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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DJ '대중경제론'은 박현채 작품"

<기고> '민족경제론'의 정치적 버전…진보진영의 '공동저술' 성격도

사람 이름을 딴 정책이나 이데올로기의 이름은 흔한 것 같지만 사실은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다. '레이거노믹스'와 '대처리즘'의 레이건, 대처는 뚜렷하게 구별되는 새로운 정책을 실행에 옮긴 사람들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한국의 놀라운 압축 고도경제성장에 대해 '박정희노믹스'나 '박정희이즘'이라는 용어를 쓰는 데 인색하다. 박정희식 수출주도형 경제성장은 실제로는 케네디의 안보담당 특별보좌관이던 로스토우의 경제발전론에 입각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김대중의 '대중경제론'은 우선 그 동음이의어의 작명부터 행운이었다고 할 수 있다. 대중경제론은 한국의 특수한 현실에서 그 족적을 뚜렷이 남긴, 그리고 나름의 일관된 체계를 갖춘 아주 특이한 이론과 정책이었다. 대중경제론은 김대중을 그냥 반대만 하는 야당 정치인이 아니라 현실의 합리적 대안을 갖고 있는 경륜 있는 정치인으로 국민들에게 각인시킨 중요한 자원이었다.

***DJ를 '합리적 대안의 정치인'을 각인시킨 대중경제론**

그런데 이 대중경제론이 실제로는 고 박현채 선생(1934~95)이 주도해서 만든 작품이었다. 그의 민족경제론의 정치적 버전이 바로 대중경제론이었던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대중경제론은 박현채의 기획이었으며, 박현채를 중심으로 당시의 수많은 진보학자들이 참여해서 창안한, 현실성 있는 대안경제 이론이었다. 레이거노믹스의 이론제공자가 시카고학파의 프리드먼이나 공급중시 경제학의 펠드스타인, 래퍼 등이었던 것처럼 대중경제론 역시 이론제공자 그룹이 있었고 그 중심에 박현채가 있었던 것이다.

물론 레이거노믹스의 이론 제공자들이 정보기관에 끌려가 고문을 받거나 감시 당하지 않았다는 것이 미국과 한국의 차이라면 차이였다.

***박현채가 기획하고 공동집필한 '대중경제론 : 100문100답'**

1971년 4.27 제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박현채, 정윤형(전 홍익대 교수), 임동규(현 민족무예 경당 대표), 그리고 당시 김대중의 비서였던 김경광 등 네 사람은 온양온천의 한 여관에서 2주 동안 합숙하며 김대중의 대중경제론을 '100문 100답' 형식으로 편집했다.

임동규가 2005년 1월 경기문화재단 누리집 게시판에 올린 글을 보면 그 이전에 각 분야의 전문가 열서너 명이 집필한 원고를 검토한 결과 일관성이 없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후일담이지만 이렇게 신속하게 완성된 원고를 김대중도 출판 직전에 보고는 그토록 짧은 시간에 일관된 논리의 책을 만든 것에 대해 만족감을 표시하고 감사의 뜻을 전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대중경제연구소'의 명의로 발간된 '대중경제론 : 100문 100답'은 1971년 대통령선거 국면에서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당시 김대중은 향토예지군 폐지, 남북교류, 4대국 안전보장안 등으로 박정희식 안보논리를 정면에서 공격하는 정책과 함께 박정희식 경제성장론을 공박하는 대중경제론을 제시함으로써 돌풍을 일으켰다. 물론 역풍도 만만치 않았다. 당시 중앙정보부장이던 김형욱이 증언하고 있듯이, 전 국가기관을 총동원한 박정희의 공공연한 선거부정으로 김대중은 선거에서는 이기고도 투표에서는 90만 표라는 간발의 차이로 지고 말았다. 그런 아슬아슬한 대통령선거 같은 것은 두 번 다시 하지 않겠노라고 굳게 다짐한 박정희는 1년 뒤인 1972년 자신이 사실상 임명한 사람들만의 체육관 선거를 통해 종신집권 할 수 있는 10월유신을 단행하고 만다.

***"대중경제론, 네가 쓴 거지?"…중앙정보부 고문의 희생자들**

그 뒤 대중경제론은 수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고문과 고초를 겪게 만들었다. 누가 이 책을 썼고 누가 관련되어 있느냐는 것을 중앙정보부는 집요하게 조사했다. 1973년 최종길 당시 서울대 법대 교수가 고문살해 되던 바로 그 순간 같은 남산 지하실에서 유럽거점 간첩단 사건이라는 어마어마한 조직(?)의 조직원으로 만들어지기 위해 고문 받고 있던 김장현(당시 경제과학심의회의 서기관)도 이 대중경제론에 집필 또는 자료제공 등의 기여를 하지 않았느냐고 모질게 추궁 받았다. 김대중내란음모 사건 뒤인 1980년대 초반의 어느날 당시 쌍무기수(무기형이 두 개)로 복역중이던 임동규도 정보기관에 다시 불려가 조사를 받았다. 그는 그 자리에서 자신이 대중경제론을 썼노라고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가운데 당시 김대중의 비서로서 책 발간의 실무를 주도했던 김경광은 대중경제론 때문에 일생을 망친 경우에 속한다. 그는 선거가 끝나자마자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그는 애초 김대중, 박현채 등과 약속한 대로 끝내 자신이 모든 것을 쓰고 출판했노라고 우겼다. 그 때문에 그만큼 더 고문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동아대 강사 출신의 김경광은 극심한 고문 후유증으로 고생하다 결국 엄청난 부채만 가족들에게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아직도 김경광의 가족들은 가장이 남긴 빚더미에 묻혀 간난신고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김경광은 김대중의 비서들 가운데 그가 수행한 일에 견주어 빛을 보지 못한, 가장 불우한 사람 가운데 하나다. 1997년 12월 김대중이 마참내 집권하고 얼마 뒤 당시 비서실장이던 한광옥이 김경광 가족의 주소와 전화번호를 수소문한 적이 있다고 김병태(전 건국대 교수, '대중경제론'의 농업 부문 집필)는 증언한다. 그러나 그뿐 아무런 연락도, 아무런 소식도 다시 들려오지 않았다. 또 대중경제론 출판 작업 당시 연락업무를 담당했던 한화갑이 언젠가 한번 김경광 가족의 연락처를 물어온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그뿐 다시는 김대중 주변으로부터 아무런 연락도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DJ와 박현채, 이미 1960년대부터 가까운 사이**

대중경제론을 둘러싼 이런 이야기들은 김대중과 박현채 주위의 일부 사람들에게는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김대중과 박현채의 관계가 언제부터였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그러나 1960년대부터 이미 김대중이 박현채와 교류하고 있었던 흔적은 곳곳에서 나타난다. 두 사람의 관계는 1960년대 이후의 민주화운동과 1971년 대통령선거에서의 지원, 1987년 대선 당시의 이른바 비판적 지지, 그리고 1997년 김대중의 집권과 국민의 정부 시기 경제정책에 이르기까지 한국현대사를 새롭게 해석하게 만든다.

2005년 고 박현채 10주기를 맞이하여 박현채 전집·추모문집 발간위원회(발간위원 박중기, 김낙중, 백낙청, 김금수, 송기숙, 문병란, 이경의, 김경희, 임동규, 김언호, 박영호 등 20인)는 전집을 준비하면서 고인의 모든 형태의 글을 수집했다. 그리고 고인과 교류가 있던 모든 사람들, 선후배 동료지인, 제자 등에게 추모문집의 원고를 청탁하고 있는 중이다. 이 과정에서 참으로 다양한, 한국현대사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을 접할 수 있었다. 그만큼 우리 역사가 굴절이 많았다는 증거이며 박현채의 삶이 꼭 그러했다.

***'박현채 神話'…그러나 그는 '현실주의자'**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박현채는 민족경제론을 제창한 경제학자이자 사회운동가였다. 초등학교 때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은 뒤 독서회를 조직할 정도로 천재로 인정받고 있던 그는 광주서중학교 학생 신분으로 지리산에 들어가 빨치산이 된다. 소설 '태백산맥'에 나오는 소년전사 조원제는 다름 아닌 소년시절의 박현채가 모델이다. 실제 박현채의 증언이 없었다면 그처럼 생생한 조정래의 대하역사소설은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박현채는 전주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서울대 상대에 들어가 경제학자로서의 삶을 시작한다. 그러나 그는 요주의 인물로 정보기관이 철저히 감시하는 대상이었지만 단순히 연구실 의자에 앉아 있는 고루한 학자가 아니라 현실을 파악하고 그 부조리한 현실을 바꾸기 위해 끊임없이 모색하는 사회운동가로서의 삶을 살았다. 1964년 제1차 인혁당 사건에서부터 그는 구속과 연행, 감금을 밥 먹듯 당해야 했다.

민주화운동 진영에서 박현채는 신화와도 같은 존재였다. 그의 정연한 논리와 현실인식에 더하여 그의 경력이 범접할 수 없는 권위를 더해주었다. 그럼에도 그는 빨치산이 주는 이미지와 달리 '교조주의' '극좌' '비타협'이라는 말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무섭도록 현실을 인정하고 그보다 꼭 한 걸음만 앞서 나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현실주의자였다. 그의 모든 이론과 주장의 핵심은 오늘을 살아가는 민중들의 현실적인 삶의 개선이었다. 어쩌면 좁은 의미의 마르크시즘 교의에서 보면 이탈이라고도 볼 수 있는 민족경제론을 제창한 것도 그의 이런 문제의식이 낳은 미완의 실험이었다.

***"DJ 석사논문도 박현채·임동규의 작품"**

1969년 김대중은 경희대 대학원의 경제학과 학생으로서 석사논문을 제출했다. 논문 제목은 '대중경제의 한국적 전개를 위한 연구 : 한국경제의 구조개혁을 위한 서설'이었다. 한국경제의 경제성장 현실을 분석하고 그 대안으로서 대중경제의 건설을 제시하는, 수준 높은 논문이었다. 1971년 대중경제론이 김대중 대통령후보의 정책으로 대중에게 선보이기 훨씬 전에 이미 대중경제론은 발효와 숙성의 과정을 거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논문은 현대자본주의에 대한 검토에서부터 시작하여 박정희 정권의 공업화정책, 농업정책, 외자도입 정책, 수출정책, 분배정책, 재정투융자 정책 등 경제 전 분야를 분석 비판한 뒤 한국적 대중경제론의 기본방향과 정책방향 구상까지 제시하는, 다분히 대중경제론의 기초이론 성격을 띠고 있는 글이었다.

김대중의 이 논문도 실제 박현채의 작품이었다. 임동규는 자신도 이 논문의 작성과 윤문에 일부분 참가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것은 흔히 말하는 저작권의 문제가 결코 아니다. 정치인의 정책과 이론이란 저작권이 문제가 아니라 당대의 시대상황에 대해 어떤 문제인식을 갖고 있으며 또 어떤 지식이론 경향과 사회계층을 대변하고 있는지가 문제이기 때문이다.

***"당대 진보지식인들의 공동저술 성격도"…그밖에도 '익명''차명' 저작물 많아**

박현채는 임동규(현 민족무예 경당 대표)와 함께 1960년대부터 기회만 주어지면 다른 사람 이름으로 신문, 잡지에 수많은 논문을 발표했다. 심지어는 단행본까지 출판했다. 박현채와 임동규가 다른 사람 이름으로 출판한 단행본 가운데에는 1970년대부터 대학생들의 필독서가 된 경제이론서도 포함되어 있다. 누가 쓴 글이냐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형식이든 대중에게 내용을 알리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말하자면 내용주의자들의 시대가 민주화운동 시대였던 것이다.

김대중의 경희대 석사논문을 박현채가 썼다는 사실은 박현채로 대표되는 당시 진보진영의 지식인들이 김대중을 박정희를 대신할 현실의 대안정치세력으로 인식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역으로 김대중이 박현채로 대표되는 진보진영의 지식인들을 자신의 우군으로서 확실히 인식하고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비판적 지지'의 뿌리는 이미 1971년 대선 당시 형성되어 있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박현채가 김대중을 그렇게 생각하고 대중경제론 논문을 쓴 것과 김대중이 박현채에게 대중경제론의 집필을 맡긴 것은 커다란 차이가 있다. 박현채야 자타가 공인하는 급진 경제학자이자 사회운동가로서 고난의 길을 마다하지 않는 사람이지만 김대중은 당시 현역 국회의원으로서 대통령을 꿈꾸던 사람이었다. 만약 김대중과 박현채의 관계를 박정희 정권이 안다면 그 순간 김대중은 정치생명이 끝날 수도 있는 그런 문제였다. 그렇지 않아도 김대중을 빨갱이로 엮을 무슨 묘수가 없나 하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중앙정보부는 박정희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수십, 수백 명을 벌떼처럼 투입해 일 계급 특진의 영광을 얻을 수 있는 절호의 간첩사건을 떠들썩하게 만들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젊은 시절부터 장년에 이르기까지 김대중의 경륜과 고뇌와 문제의식의 깊이를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1971~1997 '대중경제론'의 流轉**

대중경제론은 그 뒤 몇 번의 수정을 거쳤다. 광주항쟁 이후 죽음 직전까지 갔다가 간신히 살아난 김대중은 1982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1983년 가을부터 1984년 여름까지 하바드대학 국제문제연구소 초청연구원으로 있던 김대중은 영문으로 논문을 제출했고, 이것이 1985년 'Mass-Participatory Economy-A Democratic Alternative for Korea'란 제목으로 출판됐다. '대중참여경제론'이라는 제목의 이 책은 1971년의 대중경제론을 저본으로 이번에는 박현채가 아니라 당시 뉴저지주 경제연구소에 근무하던 유종근(전 전북지사)이 정리한 것이었다. 이 논문은 국내에서는 1986년 '대중경제론'이라는 제목으로 도서출판 청사에서 간행됐다. 책이 출판되자마자 청사 대표인 함영회는 동대문경찰서에 강제연행돼 조사를 받고는 즉심에 회부돼 구류 5일을 선고받았다.

그 뒤 10여년이 지난 1997년 대선을 앞두고 대중경제론은 '대중참여경제론'이라는 수정본으로 다시 출판됐다. 이 책은 1985년의 영문 논문을 개정 증보한 것이었다. 이때는 또 유종근이 아니라 이강래가 실무를 맡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DJ 대통령 당선, 그리고 '대중경제론'에 대한 철저한 배신**

무엇보다도 대중경제론의 마지막 수정(?)은 김대중 집권 후의 실제 경제 운용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IMF 경제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경제체제를 시행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앞에서 김대중은 그 자신이 그렇게도 주장했던 바대로 대중의 삶을 개선하기는커녕 양극화를 더욱 심화시킨 20대 80의 사회를 만든 장본인으로 비판받고 있다. 물론 김대중 시대에 대한 평가는 좀 더 시간이 필요할지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1997년 이후의 김대중은 1971년의 대중경제론을 수정 증보한 것이 결코 아니라 철저하게 배신했다는 점이다.

역사가 보여주는 한 가지 진실은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오늘 이 순간의 선택이라는 사실이다. 역사에 무슨 고정불변의 발전법칙이나 단계가 있을까. 그런 주장은 이제 낡은 이데올로기임을 우리는 체험했고 또 알고 있다. 역사는 변화이며 그것도 우연이 지배하는 변화다. 이 우연성 때문에 사람들은 스스로 역사를 창조해낼 수 있다. 오늘 이 시점에서의 선택이야말로 역사를 변화시키는 원동력이다. 현재 노무현정부의 경제정책이란 게 과연 있는 것인지조차 의심스러운 오늘날 박현채와 김대중의 대중경제론이 겪어 온 역사는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과거청산을 외치고 민중들의 삶을 민중들 스스로가 참여해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는 현 정부가 지금 어떤 선택을 하고 있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상은 높았지만 냉정한 현실주의자였던 지하의 박현채는 오늘의 대중경제 현실을, 민중들의 척박한 삶이 보여주는 이런 전도와 역설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 박스 시작**

***박현채, 그는 누구인가**

올해 10주기를 맞는 박현채(1934~1995)는 평생을 이 땅의 평범한 사람들과 아픔을 함께 한 실천적 지식인이다. 그는 조정래 <태백산맥>의 소년 전사 조원제의 실제 모델로 광주서중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50년 전라남도 화순군 백아산에 들어가 1952년까지 빨치산 전사로 활동했다.

하산 후 역사 속에서 투쟁할 것을 결심하고 서울대학교에 진학해 경제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한다. 대학원 재학 시절인 1959년부터 1964년까지 '한국농업문제연구회' 간사로 활동하며 농업구조 개혁 문제에 특히 관심을 가졌다. 그는 이 시기에 왜곡된 종속적 경제를 자주적이고 자립적인 경제로 개편하려는 '민족경제론'의 문제의식을 본격적으로 형성했다.

현실은 그를 상아탑 안에 머물게 하지 않았다. 그는 1964년 이른바 제1차 인민혁명당 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룬것을 시작으로 30여 년 동안 노동운동ㆍ학생운동 등 민중ㆍ민주 운동의 중심에서 온갖 고초를 당했다. 1978년 박정희식 근대화를 통렬하게 비판하며 세상에 선보인 그의 <민족경제론>은 이와 같은 치열한 삶 속에서 켜켜이 쌓인 고민의 응축물이다.

특히 그는 1985년 <창작과비평>(57호)에 '현대 한국사회의 성격과 발전 단계에 관한 연구'를 발표해 이른바 1980년대 중ㆍ후반을 달궜던 한국사회구성체 논쟁의 단서를 제공했다. 1988년에는 한국사회연구소(현 한국사회과학연구소의 전신)를 설립해 이 땅에 뿌리내린 진보 이론을 모색했다. 말년에 현실사회주의가 몰락하는 것을 보고 크게 실망했던 그는 결국 어려서부터 꿈꾸던 자유와 평등이 이 땅에 활짝 꽃 피우는 것을 보지 못하고 1995년 8월 17일 영면했다.

그는 일생 동안 마르크스주의에 뿌리를 둔 급진적 사상을 견지하면서도 항상 '구체적 현실을 감안한 사상적 실천'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땀 흘려 일하는 민중의 시각에서 학문과 실천을 해 온 것이다. 평생을 '정의는 언제나 약한 자의 편에 있다'는 믿음을 굳게 가졌던 그는 삶과 학문이 일치했던, 흔치 않은 인물이다.

최근 그의 10주기를 맞아 '박현채 전집ㆍ추모문집 발간위원회'가 꾸려졌다. 이 위원회는 올해 안에 전집ㆍ추모문집 사업이 완료되면 그 성과를 토대로 한국 경제의 핵심 문제들을 박현채의 이름을 걸고 토론하는 자리를 매년 만들 계획이다. 민중의 시각에서 이 땅에 뿌리내린 진보 이론을 완성하는 일은 이제 후진들의 몫이 됐다.

☞박현채 전집ㆍ추모문집 발간위원회(02-362-5279, gilese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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