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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포된 김삼룡‧이주하, 홀로 남은 병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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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포된 김삼룡‧이주하, 홀로 남은 병삼

['박헌영의 아들' 원경 대종사 이야기] 8~9화

8. 버려진 소년

"모두 꼼짝 마라!"

"김삼룡 이 새끼, 어디 있어!"

1950년 3월 15일, 모두가 잠이 든 한 밤중에 예지동 김삼룡 아지트에 경찰들이 들이닥쳤다. 체포된 김삼룡의 비서가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김삼룡 아지트의 위치를 분 것이다. 경찰의 고함소리에 잠이 깬 젊은 당원 이세범은 김삼룡이 도주할 수 있도록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그 사이 김삼룡은 담을 타고 넘어 옆집으로 달아났다.

"아이고!"

일단 경찰은 피했지만 옆집 담을 넘어 도주를 하려다가 담 위에 쳐 놓은 철조망에 다리를 심하게 다치고 말았다. 일단 현장을 벗어나 낙산 쪽으로 도주를 했지만 다친 다리로 빨리 도주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결국 김삼룡은 골목 안에 있는 큰 일본식 쓰레기통에 숨어들어가 뚜껑을 닫았다.

"다리 저는 놈들은 무조건 잡아 들여라."

김삼룡이 집 근처에 남긴 핏자국을 보고 이를 추격했지만, 그날따라 비가 와서 핏자국은 지워져 버렸다. 김삼룡이 도주를 하다가 다리를 다쳤다는 것을 안 경찰은 무조건 다리 저는 놈들은 다 잡아들이라고 지시했다. 김삼룡은 지하에서 비밀리에 활동을 해 왔던 만큼 그의 얼굴을 아는 경찰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날 서울 시내에 다리 저는 사람 300명이 잡혀가 조사를 받았다.

"예 이놈 거기 섰거라!"

새벽이 되자 김삼룡은 쓰레기통을 빠져나와 다시 도주를 시작했다. 불행히도 이를 경찰이 보고 쫓아왔다. 피를 많이 흘리고 탈진한 그는 저항도 하지 못하고 잡히고 말았다. 하지만 경찰은 그가 김삼룡이라는 확신은 없었다.

"아저씨, 아줌마, 다 어디 갔어요?"

경찰이 습격할 당시 박지영 내외는 도주했다(원경은 1954년 뚝섬근처에서 큰 아버지 박지영이채소를 길에서 파는 것을 보고 달려가려 했는데 한산스님이 막았다고 한다.). 김삼룡이 도주할 수 있도록 경찰과 대결했던 청년당원들과 3살짜리 아이를 돌보고 있던 이옥숙은 현장에서 체포됐다. 일대 혼란이 일어나자 위층에서 자고 있던 병삼은 몰래 밑으로 내려와 쌀가마니 뒤에 숨었다. 

한바탕 소란이 끝나고 경찰이 철수하자 인기척이 사라졌고 기이한 적막만 흘렀다. 하지만 그는 쌀가마니 뒤에서 나올 수가 없었다. 초등학교를 다니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제 9살에 불과한 병삼은 밤새 울면서 공포에 떨어야 했다.

"아이 추워."

갑자기 추위가 엄습해 일어나고 보니, 쌀가마니 뒤에서 잠이 든 것이다. 해가 중천에 떠서 훤했다. 가마니 뒤에서 살금살금 나와 가게를 돌아보니 아무도 없었다. 갑자기 배가 고파왔다. 우선 물을 떠서 물배를 채웠다. 배고픔이 어느 정도 가시자 다시 두려움이 엄습했다. 병삼은 다시 가마니 뒤로 가서 쪼그려 앉아 있다가 다시 잠이 들었다.

다시 깨어나자 참을 수 없게 배가 고팠다. 물을 마셨지만, 이번에는 허기가 사라지지 않았다. 쌀가게인 만큼 사방에 쌀가마니가 쌓여 있었지만 밥을 해본 적이 없어서 밥을 할 자신이 없었다. 먹을 것이 없나, 사방을 뒤지자 밀가루가 눈에 띠였다.

"아- 수제비를 해 먹으면 되겠네."

밥은 자신이 없지만 수제비는 큰 어머니가 해주는 것을 여러 번 봐서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물을 부어 밀가루반죽을 하고 솥에 물을 부은 뒤 부뚜막에 불을 피웠다. 간을 해야 할 것 같이 물에 간장을 적당히 넣고 물이 끓자 밀가루반죽을 잘라서 넣었다. 큰 어머니가 해주던 수제비에 비하면 맛이 너무 없었지만 너무 배가 고파, 한 그릇을 다 먹었다. 이렇게 먹고 자고 공포와 불안에 떠는 시간이 지나갔다.

9. 실패한 작전

"누구 없나요?"

얼마가 지났을까, 한 중년남자가 집으로 들어와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 가만히 보니, 가끔 들리던 이주하 아저씨였다.

"아저씨!"

병삼은 반가움에 뛰어나가며 아저씨를 불렀다. 그는 이미 사태를 아는지 다른 사람들의 행방을 묻지 않았다.

▲ 김삼룡을 구출하려다 체포당한 이주하. ⓒ원경스님

"배고프지? 나가서 요기를 하자."

그는 가까운 식당으로 병삼을 데리고 가서 추어탕을 사줬다. 병삼은 한 그릇을 숨도 쉬지 않고 다 먹었다.

"너뿐이 없구나."

"예?"

"김삼룡 아저씨가 도망을 쳤는데 잡혔는데 안 잡혔는지 모르겠다. 우리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 아직 경찰이 아저씨를 잡았다는 이야기는 없다."

"다행이네요."

"다만 도망가다가 아저씨가 다리를 다쳤기 때문에 경찰이 다리를 저는 사람들은 모두 경찰서에 잡아다 놓았다고 한다. 경찰이 아저씨를 잡고도 아저씨의 얼굴을 모르기 때문에 잡았는지도 모르고 있을 수 있어 경찰서에 가서 잡힌 사람들 속에 아저씨가 있나 확인해야 하는데 아저씨 얼굴을 알면서 의심을 받지 않고 거기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너뿐이구나."

이주하와 정태식은 만일 김삼룡이 체포되어 있다면 서울의 당원을 동원하되 안 되면 대구 팔공산에 있던 유격대를 상경시켜 무력으로 김삼룡을 탈출시킨다는 무모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살아있나, 면회라고 시켜줘야 할 것 아닌가요?"

"밥이라도 넣어주게 해주세요."

중부경찰서 앞에는 연행된 사람들이 가족들이 몰려와 난리통이었다.

"병삼아, 나는 여기서 기다릴 터니 안에 들어가서 잘 보고 오너라."

"예 아저씨."

병삼은 떨리는 가슴을 안고 경찰서로 들어갔다.

"어딜 들어가?"

"삼촌이 여기 일하시는데 어제 안 들어오셔서 엄마가 별 일 없나 보고 오라고 해서요."

▲ 원경이 김삼룡이 잡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 중부경찰서 ⓒ손호철

거짓말을 하고 중부경찰서로 들어가자, 사방에 잡혀 온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 속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김삼룡 아저씨였다. 사방에 피가 묻은 바지를 입고 긴 의자에 수갑을 뒤로 채운 채 앉아 있었다.

"아저씨"하고 부르려는 순간 김삼룡도 병삼을 알아보고 깜짝 놀랐다. 놀란 김삼룡은 무서운 얼굴로 아는 척 하지 말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턱을 옆으로 흔들며 빨리 나가라는 신호를 했다. 자기가 잡힌 것도 한심한데 이정 선생님의 아들이 자기 때문에 잡히는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 했다.

"잡았다. 이주하를 잡았다."

놀라서 나오려는데 밖에서 난리가 났다. 경찰들이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이주하를 잡은 것이다.

"아니 아저씨가!"

병삼이 온몸이 굳었다.

경찰을 비롯해 이주하, 김삼룡의 얼굴은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들을 아는 극소수 중 한명이 남로당 서울시당 제1부위원장을 한 홍민표였다. 그는 전향해 남로당을 색출하는 정보경찰로 일하고 있었다. 중부경찰서는 연행해온 용의자 중 김삼룡이 있는가 확인하기 위해 그를 불렀고 그가 중부서로 들어오려다가 앞으로 웅성대고 있는 군중 속에서 이주하를 발견한 것이다(50년 뒤인 2003년에 쓴 검찰관계자의 회고록은 조금 다르다. 김삼룡이 도주하다가 부상을 당한 것까지는 일치하지만 이주하는 예지동 아지트에서, 김삼룡은 북아현동 아지트에서 잡혔다고 한다. 당시 신문들은 원경의 기억과 비슷하게 김삼룡이 종로5가에서 잡혔다고 보도했다. 둘 다 이주하가 중부경찰서 앞에서 잡혔다는 원경의 회상과 다른데, 검경이 공을 부풀리기 위해 다양한 이야기를 지어냈다는 말이 당시 돌았다고 하고 체포에 협력한 투항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진실을 감췄을 수 있어 진실을 알기는 어렵다.).

▲ 김삼룡 이주하의 체포를 알리는 동아일보 기사

병삼은 본능적으로 이곳을 떠야한다고 생각했다. 병삼은 잡힌 두 아저씨들을 생각하며 울면서 집으로 뛰어 왔다. 집으로 들어와 쌀가마니 뒤에 숨은 병삼은 마음 놓고 대성통곡하기 시작했다.

이제 그를 돌볼 수 있는 사람은 정태식 아저씨와 한산스님밖에 남지 않았다. 그러나 정태식 역시 일주일 뒤 잡히고 만다. 이주하가 잡히자 무장탈출 작전을 포기하고 현직 검사를 통해 이들을 빼내려하다가 경찰의 함정수사에 걸려 그마저 잡히고 만 것이다. 

한국전쟁 직전인 1950년 3월, 남로당은 이렇게 완전히 와해됐다. 남은 것은 산속에 올라간 이현상 부대, 전라도와 경상도 도당 지도부와 이들을 경호하는 유격대원뿐이었다. 병삼은 버려진 예지동 아지트 속에 혼자 버려졌다.

▲ 조선호텔 건너편에 있었던 조선공산당 건물 ⓒ손호철
▲ 이제는 식당으로 변한 충주의 김삼룡 생가 ⓒ손호철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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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철

화가를 꿈꾸다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로 진학했다. 독재에 맞서다 제적, 투옥, 강제 징집을 거쳐 8년 만에 졸업했다. 어렵게 기자가 됐지만, '1980년 광주 학살'에 저항하다 유학을 갔고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일하며 진보적 학술 활동과 사회운동을 펼쳐왔다. <국가와 민주주의>, <한국과 한국 정치>, <촛불혁명과 2017년 체제> 등 이론서와 <마추픽추 정상에서 라틴아메리카를 보다>, <레드 로드-대장정 13800KM 중국을 보다> 등 역사 기행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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