복수심을 버리다

"병삼아, 이거 마셔라!"

"스님, 이거 뭐에요? 냄새가 지독한데…."

"잔말 말고 살려면 마셔라."

원경의 음독소식을 듣고 달려온 한산은 원경에게 노란 액체가 든 사발을 내밀었다. 스님이 시키니 마셨지만 냄새가 지독했다.

"스님, 이게 뭐에요?"

"마당에 있는 오줌통에서 퍼온 오줌이란다."

"예? 오줌이요?"

오줌이라는 말을 들으니 마신 것을 다시 토하고 싶어졌다.

"그렇다. 네가 마신 약들을 세척하느라고 네 식도와 위가 크게 상했는데 거기에는 오줌이 최고라는 것이 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민간요법이다."

토하고 싶었지만, 이상하게 속이 편해졌다. 원경은 언제 죽으려고 약을 먹었느냐는 듯 수시로 오줌통에서 오줌을 퍼서 마셨다.

"스님, 동해바다의 일출이 정말 멋있네요!"

"그래 여기가 우리나라에서 제일 먼저 해가 뜨는 곳이라는데, 일출이 정말 장관이구나."

원경의 몸이 회복되자 한산스님은 원경을 데리고 울릉도로 가는 배에 몸을 실었다. 포항을 떠나 열시간동안 파도에 시달린 끝에야 울릉도에 도착했다. 다음 날 이른 새벽, 한산은 원경을 데리고 도동항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대원사를 출발해 울릉도의 정상인 성인봉으로 향했다.

지리산 시절과 달리 한산스님은 환갑이 가까워지는 만큼 원경보다 뒤쳐지기 시작해 원경은 속도를 줄여야 했다. 오랫동안 지리산에서 단련이 됐고 UDT 특수훈련을 받은 몸이지만, 어둠 속에서 원시의 숲을 헤치고 가파른 산길을 거쳐 해발 984미터의 정상에 오르는 길은 쉽지 않았다.

3시간 반을 등산하자 정상에 도착했다. 어둠 속에서 숨을 고르고 나자 바다위로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글이글 타오르며 솟아오르는 해를 보자, 음독까지 했던 마음의 번뇌가 사라지고 단전끝에서 뜨거운 열기가 솟아오르는 것 같았다.

▲ 원경이 김일성에 대한 복수심을 새롭게 가다듬은 성인봉으로 가는 원시림이 안개속에 싸여 있다. ⓒ손호철

"병삼아. 네가 왜 약을 먹었는지 그 마음 내가 다 안다. 얼마나 괴로웠으면 약까지 먹었겠느냐?"

일출을 보고나자 한산스님이 원경의 손을 꼭 잡았다.

스님의 이야기를 듣자, 원경은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한산은 잡고 있던 손에 힘을 꼭 주었다.

"5년 전 예산 대흥사와 임존산성에서 내가 해준 이정 선생님 이야기를 기억하느냐?"

"예."

"그 때는 네가 어려 다 이야기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네가 다 컸고 음독사건까지 있고 하니 모든 것을 이야기해주마."

"…"

"너도 대강 짐작을 했겠지만, 이정 선생님은 단순한 독립운동가가 아니라 공산주의자셨다. 그것도 조선공산당의 최고지도자셨다."

대강 추측은 하고 있었지만, 한산스님의 입을 통해 '아버지가 공산주의자', 즉 빨갱이라는 이야기를 직접 듣자 충격이 컸다. 한산은 오랜 시간 동안 아버지의 삶과 생각을 자세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버지 박헌영의 모든 것을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박헌영에 대한 설명을 끝내고 한산은 다시 한 번 원경의 손을 꼭 잡았다.

"병삼아, 무엇보다도 복수심, 증오심을 버려야 한다."

"아니 이현상 아저씨도 죽게 만들고, 아버지를 미국 스파이로 몰아 죽인 김일성을 용서하라고요?"

"그렇다. 아버지의 죽음을 사사로운 개인적 감정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봐야 한다. 아버지의 죽음은 역사적으로 평가하고 심판할 문제이니 네가 김일성에 복수하는 식으로 개인적 문제로 삼아서는 안 된다. 김일성이 이정 선생님을 죽이고 싶어 죽였겠느냐? 그것은 냉정한 권력의 문제이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란다. 김일성이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선생님을 제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란다. 그것이 정치의 논리란다."

"스님, 아무리 그래도…"

"병삼아, 이정 선생님이 그런 분이 아니시지만, 만일 김일성과 입장이 바뀌었다면 어떻게 행동하셨을 것 같으냐? 김일성을 제거하지 않으셨을 것이라는 보장은 없단다."

"…"

아버님도 김일성의 입장에 섰다면 그처럼 행동했을 것이라는 스님의 말에 원경은 충격을 받고 말을 잃었다.

"자기가 추구하는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권력을 잡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때로는 피도 눈물도 없어야 하는 것이 정치이고 혁명이란다."

그동안 자기를 지탱해온 김일성에 대한 증오심과 복수심이 흔들리자, 원경은 온 몸에 힘이 쭉 빠져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긴 침묵이 흘렀다.

동해바다를 바라다보고 서 있던 한산스님은 원경에게 다가와 옆에 털썩 주저앉아 원경의 두 손을 다시 꼭 쥐었다.

"네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다. 그 일을 해내기 전에 너는 결코 죽어서는 안 된다. 그 무엇보다도 이정 선생님의 글을 모아 전집을 내야 한다. 아버지의 행적과 생각을 자료로 남겨 후세에 정당한 평가를 받도록 해줘야 한다. 내가 방금 얘기하지 않았느냐, 아버지의 죽음은 역사적으로 평가하고 심판할 문제라고. 기억하느냐?"

"예."

"네가 아니면 누가 그 일을 하겠느냐? 그것이 너에게 주어진 운명이고 너에게 하늘이 부여한 책무이다. 아버지가 정당한 역사적 평가를 받게 만들어주는 것, 그것이 네가 김일성에게 할 수 있는 진정한 복수다. 이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알았느냐?"

원경은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 정신이 바짝 들었다. 그의 삶의 목표, 그의 삶의 의미가 새롭게 생겨난 것이다.

"알았습니다. 스님. 이제 음독 같은 바보짓은 하지 않겠습니다."

"병삼아, 또 해줄 이야기가 있다. 네가 자라면서 낙서한 글을 봤는데 저항적 연구가 많더라. 지금부터 글 쓰는 것을 삼가야 한다. 지금까지 살아온 세상보다 더 험한 세상이 네 앞에 놓여 있단다. 따라서 모든 욕망을 버리고 조심하고 또 조심해 살아남아야 한다. 특히 정치를 멀리 해야 한다. 네가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다고 단단히 마음을 먹고 부처님의 참다운 제자로 살아가면 좋은 세상이 올 것이다. 그 때가 오면 아버지의 자료들을 모아 네 책무를 다하여라."

▲ 한산이 음독 후 깨어난 원경을 데라고 간 울릉도 ⓒ손호철

<계속>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손호철

화가를 꿈꾸다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로 진학했다. 독재에 맞서다 제적, 투옥, 강제 징집을 거쳐 8년 만에 졸업했다. 어렵게 기자가 됐지만, '1980년 광주 학살'에 저항하다 유학을 갔고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일하며 진보적 학술 활동과 사회운동을 펼쳐왔다. <국가와 민주주의>, <한국과 한국 정치>, <촛불혁명과 2017년 체제> 등 이론서와 <마추픽추 정상에서 라틴아메리카를 보다>, <레드 로드-대장정 13800KM 중국을 보다> 등 역사 기행서를 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