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과 부산시장 보궐선거에서 여당이 참패한 뒤에 '세대' 담론이 범람하고 있다. 이대남, 이대녀, MZ세대, 에코세대 ... 하나같이 처음 듣는 말인데, 이를 모르면 언론 기사도 이해하기 힘들고, 사석에서 정치, 경제를 논할 수도 없다. 여기에다 이미 익숙해진 말들, 가령 산업화세대, 민주화세대, 86세대, X세대 등을 합치면, 그게 곧 한국 사회의 지도라도 되는 것 같다.
주로 세대로 나누기는 하지만, 결국 다 '부족'명이다. 한국 사회의 다른 구성원과는 결코 공유할 수 없다고 '가정되는' 특성으로 집단을 나누고, 한국 사회가 마치 그런 집단들의 무더기인 양 여기는 것이다. 즉, 2021년의 한국 사회란 이대남, 이대녀부터 86세대, 산업화세대에 이르는 수많은 부족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다른 부족의 심성과 계산법, 언어와 몽상에 괴로워하며 모두 다 '헬!'을 외치는 난장판이다.
여기에 없는 단 한 가지는 그런 부족 경계를 뛰어넘어 '우리'를 느끼고 사고할 수 있게 하는 이름이다. 물론 정치인들이나 언론이 들이미는 묘한 단어가 하나 있기는 하다. 국적 불명의 'K-' 접두어가 그것인데, 어느덧 이 말은 한국인들 사이에서 '민족'이나 '국민'의 기이한 대체어가 되어 있다. 하지만 그 전에 우리에게는 더 그럴 듯한 보편어들이 있었다. 근대의 거대한 이념들이 예외 없이 주창한 자유, 평등, 연대의 가치를 직접 연상시키는 언어들, 가령 '시민', '민중', '노동자' 같은 말들 말이다.
그러나 자고 일어나면 또 다른 부족명이 발명되는 세상에서 이런 이름들은 죽은 말 취급을 당하기 일쑤다. 예컨대 86세대가 '시민'을 말하면, 이는 꼰대의 위선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가 된다. 또한 이대남을 '노동자'의 틀로 바라보려 하면, 이는 세월이 바뀐 줄 모르는 낡은 이념의 증거일 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런 세태에 정면으로 거스르는 제목을 당당히 달고 나온 책 한 권이 있다. 젊은 저자 강남규의 칼럼 모음 <지금은 없는 시민>(한겨레출판, 2021)이다. 비록 '없음'을 전제하면서도 '지금은'이라는 또 다른 한정을 통해 이 책은 감히 '시민'을 호명한다. 지금은 없더라도, 반드시 있어야 할 '시민'을 부른다. 부족연합의 현실뿐만 아니라, 현실이 그것뿐이라 진단하는 정치권과 언론계에 던지는 선전포고와도 같은 제목이다.
'깨시민'의 시대에 부재한 '시민'
시민이 없다니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바야흐로 '깨시민', '깨어 있는 시민'들의 전성기가 아닌가. 이 호명에 자부심을 느끼는 이들이 정권까지 출범시키지 않았던가. 그러나 바로 그렇기에 '시민'이라는, 반드시 필요한 보편어는 오히려 심각한 위기에 빠지고 말았다. 그런 보편어를 무기로 절실히 필요로 하는 이들이 그 무기를 빼앗겼고, 그런 무기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의문시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저자 강남규는 "서문"에서 이렇게 밝힌다.
그럼 강남규에게 '깨시민'과는 다른, 진정으로 깨어난 '시민'이란 누구인가? 이를 밝히기 위해 그는 "서문"에서 '시스템주의자'와 '의인'이라는 비유로 논의를 풀어나간다. '시스템주의자'란 시스템을 바꾸지 않고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부류다. 반면에 '의인'이란 문제 상황에서 이에 대처하려고 앞서서 행동하는 이들이다. 저자는 이 두 부류 가운데에 문제를 실제로 풀어나가는 데 기여하는 것은 어느 쪽인지 묻는다. 시스템주의자인가, 아니면 의인인가?
사실 좀 극단적인 이분법이고, 따라서 억지 질문일 수 있다. 저자 역시 시스템주의자를 비판하거나 의인을 영웅시하려는 게 아니다. 오히려 <지금은 없는 시민> 곳곳에서 구조와 제도의 커다란 변혁을 강조하는 저자는 전형적인 시스템주의자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런 물음으로 책을 시작하는 것은 시스템주의 접근법을 보다 진지하게 취할수록 거기에 커다란 빈 자리가 있음이 선명히 감지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시스템을 바꾸는 것 역시 사람의 일이라는, 어찌 보면 너무 당연한 상식이다.
그러나, 늘 그렇듯이, 우리의 정체와 퇴보는 바로 그 당연한 문제를 풀지 못하거나 망각하는 데에서 비롯된다. "망가진 시스템을 청산하는 일도, 좋은 시스템을 세우는 일도 모두 사람의 일"(8쪽)이라면, 시스템주의 해법을 관철하기 위해서도 우선은 이 일을 해낼 "사람"을 찾아나서야 한다. '의인'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강남규는 이 '의인'이 특출한 소수의 영웅일 수 없다고 단언한다. 더 많은 이들이 '의인'의 짐을 나눠 질 수 있고, 그렇기에 우리는 부족을 떠나 더 큰 '우리'로 거듭 날 수 있다고 역설한다. 지금은 없는 '시민' 말이다.
요컨대 강남규에게 '시민'이란 '책임'이라는 느낌과 의식, 상상력을 동반하는 호명이다. 서로를 '시민'이라 부르며 우리는 상대에게 어떤 책임을 요구할 수 있으며, 따라서 당연히 나 또한 그 책임의 그물 안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자각하게 된다. 이것은 참으로 성가신 요청이며, 그래서 지금 한국 사회의 '깨시민'들은 그 이름과는 정반대로 책임에 대해 '깨어있기'를 애써 피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책임에 대해 깨어있기를 거부하지 않는 '시민'이 돌아오지 않고서는 제도나 구조의 변화는 불가능하다. 변화해야 할 시스템의 중요한 부분들을 구체적으로 지목하는 <지금은 없는 시민>의 여러 글들에서 저자가 끊임없이 동료 시민의 관심과 결단을 호소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점에서 이 책은 흔히 보는 칼럼집만은 아니다. 정말로 절실히 변화를 바라는 이의 격문이다.
모두가 '시민'이 되는 꿈을 버릴 수 없는 사람들
<지금은 없는 시민>에서 가장 가슴을 때리는 대목이다. 2020년 4월 29일 이천 물류센터 화재로 38명의 노동자가 사망한 뒤에 쓴 칼럼 "'이야기'가 되지 못한 죽음"의 마지막 단락이다. <지금은 없는 시민>이 처음 세상에 나올 무렵인 올해 4월 22일에는 또 한 명의 젊은 노동자 이선호 씨가 평택항에서 300kg 무게의 컨테이너 날개에 깔려 숨졌다. 무섭게도, 위의 처절한 문구는 지금도 대한민국에서 매일 반복되는 현실이다.
이선호 씨의 빈소에는 더불어민주당의 신임 송영길 대표도 찾아왔다고 한다. 송영길 대표는 자신의 SNS에 "자본의 논리에 일용노동자들이 소모품처럼 죽어가는 야만의 경제 사슬을 개선해야 합니다. 현장에서 답을 찾겠습니다"라고 적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답을 찾아 헤맬 필요가 없다. 정부, 여당은 이미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이라는 모범 답안을 누더기로 만들어 '무늬만 중대재해처벌법'을 통과시킨 바 있다.
그래도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도 180석 획득의 대승을 거듭할 수 있고, 정권을 이어갈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그리 생각하고 믿을 수 있는 것은 산업 재해로 쓰러지는 비정규직 노동자 같은 이들에게는 '이름'이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는 이들이 등장인물로 식별되는 '이야기'란 없음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고 목소리가 들리는 이들은 다른 사람들이다. 가령 '공정'이라는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그들이다. 인천국제공항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에 반대하고 나선, 대개 대졸자이고 관리직 업무를 맡는 공항 정규직 같은 이들 말이다. "'다른' 청년은 어디에나 있다"는 글에서 강남규는 많은 점에서 그들과 같지 않은 이들이 늘 '청년'의 범주 안에서 삭제되는 메커니즘을 보여준다. 대졸자, 그것도 명문대 졸업자가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는 언론사 기자의 펜을 거치면서 어떤 이들이 '이름'을 얻고, 어떤 '이야기'만 살아남는지 보여준다.
한국 사회 구성원들을 거의 필사적으로 부족들로 세분화하는 최근 언론의 유행도 마찬가지다. 정치인, 언론인들이 이러저런 부족 '이름'들을 떠벌릴수록 어떤 이들은 오히려 더욱 가려지고 망각된다. '공정'을 논하며 주로 대학 입시 경쟁과 대졸자 취업난을 이야기 할 때에 시야에서 사라져버리는 "'다른' 청년"들(128-9쪽)이 있다. 정부, 여당을 변호하는 중산층 시위대가 "벼랑 끝에 내몰렸다"고 외칠 때에 진짜 벼랑 끝에 서 있는 이들, "미투 고발자들, 사회적 약자들, 산업재해로 죽어가는 노동자들"(61쪽)이 있다.
이들이 망각을 거부하며 목소리를 낼 수 있으려면. 그에 맞는 그들의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 <지금은 없는 시민>에 따른다면, 그것은 이를테면 '시민의 자리'를 묻는 이야기다. 시민이 동료 시민에게 마땅히 요구할 수 있는 책임의 이야기, 그래서 무관심이 더는 무죄와 동일시될 수 없도록 다그치는 이야기일 것이다. 강남규가 너무나 깔끔히 정리한, 다음과 같은 한국 사회의 축도를 개선하자는 '공정'론 말고 그것을 뒤엎어버리자는 '평등'의 이야기일 것이다.
<지금은 없는 시민> 속 변화의 단서들
<지금은 없는 시민> 곳곳에는 그런 '이야기'의 단서가 있다. 어떻게 하면 제6공화국의 정치인, 언론인들이 단단히 구축해놓은 기존 이야기들에 균열을 내고 새 이야기들이 솟아나오게 할지에 대한 고민들이 모든 글을 관통한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은 영화 <기생충>을 보고 쓴 칼럼인 "왜 저들은 <기생충>을 두려워하지 않나"이다. 이 글은 내가 이제껏 본 이 영화의 감상평 중 단연 뛰어나다. <지금은 없는 시민>은 이 글 한 편 때문에라도 애써 찾아 읽을 값어치가 충분하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이 글이 제시하는 방법론을 저자 자신이 요약한 말이 "선을 넘는 진보정치" 아닌가 싶다.
바꿔 말하면, "선을 넘지" 못하는 정치와 언론, 사회운동은 이제 퇴장해야 한다. 두 차례의 촛불 시위를 경험하며 성장한 90년대생 저자는 이들이 퇴장해도 전혀 아쉽거나 걱정할 게 없음을 스스로 증명한다. 새롭게 대열을 채울 이들이 이미 성큼 다가와 있는 것이다.
그 점에서 <지금은 없는 시민>의 유일한 오류는 제목일 것이다. 그 시민은 지금 없지 않다. 부족으로 분류되길 거부하고 공통의 이름으로 외칠 태세를 갖춘 이들이 없지 않다. 지금은, 단지, 충분히 결집하지 못했을 뿐이다. 더 많은 이들이 이 책을 손에 들고 거기에 담긴 고민과 희망에 공명함으로써 이 오류를 더욱 선명히 입증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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