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대유행 중에 위상이 가장 추락한 나라는 미국도 아니고, 중국도 아니다. 서유럽 국가들이다. 아직도 아프리카계 시민들이 죽지 않기 위해 싸워야 하는 나라와 일국양제 약속을 손바닥 뒤집듯 저버리고 홍콩 민주주의를 압살하는 나라가 지구 자본주의 패권을 놓고 다투는 상황에서 서유럽 국가들은 그래도 어떤 '모범'을 찾을 수 있는 나라들로 여겨졌다. 하지만 이런 기대는 초기 유행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허둥대다 위기를 자초하는 유럽 사회 현실을 목격하며 무너져 내렸다. 모범은커녕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처참한 실패의 광경이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유럽에서 눈을 돌려선 안 될 이유가 있다. 코로나19 사태로 드러난 유럽의 허상에도 불구하고 유럽연합은 한 가지 중대한 영역에서 다른 어느 국가보다 확연히 앞서 있기 때문이다. '유럽 그린 딜'로 나타나는 기후 위기 대응이 그것이다. 미국 등에서 '그린 뉴딜'이 아직 야당 공약일 뿐인 데 반해 유럽 그린 딜은 유럽연합 회원국 합의와 유럽의회 입법을 거쳐 실제 추진 중인 사업이다. 게다가 유럽연합은 코로나19 위기에 맞서는 경제 회복 계획에도 그린 딜의 내용을 적극 반영하고 있다.
어쩌면 그나마 유럽연합이 있기에 인류는 지금이라도 기후 위기에 대처할 희망을 품을 수 있는 것일지 모른다. 그럼 그레타 툰베리처럼 기후 행동에 앞장서는 새 세대 유럽 시민들은 이런 유럽연합의 선진적인 기후 위기 대책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모르긴 해도 상당한 자부심을 느끼지 않을까?
유럽 그린 딜에 대한 툰베리 세대의 차가운 비판
그러나 유럽 그린 딜과 경제 회복 계획에 대한 툰베리 세대의 반응은 차갑기만 하다. 이제껏 유럽연합에서 나온 모든 정책이 다 기후 위기를 되돌리기에 턱없이 부족하다고 혹평한다. 엘리트 정치인들이 기후 변화를 아직도 '위기'라 절감하지 못함을 보여주는 증거이며, 기후 위기를 야기한 기득권 세력과의 동맹을 포기하지 못한 결과라고 신랄히 비판한다.
얼핏 들으면 너무 야박한 평가 아닌가 싶다. 그린 딜이 과연 이 정도 평점을 받아도 좋을만한 내용인가? 유럽 그린 딜은 2050년까지 유럽을 탄소 배출 제로인 기후 중립 지대로 만들겠다고 약속한다. 게다가 이를 '선언'에 그치지 않게 하려고, 203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량을 1990년 수준의 50-55%로 줄인다는 중기 목표까지 명확히 제시한다. 지금 세상 어느 나라 정부가 이런 구체적이면서도 책임 있는 탄소 배출 감축 계획을 내놓고 있는가?
유럽 그린 딜은 흔히 '그린 뉴딜'이라 이름 붙은 생태 전환 프로그램에 담기곤 하는 정책을 총망라한다. 그린 딜 합의에 홀로 빠질 정도로 자국 석탄산업 퇴출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폴란드(와 다른 동유럽 국가들)를 의식해서인지 '정의로운 전환' 프로그램도 상세히 담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정책을 실행하기 위해 1조 유로에 달하는 투자 계획을 추진하겠다고 한다. 우리 돈으로 1400조 원이 넘는 천문학적 규모다. 유럽연합은 2020년대에만 총 2600억 유로(약 365조 원)를 투입하겠다고 약속한다.
또한 5월에 발표한 "다음 세대 유럽연합"이라는 이름의 경제 회복 종합 계획에는 7500억 유로(약 1053조 원)가 배정됐는데, 그 중 25%가 기후 위기 대책에 쓰인다고 돼 있었다. 7월에 유럽의회가 이 계획을 입법하면서 기후 위기 대책 예산은 전체 계획의 30%로 늘었다. 결과적으로 향후 10년간 투입하기로 돼 있던 300조 원 넘는 그린 딜 예산이 조기 집행될 수 있게 됐다.
허울 좋은 대한민국의 '그린 뉴딜'에 비하면, 참으로 풍성하고 선명한 내용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도 툰베리와 함께 기후 행동에 나선 젊은 세대 운동가들은 결코 만족할 수 없다고 한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이들은 얼핏 거대해 보이는 그린 딜의 투자 규모가 실은 기만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총 1400조 원을 투입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2050년까지 30년에 걸쳐 그리 하겠다는 것이다. 첫 10년 동안의 예산으로 잡힌 것은 350조 원 조금 넘는 금액이다. 비판가들은 여기에 그린 딜의 가장 커다란 문제가 있다고 본다.
보통 다른 장기 계획이라면, 단계별로 사업을 집행하면서 예산도 그에 맞게 나눠 쓰는 게 상식일 것이다. 그린 딜 역시 이런 상식에 따라 작성됐다. 그러나 그린 딜이 대응하겠다는 것은 다름 아닌 기후 위기다. 최근 기후 위기는 예상을 뛰어넘는 되먹임 작용(가령 열대 우림 화재나 시베리아 이상 고온 현상 등)을 일으키며 가속화하고 있다. 비록 얼마 전에 전 세계 과학자들이 2050년까지 탄소 배출 제로를 달성하자는 목표를 제시했지만, 기후 위기 전개 양상은 이미 이런 목표를 너무도 태평한 것으로 만들고 있다. 기후 위기 심화와 인류의 대응 사이에 속도전이 시작된 것이다.
그렇다면 2050년까지 예산 총액을 얼마로 잡았으니 2020년대에는 그 중 몇 %를 쓰자는 식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가까운 미래에 가능한 모든 자원을 기후 위기를 늦추는 온갖 대책에 쏟아 부어야 한다. 향후 10년 안에 전 역량을 투입해야만 기후 위기가 대파국으로 이어지지 않게 막으면서 2050년에 탄소 경제에서 완전히 탈피한다는 목표를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이조차도 이제는 너무 낙관적인 기대일지 모른다.
이런 시각에서 본다면, 그린 딜의 장대한 청사진도 겉보기만큼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라는 평가를 내릴 수밖에 없다. 더구나 그린 딜 문서만 봐서는 알아채기 힘든 또 다른 문제가 있다. 거대 자본의 개입이다. 올해 4월에 유럽연합 집행위원회는 블랙록(BlackRock)을 그린 딜 세부계획 입안을 위한 자문기관으로 위촉했다. 블랙록은 7조 달러(약 8100조 원)가 넘는 자산을 굴리는 전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다. 규모가 규모이다 보니 전 세계에서 석탄-석유 산업에 가장 많이 투자한 기업이기도 하다. 유럽연합은 기후 위기 주범인 이런 대자본을 그린 딜의 주요 파트너로 삼은 것이다.
유럽연합도 할 말이 없지는 않다. 블랙록은 올해 초에 석탄화력발전과 관련된 기업에는 더 이상 투자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유럽연합은 블랙록이 탄소 경제에서 철수하는 자본의 모범을 보여주며, 이것이야말로 그린 딜이 기대한 효과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달리 보면 이는 유럽 그린 딜이 기후 위기 주범들에게 '녹색 세탁(Greenwashing)'의 더없이 좋은 수단이 될 것임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거대 자본은 그린 딜 덕분에 새로운 수익원도 확보하면서 동시에 기후 위기 주범 이력에 녹색을 덧칠할 수도 있다.
새 세대 기후 행동가들은 이 대목에서 그린 딜의 또 다른 결정적 한계를 본다. 유럽 그린 딜은 철저히 대자본과의 화목한 타협을 전제로 생태 전환을 추진하겠다는 입장이다. 대자본이 앞으로도 계속 과거와 같은 수준의 이윤을 확보할 수 있어야만 이런 타협은 지속될 수 있다. 만약 그럴 수 없다면, 생태 전환 역시 불가능하다. 기후 위기가 아무리 심각하더라도 말이다. 툰베리와 동지들은 그린 딜에 깔린 이러한 냉혹한 철학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21세기식 '혁명' 논리의 등장?
유럽연합과 새 세대 기후 행동가들 모두 기후 위기를 최대 현안이라 인식하며 생태 전환을 추구한다. 둘 다 21세기 인류 사회 변화의 최전선에 서 있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공통점만큼이나 거대한 차이점이 있다.
유럽연합은 기후 급변이 인류 문명의 지속을 위협하는 초유의 위기라고 여기면서도 어디까지나 자본주의와의 일정한 타협을 전제로 생태 전환을 추진하려 한다. 대자본이 계속 과거와 비슷한 수익성을 유지해야 하며, 탈탄소 목표는 늘 기존 경제 지표와 조화를 이루며 달성돼야 한다. 누구나 이 입장에서 유럽 사회민주주의의 오랜 관성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젊은 기후 행동가들은 인류를 포함한 뭇 생명의 대멸종을 부를 기후 재앙 앞에서 기존의 어떤 것도 무조건적 지속을 요구할 수 없다고 확신한다. 기후 위기를 되돌리거나 완화하려는 노력이 자본주의와 충돌한다면, 단호하게 포기해야 할 쪽은 자본주의다. 툰베리의 표현에 따른다면, "기존의 모든 사회 계약을 원점으로 되돌리고" 오직 기후 위기 대응이라는 목표에 맞춰 모든 것을 새롭게 재편해가야 한다. 새로운 경제 체제가 필요하다면, 지금 당장 이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이 두 입장의 긴장과 충돌은 오랫동안 사회변혁운동 안에서 지속됐던 '개혁'과 '혁명'의 대립을 연상시킨다. 지난 두 세기 동안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모든 운동은 두 가지 방법, 즉 개혁과 혁명 사이에서 고민을 거듭했다. 하지만 20세기 말이 되자 지구 위 대다수 지역에서 개혁이 현실을 바꾸는 유일한 방법으로 떠올랐다. 혁명은 발전된 자본주의와는 맞지 않는, 먼 옛날의 추억이 돼버린 것 같았다.
19세기에는 상황이 정반대였다.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무대인 대의 민주제에 참여할 자격이 극히 제한됐기에 그 바깥에 버려진 모든 이들에게 유일한 현실적 방법은 혁명이었다. 20세기가 돼서도 지구 위 많은 곳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20세기의 마지막 십년 전까지는 아직 많은 지역에서 대의 민주제가 보장되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20세기의 특징인 대규모 전쟁 탓에 인민이 무장을 통해 자기 생명을 지켜야 하게 된 곳들에서 전대미문의 혁명이 발발하곤 했다.
그러나 세기가 바뀌면서 이는 급격히 과거의 일로 치부됐다. 이제 국민국가들로 촘촘히 구획된 세계 질서는 상식이고, 보통선거제도는 일상이다. 이런 세상에서는 혁명이란 가당치않고 단지 개혁의 폭과 깊이만이 달라질 수 있을 뿐이다. 지금 지구 위를 살아가는 80억 인류 가운데 대다수 세대는 생애 내내 이를 상식이라 여기며 살아왔다.
그러나 다시 시대가 바뀌고 있다. 과거의 '개혁'과 '혁명'에 그대로 등치될 수는 없다 할지라도 아무튼 생태 전환을 둘러싸고 '개혁 대 혁명'과 유사한 두 관점이 서로 갈라지며 대립하기 시작한다. 한쪽은 탈탄소 체제 수립조차 기존 자본주의 질서의 연장선 위에서만 사고하고 실천하려 하며, 다른 한쪽은 생태 전환이라는 긴박하고 근본적인 목표를 위해서는 기성 질서의 어떤 요소든 포기하고 재구성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전자는 후자가 비현실적이라고 하며, 후자는 '탈탄소 자본주의'를 꿈꾸는 전자야말로 비현실적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한 동안 개혁 이외에는 어떠한 방법도 생각할 수 없었던 인류에게 기후 위기를 계기로 또 다른 선택지가 강요되고 있는 것이다. 유럽 그린 딜조차 기후 위기에 맞서는 진지한 시도로서는 너무도 부족하다는 젊은 세대의 목소리 속에서 어쩌면 21세기식 '혁명' 논리라 할 만한 입장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는 대의 민주제의 유무나 승인 여부와는 더는 상관없지만, 자본주의에 대한 단절이라는 측면에서는 어쩌면 과거의 혁명 관념보다 더 단호한 양상을 띨 가능성이 있다.
남의 이야기로만 들리는가? 저 먼 유라시아 대륙 반대쪽의 이야기일 뿐인가? 2년 전의 폭한과 폭염보다 더 두려운 길고 무자비한 장마를 겪고서도 계속 그렇게 말할 수 있겠는가? 유럽 그린 딜에 한참 못 미치는 한국형 그린 뉴딜을 마주하면서도 여전히 그렇게 태평할 수 있을까?
과거에도 혁명을 가장 현실적인 선택지로 만든 것은 늘 개혁의 해태(懈怠)와 지연, 실패였다. 지금 이 상관 관계가 더 선명히 작동할만한 곳은 유럽이 아니라 한반도다. 유럽 그린 딜이 마치 혁명적 대안인 양 보이게 만드는 한국형 그린 뉴딜을 유일한 선택지로 강요받는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툰베리와 동지들의 단호한 입장, 21세기식 '혁명' 논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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