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매국노 이완익은 자신이 원했던 외무대신이 아니라 농상공부대신을 맡게 된다. 그는 대신들 앞에서 '무, 배추만 싱싱하면 됐지 자기가 보탤 일이 뭐가 있느냐'며 시큰둥하다. 100년이 지난 지금도 농림축산식품부(이하 농림부)의 주요 업무는 무, 배추가 잘 자라는지 살피는 일이다. 국가는 무·배추 등의 엽근채소뿐 아니라 쌀, (토마토가 포함된) 과채류, 양념채소, 사과·배·포도 같은 과일, 버섯, 축산물, 여기에 해외식량 동향까지 파악해 농촌경제연구원과 통계청을 통해 매달 공표한다.
농림부에서는 주기적으로 농산물 수급관리 관계기관, 소·닭·돼지·계란 협회, 신선채소조합과 가락동농수산물시장의 도매시장법인들, 농협과 대기업 대형마트 관계자들까지 모여 수급 대책을 논의한다. 폭염이 심하고 전염병 상황까지 겹쳐 묘수는 없지만 일단 모인다. 명절을 한 달 앞둔 지금, 성수품 수급 상황을 점검하고 비축물량에서 얼마나 풀고 어떤 품목을 수입할 것인지 회의를 연 뒤 각 언론사에는 보도자료가 뿌려진다.
지난겨울부터 속을 썩인 농산물이 계란과 대파다.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AI)가 산란계 닭을 강타하면서 계란 값이 한판에 1만원까지 치솟자 수입대책을 내놓았다. 2017년 겨울에도 AI가 산란계를 휩쓸어 건국 이래 처음 계란을 수입했었는데, 4년 만에 다시 수입을 통해 계란 값을 잡으려 했지만 상황은 아직도 꼬여 있다. 병아리가 알을 낳으려면 6개월이 걸린다. 정부는 6개월의 시간을 벌면 상반기 중에는 계란 값이 안정될 것이라는 계산을 세웠을 것이다. 하지만 살처분 농가는 예년보다 줄어든 보상금으로 처분한 만큼의 병아리를 새로 들일 수 없었다. 비슷한 시기에 병아리 수요가 몰려 한 마리에 3~4000원하던 것이 7~8000원까지 올라 병아리 입식비용은 더욱 모자랐다. 국제곡물가격까지 상승해 사료값도 34퍼센트 올라 계란의 사정은 내내 좋지 않다. 게다가 본래 여름에는 산란율이 떨어지는데다 폭염까지 겹쳐 닭들이 알을 제대로 낳지 못해 소비자들이 바라는 값만큼 내려가지 않고 있다. 이에 청와대와 기획재정부까지 계란 값을 잡으라 농림부를 닦달하는 양상이어서 결국 연말까지 무관세 계란 수입을 연장하기로 결정했다. 양계 농가들은 수입하는 데 드는 세금으로 병아리 비용을 지원하면 잘 길러 계란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중이다.
연초에는 대파가 한 단에 1만 원까지 치솟으면서 '파테크'라는 말이 나돌았다. 한파로 작황이 좋지 않았고, 코로나19로 인력 구하기가 어려워 값이 올랐다. 값이 오르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지만 계란이든 파든 본래 사 먹던 값에서 조금만 올라도 '물가 위협'의 기조가 만들어진다. 하지만 대파는 지금 '금파'에서 '똥파' 신세다. 연초에는 1kg당 도매가격이 4000원선이었지만 최근엔 700원대로 떨어져 생산비 1000원을 벌충하기에도 모자란다. 팬데믹 상황에서 외식업과 단체급식과 같은 대형수요처가 움츠러들어 '온 국민 대파 한 단 더 먹기' 캠페인을 펼쳐도 별수 없을 것이다.
농산물 시장에서는 값이 천장을 찍는 농산물과 바닥을 찍는 농산물이 동시에 팔린다. 올해는 호박과 풋고추 같은 채소가 바닥세다. 여름철 식당 밑반찬으로 가장 맞춤한 것이 애호박이지만 식당 영업이 어려워지니 여파가 산지까지 미친다. 강원도 화천에서 호박을 트랙터로 밀어버리는 장면이 TV에 나오자 이곳저곳에서 호박을 사주기도 한다. 근래 지자체장들이 농산물 판매에 직접 나서는 일도 유행이지만 지자체가 배송비라도 보조하여 염가에 파는 일은 신중해야 한다. 소비자들이 시중가보다 훨씬 싸게 농산물을 구매하면 그동안 바가지를 썼다는 말이 바로 나온다.
많은 이들은 농산물 유통이 문제라 손쉽게 진단한다. 품목마다 차이가 있지만 농산물의 농가 수취율은 평균 52.5퍼센트, 유통비는 47.5퍼센트다. 농산물 유통비에는 운송, 하역, 포장, 매장 운영, 경매 수수료, 감가상각비 등이 포함되는데 농산물의 특성상 유통기한이 짧고 신선도 문제가 걸려 있어 유통비용이 높은 구조다. 역대 정권마다 농산물 유통비 문제를 해결하겠다 호언했지만 해결한 정부는 없다.
결국 생산자들 스스로 수급을 조절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정부도 주요 농산물의 재배 의향과 작황 전망을 공표해 생산자들이 생산량을 조절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하지만 실현되기는 어렵다. 고령의 농민들은 땅이 있으니 심고, 심을 것이 마땅찮아 익숙한 작물을 심는다. 한 해는 돈을 벌어 빚을 갚고, 한 해는 다시 빚을 진다. 대안으로 온라인에 기반한 직거래나 로컬푸드 활성화 등이 제안되고 일부 성과도 있지만, 여전히 농산물 유통의 큰 맥은 경매제도에 기반한 '가락동 시스템'이 잡고 있다.
전반적인 시세 정보를 모르는 농민들을 상대로 가격을 후려치던 문제를 해결하고 농산물 거래를 양성화하기 위해 1985년 가락동농수산물종합도매시장이 건립되었다. 도매법인들이 대량으로 농산물을 취급하면서 유통을 안정화하는 데 주효했다는 평가도 받지만 이들이 수수료 장사에만 열을 올린다는 비판도 쏟아진다. 이에 생산자가 시장도매인에게 농산물을 위탁 수매하는 방식의 시장도매인제 도입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농림부는 도입을 반대하고 서울시는 도입을 추진하면서 서로 반목 중이다. 농민단체와 연구자들, 농업언론들마저 반분되어 갈등의 골이 깊어지는 양상이다. 관련 토론회에 참석한 한 농민은 경매제가 됐든 시장도매인제가 됐든 농사지어 먹고살게끔만 해달라 목청을 높였다.
농업은 자연에 절대 의존하면서 사람과 제도가 작동해 겨우 이루어지는 일이다. 자연의 매서운 변화에 농업은 가장 먼저 철퇴를 맞는다. 과수 화상병과 같은 새로운 병해를 감당해야 하고, 수십 년 지어온 농사라 해도 작기가 흔들리면 갑자기 초보자가 되기도 한다. 여기에 샤인머스켓이니 초당옥수수니 하는 유행 작물을 좇기에도 바쁘다. 국경마저 닫혀버려 외국인 노동자들도 들어오지 못해 12만 원 하던 일당이 17만 원까지 치솟았다. 세상의 모든 상품에는 인건비가 들어가야 하건만, 그래도 대파는 한 단에 2000원이 넘어서는 안 된다고 여긴다. 신품종 육성과 스마트팜 도입 같은 기술적 해결책도 보급과 안정화에 시간이 걸리는 장기 프로젝트이니 당장의 문제를 해결하기엔 난망하다.
2021년 여름, 코로나19는 더 퍼져만 가고, 모두 먹고살기 힘들다 아우성인데 여기에 수박이나 계란 값이 예년보다 오르면 여론은 들끓는다. 날씨는 이토록 험하고 기르는 사람, 파는 사람 모두 속사정은 복잡하여 무, 배추 싱싱하기가 이토록 어려우니 누구 하나 나서서 도깨비 방망이 한 방 휘둘러주기만을 바라는 모양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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