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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범' 잡아넣던 반인권법, '조두순 격리법'으로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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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사상범' 잡아넣던 반인권법, '조두순 격리법'으로 부활?

[손호철의 발자국] 35. 청주와 청송 : 사상범·전과자에 대한 이중처벌은 계속된다!

"김상흠, 너 나와!"

"제가 뭐 잘못했는데 그러세요?"

1974년 말, 부산의 한 달동네 서민주택에 경찰이 들이닥쳐 한 중년 노인을 끌어냈다. 영문도 모르고 갑자기 끌려나온 사람은 몇 년 전 출소한 사상범이었다.

그는 지리산을 끼고 있는 경남 하동의 내로라하는 부농의 아들로, 일본 와세다대학에 유학을 갔다. 일제 하 많은 지식인들이 그러했듯이, 그는 민족해방과 사회혁명을 위해 공산주의에 빠졌고 해방 후 남로당 경남 도당위원장으로 지리산에 들어가 빨치산이 됐다. 1953년 정전이 되자 그는 지리산을 탈출, 부산에서 지하당 재건 사업을 하다가 1955년 1월에 체포되어 16년 이란 긴 감옥살이를 하고 1971년 석방됐다.

수소문 끝에 지리산의 옛 동지였던 김정숙을 만나 뒤늦게 단란한 생을 살고 있는데 날벼락을 맞는 것이다. 박정희 정권이 유신과 함께 사회안전법이라는 것을 만들어 이미 형을 살고 나온 사상범을 다시 가두었기 때문이다. 즉 위헌적인 이중처벌을 한 것이다. 다시 수감된 김상흠 씨는 14년 뒤인 1988년에야 석방될 수 있었다. 다큐멘터리 작가 정충제가 발로 취재해서 쓴 <실록 정순덕>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청주 남쪽 끝인 서원구 언덕에 위치한 청주외국인보호소 앞에 서자 갑자기 이제는 고인이 된 김 씨의 애절한 사연이 생각나, 이른 아침부터 나도 모르게 가슴이 메어졌다. 청주외국인보호소가 원래 박정희 정권이 사회안전법으로 형을 살고 나온 사상범을 다시 가두었던 청주보안감호소가 있던 자리이기 때문이다. 교도소를 '보안감호'라고 부른다고 '보안'이 되고 '감호'가 되는 것인가? 김상흠 씨는 그래도 목숨이라도 건져 이곳에서 나올 수 있었지만, 변형만 씨와 김응성 씨 등 그렇지 못한 사람도 많았다.

▲ 형기를 다 채운 사상범들을 가두던 청주보안감호소는 이제 외국인보호소로 변했다. ⓒ손호철

제주의 보도연맹원 집단학살 사건인 '백조일손'에서 이야기했듯이, 우리는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이야기처럼 좌익인사 등에 대해 "과거의 전력 등을 보니 범죄를 일으킬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미리 잡아 가겠다", 아니 "죽이겠다"는 예비검속이라는 반인권적인 부끄러운 제도를 가지고 있었다.

▲ 빅데이터의 예측프로그램을 통해 범죄를 일으킬 가능성이 큰 사람을 골라 제거함으로써 범죄를 예방하는 미래를 그린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

이는 일제가 1933년에 만든 사상전향제도, 1936년의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에서의 '보호관찰' 제도, 1941년 개정된 치안유지법과 '조선사상범예방구금령에서의 '예방구금' 제도 등을 이어받은 것이다. 박정희 정권은 I950년 한국전쟁 전후의 '좌익' 혐의로 국가보안법 등으로 형을 선고받은 이들이 1960년대 후반~1970년대 전반에 만기출소하기 시작하자 이미 형을 다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예방 차원'에서 이들을 다시 가두기로 한 것이다.

이 법은 재범의 '위험성' 내지 '현저성'을 근거로 하여 '좌익사범'에 대하여 보안처분심의위원회의 의결을 거쳐 거의 무제한 감금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 특히 박정희,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전두환 정권은 '반공정신 확립 여부'를 재범 위험성의 기준으로 보고 전향서를 쓰지 않을 경우 계속 이들을 감금했다. '현저성'의 정도가 떨어진다고 판단해 보안감호소에 감금을 하지 않은 사상범도 주거를 제한하고 이들에 대해 주기적으로 '보호관찰'을 하도록 했다.

박정희 정권은 사회안전법 제정을 앞두고 사전 정지작업으로 1973년부터 약 2년에 걸쳐 전국적으로 미전향 좌익수들에 대한 집중적이고도 조직적인 전향강요 고문을 했다. 그 결과 많은 좌익수들이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죽거나 자신의 신념과 상관없이 전향을 해야 했다.

최후의 빨치산 정순덕 씨도 그중 한 명이다. 집단 폭행과 고문에 못 이겨 전향서를 쓴 사람들은 평생 폭력에 굴복해 자신의 양심을 팔았다는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뿐만 아니라 김영삼 정부 이후 이인모 등 여러 명의 비전향 장기수들이 북한으로 보내달라고 요구해 북으로 갔지만, 정순덕 등 전향각서를 쓴 장기수의 경우 본인이 원해도 보내주지 않았다.

1970년대 재일교포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형을 산 뒤 보안감호 처분을 받아 청주보안감호소에 감금되었다가 민주화와 함께 1988년 출옥한 서준석의 증언에 따르면, 그가 보안감호 대상이 된 1978년 120여 명이었던 피보안감호자가 고문 등으로 인해 1988년에는 50명으로 줄어들었다고 한다.

"1988년 현재 보안감호소라는 감옥에 남아있던 50명의 사상범들은 '재범의 현저성'과는 전혀 거리가 멀었던, 평균 연령 64세의 병든 노인들로, 사회안전법은 이들의 재범을 막기 위한 것이 아니라 미전향자들을 전향시키고, 시국관련 사범 및 재야인사, 나아가 국민들에게 겁을 주기 위한 협박장치일 뿐이다." 서준식의 비판이다.

서준식 등은 이 법이 일사부재리의 원칙, 소급입법 금지, 양심의 자유 등에 위배되는 법이라며 법정 투쟁을 벌였지만 독재정권의 하수인이었던 사법부는 이들의 호소를 철저하게 외면했다. 이들은 사법투쟁 외에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단식투쟁을 진행하는 등 끊임없이 투쟁했다.

"책 읽을 자유를 달라!" 변형만, 김응성 씨는 비전향장기수로 형을 살고 석방되어 사회생활을 하다가 1978년 사회안전법에 의해 청주보안감호소로 다시 잡혀왔다. 이들은 감호소가 서적 반입을 심하게 제한하자, 이에 항의해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단식이 길어지자 감호소는 이들에게 소금물을 강제로 붓는 강제급식을 실시했고, 그 과정에서 이들은 숨지고 말았다. 김대중 정부 시절인 2002년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는 사회안전법을 국민의 기본권을 짓밟은 위헌적 법률로 규정하고 보안감호소의 비인간적인 처우에 저항해 싸우다가 숨진 이 두 명에 대해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했다.

사회안전법은 민주화와 함께 1989년 폐지됐다. 문제는 이를 대체하여 제정한 보안관찰법이 민주화 30여 년이 지나도록 아직도 버젓이 존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법은 국가보안법 위반 등으로 3년 이상 형을 받은 사상범에 대해 활동 내역과 여행지 등을 관할경찰서에 주기적으로 신고하도록 의무화하고 있는데, 이를 면제받으려면 신원보증과 함께 준법서약서를 내도록 요구하고 있다.

전두환 정권 시절 구미유학생 간첩단 사건이란 공안 사건으로 14년 형을 받고 1990년대 말 출옥한 강용주는 양심과 사상의 자유를 제약하는 이 위헌적 조치에 대해 불복종 운동을 벌였다. 정부는 그를 기소했지만 법원은 2018년 무죄 판결을 내렸고, 법무부는 2019년 보안관찰면제 처분에 요구했던 준법서약서를 폐지했다. 하지만 법 자체는 위헌이 아니라는 것이 사법부의 판단이라 시대착오적인 보안관찰법은 남아있다. 빨리 이 같은 법이 없어지기를 기원하며 나는 청주를 떠났다.

▲ 예비검속의 극단적 형태로, 북한과 협력할 가능성이 크다는 이유로 보도연맹 가입자들을 집단 학살한 제주도 대정의 섯알오름 웅덩이 ⓒ손호철
▲ 보안관찰제도에 대한 불복종 운동으로 준법서약서 폐지를 이끌어낸 최연소 비전향장기수 출신의 강용주 씨. ⓒ프레시안(최형락)

'미투' 운동으로 해외를 떠돌다 생을 마감한 김기덕 감독의 영화에 '봄, 여름, 가을, 겨울'이란 작품이 있다. 그 영화에는 자그마한 호수의 물속에 기이한 형태의 고목들이 자라고 있는, 기가 막힌 장소가 나온다. 청송의 주산지다. 안동 밑에 있는 청송은 '육지 속의 섬'이라고 불리는 '오지 중의 오지'다. 이곳에도 청주보안감호소를 빼어 닮은 시설이 있었다. '한국의 알카트라즈' 청송보호감호소다(샌프란시스코 앞바다 섬에 있는 알카트라즈는 알 카포네 등 악명 높은 범죄자들만 가두었던 악명 높은 감옥으로 이를 주제로 여러 영화가 만들어졌다).

1980년 광주 학살로 권력을 잡은 전두환은 여러 가지로 박정희를 모방했다. 박정희가 5‧16쿠데타 후 사회정화라는 이름아래 깡패 등을 잡아다 만든 '국토건설단'을 모방해 '삼청교육대'를 만들었고, 박정희의 '사회안전법'을 모방해 '사회보호법'을, 청주보안감호소를 모방해 청송보호감호소를 만들었다.

▲ 산에서 내려다본 청송교도소 모습 ⓒ손호철

사회안전법과 보안감호소가 사상범을 대상으로 한 것이라면, 사회보호법과 보호감호소는 '일반범죄자', 특히 '강력범'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전두환은 1980년 삼청교육대를 해체하며 전과자들을 사회로부터 격리시켜 재범 가능성을 봉쇄한다는 목적으로 사회보호법을 만들었다. 즉 비슷한 범죄로 두 번 이상 실형을 선고받은 '상습범'이 다시 범죄를 저지를 경우 재범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형기를 다 산 뒤에도 사회로부터 격리시킬 수 있도록 보호감호 처분을 내린다는 것이다. 이는 사회보안법과 마찬가지고 위헌적인 이중처벌이다.

"징역 7년에 보호감호 10년을 더해 17년을 썩을 생각을 하니 아득해서 탈주했다."

"징역 15년에 추가로 보호감호 10년까지 선고받아 희망이 없었다."

앞은 지난 1988년 탈주해 인질극을 벌이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란 말을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지강헌이, 뒤는 탈주했다가 붙잡힌 '대도' 조세형이 한 말이다. 이처럼 보호감호제와 청송보호감호소는 범죄자들에게 지옥이었다. 지강헌, 조세형 이외에도 서방파 두목 김태촌, 수원 토막살인범 오원춘 등 거물 범죄자나 흉악범들은 다 이곳을 거쳐 갔다.

▲ 청송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청송으로 가는 길' 포스터

오지 중의 오지인데다가 대부분 독방으로 24시간 CCTV로 감시하는 국내 유일의 중경비시설이라 탈옥은 꿈도 못 꾼다. 결국 사회보안법은 위헌적인 이중처벌과 인권침해라는 비판에 의해 노무현 대통령 시절인 2005년 폐지됐고 청송의 보호감호소는 문을 닫고 일반교도소만 남았다(최근 출소해 국민적인 공분을 사고 있는 엽기적인 아동성범죄자 조두순 역시 청송보호감호소 폐지 후 청송교도소에서 형을 살았다).

그런데 사라졌던 보호감호제도가 부활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조두순 출소에 따른 국민적 분노에 힘입어, 문재인 정부는 살인범, 아동 성폭력범, 5년 이상 실형을 산 재범 위험이 높은 사람 등의 경우 알코올 중독 등의 요인으로 재범 가능성이 크다는 전문가 판단이 나오면, 법원이 이들에게 출소 후 최장 10년 동안 보호시설에 격리 수용 선고할 수 있도록 하는 신보안처분제(일명 '조두순 격리법')를 추진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은 이것이 폐지된 보호감호와 전혀 다를 바가 없다고 비판하고 있다.

청송의 북쪽 지역인 진보면 홍구리의 가파른 언덕 위로 올라가면, '육지의 섬' 속의 '또 다른 섬'인 청송교도소가 멀리 내려다보인다. 멀리 청송교도소를 내려다보고 있자, 여러 생각이 교차하며 머리가 복잡해졌다. 조두순과 같은 '인간 이하'의 범죄자에 대한 분노와 재범에 대한 우려는 이해하지만, 이에 대한 유일한 대안이 이들을 죽을 때까지 사회로부터 격리시키는 보호감호제도라는 '변형된 무기징역' 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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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철

화가를 꿈꾸다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로 진학했다. 독재에 맞서다 제적, 투옥, 강제 징집을 거쳐 8년 만에 졸업했다. 어렵게 기자가 됐지만, '1980년 광주 학살'에 저항하다 유학을 갔고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일하며 진보적 학술 활동과 사회운동을 펼쳐왔다. <국가와 민주주의>, <한국과 한국 정치>, <촛불혁명과 2017년 체제> 등 이론서와 <마추픽추 정상에서 라틴아메리카를 보다>, <레드 로드-대장정 13800KM 중국을 보다> 등 역사 기행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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