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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들 내쫒고 한반도 족쇄 채운 '여명의 황새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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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들 내쫒고 한반도 족쇄 채운 '여명의 황새울'

[손호철의 발자국] 50. 평택 : '여명의 황새울'과 함께 시작된 평택 미군기지

'화려한 휴가'. 1980년 광주학살이라는 비극을 야기한 공수부대의 광주진압 작전명이다. 전두환 정부에 '화려한 휴가'가 있었다면, 노무현 정부에는 '여명의 황새울'이 있었다. 황새울은 경기도 평택의 작은 마을 대추리의 벌판 이름이다.

2006년 5월 4일 새벽 4시, 이 벌판의 이름을 딴 '여명의 황새울' 작전에 따라 1만 명의 경찰들이 방패로 무장하고 대추리에 진입했다. 몇 시간 뒤, 540명의 농민들은 눈물을 흘리며 조상대대로 살아온 고향을 떠나 정착촌으로 떠나야 했다. 평택 미군기지 건설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용산은 오랫동안 외국군이 주둔하던 '굴욕의 땅'이다. 몽고군이 쳐들어 왔을 때 이곳에 주둔했고, 이어 일본군이, 일본군이 철수하자 미군이 주둔했다. 용산에 있던 주한미군사령부가 철수하면서, 근 백년 만에 우리는 용산을 되찾았고 서울 한가운데에 넓은 공원을 갖게 됐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용산의 미군들을 받아들이기 위해 고향을 떠나야 했던 대추리 등 평택 주민들의 눈물이 숨겨져 있다.

▲ 황새울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평택 미군기지 이전 저지 투쟁 사진 ⓒ손호철

'평화는 총칼로 지켜지지 않는다.' 대추리에서 약 10킬로미터 떨어진 대추리 평화마을에 들어서면 이 같은 글씨와 함께 황새울기념관이 방문객을 맞는다. 이곳은 2006년 5월 공권력에 의해 쫓겨난 대추리 주민들이 2007~2010년 사이에 이주한 이주단지다. 이주 후 미군기지 이전에 반대해 싸운 평화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기념관으로 들어가자 신종원 이장이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 황새울기념관에 설치되어 있는 평화조형물 ⓒ손호철
▲ 평택 미군부대가 들어서며 쫓겨난 대추리 주민들이 이주한 새 대추리 마을 ⓒ손호철

- 요즘 생활은 어떻습니까?

= 대추리 주민들은 1942년 일본이 비행장을 짓는다고, 1952년에는 미군이 기지를 지으면서, 두 번 강제 이주를 당했습니다. 그래서 근처에 새로 땅을 개간한 것이 새 대추리입니다. 이 대추리는 도두리와 함께 쌀이 맛있기로 유명했습니다. 이름도 '들판이 넓고 가을이 풍성하다'고 큰 대(大)자에 가을 추(秋)자를 써서 대추(大秋)리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이처럼 풍요로운 생명의 땅이자 조상 대대로 살아온 삶의 터전이 또 다시 미군들의 죽음의 기지로 변하고 말았으니, 화병이 안 나고 배기겠습니까? 밤이면, 어렸을 때 당집에서 연 날리던 꿈을 꿉니다.

- 정부에서는 대추리 반대운동에 주민들보다 외부인들이 더 많았다고 하는데요?

= 2004년 평택기지 확장 계획이 발표된 뒤, 605명의 전국 평화운동가들이 확장예정지에 땅을 사서 평화지주가 됐던 것입니다. 이들을 '외부세력'이라고 몰아세우는 것은 평화지주운동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문정현 신부님도 대추리로 이주하셔서 우리와 함께 생활하면서 치열하게 평화운동을 하셨습니다.

- 이주는 미군기지 이전 때문에 불가피했다고 치더라도, 보상 등은 충분했나요?

= 완전히 사기당한 기분입니다. 농토가 평당 15만원을 보상받았는데 대토를 하려고 하니 농지가격이 평당 30만 원이라 살수 없었고 새로 준 이곳 땅도 축산부지 초지로 제일 싼 곳입니다. 대토로 농사짓는 두 사람만 제외하고는 농토가 없어 평생 직업이었던 농사도 못 짓고, 주거단지로 수용했기 때문에 슈퍼도 못 하는 실정입니다. 44가구 중 5가구는 집을 팔고 나갔고, 70~80대 노인들은 고향을 그리워하며 여러 명 돌아가셨습니다. 아직 살고 있는 집들도 보상금을 다 소진했습니다.

2018년, 정부가 이주당시 약속대로 상업용지를 제공해주고 지금 살고 있는 마을 이름도 대추리로 변경해 주도록 청와대 앞에 가서 시위까지 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나마 체험프로그램을 운영해 약 1만 명이 다녀갔는데, 메르스에 이어 코로나19가 터지면서 다 끊기고 말았습니다.

▲ 평택 미군기지 이전 반대투쟁과 그 이후에 대해 설명하는 신종원 대추리 이장 ⓒ손호철

여명의 황새울 작전에 의해 대추리 주민들을 쫓아내고 짓고 있는 평택 미군기지는 여러 면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 기지는 그간의 여러 기지들과 달리 20킬로미터 내에 육해공군 기지가 모두 모여 있는 '완성형 기지'이자 '아시아에서 가장 큰 미군기지'라는 것이 중요한 특징이다.

황새울기념관에 전시된 자료에 따르면 그 핵심에 있는 험프리스 기지는 미군 2사단 이외에도 주한미군사령부가 이전, 155만평에서 451만평으로 확장하고 주둔인원도 5058명에서 5만 명 이상으로 늘어난다고 한다(이는 주한미군규모를 훨씬 넘어서는 것으로, 아마 군인원만이 아니라 가족 등 이곳에 거주하는 인원 전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이는 중국에서 제일 가까운 미군기지다. 이처럼 기지를 평택으로 이전하기로 결정한 것은 미국이 중국과 '긴장 관계'에 들어가기 이전으로, 사드처럼 중국을 직접 겨냥한 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중국을 겨냥한 꼴이 되어 버렸고 평택기지는 중국으로서는 '목에 가시'가 되어 버렸다. 따라서 미국과 중국이 군사적으로 직접적인 대립에 들어가는 경우, 이곳은 제일 먼저 그 중심에 놓일 수밖에 없다.

특히 21세기 패권을 놓고 미국과 중국이 예상보다 빨리 팽팽한 긴장 관계에 놓이면서, 평택기지는 대북한 제지보다는 대중국 견제용으로 더 의미를 갖게 됐다. 이는 우리의 21세기 행보에 있어서 '심각한 족쇄'가 되고 있다.

한미방위조약 등을 고려할 때 평택 미군기지의 존재에 대해 우리가 왈가왈부하기가 어렵다고 하더라도, 미군의 주둔비용 등과 관련해 우리가 미국에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미국으로부터 거액의 (대중국)기지 임대료를 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 미국이 어디에서 평택과 같이 가까운 대중국 기지를 얻을 수 있겠는가? 나아가 미국과 중국, 러시아와 같은 초강대국들 사이에서 우리가 살아남는 길은 어느 한 편에 서는 것이 아니라 한반도를 스위스 같은 영세중립국으로 만드는 것이 아닐까?

신 이장은 자신들이 과거 살았던 대추리를 비롯하여 평택 미군기지 지역을 손수 안내해 주었다. 이 지역을 돌아보자,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사방에 짓고 있는 서양식 빌라 등 건설 붐이다. 미군들을 겨냥해 임대주택을 지어 놓은 것들이거나 짓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임대주택 건설이 온양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빌라형 주택이외에도 '평택 팽성 국제신도시 아메리카타운' 건설 선전판으로부터 '미국인 마을 분양' 포스터, '평택 험프리스 도시개발 추진위원회' 등 다양한 건설 기획들을 볼 수 있다.

▲ 평택에 이전하는 미군들을 겨냥한 미국인 마을 분양 광고 ⓒ손호철
▲ 평택 험프리스 도시개발추진위원회 사무실 간판 ⓒ손호철

그러나 평택기지 확장이 그 같은 기대에 얼마나 부응할지는 미지수다. 멀리서 돌아본 평택미군기지는 군사기지라기보다는 거대한 아파트단지 같았다. 고층 아파트들을 짓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이 기지가 가족이 함께 거주하는 '가족거주 기지'라는, 미국의 '21세기 미래형 기지'의 시험장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엄청난 규모의 수퍼마켓, 쇼핑몰도 짓고 있다고 한다. 다시 말해, 기지 자체가 하나의 자급형도시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미군기지를 겨냥한 주변의 임대주택, 상가들은 기대에 못 미칠 가능성이 크다.

평택 미군기지 주변에 가면 고가 기차철로를 발견할 수 있다. 미군기지로 들어갈 물자들을 수송하기 위해 새로 건설한 철로다. 신 이장은 나를 내리문화공원으로 안내했다. 이 공원은 평택시가 캠프 험프리스 확장과 관련해, 평택 시민들과 미군거주가 가족들이 함께 즐길 수 있는 글로벌 문화공원으로 만든다는 계획 아래 건설하고 있는, 약 3만평 크기의 거대한 공원이다. 그런 만큼 코로나19 예방을 위해 마스크를 쓰라는 펼침막이 영어로 쓰여 있다.

▲ 평택 미군기지는 대형 아파트들을 짓고 있어 군부대가 아니라 신도시 건설현장을 연상시킨다. ⓒ손호철
▲ 내리문화공원에서 내려다 본 평택 미군기지. 군기지라기 보다는 아파트 단지에 가깝다. ⓒ손호철

신 이장의 안내로 공원입구 언덕으로 가자 거대한 캠프 험프리즈가 한눈에 내려다 보였다. 앞 쪽에 주한미군사령부와 뒤쪽으로 신도시개발 같은 고층아파트 건설현장이 이어졌고 어디로 보아도 군사시설 비슷한 것은 눈에 뜨이지 않는다.

캠프 험프리즈를 내려다보고 있자, 황새울 기념관에 걸려 있던 문정현 신부의 목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저는 6개월 동안 유랑하면서 평화가 무엇인가를 깨달았습니다. 공장에서 쫓겨난 노동자가 원직 복직하는 것이 평화입니다. 두꺼비, 맹꽁이가 개발에 밀려 멸종되지 않도록 서식지를 만들어주는 것이 평화입니다. 장애인이 가고 싶은 곳에 갈 수 있게 하는 것이 평화입니다. 이 땅의 농민들이 땅을 빼앗기지 않도록 하는 것이 평화입니다. 강대국으로 침략으로 죽어가는 아이들 노인들을 살리는 것이 평화입니다. 어떤 이유로도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 평화입니다. 평화를 이루는 것은 또 다른 세계를 만드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식을 줄 모르는 열기로 평화를 사랑한다면 또 다른 세계를 만들 수 있습니다. 기필코 우리는 평화의 세상을 이룰 것입니다."

▲ 대추리 투쟁에 온몸을 바친 문정현 신부의 평화에 대한 목각 ⓒ손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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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철

화가를 꿈꾸다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로 진학했다. 독재에 맞서다 제적, 투옥, 강제 징집을 거쳐 8년 만에 졸업했다. 어렵게 기자가 됐지만, '1980년 광주 학살'에 저항하다 유학을 갔고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일하며 진보적 학술 활동과 사회운동을 펼쳐왔다. <국가와 민주주의>, <한국과 한국 정치>, <촛불혁명과 2017년 체제> 등 이론서와 <마추픽추 정상에서 라틴아메리카를 보다>, <레드 로드-대장정 13800KM 중국을 보다> 등 역사 기행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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