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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는 '한 끗 차이'에서 시작될 수 있다"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 서로가 서로를 돌보는 삶, 그 풍요로움에 대하여…

학교를 마친 아이들이 재잘거리며 뛰어온다. 아이들이 향하는 곳은 마을의 작은 도서관(경기도 용인의 '해와달작은도서관')이다. 이곳은 평일 12시부터 6시까지 늘 열려있다. 아이들은 도서관 이곳저곳에 가장 편한 자세로 자리 잡는다. 상주하는 사서 선생님도 마을 주민이다. 아이들의 이름도 알고 성향도 파악하고 있다. 아이들은 도서관에 상비된 스도쿠도 하고, 보드게임도 하고, 책도 보며 스스럼없이 행동한다. 이곳이 환대의 공간이라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아이들은 안전한 공간에서 편안하고 자유롭게 자신만의 세계로 빠져든다. 도서관 옆 북카페에서는 일주일에 세 번 '아동 마을 돌봄'의 일환으로 컴퓨터, 독서, 보드게임 등의 별도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원하는 아이는 누구나 별도의 비용 없이 참여할 수 있다.

이 소소하지만 희귀한 풍경은 내가 사는 마을에서 거의 매일 일어나는 일이다. 내가 '희귀하다'라고 표현한 이유는 이 풍경 어디도 '관' 혹은 '자본'이 주도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복지의 주체와 대상 모두 주민이다. 지금은 코로나19로 인해 일시적으로 멈춰지거나 온라인으로 대체된 상태지만 주민 주도로 '인문학 수업, 악기 강습, 캘리그래피, 시니어 보드게임, 김장 나눔 행사' 등 성인과 노인을 대상으로 한 다양한 복지 프로그램도 꾸준히 이어져 왔다.

이 같은 마을 복지 활동들은 최근 정부가 적극 추진하고 있는 지역사회 통합돌봄(커뮤니티 케어)과 맥을 같이 한다. 노인, 장애인, 아이들처럼 사회적 약자에 대한 돌봄을 개인이나 자본 혹은 기관에 전담시키지 않고, 각자가 살아가는 마을에서 주민이 주민을 돌보며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찾아가고 있다.

▲ 경기도 용인의 '해와달작은도서관' 모습. ⓒ해와달작은도서관

그렇다면 평범한 아파트인 이곳에서 어떻게 자연스럽게 일상 속 커뮤니티 케어가 실현될 수 있었던 걸까? 주민들은 어떻게 스스로가 필요로 하는 복지를 찾아내고 만들며 서로를 도우며 살아가게 된 것일까? 그 비밀은 바로 오랜 시간 공동체가 함께 쌓아온 공통의 경험과 연대에 있다.

산 위에 오독하니 자리한 이곳은 아침저녁으로 새소리가 들리고 아이들이 나가 놀아도 걱정 없는 아파트다. 조용하고 쾌적한 환경이 좋아 이사한 주민이 대다수였지만 서로 간에 특별한 연대가 형성되어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2015년 1월, 갑자기 마을이 뒤숭숭해졌다. 초등학교 바로 옆에 위치한 산이 잘려 나가고 '시멘트 혼화제 연구소'가 들어온다는 것이었다. 착공계가 제출될 때까지 대다수의 주민은 이를 몰랐다. 급하게 대책위원회가 꾸려졌고 아이들과 환경을 지키기 위한 주민들의 투쟁이 시작되었다. 산 앞에 천막이 지어졌고, 주민들이 모였다. 재판이 이어졌고, 투쟁은 힘겨웠다. 자본의 힘은 크고 집요했고 거셌다. 결국 주민이 신청한 행정소송은 각하되고 말았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졌으나 지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공동체가 형성된 것이다. 투쟁 과정을 함께 한 공동체는 끝난 후에도 흩어지지 않았고, 주민들은 '어쩔 수 없다'라는 말 대신 '그럼 어떻게 할까?'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다. '마을 공동체'라는 새로운 무대 위에서 서로의 삶을 포개며,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한 방법을 함께 모색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 행동을 시작했다. 학교 옆에 세워진 연구소가 환경을 해치지 활동을 하지 않는지 끊임없이 모니터하고, 우리 아이들이 마을 안에서 건강하게 클 수 있도록 돌봄 활동을 시작했다. 어르신들의 건강권을 지켜드리기 위해 산책로를 더 정비해달라고 요구했다.

이런 활동들을 하며 주민은 각자의 문제들이 다 서로 이어져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래서 자본의 힘이나 관의 주도에 의존하지 않고, 주민 스스로의 힘으로 복지를 만들어 나갔다. 필요한 부분이 있으면 각자의 품을 내어 조금씩 해결했고, 부족한 예산은 시의 지원도 받았다.

복지는 단순히 더 많은 예산이나 획기적인 프로그램만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물론 이 역시 매우 중요하다). 사람들과 함께 옳다고 믿는 가치를 향해 연대하며 나아갈 때 우리는 자기 삶의 문제들을 단계적으로 해결해 나갈 수 있다. 각자도생해야 하는 사회에서 많은 비용을 들여 해결하거나 아예 해결 불가능해 보이는 문제들도, 연대하는 사회에서는 의외로 쉽게 해결될 수 있는 이유도 그래서다.

특히 위기의 상황을 맞거나, 취약한 계층일수록 나의 삶 가까이에서 스스로 만들어가는 복지가 더욱 빛을 발할 수 있다. 예를 들어 2020년 코로나19로 인한 팬데믹 상황의 경우 모두에게 힘겨웠으나 여성 노동자들에게는 더욱 가혹했다. 한국노총이 지난 3월 발표한 '2021년 직장 내 성평등 조직문화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여성 노동자의 70%는 코로나로 인한 가족 돌봄으로 직장 내 불이익 우려가 두드러지고 있다고 밝혔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돌봄 서비스의 공적 기능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돌봄 노동의 책임이 여성에게 전가된 것이었다. 그로 인해 실직과 생계 악화로 이어지는 경우도 많았다. 장기적으로는 우리 사회의 인식과 제도 개선이 필수지만 단기적으로는 그들의 삶 옆에서 그들을 일으키고 도와줄 현실적인 복지제도가 절실하다. 이럴 때 지역사회에서 서로서로 도울 수 있는 시스템이나 연대가 형성되어 있다면 어떨까? 정말 급할 때, 혹은 위급할 때 내가 손 내밀고 기댈 수 있는 곳이 바로 옆에 있다는 것. 그 사실 하나로도 개인의 삶의 질은 달라질 수 있다.

▲ 경기도 용인의 '해와달작은도서관' 모습. ⓒ해와달작은도서관

나는 복지가 이 '한 끗 차이'에서 시작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복지를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거창한 개념에서 찾지 않고, 지금 내가 살아가는 '여기'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찾고 만들어가는 구체적 생활 속에서 찾아가는 것이다. 누구나 살아가다 보면 거센 파도를 만나게 되는 순간이 온다. 홀로 점처럼 떠서 그 파도를 맞으며 살기에는 인생이 너무 버겁다. 그러나 점과 점을 이어 선이 되면 '우리 공통의 문제'가 된다. 아동 돌봄 문제는 아이의 안전 보장은 물론 모두의 노동권 생존권과 연결된다. 독거노인의 건강 문제는 어디선가 홀로 지낼 내 부모의 문제가 될 수 있다. 최저임금은 당장 나의 노동환경과 내 아이가 노동시장에 던져졌을 때 부딪치게 될 문제다. 교통 약자의 이동권 문제는 누구에게라도 언제나 닥칠 수 있고, 우리 모두에게 반드시 닥칠 미래의 문제이다.

내가 지금 살아가는 이곳에서 내 삶의 앞에서 만나는 구체적인 문제를 가지고 지역사회로 나가보자. 함께 살아가는 이들과 연대하고 관계를 맺으며 작은 해결책이라도 함께 찾아보자. 얼핏 요원해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은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방법일 수 있다.

지금 당신의 삶을 힘겹게 하거나 괴롭히는 의제는 무엇인가. 그 의제에 대해 함께 이야기하고 해결책을 찾아갈 사람을 만나 관계를 맺자. 그 의제를 해결하기 위해 함께 노력해보자. 목소리를 모아 정부에게 제도 개선을 요구하고, 우리를 위한 복지를 설계하자. 지금, 여기, 이곳을 내가 살고 싶은 복지국가로 만들어 가보자. 그렇게 우리 풍요로운 삶을 함께 살아가 보자.

*내가만드는복지국가는 의제별 연대 활동을 통해 풀뿌리 시민의 복지 주체 형성을 도모하는 복지단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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