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9월에 총선을 치른 독일은 최근에야 새 정부를 구성했다. 지루한 협상과 당 내 논쟁 끝에 사회민주당(SPD)이 기독교민주연합/기독교사회연합(CDU/CSU, 이하 기독교민주연합)과 다시 대연정을 꾸리기로 하면서 기독교민주연합의 앙겔라 메르켈이 네 번째 총리 임기를 시작할 수 있게 됐다.
그런데 사회민주당은 4기 메르켈 정부가 임기를 시작하기도 전부터 휘청대는 모양새다. 기독교민주연합이 주도하는 대연정에 다시는 참여하지 않겠다고 했다가 말을 바꾼 탓인지 지지율이 10% 대로 추락했다. 심지어 인종주의 극우파 '독일을 위한 대안(AfD, 이하 독일대안)'에 지지율이 밀리는 형편이다. 사회민주당 지지율이 10% 대로 떨어진 것은 나치 시절을 제외하면 1890년대 이후 처음이다. 그 정도로 지금 독일 정치가 뼈대까지 흔들리고 있다.
불길하게도 사회민주당 지지가 줄어들수록 독일대안의 지지는 늘어난다. 구 사회민주당 지지층 중에서도 독일대안으로 이동하는 이들이 있다고 짐작해볼 수 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좌파 성향 유권자들에게 사회민주당 말고도 녹색당이나 좌파당 같은 대안이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사회민주당 지지율이 하락한 반면 두 당의 지지율은 올랐다.
한데 최근 이 중 좌파당의 원내 대표 자라 바겐크네히트가 쓴 책이 우리말로 번역돼 나왔다. 2016년 저작 <풍요의 조건: 자본주의로부터 우리를 구하는 법>(장수한 옮김, 제르미날 펴냄)이다. 독일 정치가 격동하는 시점에 그 주역 중 한 사람의 육성이 소개됐으니 일단 반갑다. 게다가 사회민주당의 위기가 깊어질수록 더 주목받을 수밖에 없는 정당에서 어떤 이야기들이 오가는지 확인할 수 있으니 더욱 뜻깊다.
봉건주의로 돌아간 자본주의
그러나 이제는 바겐크네히트의 위상이 라퐁텐을 뛰어넘는다. 바겐크네히트는 급진좌파 정당으로 분류되는 좌파당 안에서도 왼쪽에 속한다. 동독이 망해가던 1989년에 사회주의통일당(SED, 동독 집권당)에 입당했고, 그 후신인 민주사회주의당(PDS)에서는 이름이 무려 '공산주의 강령'인 분파에 가담했다. 2009년에 구 서독 지역인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에서 연방의원으로 당선된 뒤로는 원내에서 좌파당의 이상과 원칙을 올곧게 대변했다.
특히 그레고어 기지 같은 다른 구 동독 출신 당 간부들과 달리 사회민주당과의 공동 집권에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바겐크네히트는 베를린 시의 사회민주당-좌파당 연립정부가 복지 축소와 사유화 정책을 펼치자 베를린의 당 동지들을 매섭게 비판하고 나서기도 했다.
이렇게만 소개하면 왠지 차갑고 성마른 좌파 지식인 이미지가 떠오를지 모른다. 그러나 바겐크네히트의 면모는 정확히 그 반대다. 바겐크네히트는 좌파당뿐만 아니라 독일 좌파 전체에서 가장 매력적인 언술과 인간미 넘치는 행동으로 대중에게 다가가는 정치가다. 유권자들 사이에서 "좌파당은 지지하지 않아도 자라(자라 바겐크네히트)는 좋다"는 말이 회자될 정도다.
<풍요의 조건>은 그런 그가 낸 이론서다. 칼 마르크스 철학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고 박사학위는 경제학으로 받은 바겐크네히트이니 이론서의 저자라는 게 어색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딱딱한 학술 서적은 결코 아니다. 그러기에는 '대중 정치가' 바겐크네히트의 그림자가 짙다. <풍요의 조건>은 분명 이론적 주장을 담은 책이되 누구나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는 언어로 말을 건다. 평범한 독일 유권자와 대화하듯이 이야기를 풀어낸다. 금상첨화로 우리말 번역도 깔끔하다.
책 전반을 꿰뚫는 핵심 명제 역시 간단명료하다. 자본주의는 이제 새로운 봉건주의가 됐다는 것이다. 바겐크네히트는 "자본주의적 경제 봉건주의"(353쪽)라 이름 붙인다. 자본주의가 봉건주의라니! 우리 상식 속에서 자본주의는 낡은 봉건주의를 깨부수고 등장한, 봉건주의의 대립어가 아닌가! 세습 귀족이 불로소득을 누리며 대다수 민중을 내리 누르던 봉건제 대신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경쟁을 통해 승자를 가리는 자본주의 질서가 등장한 것 아닌가.
그러나 자유 경쟁에서 누구나 마음껏 제 능력을 발휘하게 해준다는 자본주의의 신화는 오늘날 신자유주의 교리문답서 안에만 존재한다. 신자유주의 지구화 한 세대를 거친 뒤에 온 인류가 맞이한 세상을 바겐크네히트는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아이들이 부모 세대보다 좋아진 경우는 오늘날 드물어졌고 오히려 그 반대 사례들이 잦다. 단 하나의 예외는 배타적 유산 클럽이다. 거대한 상속재산을 기대할 수 있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이 클럽의 구성원들은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유복한 삶을 뒷받침하기에 충분한 재원과 소득을 갖고 있다. 20세기 후반 자본주의가 인기를 누리게 된 근거였던 계층 상승의 약속은 너무나 높고 믿지 못할 것이 되어 버렸다. 재능이나 자신의 노력을 훨씬 넘어서서 출신이란 요소가 어떤 개인이 사회적 소득과 재산 피라미드의 정상에 특별석을 차지할 수 있을지 없을지를 결정한다." (<풍요의 조건>, 23쪽)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이야기다. 다름 아니라 "금수저, 흙수저"론이다. 그런데 이게 "헬조선"만의 현실이 아니었던 것이다. 스웨덴과 함께 흔히 "헬조선"의 정반대 사례로 이야기되는 독일에서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나 보다. "우리만 이렇게 힘든 게 아니었어"라며 안도해야 할 일인가, 아니면 "아, 독일마저도"라며 탄식해야 할 일인가.
"극상위층 독일 부자들은 모두 합해 6250억 유로[약 819조 원-인용자]의 자본재산을 소유하고 있다. (…) 이 액수는 500명의 평범한 소득자들이 중부 유럽에 아직 사람들이 살지 않았던 석기시대 초기 2만년 이상 전에 고된 노동을 시작해 현재까지 공기와 숲 속의 딸기 같은 것 외에는 아무것도 먹거나 소비하지 않고 저축을 해야만 얻을 수 있는 재산이라는 사실에 관해서는 아예 입을 다물기로 하자." (<풍요의 조건>, 93~94쪽)
아무튼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이든 서쪽이든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신자유주의의 표어와는 달리 "경쟁", "능력", "자유시장" 등등이 아니다. "세습특권", "상속재산", "지대수익"이다. 자본주의 교과서가 봉건제의 특징이라 가르치는 바로 그것들이다. 그러니 어찌 봉건제의 귀환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최근 "세습 사회"(토마 피케티), "지대추구자 자본주의"(가이 스탠딩) 등등으로 불리며 비판받는 전 지구적 현실이 <풍요의 조건>에서 비로소 제 이름을 찾은 느낌이다. "21세기 경제 봉건주의".
왜 하필 21세기 초입에 다시 봉건제가 문제인가? 지난 30여 년간 지구 자본주의가 금융화 국면을 겪었다는 사실이 중요한 요인 중 하나임은 분명하다. 금융화란 화폐자본 소유자를 정점에 두는 지배 피라미드를 구축하고 유지하는 일이며, 따라서 금융화 국면을 거치면 어느 자본주의 사회에서든 지배계급은 금권 귀족으로 행세하게 된다. 얼마나 파렴치한 역설인가. "경쟁", "능력", "자유시장" 등 초기 자본주의가 봉건제에 맞서며 내세웠던 구호들을 먼지 속에서 꺼내 깃발로 내걸었던 신자유주의가 전 지구적 봉건제를 완성시켰다니 말이다.
자유주의로 자본주의를 비판한다?
그런데 바겐크네히트는 좀 더 깊이 파고든다. 비록 신자유주의 시대에 유례없는 힘을 얻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재봉건화 추세가 20세기 말에 느닷없이 등장한 현상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바겐크네히트는 실은 자본주의의 맨 처음부터 재봉건화 경향이 잠복해 있었다고 본다. 그렇다면 봉건제는 결코 자본주의의 반대말일 수 없다. 아니, 봉건주의야말로 자본주의의 필연적인 귀결이다.
이는 또 다른 역설로 이어진다. 자유주의는 흔히 자본주의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 노릇을 한다. 가장 극단적인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라 불렸던 한 시대를 겪은 우리에게는 너무도 사무치는 진실이다. 그런데 얼핏 이와 모순되는, 이 진실의 이면이 있다.
역사적으로 자유주의는 봉건적 특권에 맞서며 득세했고, 늘 이런 특권에 날을 세우며 스스로를 정당화한다. 그런데 이런 자유주의와 쌍을 이루며 득세한 자본주의는 오히려 봉건주의로 회귀한다. 달리 말하면, 자본주의는 자유주의를 구호로 내세우면서도 자유주의를 배반한다. "경쟁", "능력", "자유시장" 등등은 "자본주의적 경제 봉건주의" 아래서 늘 거짓 약속이 되고 만다.
이 대목에서 바겐크네히트는 단순한 이데올로기 비판에 그치지 않는다. 바겐크네히트는 자본주의의 진실에 배반당한 자유주의에서 동맹군을 찾으려 한다. <풍요의 조건>은 현대 자본주의를 비판하면서 아주 적극적으로 자유주의 사상가들을 인용하며 그들의 논리를 동원한다. 물론 "효율적 시장"이라는 이름으로 도박판을 옹호하던 가장 퇴화한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은 포함되지 않는다. 존 스튜어트 밀이나 존 메이너드 케인스 같은 이름이 주로 나온다.
한데 그들만이 아니다. 반케인스주의라는 면에서는 밀턴 프리드먼이나 프리드리히 폰 하이에크와 동류로 취급되기도 하는 독일의 질서자유주의자들(프라이부르크 학파)도 아군의 편에 세운다. 경제학설사를 좀 아는 독자에게는 사뭇 충격적일 수도 있다. 좌파당 안에서도 급진파라는 논자가 기독교민주연합의 경제 이데올로기를 구축한 이들에게 손을 내밀다니!
하지만 자국의 사상 지형 안에서 재봉건화에 맞설 동맹군을 찾고자 하는 바겐크네히트로서는 이들에게 주목할 이유가 충분히 있다. 프라이부르크 학파 경제학자들은 독일식 독점 자본인 콘체른의 시장 지배를 비판하면서 재봉건화 경향 비판의 핵심 논리들을 제시한 바 있기 때문이다. 가령 질서자유주의의 대표자 중 한 사람인 알렉산더 뤼스토프는 이렇게 말했다.
"상속에 의한 불평등한 출발은 자본주의에 고유한 제도적 구성 요소들인데, 이를 통해 시장경제 사회에서도 봉건주의가 계속해 살아남았고 시장경제를 금권 정치와 부의 지배로 만들고 있다." (<풍요의 조건>, 103쪽에서 재인용)
그렇다고 바겐크네히트가 논의를 온통 자유주의의 틀에만 끼워 맞추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재벌을 비판하면서 주주 자본주의를 대안으로 내세우는 식으로 뒷걸음치지는 않는다. 정반대다. 바겐크네히트는 자유주의의 이상이 이제는 다른 짝을 찾아 나설 때라고 역설한다. 자유주의는 이제 자본주의가 아닌 새 짝을 찾아야 한다. 그것은 말하자면 21세기에 맞게 재구성된 사회주의다!
바겐크네히트가 이렇게 주장하는 핵심 근거는 재봉건화의 뿌리 깊은 기반이 자본주의적 기업 소유구조라는 데 있다. 생산-서비스 활동과 괴리된 불로소득자들이 사회를 지배할 수 있는 것은 이런 활동이 벌어지는 현장인 기업이 불로소득자들에게 점령당했기 때문이다. 그 제도적 통로가 바로 주식회사 제도다.
주식회사는 참으로 묘한 제도다. '주주'라 불리는 금융 투자자는 손실에 대해서는 제한된 책임만 진다. 반면 이익은 무제한으로 착복한다. 그래서 기업 활동의 부침과 상관없이 금융 투자자들은 대를 이어가며 부와 권력을 천문학적으로 늘린다. 자본주의가 금융화 국면에 접어들기 훨씬 전부터 이미 이런 토대 위에서 소수 자본가가 끊임없이 금권 귀족이 되고 사회를 통째로 접수할 만반의 준비를 갖춘다. 바겐크네히트는 이렇게 정식화한다.
"자본주의에서 나타난 창의적인 소유권적 발명은 제한적으로만 책임을 지는 소유로서, 우리가 유한책임회사와 주식회사에서 보는 바와 같은 그런 기이한 소유권의 구성이다. 이 구성은 한 기업의 소유자에게 그 기업에서 형성한 모든 수익을 완벽하게 자기 마음대로 사용하도록 보장하지만 그 기업이 안게 된 위험에 대해서는 처음에 투자한 자본금만큼만 책임을 지운다." (<풍요의 조건>, 315쪽)
"오늘날 우리는 경제적 소유에 대한 제한적 책임에 너무나 익숙해져서 책임을 추궁하지 않고 아예 마음을 쓰지 않거나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정도이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것은 그 자체로서 모순이다. 그래서 애덤 스미스로부터 발터 오이켄[질서자유주의자-인용자]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시장경제를 주장한 학자들로부터도 이런 권리 형태는 거부당해 왔다." (<풍요의 조건>, 318쪽)
자본주의의 봉건제 회귀 경향의 밑바탕에는 이렇듯 주식회사 제도가 있다. 이 부조리한 제도 덕분에 생산-서비스 활동은 이미 사회 전체의 협력으로 이뤄지는데도 부는 더욱더 소수 금융 귀족의 손아귀에 집중된다. 이를 혁파하지 않고서는 재봉건화를 결코 뒤집을 수 없다. 진정 새로운 지식과 기술 개발의 "경쟁"이 보장되고 각인의 "능력"이 마음껏 실현되며 "자유시장"이 작동하려면, 이 두터운 장벽을 돌파해야만 한다. 새로운 기업 형태로 전환해야만 한다.
이리 하여 자유주의의 논리를 동원한 바겐크네히트의 현대 자본주의 비판은 사회주의의 오랜 이상의 부활이라는 야심 찬 결론에 도달한다. <풍요의 조건>은 1970년대~1980년대 초에 세계 곳곳에서 좌파의 도전이 신자유주의 초기 물결에 짓밟히고 현실사회주의권이 무너지면서 금기와 망각의 대상이 됐던 원대한 목표, 기업 소유-지배구조 변혁을 당당히 다시 의제에 올린다.
주식회사를 넘어 새로운 기업 소유-지배구조로
지난 세기에 주식회사에 맞선 좌파의 주된 대안은 늘 국가 소유 기업이었다. 그러나 바겐크네히트는 300여 쪽에 이르는 논의 끝에 이런 식상한 대안으로 돌아가지는 않는다. 주주 같은 외부 소유주 없이 회사원 전체가 스스로 경영하는 '직원회사', 지방자치단체가 소유하는 '지역공동체회사', 구 공기업처럼 공공성 강한 생산-서비스를 맡지만 국가로부터 독립적인 '공동번영회사'를 대안으로 내놓는다. 주식회사 제도는 폐지하고 아예 개인회사를 차리든가 이 세 가지 대안적 소유-지배구조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겐크네히트는 금융 영역에서도 수익 지향적인 일반 은행과 달리 공공 지향적인 '공동번영은행' 부문을 따로 만들자고 제안한다.
이러한 바겐크네히트의 대안은 1970년대 스웨덴 임노동자기금 구상의 모태가 된 에른스트 비그포르스의 '소유주 없는 사회적 기업' 구상을 연상시킨다. 국내 논의로는, 주식회사 제도를 비판하면서 바겐크네히트의 '직원회사'와 비슷한 방향을 개진한 김상봉의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꾸리에 펴냄)가 있다. 김상봉의 주장은 한국의 재벌개혁론 지형에서 다분히 유토피아적인 것으로 치부되곤 했다. 그러나 <풍요의 조건>은 이런 모색야말로 재봉건화한 현대 자본주의에 맞서는 정면 공격이라고 역설한다.
참으로 시원시원한 주장이다. <풍요의 조건>에서 자라 바겐크네히트가 정리한 주장이 좌파당 안에서 얼마나 지지를 얻는지는 모르겠지만, 한껏 움츠러든 독일 좌파의 고민과 토론 수준을 높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만한 시도임에는 분명하다.
더불어 이 책은 독일보다 더 심각한 "자본주의적 경제 봉건주의"에 신음하는 한국 사회에도 자극을 던져준다. 특권세습사회를 뒤집고 싶은가? 그렇다면 바겐크네히트가 역설하듯이, 자산 소유 불평등을 혁파하길 두려워해선 안 된다. 더구나 그 과제 안에는 기업이 누구의 것인지 가리고 다시 정하는 일도 포함된다. 21세기에도 '좌파'됨에 의미가 있다면 바로 이 물음을 놓을 수 없기 때문 아닐까.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