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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일어나기 전, 사람이 다니던 길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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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일어나기 전, 사람이 다니던 길이 있었다

[접경지역 바로알기] ③ 만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길 기약하며

우리 금강산에 언제 다시 갈 수 있을까

'금강산 찾아가자 일만이천봉, 볼수록 아름답고 신기하구나', 이 동요가 아직도 초등교과서에 나올까.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데, 얼마나 대단한 산이길래 어디 있는지도 모르면서 금강산은 천상에나 존재하는 신비의 산으로 기억됐다.

그 금강산을 2000년에 가보게 되었다. 침실과 식당이 있는 큰 배를 타고 북한 땅에 발을 디뎠다. 절대 북한 사람들에게 말을 걸어서는 안 된다는 말에 잔뜩 긴장하며 산행을 시작했다. 비슷한 산봉우리가 이어졌고, 산행 후 금강산온천이 최고였던 기억이 난다.

2003년 시작된 육로관광은 고성을 출발해 휴전선을 통과하여 금강산 관광지구로 들어갔다. 남한 관광객 194만 명이 찾았고, 남북 장관급 회담, 이산가족 상봉 등 남북 화합과 협력의 장소였다. 38선으로, 한국전쟁으로 남북이 갈라지기 전까지는 함께 한 금강산 가는 길이 2008년 이후로 막혀버렸다.

▲ 포천시 관인면 화적연 ⓒ김효은

▲ 양구군 양구읍 금강산가는길 표지석 ⓒ김효은

금강산은 예전부터 누구에게나 로망이었다. 조선시대에는 도봉산입구-축석령-포천-철원-김화-창도-단발령을 넘어 내금강으로 들어갔다. 겸재 정선도 금강산 초행길에 포천 화적연에 들러 포천의 비경을 화폭에 담았다고 한다. 강원도 양구에서 내금강까지의 거리는 50여km에 불과하다.

쌓고 두르고 뺏고 빼앗기고

접경지역이 언제부터 막힌 지역이 되었을까. 6.25 전쟁 이전까지는 한반도 반만년 역사에서 우리 땅의 중심이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만나는 곳에는 교류의 장이 만들어지거나 전쟁터가 생긴다,

고구려를 만나러 가는 가까운 길은 연천에 있다.

▲ 위로부터 호로고루성, 당포성, 은대리성에서 바라본 한탄강 ⓒ김효은

임진강과 한탄강 북쪽의 삼각형 모양의 현무암대지 위에 만들어진 독특한 형태의 고구려 성들이다. 강의 양쪽에 수십 킬로미터에 걸쳐 높이 15-20m 이상의 수직 현무암 주상절리를 천연 방벽으로 활용했다. 고구려의 남진이 시작되는 5세기 중반부터 고구려군이 신라와 백제 연합군에 밀려 한강지역을 빼앗기게 되는 551년 무렵까지 연천은 고구려 남진의 거점이었다.

이들 세 성보다 더한 격전지는 파주의 칠중성이다. 처음 성을 쌓은 나라는 백제였는데 삼국의 공방전에서 고구려가 점령했다가 당나라와 연합한 신라의 영토가 됐다. 한국전쟁 때도 이곳은 치열한 전쟁터가 됐다.

▲ 파주시 적성면 칠중성, 성벽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김효은

한국전쟁 때 피의 전장이 아닌 곳이 없었으련만 이곳 접경지역은 더 한 비극의 역사를 남겨두었다. 기념탑으로 남은 한국전쟁 격전지는 어디서나 볼 수 있다.

▲ 위에서부터 파주시 적성면 영국군 묘지, 연천군 미산면 유엔군 화장장, 강화군 교동면 UN8240 을지타이거여단 충혼비 ⓒ김효은

함께 했던 우리의 길, 시간들

그러나 길 위에 전쟁만 있으랴. 사람이 만나고 물자가 흐르는 풍성한 길이 더 많았다. 한강하구는 고려 수도 개성과 조선 수도 한양의 사람과 물자가 다니는 한반도 중심 뱃길이었다. 강화도의 연미정은 마포나루로 향하던 크고 작은 배들이 물때를 기다리며 문전성시를 이루던 곳이다. 연미정은 조강(한강하구)이 김포와 강화도 사이 염하로 갈라지는데 그 모습이 제비꼬리를 닮아서 붙은 이름이다.

▲ 강화군 강화읍 연미정에서 바라본 한강하구, 배 한 척 없이 얼음 아래로 흐르는 강물 너머 북녘땅이 보인다. ⓒ김효은

길은 대륙과 해양으로도 뻗어 갔다. 한양과 의주를 잇는 의주길(한양 돈의문을 출발하여 중국 연경(북경)까지 연결)은 중국을 오가던 사신들이 이용한 길로 조선시대 큰 길 중 가장 중요한 길이었다. 이 길은 중국과 조선의 문명 교류의 장이었으며 일본과 중국을 연결하는 동아시아 무역로의 중심이었다. 이승훈과 김대건 신부님이 천주교를 배우기 위해 중국으로 갔던 길이기도 하다.

▲ 연산군시대 금표비(연산군이 유흥을 즐기는 곳에 세운 일반인 출입 금지 표지석) 의주길에서 만날 수 있다. 고양시 덕양구 ⓒ김효은

북으로 남으로, 몰래 다닌 금지된 길

1931년 파주에서 태어난 청년 김낙중은 '전쟁반대 평화통일 만세'를 외치다 경찰서에 잡혀갔다. 1955년 6월 25일 이승만 대통령에게 청원서로 제출한 평화통일 방안을 가지고 만우천을 통해 임진강을 건너 북으로 건너갔다. 북에서는 남한 간첩 취급을 받아 송환되고 남에서는 네 차례나 간첩 혐의로 복역했다.

반대로 북에서는 무장공비 김신조가 내려왔다. 1968년 1월 17일 개성 출발해 연천 고랑포에서 임진강을 건넜고, 파주 파평산을 지나 삼봉산에 도착해 1박을 했다. 북악산의 호경암과 1.21 소나무에는 그날의 교전 흔적이 뚜렷해 등산객들의 시선을 잡는다.

▲ 파주시 법원읍 삼봉산 입구의 '무장공비(김신조) 침투로' 표지판 ⓒ김효은

다시 중앙을 꿈꾸며

강원도 양구군은 최근에 면사무소 이름을 바꾸고 선포식을 했다. '남면' 대신 '국토정중앙면'이라는 이름을 가졌다. 우리 땅 정중앙에 위치해 '한반도의 배꼽'이라고 불린다는 설명이다. 우리나라에는 아직도 지역명이나 학교 이름에 '동서남북' 등 방위가 붙은 일제의 잔재가 흔하다. 우리의 역사성을 회복하려는 노력을 하나하나 시작해야 한다. 지금은 비록 변방이나 다시 중앙으로 나가겠다는 양구군의 힘찬 선언만큼 접경은 다시 중심으로 비상할 준비를 하고 있다. 다음 편에서는 분단의 역사를 안고 흐르는 강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 양구군 국토정중앙면사무소 ⓒ김효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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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은

이화여자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행정대학원에서 행정학 석사를, 인제대에서 통일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새정치국민회의 공채 1기로 정치권에 발을 디딘 후 더불어민주당 상근부대변인을 지냈다. 접경지자체인 인천광역시 남북교류협력팀장, 경기도 평화대변인을 역임하며 남북관계 이론과 실무를 두루 갖춘 남북관계·통일전문가로, 현재 대진대학교 DMZ연구원 객원교수로 있으며 <인천일보> 평화연구원 운영위원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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