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이대남, 이대녀, MZ세대?...'부족명' 붙이기 말고 진짜 '시민'을 위해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이대남, 이대녀, MZ세대?...'부족명' 붙이기 말고 진짜 '시민'을 위해

[장석준 칼럼] 강남규의 <지금은 없는 시민>을 읽고

서울과 부산시장 보궐선거에서 여당이 참패한 뒤에 '세대' 담론이 범람하고 있다. 이대남, 이대녀, MZ세대, 에코세대 ... 하나같이 처음 듣는 말인데, 이를 모르면 언론 기사도 이해하기 힘들고, 사석에서 정치, 경제를 논할 수도 없다. 여기에다 이미 익숙해진 말들, 가령 산업화세대, 민주화세대, 86세대, X세대 등을 합치면, 그게 곧 한국 사회의 지도라도 되는 것 같다.

주로 세대로 나누기는 하지만, 결국 다 '부족'명이다. 한국 사회의 다른 구성원과는 결코 공유할 수 없다고 '가정되는' 특성으로 집단을 나누고, 한국 사회가 마치 그런 집단들의 무더기인 양 여기는 것이다. 즉, 2021년의 한국 사회란 이대남, 이대녀부터 86세대, 산업화세대에 이르는 수많은 부족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다른 부족의 심성과 계산법, 언어와 몽상에 괴로워하며 모두 다 '헬!'을 외치는 난장판이다.

여기에 없는 단 한 가지는 그런 부족 경계를 뛰어넘어 '우리'를 느끼고 사고할 수 있게 하는 이름이다. 물론 정치인들이나 언론이 들이미는 묘한 단어가 하나 있기는 하다. 국적 불명의 'K-' 접두어가 그것인데, 어느덧 이 말은 한국인들 사이에서 '민족'이나 '국민'의 기이한 대체어가 되어 있다. 하지만 그 전에 우리에게는 더 그럴 듯한 보편어들이 있었다. 근대의 거대한 이념들이 예외 없이 주창한 자유, 평등, 연대의 가치를 직접 연상시키는 언어들, 가령 '시민', '민중', '노동자' 같은 말들 말이다.

그러나 자고 일어나면 또 다른 부족명이 발명되는 세상에서 이런 이름들은 죽은 말 취급을 당하기 일쑤다. 예컨대 86세대가 '시민'을 말하면, 이는 꼰대의 위선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가 된다. 또한 이대남을 '노동자'의 틀로 바라보려 하면, 이는 세월이 바뀐 줄 모르는 낡은 이념의 증거일 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런 세태에 정면으로 거스르는 제목을 당당히 달고 나온 책 한 권이 있다. 젊은 저자 강남규의 칼럼 모음 <지금은 없는 시민>(한겨레출판, 2021)이다. 비록 '없음'을 전제하면서도 '지금은'이라는 또 다른 한정을 통해 이 책은 감히 '시민'을 호명한다. 지금은 없더라도, 반드시 있어야 할 '시민'을 부른다. 부족연합의 현실뿐만 아니라, 현실이 그것뿐이라 진단하는 정치권과 언론계에 던지는 선전포고와도 같은 제목이다.

'깨시민'의 시대에 부재한 '시민'

시민이 없다니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바야흐로 '깨시민', '깨어 있는 시민'들의 전성기가 아닌가. 이 호명에 자부심을 느끼는 이들이 정권까지 출범시키지 않았던가. 그러나 바로 그렇기에 '시민'이라는, 반드시 필요한 보편어는 오히려 심각한 위기에 빠지고 말았다. 그런 보편어를 무기로 절실히 필요로 하는 이들이 그 무기를 빼앗겼고, 그런 무기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의문시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저자 강남규는 "서문"에서 이렇게 밝힌다.

"문재인 정부 탄생 이후 이른바 '깨어있는 시민'들은 시민으로서의 정체성보다 지지자로서의 정체성을 앞세우기 시작했다. 즉 시민으로서 사회적 문제에 관여하고 민주주의를 확장하는 대신, 지지자로서 문재인 정부에 정치적 당위를 위탁하고 정부를 엄호하는 데 주력했다. 이런 흐름은 여당이 제21대 총선에서 압도적 승리를 거둔 뒤에 심화됐다. "시민의 승리"로 탄생했다는 정부에서 역설적으로 "시민의 후퇴"가 일어난 것이다. 그래서 민주주의를 급진화하는 '시민의 자리'를 얘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없는 시민> 10쪽)

그럼 강남규에게 '깨시민'과는 다른, 진정으로 깨어난 '시민'이란 누구인가? 이를 밝히기 위해 그는 "서문"에서 '시스템주의자'와 '의인'이라는 비유로 논의를 풀어나간다. '시스템주의자'란 시스템을 바꾸지 않고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부류다. 반면에 '의인'이란 문제 상황에서 이에 대처하려고 앞서서 행동하는 이들이다. 저자는 이 두 부류 가운데에 문제를 실제로 풀어나가는 데 기여하는 것은 어느 쪽인지 묻는다. 시스템주의자인가, 아니면 의인인가?

사실 좀 극단적인 이분법이고, 따라서 억지 질문일 수 있다. 저자 역시 시스템주의자를 비판하거나 의인을 영웅시하려는 게 아니다. 오히려 <지금은 없는 시민> 곳곳에서 구조와 제도의 커다란 변혁을 강조하는 저자는 전형적인 시스템주의자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런 물음으로 책을 시작하는 것은 시스템주의 접근법을 보다 진지하게 취할수록 거기에 커다란 빈 자리가 있음이 선명히 감지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시스템을 바꾸는 것 역시 사람의 일이라는, 어찌 보면 너무 당연한 상식이다.

그러나, 늘 그렇듯이, 우리의 정체와 퇴보는 바로 그 당연한 문제를 풀지 못하거나 망각하는 데에서 비롯된다. "망가진 시스템을 청산하는 일도, 좋은 시스템을 세우는 일도 모두 사람의 일"(8쪽)이라면, 시스템주의 해법을 관철하기 위해서도 우선은 이 일을 해낼 "사람"을 찾아나서야 한다. '의인'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강남규는 이 '의인'이 특출한 소수의 영웅일 수 없다고 단언한다. 더 많은 이들이 '의인'의 짐을 나눠 질 수 있고, 그렇기에 우리는 부족을 떠나 더 큰 '우리'로 거듭 날 수 있다고 역설한다. 지금은 없는 '시민' 말이다.

"'시스템이 바뀌어야 한다'는 말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어떤 공백의 영역에 시민의 자리가 있다. 그 자리를 소수의 특별한 의인들에게만 맡겨놓지 말자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 좋은 시스템의 작동을 불가능하게 하는 이 구조를 바꾸는 일에 함께하자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 함께 책임을 나누고, 부담을 덜고, 옳음을 따르는 마음을 모아 좋은 '사회'를 만들자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

... '시민이 한 사회의 주인'인 것이 민주주의의 근본원리다. 자신의 집을 일부러 더럽히고 망가뜨리는 사람이 흔치 않은 것처럼, 우리가 '사회'라는 집의 주인이라면 이 사회를 유지하고 발전시킬 책임이 있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서로 돕고 연대하는 좋은 사회를 만드는 것은 시민인 우리가 할 수 있는 '선의의 행위'이면서 동시에 '당위적 책임'이 된다. 현대 사회에서 입법자와 통치자를 선출하는 일이나 다수결 논리로만 오해되고 있는 민주주의라는 개념을 처음부터 다시 고민함으로써 그 의미를 복원하고 확장할 때, 비로소 우리는 더 나은 세상에 살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9-10쪽)

요컨대 강남규에게 '시민'이란 '책임'이라는 느낌과 의식, 상상력을 동반하는 호명이다. 서로를 '시민'이라 부르며 우리는 상대에게 어떤 책임을 요구할 수 있으며, 따라서 당연히 나 또한 그 책임의 그물 안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자각하게 된다. 이것은 참으로 성가신 요청이며, 그래서 지금 한국 사회의 '깨시민'들은 그 이름과는 정반대로 책임에 대해 '깨어있기'를 애써 피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책임에 대해 깨어있기를 거부하지 않는 '시민'이 돌아오지 않고서는 제도나 구조의 변화는 불가능하다. 변화해야 할 시스템의 중요한 부분들을 구체적으로 지목하는 <지금은 없는 시민>의 여러 글들에서 저자가 끊임없이 동료 시민의 관심과 결단을 호소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점에서 이 책은 흔히 보는 칼럼집만은 아니다. 정말로 절실히 변화를 바라는 이의 격문이다.

모두가 '시민'이 되는 꿈을 버릴 수 없는 사람들

"시인 김시종이 5.18을 마주하고 쓴 <명복을 빌지 말라>라는 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날이 지나도 꽃만 놓여 있다면, 애도는 이제 그저 꽃일 뿐이다." 그렇다면 꽃조차 놓이지 않은 죽음은 무엇이란 말인가." (145쪽)

<지금은 없는 시민>에서 가장 가슴을 때리는 대목이다. 2020년 4월 29일 이천 물류센터 화재로 38명의 노동자가 사망한 뒤에 쓴 칼럼 "'이야기'가 되지 못한 죽음"의 마지막 단락이다. <지금은 없는 시민>이 처음 세상에 나올 무렵인 올해 4월 22일에는 또 한 명의 젊은 노동자 이선호 씨가 평택항에서 300kg 무게의 컨테이너 날개에 깔려 숨졌다. 무섭게도, 위의 처절한 문구는 지금도 대한민국에서 매일 반복되는 현실이다.

이선호 씨의 빈소에는 더불어민주당의 신임 송영길 대표도 찾아왔다고 한다. 송영길 대표는 자신의 SNS에 "자본의 논리에 일용노동자들이 소모품처럼 죽어가는 야만의 경제 사슬을 개선해야 합니다. 현장에서 답을 찾겠습니다"라고 적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답을 찾아 헤맬 필요가 없다. 정부, 여당은 이미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이라는 모범 답안을 누더기로 만들어 '무늬만 중대재해처벌법'을 통과시킨 바 있다.

그래도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도 180석 획득의 대승을 거듭할 수 있고, 정권을 이어갈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그리 생각하고 믿을 수 있는 것은 산업 재해로 쓰러지는 비정규직 노동자 같은 이들에게는 '이름'이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는 이들이 등장인물로 식별되는 '이야기'란 없음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고 목소리가 들리는 이들은 다른 사람들이다. 가령 '공정'이라는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그들이다. 인천국제공항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에 반대하고 나선, 대개 대졸자이고 관리직 업무를 맡는 공항 정규직 같은 이들 말이다. "'다른' 청년은 어디에나 있다"는 글에서 강남규는 많은 점에서 그들과 같지 않은 이들이 늘 '청년'의 범주 안에서 삭제되는 메커니즘을 보여준다. 대졸자, 그것도 명문대 졸업자가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는 언론사 기자의 펜을 거치면서 어떤 이들이 '이름'을 얻고, 어떤 '이야기'만 살아남는지 보여준다.

한국 사회 구성원들을 거의 필사적으로 부족들로 세분화하는 최근 언론의 유행도 마찬가지다. 정치인, 언론인들이 이러저런 부족 '이름'들을 떠벌릴수록 어떤 이들은 오히려 더욱 가려지고 망각된다. '공정'을 논하며 주로 대학 입시 경쟁과 대졸자 취업난을 이야기 할 때에 시야에서 사라져버리는 "'다른' 청년"들(128-9쪽)이 있다. 정부, 여당을 변호하는 중산층 시위대가 "벼랑 끝에 내몰렸다"고 외칠 때에 진짜 벼랑 끝에 서 있는 이들, "미투 고발자들, 사회적 약자들, 산업재해로 죽어가는 노동자들"(61쪽)이 있다.

이들이 망각을 거부하며 목소리를 낼 수 있으려면. 그에 맞는 그들의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 <지금은 없는 시민>에 따른다면, 그것은 이를테면 '시민의 자리'를 묻는 이야기다. 시민이 동료 시민에게 마땅히 요구할 수 있는 책임의 이야기, 그래서 무관심이 더는 무죄와 동일시될 수 없도록 다그치는 이야기일 것이다. 강남규가 너무나 깔끔히 정리한, 다음과 같은 한국 사회의 축도를 개선하자는 '공정'론 말고 그것을 뒤엎어버리자는 '평등'의 이야기일 것이다.

"가진 자들은 안정된 삶을 누릴 수 있는 계급의 입구를 좁히려 특혜와 편법을 동원하고, 덜 가진 자들은 좁혀진 입구에 들어가기 위해 '교육 신화'와 '부동산 신화'에 병적으로 집착하며, 그보다도 덜 가진 자들은 이미 가진 것이라도 놓치지 않으려 여성과 비정규직과 장애인을 밀어낸다." (27쪽)

<지금은 없는 시민> 속 변화의 단서들

<지금은 없는 시민> 곳곳에는 그런 '이야기'의 단서가 있다. 어떻게 하면 제6공화국의 정치인, 언론인들이 단단히 구축해놓은 기존 이야기들에 균열을 내고 새 이야기들이 솟아나오게 할지에 대한 고민들이 모든 글을 관통한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은 영화 <기생충>을 보고 쓴 칼럼인 "왜 저들은 <기생충>을 두려워하지 않나"이다. 이 글은 내가 이제껏 본 이 영화의 감상평 중 단연 뛰어나다. <지금은 없는 시민>은 이 글 한 편 때문에라도 애써 찾아 읽을 값어치가 충분하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이 글이 제시하는 방법론을 저자 자신이 요약한 말이 "선을 넘는 진보정치" 아닌가 싶다.

"그러니 그 모든 것을 바꾸자고 말하려면 결국 선을 넘는 수밖에 없다. 국민감정에 도전해 새로운 합의를 도출하고, 현실적인 불가능성에도 기꺼이 도전하며, 독단적이고 교조적이라는 시선도 감수할 필요가 있다." (90쪽)

바꿔 말하면, "선을 넘지" 못하는 정치와 언론, 사회운동은 이제 퇴장해야 한다. 두 차례의 촛불 시위를 경험하며 성장한 90년대생 저자는 이들이 퇴장해도 전혀 아쉽거나 걱정할 게 없음을 스스로 증명한다. 새롭게 대열을 채울 이들이 이미 성큼 다가와 있는 것이다.

그 점에서 <지금은 없는 시민>의 유일한 오류는 제목일 것이다. 그 시민은 지금 없지 않다. 부족으로 분류되길 거부하고 공통의 이름으로 외칠 태세를 갖춘 이들이 없지 않다. 지금은, 단지, 충분히 결집하지 못했을 뿐이다. 더 많은 이들이 이 책을 손에 들고 거기에 담긴 고민과 희망에 공명함으로써 이 오류를 더욱 선명히 입증하길 바란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장석준 전환사회연구소 기획의원은 오랫동안 진보 정당 운동의 정책 및 교육 활동에 참여해왔으며, 자본주의 위기에 맞선 진보적 사회과학을 재구성하고자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에서 연구 및 출간 사업을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레프트 사이드 스토리 : 세계의 좌파는 세상을 어떻게 바꾸고 있나>, <사회주의>, <장석준의 적록 서재>, <신자유주의의 탄생 : 왜 우리는 신자유주의를 막을 수 없었나>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국가 대 시장 : 지구 경제의 출현>, <안토니오 그람시 : 옥중수고 이전> 등이 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