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 코로나19 최초 확진자가 나온 지 꼭 석 달이 되었다. 신천지와 대구경북 지역의 집단감염 사태로 우리 일상이 완전히 바뀌어버린 지도 두 달이 되었다. 성공적인 방역으로 드디어 하루 신규확진자수가 한자리수까지 줄어들었다. 정부는 사회적 거리두기를 부분적으로 완화하기로 했고, '생활 속 거리두기'로의 전환을 준비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포스트 코로나' 준비를 선언했다. 하지만 코로나19 사태는 앞으로도 오랫동안 우리를 괴롭힐 것이고, 코로나19 이후의 세계로 가는 길은 결코 순탄하지 않을 것이다. 본고는 보건과 경제에 대한 코로나19의 충격을 가늠해보고, 코로나19로 인한 국제질서와 사회경제시스템의 변화요인을 살펴본 후, 성공적으로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열어가기 위한 정책적 과제를 제시한다. (필자)
코로나19의 보건 재앙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다. 세계 대유행, 팬데믹(pandemic)이다. FT집계에 의하면 4월 19일 현재 190여 개국에 227만의 확진자가 발생했고, 14만8000명 이상이 사망했다. 도대체 언제나 코로나19 대유행이 종식될 수 있을 지, 앞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감염되고 죽게 될지, 의문과 걱정이 태산이다.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감염병에 관한 가장 권위있는 분석과 예측을 하는 기관 중의 하나인 런던의 임페리얼 칼리지(Imperial College, London)가 지난 3월 하순 몇가지 시나리오를 발표했다.(Report 12: The Global Impact of COVID-19 and Strategies for Mitigation and Suppression, Imperial College COVID-19 Response Team, 26 March 2020.)
각국 정부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방치(No action) 할 경우 전 세계인구의 90%에 해당하는 약 70억 명이 감염되고 약 4000만 명이 사망할 것이라고 한다. 물론 이런 나라는 거의 없다. 만약 각국 정부가 저강도 사회적 격리와 진단 및 치료를 실시하는 완화(Mitigation) 조치를 취한다면 인명 피해를 반으로 줄일 수 있으며, 고강도 사회적 격리 및 광범위한 추적·진단·격리를 포함하는 억제(Suppression) 조치를 취한다면 이를 훨씬 더 줄일 수 있다고 한다. 인구 10만 명당 주간사망자수가 1.6명에 달한 시점에서 억제 조치가 시작되면 감염자가 약 24억명, 사망자가 약 1000만 명으로 줄어들고, 인구 10만 명당 주간사망자수가 0.2명인 시점부터 억제 조치를 시작하면 감염자는 약 4억7000만 명, 사망자는 약 186만 명까지 줄어들 수 있다고 한다. 조기 개입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보여주고 있다.
위의 예측이 끔찍한 것은 최상의 시나리오에서도 200만 명 가까운 사망자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베트남 전쟁 이후 최악의 인명피해가 거의 확실시 된다.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 이탈리아, 스페인 등 폭발적 확산을 통제하고 진정세로 접어든 나라들이 희망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2차, 3차의 확산의 가능성이 상존한다. 또한 현재 나오는 공식 통계는 실제 피해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 중국의 통계에 대한 의문이 계속 제기되고 있고, 미국과 유럽의 경우에도 실제 사망자수는 공식 통계보다 훨씬 많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불충분한 진단검사 때문에 코로나19 관련 사망이 제대로 보고되지 않고 있으며, 실제 감염자수는 확진자수의 5~10배에 이를 것이라고 한다.(참고로 2009년 H1N1 신종플루 대유행의 경우 WHO에 공식 통보된 확진자수는 1,632,710명, 사망자수는 18,449명이었지만, CDC와 WHO의 사후적 추정에 의하면 사망자수는 150,000~575,000명, 감염자수는 당시 세계인구의 11~21퍼센트인 7억~14억명에 달했을 것이라고 한다.)
무책임한 일부 정치인들의 한심한 행태를 제외하면 인류는 지금 코로나19 퇴치를 위하여 치열한 싸움을 전개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유행이 조기에 종식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한 것이 사실이다. 대유행이 최종적으로 종식되려면 인구의 60~70%가 감염되어 집단면역이 형성되거나 혹은 백신이 대량생산되어야 한다. 인명피해를 줄이기 위해 강력한 억제 조치를 취하면 당연히 집단면역 형성이 늦어지고, 억제 조치를 조기에 완화하면 제2의 확산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필자와 같은 비전문가들은 세계 곳곳의 연구자들이 필사적으로 노력하여 기적을 만들어내기를 기대하고 있지만, 대다수 전문가들은 백신 개발에만 최소 1년~3년이 걸린다고 한다. 1년 연기된 동경올림픽도 비현실적이라는 견해가 늘고 있다. 지루한 싸움을 각오해야 할 것 같다.
코로나19의 경제 충격
세계경제는 이미 대공황에 버금가는 최악의 상황에 빠졌다. 코로나19가 경제에 주는 충격은 복합적이면서 다양한 악순환을 만들어내고 있다. 첫째, 사회적 거리두기 조치의 강도에 비례하여 생산 차질과 수요 위축이 일어나고 있고, 생산 감소는 실업과 소득 감소를 낳아 수요 감소를 초래하고 이는 다시 생산의 감소를 초래하는 악순환이 존재한다. 둘째, 이렇게 실물경제가 악화하면서 기업이 부실화되고, 이는 금융부실 및 패닉을 초래하여 기업을 더욱 어렵게 하는 악순환이 발생한다. 셋째, 불평등과 감염확산의 악순환이다. 불평등이 심해 사회적 거리두기가 어려운 취약계층이 많을수록 감염확산이 빠르고, 취약계층을 더 가혹하게 공격하는 감염병이 확산될수록 불평등은 증가한다. 넷째, 감염 확산은 생존본능에 따른 보호주의·배타주의를 강화하고, 이는 경기악화를 가속화하는 악순환이 존재한다.
방심하고 있다가 코로나19에 적기에 대응하지 못한 미국과 유럽 등 세계 각국이 강력한 봉쇄 혹은 이동제한 조치를 취하면서 경제활동이 급전직하하고 있다. 급기야 국제통화기금(IMF)은 최근 2020년 세계경제성장률을 –3.0%로 예측하였다. 작년 10월 전망치 3.4%에 비해 무려 6.4%포인트 하향조정이다. 글로벌금융위기로 2009년 세계경제성장률이 -1.7%였던 것에 비해서도 한층 심각한 숫자다. 각국의 과감한 경기부양정책에도 불구하도 금융경색과 신흥국 자본유출 등 세계적 금융위기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이미 90여개국이 IMF에 지원을 요청하고 있을 정도다. 한국의 경우는 다행히도 조기에 대규모 진단에 이은 빠른 추적과 격리를 중심으로 가혹한 봉쇄조치를 취하지 않고도 코로나19 억제에 성공한 탓에 경제 충격도 비교적 덜하다. 덕분에 IMF는 한국의 금년 성장률을 선진국 중 가장 높은 수치인 -1.2%로 전망하였다. 방역 성공에도 불구하고 높은 대외의존도 때문에 심각한 타격은 불가피하고, 여전히 방역 및 경제와 관련한 불확실성이 높은 상황이다.
연준 의장을 지냈던 버냉키를 비롯해서 상당수 전문가들이 V자형 조기회복을 예상하기도 했으나, 필자는 WHO가 대유행을 선언한 지난 3월 11일 이후 그러한 가능성은 사라진 것으로 보았다. 우선 코로나19가 전염성이 매우 높고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어 감에 따라 조기 진화의 가능성이 실질적으로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번 코로나19의 충격을 받으면 감염사태가 어느 정도 진정 이후에도 엄청난 불확실성과 국내 및 글로벌 공급망 차질 등으로 급격한 경제회복은 어렵다.(최근 발표된 연구에 따르면 미국경제에 대한 COVID-19 충격을 직접 충격과 불확실성 충격으로 나누어 보면 불확실성 충격이 직접 충격보다 더 크고, 경제가 전체충격에서 회복되는 데 2년 이상 소요될 것이라고 한다.(Baker, Bloom, Davis and Terry, COVID-INDUCED ECONOMIC UNCERTAINTY, NBER Working Paper 26983, April, 2020.)
중국정부가 우한과 후베이성 중심의 감염폭발을 강력한 봉쇄조치로 진정시키고 전국적으로 사회적 거리두기를 완화한 이후에도 급격한 경제회복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것이 좋은 사례다. 중국경제는 1/4분기에 -6.8% 성장이라는 충격적 경기하락을 겪었고, 2차 감염확산 우려와 수출 폭락세 등으로 어두운 전망이 이어지고 있다.
물론 각국 정부가 이러한 상황에 손을 놓고 있는 것은 아니다. 미국, 유럽 등 각국이 초대형 금융지원과 경기부양책을 내놓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대응에는 뚜렷한 한계가 있다. 경기침체의 원인이 전통적인 수요부족이나 금융위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감염병 자체가 진정되지 않는 한, 생산과 수요의 실물충격과 이를 반영한 금융부실 문제를 막기는 어렵다. 금융·통화·재정정책은 경제 충격의 악순환과 패닉이 심화되는 것을 막고, 피해를 입은 개인과 사업체를 구제하는 역할을 할 따름이다. 또한 경성 통화를 보유한 미국, 유럽, 일본 등과는 달리 대다수 신흥국이나 개도국에게 공격적 경기부양 정책은 언감생심이다. 자칫 외환위기나 채무위기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정책의 한계 외에도 급격한 회복의 전망이 어려운 이유는 또 있다. 코로나19 이전에도 세계경제의 기초체력이 취약했다는 점이다. 선진국 경제의 장기둔화(secular stagnation), 중국의 성장률 하락, 양적 완화 지속에 따른 전 세계적 과잉부채, 소득불평등의 심화 등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무엇보다 미중 패권경쟁과 자국우선주의를 추구하는 포퓰리즘 정권이 세계 각국에 속속 등장함에 따라 자유무역과 국제협력체제가 위협받고 있었다. 만약 대유행이 장기화하는 가운데 주요국들의 국경봉쇄·수출규제 등 근린궁핍화(Beggar thy neighbor) 정책이 지속된다면 세계경제는 대공황과 유사한 L자형 장기침체를 겪게 될지도 모른다.
'포스트 코로나'의 세계
역병은 흔히 정치·경제·사회·국제질서의 격변을 초래했다. 최초의 팬데믹으로 알려진 6세기의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은 비잔틴 제국의 몰락을 재촉했고, 17세기 중국의 흑사병은 거대한 인명피해와 함께 명나라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14세기 유럽의 흑사병은 사회질서를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기도가 아닌 위생과 검역이 병을 물리치는 것이 드러남에 따라 신권은 하락하고 왕권이 강화되었으며, 인문주의 르네상스의 토양이 형성되었다. 인구의 반이 죽은 탓에 노동력 부족이 심화되었고, 토지소유주들이 노동력 확보를 위해 높은 임금을 제공하면서 농노제 해체를 가속화하였고, 자본주의의 맹아가 태어났다.
역사적 위기가 반드시 진보를 낳는 것은 아니다. 위기는 진취적 가능성과 퇴행적 가능성 모두 내포한다. 유럽의 흑사병이 중세 암흑시대와 봉건제에 종지부를 찍고 르네상스와 자본주의 맹아를 낳았다고 했지만, 어디까지나 이건 서유럽의 얘기였다. 동유럽에서는 영주들의 가혹한 억압이 성공하여 오히려 이때부터 농노제가 확립되었고 그 결과 경제발전이 뒤처졌다. 대공황과 2차세계대전이라는 끔찍한 재앙을 겪은 이후 국제사회는 유엔과 브레튼우즈 체제를 중심으로 개방과 협력을 향한 진취적 변화를 선택했으나, 9/11 테러공격과 글로벌금융위기 이후에는 폐쇄와 배타주의를 향한 퇴행적 변화로 나아가고 말았다. 코로나19 대유행 사태를 맞아서도 아직까지는 각국의 반응이 매우 퇴행적이다. 위기에 대응하고 극복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선택과 실천만이 진취적 가능성을 현실로 만들어줄 것이다.
코로나19 이후의 세계와 관련해서 필자가 보기에는 네 가지 커다란 선택과 실천의 과제가 있다. 첫째, 세계화의 미래다. 세계화의 흐름이 결정적인 도전에 직면한 것은 분명하다. 사실 신자유주의 시대의 초세계화(hyper-globalization)는 이미 글로벌금융위기 이후 느린 세계화(slowbalization)에 자리를 내주었다. 코로나19 이후에는 역세계화(de-globalization)가 도래할 전망이다. 국경 폐쇄, 수출 규제 등 생존위기가 부추긴 자국우선주의가 판을 치고 있고, 글로벌가치사슬의 취약성이 부각된 탓에 향후 기업들은 리쇼어링 등으로 국내생산기반을 확보하여 리스크를 줄일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으며, 농업생산의 차질과 마스크와 의료장비 부족을 겪은 각국 정부는 농업과 제조업 베이스의 중요성을 재확인하고 있다. 그러나 코로나19 이후에 세계가 성곽시대로 되돌아가서는 안 된다. 성곽시대 회귀는 경제적 재앙이고 문명적 퇴행이다.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아닌 새로운 세계화로 나가야 한다. 국제금융자본과 다국적기업이 주도하는 세계화 질서와 포퓰리즘과 국수주의에 기초한 반세계화 경향이 충돌하고 있는 근래의 상황을 돌파하고, 개방적 경제질서를 유지하면서 감염병 방역과 기후변화 대응, 금융안정과 탈세방지, 개발협력과 SDG 등 글로벌 공공재를 위한 국제공조를 강화해나가는 새로운 세계화를 지향해야 한다.
둘째, 신자유주의 시대를 완전히 마감하고 경제민주화 시대를 열어야 한다. 시장만능주의, 작은정부론, 규제완화, 낙수효과, 긴축재정(austerity) 등을 주장한 신자유주의는 공공서비스와 사회안전망의 축소, 불평등 심화와 금융위기를 낳았다. 신자유주의는 ‘시장이 답이고, 정부는 문제’라고 주장했지만, 기업과 시장메커니즘에 의해 방역을 하는 나라는 어디에도 없다. 방역 관련 정보와 물자의 생산과 분배에서 시장의 실패와 효과적인 정부의 중요성이 확인되고 있다. 위기 속에서 공공성의 재발견이 이루어지고 있다. 공공의료 등 공공서비스와 전국민의료보험 등 사회안전망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있다. 고용안전망과 사회안전망의 사각지대에 처한 사람들은 스스로의 감염과 타인에 대한 전염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경제활동을 지속할 수밖에 없다.
불평등이 심하고 고용안전망과 사회안전망이 부실한 미국이 가장 심각한 피해를 입고 있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아파도 병원비가 무서워 진단검사도, 치료도 받지 못하는 사람이 수두룩한 것이 신자유주의 천국 미국의 현실이다. 이미 글로벌금융위기 이후 퇴조 국면에 들어선 신자유주의는 코로나19로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어졌지만, 대안적 경제질서가 저절로 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불평등과 계층갈등이 심화하고, 경제적 혼란과 사회불안이 가중될 수 있다. 시장경제의 효율성과 역동성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민주적 의지를 모아 공공성과 공정성을 확보하는 경제민주화는 우리의 선택과 실천의 몫이다.
셋째, 코로나19로 가속화될 디지털 전환의 미래다. 디지털 기술을 이용한 비대면 서비스가 이미 급증하고 있다. 교육, 근무, 회의 등을 원격으로 수행하고, 쇼핑, 오락, 의료, 금융, 행정 등도 비대면 온라인 서비스가 활성화될 것이다. 데이터 기반 방역 등 빅데이터와 인공지능의 활용도 빠르게 확산될 것이다. 문제는 디지털 전환에 대한 사회적 수용성이다. 모든 파괴적 혁신이 그렇듯이 디지털 전환 과정에서 패자가 나온다. 인공지능이 인간노동을 대체하여 수많은 일자리가 없어진다는 우려가 많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이미 온라인 쇼핑의 확대로 자영업자의 타격이 크고, ‘타다’의 사례에서 보듯이 사회안전망의 미비 때문에 극심한 갈등이 혁신을 가로막기도 한다. 최근에는 각급 학교가 온라인 등교를 실시함에 따라 디지털 격차(Digital Divide) 문제가 부각되고 있고, 확진자 동선 파악 등과 관련한 감시사회(Big Brother) 문제도 제기되고 있다. 사회제도가 잘 뒷받침되지 않으면 디지털 전환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 이상으로 문제를 생산할 수 있다. 디지털 시대의 진정한 경쟁력은 비단 인프라, 인재, 기술력만의 문제가 아니다. 포용적 사회제도와 개인정보보호 및 활용에 관한 사회적 합의와 신뢰가 필요하다.
넷째, 기후변화 문제에 대한 대응이다. 코로나19 대유행으로 기후변화 대응의 긴박성이 부각되고 있다. 지구온난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된 이래 감염병이 4배나 증가했다고 한다. 무엇보다 인류가 방역을 위한 사투를 벌이면서 공공의 이익을 위한 집단행동(collective action)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그 가능성을 확인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코로나19 이전에도 미국 민주당의 ‘그린 뉴딜’과 유럽연합의 ‘그린 딜' 등 본격적인 기후변화 대응 움직임이 나타났다. 유럽연합은 코로나19 피해기업에 대한 지원의 조건으로 녹색전환을 요구하기로 했다. 코로나19 이후 경제를 재건하는 과정에서 과연 과거의 화석연료기반 경제로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지속가능한 녹색경제를 만들어낼 것인가? 우리의 선택에 인류문명의 생존이 달려 있다.
'포스트 코로나'로 가는 길목: 방역 우선의 원칙과 부위정경(扶危定傾)의 경제회복
코로나19 이후의 세계를 미리부터 준비하는 것은 좋지만, 대유행이 종식될 때가지 정부는 방역 우선을 정책의 기본원칙으로 삼아야 한다. 단기적으로 보면 방역과 경제 사이에는 상충관계가 존재한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강하게 할수록 경제적 피해도 심하다. 하지만 섣부른 사회적 거리두기 완화와 경기회복 도모로 방역이 실패하고 2차 확산이 일어나면 더 큰 경제적 대가를 지불하게 된다.(1918년 스페인독감 당시 미국에서 사회적 격리를 오래 지속한 도시일수록 이후 고용증대가 컸다는 연구결과가 최근 발표되었다.(Correia, Luck, Verner, "Pandemics Depress the Economy, Public Health Interventions Do Not: Evidence from the 1918 Flu", 1 April , 2020.)
마냥 경제를 희생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지만, 2차 확산을 무릅쓰는 모험을 해서도 안 된다. 세계 각지에서 조속한 완화를 주장하는 정치인과 신중론을 주장하는 전문가 사이에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까닭이다. 지금까지 비교적 신중한 접근을 해온 우리나라 정부지만, ‘강화된 사회적 거리두기'에서 부분적으로 완화된 ‘사회적 거리두기' 단계를 거쳐 ‘생활 속 거리두기'를 준비하는 시점이다. 중국과 싱가포르의 사례를 반면교사로 삼아 새로운 감염확산에 대한 신속대응체제와 생활방역체제의 정착 등 정교한 준비가 필요하다. 이후로도 고효율 억제 체제를 당분간 유지해야 한다.
방역 우선 원칙 하에서의 경제정책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것은 방역 지원에 우선적으로 재원을 투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준에 따라 정해진 대상에 대한 무료진단검사와 자가격리자 지원 등은 매우 잘한 일이다. 향후 방역에 협조하는 과정에서 피해를 입은 개인, 병원, 업소 등에 대한 지원을 더욱 적극적으로 할 필요가 있다. 의심 증상이 있어도 쉬지 못하는 이들이 없도록 유급병가제도와 상병수당제도를 시급히 도입해야 한다.("대부분의 나라는 사업주가 제공하는 유급병가와 사회보험에서 지원하는 상병수당으로 감염병 위기에 대응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병가가 법으로 보장되어 있지 않고 사회보험에서 지원하는 상병수당이 부재하여, 관련 지출이 OECD 회원국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다. 유급병가 및 상병수당을 제도화하는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이병희, "코로나19 대응 고용정책", KLI고용노동브리프 제95호, 한국노동연구원, 2020. 4. 14.)
또한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감염병에 취약한 작업환경 및 근무환경을 개선하도록 유도하고 지원하며, 카페, 음식점, 헬스장, 클럽 등 다중이용업소의 시설과 환경 개선도 지원할 필요가 있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긴급 재난 구제 정책이다. 신속하고 충분한 피해 구제로 악순환을 방지하는 일이다. 이는 방역 상의 위험을 키우는 무리한 경기부양이 아니라 오히려 경제 붕괴를 막아 방역 상의 위험을 줄이는 정책이다. 먼저 긴급 금융시장안정화 정책이다. 금리 인하와 유동성 공급 확대로 신용경색을 최소화하고, 통화 스와프 추가 체결과 글로벌 금융시장 모니터링 및 자본유출입 관리 강화로 외환시장을 안정시키는 일이다. 다음으로 고용유지와 흑자도산 방지를 위한 기업 지원이다. 노동자의 잘못도 아니고 기업의 잘못도 아닌 일시적 외부 충격 때문에 발생한 어려움을 돕는 것은 도덕적 해이를 낳지 않으며, 회복기에 신속한 회복이 가능하도록 생산력을 최대한 유지해야 한다. 고용유지지원금의 대폭 확대와 피해 기업의 금융부채에 대한 일시적 원리금상환 유예를 포함한 과감한 금융지원이 필요하다. 코로나19로 생계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자영업자와 실업자, 취약계층을 지원하는 것도 핵심적인 과제다. 이와 관련하여 정부도 다양한 대책을 내놓고 있으나, 사회안전망이 매우 부실한 우리나라에서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지원이 쉽지 않은 일이다. 그 중에서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긴급재난지원금과 관련해서 필자는 '보편지원, 선별환수'라는 대안을 제시한 바 있다.("긴급재난지원금, 최선의 대안은 있다”, 프레시안, 2020. 3. 30. 긴급재난지원금, 여전한 논란과 여전한 대안”, [좋은나라이슈페이퍼], 프레시안, 2020. 4. 13.)
'생활 속 거리두기'가 정착된 가운데 코로나19가 안정적으로 관리되는 단계에 접어들면 경제회복을 신중하게 추진해야 한다. 이때의 원칙이 부위정경(扶危定傾)이다. 위기극복 과정을 통해 과거로 회귀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잘못됨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먼저 개인과 국가의 우선순위를 재정립해야 한다. 소득·소비·성장보다 안전·건강·행복이 우선하는 나라가 되어야 하고, 시스템 차원에서 고용안전망과 사회안전망의 사각지대를 해소하는 것이 중요하다. 안전·인권·환경 등의 가치가 규제정책과 공공투자에 우선적으로 반영되어야 한다. 또한 회복탄력성이 높은 경제를 위하여 기본을 튼튼히 해야 한다. 중장기적 재정건전성과 금융기관 건전성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고, 글로벌가치사슬 붕괴에 대비하여 농업과 제조업 기반을 유지강화할 필요가 있다. 기업지배구조 선진화와 사회적 자본 확충도 중요하다. 특히, 피해 기업을 지원할 때, ‘이익의 사유화와 손실의 사회화'를 방지하도록 고용유지 및 주주의 손실분담과 지배구조 개선 등에 관한 엄격한 조건을 부과해야 한다.
미래지향적 구조조정도 필요하다. 구조적 쇠퇴기에 접어든 사양산업이나 경쟁력을 상실한 좀비기업은 정리해야 한다. 온라인 쇼핑, 원격교육, 온디맨드 서비스 등 언택트 경제 부상, 의료서비스와 바이오헬스 산업 확대, 산업지능화와 연계된 5G 통신설비, 로봇, 3D 프린터, 웨어러블 디스플레이, 이차전지, 센서, 시스템반도체 등의 수요 확대 등 산업구조 변화와 미국과 유럽의 탈중국 공급망 재편 가속화 등 글로벌 공급망의 구조변화 등을 내다보면서 미래지향적인 산업 및 기업 구조조정 마스터플랜 마련을 서두를 필요가 있다.
'포스트 코로나'를 향한 '전환적 뉴딜'과 새로운 국제협력체제 구축
코로나19 위기 이후 경제를 재건하는 과정에서 전략적 재정투자를 중심으로 하는 강력한 경기회복정책이 필요하고, 이 과정에서 '지속가능한 경제' 구축을 위한 과감한 발전 패러다임의 전환을 이루어야 한다. 필자는 이미 작년에 휴먼 뉴딜, 디지털 뉴딜, 그린 뉴딜을 포괄하는 '전환적 뉴딜'을 제안한 바 있다.( "문재인 정부에 '전환적 뉴딜'을 제안한다", [좋은나라이슈페이퍼], 프레시안, 2019. 7. 8.)
지속가능성의 위기에 봉착한 기존의 발전경로를 근본적으로 전환하기 위해 전략적이고 효율적인 재정투입을 하자는 제안이다. 휴먼 뉴딜은 만인의 존엄과 인격의 평등을 보장하고, 국가경제의 성장보다 개개인의 자아실현과 복리를 우선하는 사람우선 사회로의 전환을 추구한다. 자본투자보다 사람역량을 바탕으로 성장하고, 기업이윤보다 생명과 행복을 우선하는 '사람중심 경제'를 구축하는 일이다. 디지털 뉴딜은 산업경쟁력 강화와 사회문제 해결의 동력으로서 디지털 전환을 촉진하기 위해 전략적 재정투입과 아울러 규제 혁신과 제도 개선을 추구한다. 그린 뉴딜은 에너지 전환과 자원순환경제를 실현하여 기후변화와 환경오염을 억제하고, 환경관련 기술혁신과 일자리 창출을 추진하는 일이다.
지난 20년 동안 실제성장률과 잠재성장률의 쌍끌이 하락이 일어났고, 성장 둔화와 양극화의 악순환 가운데 합계출산율이 1을 하회하는 인구절벽에 부딪쳤다. 전반적으로 혁신이 부진한 가운데 특히 4차 산업혁명 분야의 경쟁력이 뒤처지고 있었다. 미세먼지, 쓰레기 산, 기후변화 등 환경문제가 일상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지속가능성의 위기가 심화하는데도 우리는 서서히 데워지는 냄비 속의 개구리처럼 얌전히 죽어가고 있었다. 제도와 정책의 경로의존성 탓에 기존 발전경로를 급격하게 전환하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다. 필자의 '전환적 뉴딜' 제안이 지식인들과 정치인들 사이에서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지만, 이를 실제 정책으로 실행하기 위한 동력은 얻지 못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전환적 뉴딜’을 추진할 천재일우의 기회가 찾아왔다. 위기와 재앙은 그 크기에 비례해서 기존 질서를 파괴하고 새로운 질서를 잉태할 가능성을 제공한다.
코로나19가 드러낸 기존 질서의 문제점과 해결의 지향점은 '전환적 뉴딜'과 정확히 맞닿아 있다. 코로나19 앞에 무너지는 시장과 구원자로 나선 정부의 대조가 극명하고 사회안전망과 공공성의 가치가 각인되고 있다. 사람중심 경제와 사람우선 사회라는 새로운 가치관이 필요한 상황이다. 사회적 격리로 비대면 서비스 수요가 폭증하면서 디지털 전환이 성큼 다가오면서 포용적 제도혁신의 필요성도 부각되고 있다. 기후변화가 생존의 위협으로 다가오면서 공공의 이익을 위한 집합행동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이렇게 휴먼 뉴딜, 디지털 뉴딜, 그린 뉴딜의 당위성이 드러나고 있다.
우리가 '전환적 뉴딜'에 성공한다면 국제협력체제 재편과 새로운 세계화를 추진하는 데에 주도적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BTS와 '기생충'으로 우리의 문화적 역량이 세계적으로 인정받았다고 해서 우리의 문명적 주도성이 인정된 것은 결코 아니다. 코로나19 방역의 상대적 성공은 세계가 한국을 괄목상대하도록 만드는 데 훨씬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가혹한 봉쇄 없이 조기 대응, 대량검사·신속추적·효율치료 중심의 과학 기반 대응, 드라이브스루 검사와 GPS를 이용한 추적 등 혁신적 방법 동원, 시민참여를 독려한 민주적 대응으로 효과적인 방역에 성공한 것을 세계가 주목하고 찬사를 보내고 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국제사회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기는 어렵다. 선진적 방역과 아울러 효과적 경기회복을 이루고, 특히 '전환적 뉴딜'에 입각하여 '지속가능한 경제' 구축에 앞서가는 것이야말로 한국의 세계사의 중심에 놓게 될 것이다.
코로나19 방역에서 동아시아가 상대적으로 잘하고 미국과 유럽이 실패하면서 오리엔탈리즘의 종언을 말하는 이들이 있다. 과학적 서구와 미신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아시아라는 신화는 깨질 것이다. 중국의 경제적 부상을 견제하려는 미국의 무역전쟁 및 패권경쟁에서 미국이 더 큰 타격을 받는 것도 불가피할 것 같다. 나아가 서구의 개인주의·시장주의 경향과 동아시아의 집단주의·국가주의 경향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질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아시아가 서구에 비해 우월하다거나 헤게모니를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계몽주의 이래 서구가 주도한 자유와 인권의 이상은 여전히 소중하고, 서구 과학기술의 우위도 하루아침에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누가 우위를 점하고 헤게모니를 잡는 위계적 질서가 아닌 상호존중과 상호협력의 질서를 구축하는 일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글로벌 공공재를 위한 국제공조를 통한 인류공동번영을 지향하는 일이다. 이 과정에서 강압적·봉쇄적 방식을 사용한 중국과 달리 민주적·개방적 방식으로 효과적 감염병 억제에 성공한 한국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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