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를 TV 앞에 앉게 했던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의 판문점회담이 있던 2018년 4월 27일 다음 날 기사 제목 하나가 눈에 띄었다. '한국도로공사, 문산-개성 간 고속도로 TF 구성'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대략의 노선도까지 나왔다. 우려했던 대로 파주 민간인통제구역 내 장단반도를 통과하는 노선이었다. 장단반도는 임진강의 하구 유역 가장 서쪽에 위치한 약 100만 평 규모의 논과 습지로 서부 DMZ 일원의 핵심 생태구역이다. 온갖 새들을 비롯한 멸종위기종들의 서식지이면서, 먹이터이자 휴식지인 곳이다. 파주, 광명, 부천의 초등학교, 중학교 학생들의 친환경학교급식 쌀 생산지이기도 하다.
남북협력 시대로 위협받는 서부 DMZ
산악지대로 이뤄진 동부DMZ일원과 달리 철원, 연천, 파주에 이르는 서부DMZ는 거의 대부분 농경지이다. 농경지는 온 국민들의 먹거리를 책임지는 밥상이면서 동시에 온갖 생명들을 더불어 키워낸다. 그러나 농경지의 공익적 가치는 법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채 무조건 생태자연도 3등급지로 분류돼 어떤 개발사업이든 가능한 부지로 취급되고 있다. 생태자연도 등급을 분류하기 위한 환경부의 전국 자연환경조사에서도 농경지는 조사대상지에서 빠져 있다. 그러나 논이 없으면 개구리와 뱀들, 그리고 수많은 새들의 산란터, 먹이터, 휴식지가 사라진다.
이런 한계 때문에 남북협력시대가 되면서 가장 위협받고 있는 지역이 파주, 연천, 철원의 민간인통제구역 내 농경지이다. 민간인통제구역 내 농경지는 한국전쟁 이전에 농경지였으나 분단 70년 세월 동안 농사를 짓지 않아 자연습지가 된 DMZ 내부와 연결돼 또 다른 생태적 가치를 갖고 있으리라 생각된다. 파주의 경우 점원리, 노상리, 백연리, 거곡리, 정자리 등의 논들이 해당된다. 특히 거곡리의 장단반도는 그 규모가 넓고 북한의 개성과도 가까워 선거 때마다 '평화경제특구', '통일경제특구' 등 이름만 바뀐 채 모든 정당 후보들의 공약으로 등장했다.
문재인 대통령도 후보 시절 '제2의 개성공단'이라는 명목으로 장단반도 특구개발을 공약으로 내세웠고, 100대 국정과제에도 포함돼 있다. 모든 개발을 위해서는 첫 사업이 전기, 가스, 수도 등을 놓기 위해 도로부터 연결되는 것이 순서인지라 남북정상회담이라는 감격스러운 역사적 사건을 놓고도 긴장할 수밖에 없던 터였다. 급기야 우려했던 일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2018년 11월 국회에서는 '문산-개성 간 고속도로 예비타당성 조사 면제'를 결정했다. 임진강지키기파주시민대책위와 '임진강한강하구 시민네트워크'는 즉각 항의 성명을 발표했다. 그런데 불과 일주일여 뒤 한국도로공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예비 타당성조사 면제 항의 성명 때문에 '위에서' 빨리 만나보라고 했다는 거다.
DMZ 생태 고립시키는 고속도로
'그래도 문재인 정부가 다르긴 하네, 성명서 한 장에 금방 만나자고 하네'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한국도로공사가 갖고 온 노선 지도는 우려했던 것보다 심각했다. 노선은 DMZ남방한계선과 나란히 가고 있어 DMZ를 민간인통제구역과 생태적으로 완전히 고립시켰다. 게다가 파주민간인통제구역에서 생태적으로 매우 중요한 넓은 농경지 인근에 지뢰지역인 낮은 산지를 통과했다. 또한 '문산-개성' 간 고속도로가 아니라 '문산-도라산' 고속도로였다. 종점은 백연리 논에 인터체인지를 놓아 통일로로 연결한다. 도라산역 남북출입관리사무소에서 개성과의 연결은 언제 될지도 모르고 그곳은 무조건 통과해야 한다고 했다. '그럼 통일로(국도1호선)을 확장하지 이 도로를 왜 새로 만들지?'하는 의문이 들었다.
두루미류, 뜸부기, 수원청개구리와 금개구리의 산란터이자 서식지인 장단반도, 백연리, 노상리, 점원리 논에 모두 악영향을 준다. 게다가 인터체인지만 연결하면 장단반도의 대규모 개발이 가능하다. 좀 달라진 듯하여 열심히 설명하면 달라질지 모른다고 기대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략환경영향평가 과정 전반은 요지부동 하나의 노선만을 고집했다. 환경부가 '동측 노선(통일로 쪽)을 검토하라'는 보완 통보도 무시하는 보완서를 제출했다. 결국 환경부는 △임진강 통과 시 수생태계에 영향을 끼치는 평화대교 대신 하저터널을 검토할 것 △생태적으로 중요한 장단반도를 피해 동측 노선을 검토할 것을 '조건'으로 하는 '조건부동의'를 하여 전략환경영향평가 단계가 끝나는 듯했다. 환경부가 '부동의'를 하여 현재 노선으로 재추진하는 것을 완전히 차단하지 않은 것은 유감스러웠지만, 고심한 흔적은 보였다고 생각했다.
무조건 현 정부 임기 내 착공해야 한다는 국토부
그런데 이례적인 상황이 벌어졌다. 국토부가 환경부의 조건부동의에 '조건'을 지키지 못하겠다는 '의견서'를 환경부에 냈다. 그 이유의 핵심은 '현 정부 임기 내 착공'를 해야 하므로 빠른 추진을 위해 조건을 완화시켜 달라는 것이었다. 국토부의 힘은 여전히 막강했다. 환경부는 △환경단체, 전문가 등과 공동조사를 추진할 것 △자치단체, 시민단체, 주민, 전문가가 참여하는 상생협의체를 구성할 것을 골자로 완화된 협의안을 다시 냈다. 환경부의 완화된 협의안이 국토부로 전달되자마자 국토부와 한국도로공사는 코로나19 확산으로 강화된 사회적 거리두기 상황에서도 하루에 몇 통씩 만나자는 연락을 하고, 사무실로 급습하기도 했다. 공동조사단을 꾸리자는 것이었다. 해당 노선은 전 구간을 조사조차 할 수 없는 지뢰지역이다. 파주환경운동연합은 "지뢰지역이어서 조사를 할 수 없는데 무슨 공동조사냐"며 거부 입장을 정하고 이를 성명으로 발표하는 한편, 국토부와 환경부로도 보냈다. 그러자 듣도 보도 못한 지역환경단체 두 곳과 공동조사단을 꾸렸다.
주민 의견이 장식인가
얼마 뒤 한국도로공사로부터 전화가 또 불티나게 오기 시작했다. 이번엔 모월 모일 모시에 '상생협의체'를 하려고 하니 참석해달라는 것이었다. 전화로 날짜를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이에 '정식 공문으로 보내라 그래야 회의를 소집해 안건으로 논의한다'고 했더니 공문을 보내왔다. 국토부는 상생협의체는 예정대로 하니 나중에라도 입장이 정해지면 참여하라는 말도 전했다. 소위 '개문발차'다. 심지어 임진강 수생태계에 끼치는 악영향 때문에 강하게 반발하고 있는 파주어촌계에는 어촌계장에게 2~3일 전 문자로 통보했고, 공문은 3선단장에게 보냈다.
주민 의견 수렴, 상생을 위한 논의는 장식품에 불과하고, 국토부는 처음 계획을 그대로 밀어붙이는 기존의 관행에서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상생협의체에 들어와서 논의하자'고 하는데 그렇게 논의구조에 들어갔다가 정부 안에 명분만 주는 들러리 놀음을 강요당한 게 여러번인지라 전혀 신뢰가 생기지 않는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와 달라진 게 없는 것이다. 아니 달라진 건 있다. 이명박근혜 정부조차도 '최소한 날짜는 사전에 협의'하려 했었다. 주민 의견을 장식으로 여기지 않는 다음에야 이런 식으로 일을 할 순 없다. 개발에 협조적인 민심만 조직해 개발 절차에 이용하려는 태도는 민주국가의 행정이 할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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