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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년만에 드러난 '유서대필' 진실, 병든 피해자는 사과받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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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14년만에 드러난 '유서대필' 진실, 병든 피해자는 사과받지 못했다

[과거사 정리, 그 아픔과 성과 ④] '노태우 정권의 위기 극복 공작' 강기훈 유서대필 의혹 사건

지난달 27일 제2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가 진실 규명 신청 사건에 대한 조사를 개시했다. 2기 진실화해위에는 지난달 21일 기준 3636건, 7443명의 신청 사건이 접수됐다. 그만큼 한국사회에 과거사와 관련해 억울함을 호소하는 이들이 많다는 뜻이다. 이들에게 과거사는 지난 일이 아닌 현재의 아픔이다.

한국사회에는 2000년대 초반 두 번의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활동과 2009년 제1기 진실화해위 활동이 있었다. 2기 진실화해위의 활동 개시에 맞춰 1기 진실화해위의 조사 사례를 살폈다. 이를 통해 사건으로부터 수십 년이 지났지만 치유되지 않은 피해자들의 고통과 그런 가운데에도 과거사 조사가 수행되며 남긴 성과를 들여다보려 했다. 그 속에서 한국사회가 과거사를 잊어버리지 않고 진상 규명을 지속하는 한편 피해자의 상처를 치유하는 일을 계속해야 하는 이유를 밝히고자 했다.

<프레시안>에서는 '과거사 정리, 그 아픔과 성과' 기획을 통해 진실화해위 활동이 필요한 이유, 그리고 현재의 의미를 짚어보고자 한다. 넷째 편에서는 1기 1기 진실화해위의 '강기훈 유서대필 의혹 사건 조사보고서' 등을 바탕으로 노태우 정권의 위기 극복 공작에 의해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옥살이를 해야 했던 강기훈 씨의 이야기와 이후 진상 규명 과정을 다뤘다.

[과거사 정리, 그 아픔과 성과] ① 동굴서 양팔 묶인 시신으로 발견된 아들, 진상 밝히려 애쓴 35년

[과거사 정리, 그 아픔과 성과] ② 47년 만에 밝혀진, 31살에 사형된 언론사 사장의 진실

[과거사 정리, 그 아픔과 성과] ③ 박정희 정권에 의해 유언까지 조작된 8명의 사형수가 있었다

1991년 5월 8일,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사회부장 고 김기설 씨가 노태우 정권의 퇴진을 요구하고 부모님께 죄스러움을 표하는 내용을 담은 두 장의 유서를 남기고 서강대학교 옥상에서 분신했다.

이 죽음을 두고 정부와 검찰은 상상하기 어려운 주장을 폈다. 전민련 총무부장 강기훈 씨가 유서를 대필하고 사후 모든 문제를 책임진다고 말하는 방식으로 김기설의 분신을 방조했다는 이야기였다.

현재 간암으로 투병 중인 강 씨는 이 사건과 관련한 혐의로 유죄를 선고 받고 3년을 감옥에서 살았다. 그가 누명을 쓰고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는 사실을 법원 판결로 확인받은 것은 사건 발생으로부터 27년이 흐른 2017년이었다.

▲ 강기훈 필적 검증을 위해 검찰이 입수한 자료. 오른쪽이 김기설이 남긴 유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반대 여론 잠재우기 위한 노태우 정권의 공작...'강기훈 유서대필 의혹 사건'

1991년 4월 26일부터 6월 29일까지를 '분신정국'이라고 부른다.

한해 전인 1990년 1월 3당 합당으로 여소야대 정국을 만들어낸 노태우 정부는 1991년 봄 '수서지구 특혜 분양 사건'과 '낙동강 페놀 유출 사건' 등이 일어나 위기를 맞았다. 80년대 후반 3저 호황 이후 늘어난 유동성으로 인한 부동산 값 폭등과 물가 상승이 한창이던 때이기도 했다.

그러던 1991년 4월 26일 집회에 참석한 명지대학생 고 강경대 씨가 경찰 폭행에 의해 사망했다. 이틀 전 경찰에 연행된 명지대 총학생회장 박광철 씨의 석방을 요구하는 집회였다. 이후 정권 반대 시위가 한층 거세졌다. 4월 29일 전남대학생 고 박승희 씨의 분신을 시작으로 5월 22일까지 학생, 노동자 9명이 분신했다. 5월 25일에는 성균관대학생 고 김귀정 씨가 강경대 살인 규탄과 공안통치 종식을 위한 범국민대회에 참가했다 다시 한 번 경찰 폭행에 의해 사망했다.

수세에 몰린 노태우 정부는 5월 7일 고위 당정회의를 열어 '분신의 배후'를 운운했다. 다음날인 5월 8일 전민련 사회부장이었던 김기설이 분신하자 당일 김기춘 당시 법무부 장관 등이 참여한 치안관계대책회의에서 노태우 정부는 '분신의 배후'를 철저히 조사한다고 결정했다.

이후 검찰은 서울지방검찰청 강력부에 김기설 분신 사건을 배당했다. 수사에 나선 서울지방검찰 강력부는 '분신의 배후'로 전민련 총무부장 강기훈 씨를 지목하고 1991년 7월 12일 강 씨를 자살 방조 혐의로 기소했다. 8월 12일에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덧붙였다.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이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 검찰은 강 씨가 김 씨의 유서를 대필했다는 혐의를 입증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사건 수사에 참여한 검사의 수만 9명에 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검사들이 직접 오가며 국립과학수사연구소(국과수)에 필적 감정을 의뢰하고 결과를 받아가기도 했다. 수사관이 아닌 검사가 이같은 일을 직접 수행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때 검찰은 확보한 필적 자료 전체를 제출하지 않고 일부를 골라 제출했다.

당시 국과수 문서감정실장이었던 김형영 씨는 김기설이 남긴 유서와 강 씨의 필적이 동일하다는 필적 감정 결과를 냈다. 김 씨는 1992년 5월 법원으로부터 허위 감정과 관련해 유죄 판결을 받기도 한 인물이다. 감정의뢰인 4명으로부터 "유리한 감정을 해달라"는 부탁과 함께 1035만 원의 뇌물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재판 당시 변호인단은 검찰이 국과수에 들고 간 것보다 훨씬 많은 필적 자료를 제출하며 '유서와 강 씨의 필적은 다르다'고 반박했다. 국내에서는 필적 감정을 받을 수 없어 일본의 한 필적감정소에서 '유서와 강 씨의 필적이 다르다'는 감정 결과를 받아 제출하기도 했다. 재판부는 변호인단의 필적 자료와 감정 결과를 모두 배척했다.

결국 강 씨는 1992년 7월 24일 자살방조 혐의 등과 관련해 대법원 판결을 받았다. 이후 1994년 8월 17일 만기출소했다.

강 씨는 재판 과정은 물론 출소 이후에도 무죄를 주장했다. 검찰에 의해 구속될 당시에도 강 씨는 '재판까지 가지도 않을 것'이라며 별 걱정을 하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 법정 출두하는 강기훈 씨.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건 발생 16년만에 밝혀진 진실..."김기설 유서와 강기훈 필적 다르다"

강기훈 유서대필 의혹 사건에 대한 재조사는 2005년 12월 출범한 1기 진실화해위에 의해 수행됐다. 1기 진실화해위는 2007년 11월 이 사건에 대해 강 씨가 김 씨의 유서를 작성했다고 볼 수 없다며 국가에 형사소송법상 재심 및 그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하고 피해자에게 사과하고 화해를 위한 조치를 취하라는 진실 규명 결정을 내렸다.

가장 중요한 근거는 필적 재감정 결과였다. 진실화해위는 사건을 재조사하며 국과수를 포함 국내 7개 사설감정원에 김기설의 유서와 강 씨 필적의 유사성에 대한 재감정을 의뢰했다. 국과수는 16년 전의 결정을 뒤집고 유서와 강 씨의 필적이 다르고 유서와 김기설의 필적이 일치한다는 감정 결과를 냈다. 나머지 7곳도 마찬가지였다.

재감정 때는 김기설과 강 씨의 필적과 관련해 1991년 사건 당시 검찰이 제출하지 않은 필적 자료에 대해서도 검토가 이뤄졌다. 감정은 국과수 문서감정실 전원이 수행했다.

국과수에서 재감정을 수행한 진모 씨는 진실화해위에서 "강기훈과 김기설의 필적은 서로가 특정부분의 희소성 있는 특징에서는 명확한 다른 차이점이 있다", "(1991년 필적 감정) 당시에도 이러한 자료가 제시되었다면 유서를 강기훈이 썼다고 판단할 수 없다"고 진술했다.

근거로는 △ 김기설의 독특한 운필습성인 'ㅆ에서 2획을 생략하는 것', '종성의 받침을 작게 쓰는 것'이 강 씨의 필적과 다른 점 △ 강 씨의 'ㅎ'은 운필 방향이 우하방인데 반해 김기설의 'ㅎ'은 우하방 운필과 좌하방 운필이 혼재된 점 등이 거론됐다.

진실화해위 결정문에는 검찰의 강압수사에 대한 기록도 있다. 진실화해위에서 강 씨는 '이틀씩 밤샘조사를 받았고, 앉을 수 없게 해 선 채로 조사받기도 했으며 손찌검과 모욕을 당하기도 했다'고 증언했다. 검찰이 가족과 여자친구의 구속을 거론하며 자백을 강요한 일이 가장 힘들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후 서울고등법원은 2012년 12월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의 재심을 시작해 2014년 2월 강 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검찰은 상고했지만 대법원이 이를 기각해 2015년 5월 무죄 판결이 확정됐다. 2018년 5월에는 서울고법이 강 씨가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 대해 '국가가 강 씨와 가족에게 9억 3900만 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고 법무부와 검찰이 상고를 포기해 확정됐다.

▲ 강기훈씨가 2014년 2월 13일 서울 서초동 서울고법에서 재심 선고공판을 마치고 기자회견에서 소감을 밝히고 있다. ⓒ연합뉴스

간암 투병 중인 강기훈 씨의 재심 재판 최후진술

재판 기간 강 씨는 2012년 4월 발병한 간암과도 싸워야 했다. 그런데도 2014년 1월 서울고법 재판에 부인 이영미 씨의 부축을 받으며 출석해 30여분 간 최후 진술을 했다. 아래는 그 중 일부다.

"무엇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 지 누구에게 욕을 해야 할 지 그것도 잘 모르겠습니다. 검찰일까요, 법원일까요. 서울지검 소속이었던 강신욱, 신상규, 송명석, 안종택, 남기춘, 임철, 곽상도, 윤석만, 박경순 검사나 노원욱, 임대화, 부구욱, 박만호 판사와 같은 구체적 대상인지. 전재기 전 서울지검장인지 정구영 전 검찰총장 인지 아니면 김기춘 전 법무부 장관인지. 아니면 대한민국 혹은 인간사회에 대해서?"

강 씨가 답답한 마음과 함께 언급한 사건 책임자 중 일부의 이름은 우리에게 익숙하다. 사건 당시 법무부장관이었던 김기춘 씨는 박근혜 정부에서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냈다. 서울지검 검사였던 곽상도 씨는 박근혜 정부에서 민정수석을 지냈고 지금 국민의힘 재선의원이다. 서울지검 강력부장이었던 강신욱 씨는 2000년에서 2006년까지 대법관을 지냈고 2007년 박근혜 선거 캠프에서 활동했다. 이외에도 사건 책임자 상당수가 조직에서 승진하거나 정치권에 발을 들였다.

강 씨가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병까지 얻는 동안 사건 책임자 대부분은 승승장구했다. 진실화해위와 법원에 의해 사건의 진상이 드러난 이후 오늘까지도 강 씨에 대한 그들의 사과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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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락

내 집은 아니어도 되니 이사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집, 잘릴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충분한 문화생활을 할 수 있는 임금과 여가를 보장하는 직장, 아니라고 생각하는 일에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나, 모든 사람이 이 정도쯤이야 쉽게 이루고 사는 세상을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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