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전선언이 지지부진하다. 문재인 대통령이 유엔 총회 연설에서 종전선언을 거듭 제안한 이후, 한미간의 논의는 탄력을 받고 있다. 양국 사이에 여전히 이견은 존재하지만, 구체적인 문안 검토까지 이뤄질 정도로 긴밀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은 적대시정책과 이중 잣대가 철회되지 않은 상태에서 종전선언을 추진하는 것은 시기상조라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국힘의힘의 윤석열 대선 후보가 반대 입장을 밝힌 상황이다.
이렇듯 종전선언의 동력이 크게 떨어진 현실이라면, 대안을 공론화해볼 필요가 있다. 종전선언의 취지를 더욱 발전시키면서도 그 혼선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보자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필자는 남북미중이 한반도 평화협정 협상과 비핵화 협상을 동시에 개시하면서 그 과도기적인 목표를 '한반도 종전·평화와 비핵화를 위한 잠정 협정(이하 잠정협정, Interim Agreement)' 체결로 삼을 것을 제안한다.
잠정협정은 최종적인 평화협정에 앞서 체결하는 것으로 일정 기간 동안 상호간의 적대 행위 중단, 핵문제를 포함한 군비 제한 및 통제에 합의함으로써 포괄적이고 항구적인 평화협정으로 가는 데 있어서 중요한 토대를 만들자는 취지를 담고 있다.
주요 내용으로는 한국전쟁 종식 선언, 상호 불가침 확약, 상호간의 군사 훈련 제한, 군비통제와 군축, 유엔사령부의 위상 조정, 한반도 비핵화의 정의와 목표 설정, 북한의 검증가능한 핵 동결과 시한·방식·절차를 포함한 핵무기와 핵물질 폐기 계획, 대북 제재 해결 방안 등을 담을 수 있을 것이다.
또 잠정협정의 유효 기간을 2~3년 정도로 설정하고 그 이후 잠정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완성한다는 조항도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대안을 내놓은 데에는 몇 가지 배경과 이유가 있다. 우선 전례가 있다. 미국과 소련은 1972년에 '전략 공격 무기 제한에 관한 특정 조치에 대한 잠정 협정'을 체결해 데탕트 시대를 연 바 있다. 핵 군비경쟁이 절정에 달하던 시기에 잠정협정을 체결함으로써 군비경쟁부터 자제하고 우발적 충돌 방지와 신뢰구축을 통해 본격적인 군축 협상의 디딤돌을 놓자는 취지였다.
이란 핵협정도 주목할 만한 사례이다. 이란과 P5+1, 즉 미국·중국·영국·프랑스·러시아 및 독일은 2013년 11월에 잠정협정을 체결했다. 이란은 핵 활동을 대폭 낮추고 유엔 안보리는 이란에 대한 제재를 완화하기로 한 것이 골자였다. 이 잠정협정은 2015년 7월에 이들 나라가 체결한 포괄적공동행동계획(JCPOA)의 토대가 되었다.
이 두 가지 사례의 핵심 당사자는 미국이다. 잠정협정 방식은 미국에게도 익숙하다는 것이다. 한반도 문제 해결 과정에서도 미국의 역할은 대단히 중요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한반도 문제의 과도기적 해결 방안으로 잠정협정을 추진하는 것은 한미간의 생산적 논의에 기여할 수 있다.
잠정협정 방식이 종전선언의 혼란을 극복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선 종전선언은 '정치적 선언'이다 이에 따르면 종전선언을 해도 정전협정은 남게 되어 '정치적으로는 종전인데, 법적으로는 정전 상태'가 유지된다. 한마디로 '어색한 동거'가 연출되는 셈이다.
이에 반해 잠정협정은 최종적인 평화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잠정적인 성격을 가지면서도 동시에 '법적 구속력'도 갖게 된다.
또 필자가 제안하는 잠정협정은 비핵화 문제도 포괄하고 있다. 이는 종전선언과 비핵화 사이의 관계가 품고 있는 혼선을 극복하는 데에 매우 유용한 방식이 될 수 있다. 평화체제와 비핵화 협상을 동시에 하면서도 융합함으로써 둘 사이의 선후 문제를 둘러싼 오랜 갈등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 대안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잠정협정은 행위자들이 상호 만족할 수 있는 방식이 될 수 있다. 잠정협정은 종전선언보다 분명하고도 높은 위상을 품고 있기에 적대시정책 철회를 주장하는 북한의 요구에 근접할 수 있다. 반면 이 방식은 비핵화 문제도 포함하고 있기에 미국과 국내 여론을 설득하고 지지와 협력을 도모하는 데에 유리하다.
물론 잠정협정도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당사자들이 이 방식에 동의할 것인지도 불분명하고 동의하더라도 협상 과정에선 상당한 진통이 따를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진영 논리를 초월한 공론화이다. 종전선언에 대한 '집착'과 '거부'를 넘어 평화체제와 비핵화를 동시적·융합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지혜를 모을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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