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947킬로미터', '카자르스탄 4555킬로미터', '우크라이나 7110킬로미터', '캄보디아 3591킬로미터'. 안산시 다문화음식거리 끝에 있는 다문화공원 광장에 서면 여러 나라들의 방향과 거리를 표시한 이정표가 방문객을 맞는다.
이 이정표 제일 밑에 눈길을 끄는 표시판이 있다. '글로벌 안산, 상호문화도시. 103개국 87359명'이라는 표시판이다. 안산시에 2018년 현재 103개국으로부터 온 외국인 8만7369명이 살고 있다는 표식이다. 안산의 인구가 2020년 말 현재 65만 명 수준이니 시의 인구 7명 중 1명이 외국인이라는 이야기다. 그렇다. 서울이나 송도가 아니라 안산이 한국에서 '가장 글로벌한 도시'다. 시화공단을 끼고 있어 외국인노동자들이 많이 거주하면서, 안산은 가장 글로벌한 다문화도시로 발전한 것이다.
광장 앞에 있는 간이 파출소에는 여러 나라 출신들이 쉽게 이곳을 알아볼 수 있도록 각 나라의 경찰표시를 설치해 놓았다. 이동통신사 대리점에는 각 나라 국기들과 여러 나라 말로 써놓은 인사말들이 지나가는 행인들을 부르고 있다.
'국가가 민족을 만든다'. "이게 무슨 헛소리야!" 1980년대 유학시절, 민족이 먼저 있고 그 민족이 국가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다양한 종족들의 기억을 억압해 말살하고 "너희들은 같은 민족이야"라고 가르쳐 어느 민족을 만들어내는 것이라는 주장을 읽고, 말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서양 등 여러 인족(ethnic group)으로 구성된 다른 나라들은 그럴지 몰라도, 오래 전부터 '배달의 민족', '한민족'이라는 '단일민족'(정확히 표현하면, '단일인족'이 맞다)으로 구성되어 온 우리의 경우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신라, 백제, 고구려 사람들이 그 당시에도 서로가 같은 민족이라고 생각했을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신라가 삼국 통일에 당나라라는 외세를 끌어들였다고 비판하지만, 과연 당시 삼국은 서로를 '같은 민족'이라고 생각하고, 당나라는 외세라고 생각했을까? 오히려 신라는 고구려, 백제, 당나라를 모두 '외국'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즉 신라가 삼국 통일 후 백제와 고구려민들의 역사와 기억을 억압하고 삼국이 같은 민족이라고 가르쳐 '한민족'을 창조해낸 것은 아닌가?
이처럼 오랫동안 '단일민족의 신화' 속에 살아온 우리 사회도 이제 급속히 변화하고 있다. 세계적인 '지구화' 흐름에 따라 나라 간의 상호작용이 급속히 증가한데다 우리 사회가 상대적으로 풍요해지면서, 일자리 기회를 찾아 들어오는 외국인들이 빠르게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국내 체류 외국인수는 2019년 말 현재 252만 4656명으로 20명 중에 1명이 외국인이다. 2021년 1월 현재 대구시의 인구가 241만 5813명이니, 대구시보다 많은 외국인이 국내에 살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이제 도시고 농촌이고 어디를 가도 외국인노동자와 외국인 며느리들을 만나는 것이 우리의 일상이 됐다. 국제적으로, 외국인의 비율이 인구의 5% 넘으면 '다문화 사회'로 분류하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도 이제 본격적으로 '다문화 사회'에 진입한 것이다.
이를 나라별로 보면, 조선족 70만 명 등 중국인이 전체의 43.6%인 110만 명이고, 그 다음으로 베트남 22만 명(8.9%), 태국 20만 명(8.3%), 미국 15만7000 명(6.2%), 일본 8만6000 명(3.4%) 순서다. 이처럼 우리보다 못 사는 나라들이 대부분이지만, 미국이나 일본 같은 선진국에서 온 사람들도 적지 않다. 국내 체류 목적도 다양하다. 취업 자격으로 체류하는 사람들이 56만 명으로 가장 많지만 결혼이민 16만 명, 유학생 18만 명 등이며 불법체류자 역시 39만 명에 달한다.
다문화 사회화는 단순히 국내 체류 외국인에 국한되지 않는다. 단순한 취업체류 등과 달리, 결혼은 국적 획득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국민들의 '인족(ethnic)' 구성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데, 결혼의 경우도 이 같은 추세는 마찬가지다. 2018년 1년 동안 이루어진 결혼을 보면, 남성 7.58%, 여성 2.69%가 국제결혼이라 평균 5%가 국제결혼이었다. 새로 생겨나는 20가구 중 한 가구는 다문화 가정이라는 이야기이다.
주목해야 하는 또 다른 측면은 연령이다. 이들 국내 체류 외국인 중 52%가 20·30대라는 사실이다. 우리 사회의 고령화와는 대조적이다. 우리나라 국민들의 경우 20·30대가 26.7%에 불과하고, 50대 이상이 39.5%를 차지하고 있으며 65세 이상도 800만 명을 넘어섰다. 특히 이 같은 고령화는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는 점에서, 외국인들은 점점 줄어들고 있는 젊은 노동력을 채워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우리가 이처럼 빠르게 다문화 사회로 변화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의식은 '단일혈통, 단일인족의 신화'에 사로잡혀 피부색과 문화, 언어가 다른 외국인, 특히 우리보다 가난한 나라에서 온 외국인에 대해 지나치게 배타적이라는 사실이다(우리사회에 거주하는 외국인이 늘어나면서 인기를 끌고 있는 TV프로그램 <어서와 한국은 처음이지>를 보더라도, 출연하는 외국인의 대부분은 선진국에 백인들이다).
'단일혈통, 단일인족'이라는 오랜 통념은 사실과는 거리가 먼 '신화'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 2020년 박종화 울산과학기술원 교수가 고대인과 현대인의 게놈을 체계적으로 비교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한국인은 수 만년동안 동남아시아에서 여러 차례 올라온 사람들과 그 후손들이 혼혈로 진화한 다인족(ethnic group) 민족으로 밝혀졌다.
'난방시설 고장 난 비닐하우스에서 자던 외국인 노동자 사망.' 2020년 12월 한파경보 속에 온 나라가 얼어붙은 새벽에 일어나 현관문을 열고 아침 신문을 들고 들어와 펴보니, 포천 농장에서 일하던 캄보디아 노동자가 얼어 죽었다는 기사가 비수처럼 가슴을 찔렀다.
이 기사를 보고 있자, 2000년대 초 한 겨울에 탑골공원에서 꽁꽁 언 바닥에서 절을 하던 기억이 떠올랐다. "한국인들을 대표해 사과하니, 절을 받아 주십시오." 당시 나는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의장으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외국인노동자 초청제도 등의 개혁을 요구하는 불법체류 외국인 노동자들의 집회에 참석해 이들을 착취하고 임금을 떼먹은 인간 이하의 우리 악덕 기업인들의 죄를 대신해 절을 한 것이었다.
이로부터 20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3D업종에 종사하며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고 있는 외국인노동자, 특히 불법체류 외국인 노동자들의 현실은 별로 나아지지 않은 것 같다. 비닐하우스 동사 참사 후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으로 정부가 농어촌 외국인노동자의 주거실태를 조사한 결과, 그들 중 70%가 비닐하우스 등 가건물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주거환경은 한 단면에 불과하고 이들에 대한 비인간적인 대우의 예는 다 열거하기에 지면이 모자랄 지경이다. 그나마 안산시의 경우 '다문화 포용도시' 대상을 받은 도시답게, 외국인 인권센터 등 사방에 외국인들을 돕기 위한 인프라들이 설치되어 있어 반가웠다.
'제주 예멘인 추방!', '가짜 난민 송환!', '난민법 폐지!'. 몇 년 전 서울에서 열린 난민반대 촛불집회에 나타난 구호들이다. 제주도에 와 난민을 신청한 예멘난민에 대해 보수 기독교 단체들과 보수적인 청년, 여성들이 여러 차례 반대집회를 열었고, 청와대 청원에는 70만 명 이상이 서명했다. 이처럼 우리의 외국인 혐오정서 중 가장 심한 것은 반(反)난민 정서다. 우리나라가 같은 수준의 경제발전 국가 중에서 가장 난민심사가 까다로운 나라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 같은 반난민 정서는 충격적이라고 밖에 달리 표현할 수가 없다.
우리나라는 1992년 난민협약에 가입한 후 1994년부터 난민신청을 받았는데, 그동안 신청된 4만 명 이상의 난민신청자 중 2만여 명을 심사종료한 바, 이중 900여 명 정도를 난민으로 인정해 인정률은 4.1%정도다. 특히 난민법을 제정한 2013년 이후 인정률은 3.7%로 오히려 떨어졌다. 유럽연합의 인정률이 33%인 것을 생각하면 이의 1/8에서 1/9 수준에 불과하다. 난민인정을 하지 않았지만 본국으로 돌아가면 위험에 처할 수 있다고 판단으로 체류를 허용하는 인도주의적 체류자 7.6%를 포함해도 11.7%로, 세계평균 37%의 1/3 수준이다.
'5‧18 광주의 마지막 수배자' 윤한봉, '파리의 택시운전사' 홍세화. 광주의 운동권이었던 윤한봉은 5‧18 직후 멸치 한 줌을 들고 한 화물선을 훔쳐 타, 이 멸치로 끼니를 때우며 미국으로 건너가 정치적 망명을 신청하고 전두환 정권에 저항해 5‧18의 진실을 알리고 민주화운동을 벌였다.
유명 시사평론가로 활약 중인 홍세화는 한 무역회사의 지사원으로 파리에 근무하고 있을 때 박정희 정권이 자신이 국내에서 활동했던 비밀운동조직인 남민전 사건을 터트리자, 정치적 망명을 신청해 1987년 민주화까지 파리의 택시운전사로 살아가야 했다.
이들만이 아니다. 김구, 영화 <암살>의 주인공 김원봉 의열단 단장 등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정치적 난민으로 중국 등에서 독립운동을 했다. 이처럼 난민은 '낙후한 후진국'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슬픈 역사이기도 하다.
이 같은 우리의 역사를 잊고 일부에서는 반난민 운동에 열을 올리고 있으니 부끄럽기 짝이 없다. 안산 다문화거리에서 한 블록 내려가면 '국경없는 마을'이라는 다문화센터가 있다. 안산을 떠나 서울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도 이 건물 1층 유리에 써놓은 글들이 나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난민은 범죄자가 아니다', '난민도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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