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를 앞두고 너도나도 개혁을 부르짖는다. 모두 개혁의 화신처럼 보이며 다들 개혁의 성공을 자신한다. 인간은 공부를 하고 보다 나은 미래를 꿈꿀 줄 알기 때문에 개혁은 어느 때든 시대적 과제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사람은 오랜 훈련과 반복을 통해서 생존능력을 기르는 존재여서 과거를 지키려는 보수의 세포를 몸속에 간직하고 있기도 하다. 사람이면 누구든 한편으론 보수적이고 한편으론 개혁적이라는 얘기다. 따라서 개혁을 주창하되 옛 것 가운데 좋은 것, 또는 불변의 원칙 같은 것을 지키려는 보수적 태도와 적절한 균형이 필요하다.
왕안석 개혁에 대한 역사의 평가
개혁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중국의 사상가가 왕안석(王安石)이다. 그는 세금제도, 토지제도, 교육제도, 군사제도 등에서 상당히 많은 개혁을 실시했으나 결국은 실패하여 나라를 위험에 빠뜨린 사람인데 왜 사람들은 그를 개혁정치가로 부를까. 러시아혁명을 이끈 레닌은 "왕안석은 11세기 중국의 개혁가였으며 토지국유를 실행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남겼다. 이는 왕안석 정책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말이다. 전후 16년에 걸친 전면 개혁은 왜 결국 실패에 이르렀을까.
왕안석은 형공(荊公)에 봉해지고 서왕(舒王)으로 추증되고 사후엔 공묘에 배향되었으니 역사상 이보다 더 출세한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는 시와 산문과 경전에 두루 능한 당대 최고의 지성이었으며 '당송 8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으로 칭송을 받았다. 그런데 그는 또 북송을 멸망시킨 원흉으로 지목되어 9백 년 동안이나 만세의 재앙이요 천고의 죄인으로 매도당하기도 했다. 심지어 그를 개와 돼지로 묘사한 사람도 있었다.
근대에 들어와서야 량치차오(梁啓超)가 왕안석을 중국역사상 가장 완벽한 인간이자 영국의 크롬웰과 같은 불세출의 정치가라고 칭송하면서 그에 대한 평가에 반전이 이뤄졌다. 같은 사람을 두고, 개혁의 성패를 둘러싸고, 왜 이토록 역사의 평가가 엇갈리는 것일까.
결국은 지향점의 문제이며 미래에 대한 꿈의 문제이며 국민에 대한 사랑의 문제이다. 모든 정부는 특정한 문제를 안고 있으며 개혁을 통해 그 문제를 극복하려고 한다. 그런데 개혁은 국가의 미래에 도움이 되어야 하되 그 지향점이 근본을 건드려선 안 된다. 국가의 근본인 주권이나 영토는 개혁으로 바꿀 수 없다. 정부가 개혁하려는 것은 국민의 문제인데, 잘못된 개혁은 정부를 바꿔버릴 수 있다. 이 지향점 때문에 왕안석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달라진 것이다. 그는 정부의 이익을 지향하는 개혁을 함으로써 백성들이 다치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정부가 잘된다고 해서 국민이 잘되는 것은 아니다. 개혁이 정부의 목표일 수는 없으며 개혁에 대한 국민의 평가는 정부의 성공 여부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민중의 삶의 성공 여부에 달려있다. 국민이 다친다면 아무리 좋은 개혁도 개악일 뿐이다.
왕안석은 청렴결백했다. 청빈하게 살며 공부와 글쓰기에 매진했다. 눈을 다른 곳에 둘 줄 몰랐다. 재상 재직 동안 식사를 할 때는 밥과 눈앞에 보이는 한 가지 반찬만 먹어 주방장을 고민에 빠뜨렸다. 부인이 들여보낸 첩에게 '넌 누구냐'며 빚을 대신 갚아주고 돌려보냈다. 청묘법, 면역법 등 개혁으로 송 신종(神宗) 즉위 초에 텅 비었던 정부 재정을 20년간 쓸 수 있을 만큼 넉넉히 모았으며 보갑법, 보마법 등으로 북방의 거란과 여진에 대항할 만큼 군비도 쌓았으니 부국강병의 정부 목표를 꽤 달성한 셈이다.
그런데 돈만 벌면 개혁인가? 정부재정만 넉넉히 하면 성공인가? 왕안석이 처음 정치를 할 때 송나라 백성들은 지방관의 행패에서 벗어날 수 있어서 위대한 개혁을 바라마지않았다. 그런데 희녕(熙寧) 2년인 1069년부터 원풍(元豊) 8년인 1085년까지 왕안석이 실시한 희풍변법으로 백성들은 부유해지지도 않았고 군대를 더욱 싫어하게 되었다. 당시의 정부주체는 군주이다. 개혁으로 군주는 만족했으나 백성을 잃게 된 것이다.
개혁의 성공은 무엇에 달려 있나?
깊은 학문의 벗이었던 사마광(司馬光)은 왕안석의 그 급진성과 과격성을 지적하고 백성에 대한 사랑과 불변의 가치에 대한 존중을 건의했다. 여러 번 거부당했고 급기야 신당과 구당의 당쟁으로 치닫게 되었다. '정치는 사대부를 위해 하는 것'이라는 사마광의 생각은 보수로 비칠 수 있다. 하지만 그 또한 개혁을 외쳤다. 다만 사람다움을 지키는 개혁과 불변의 원칙을 지키는 개혁, 즉 수상(守常)의 개혁을 주장했다. <관자(管子)> 치미(侈靡) 편에는 이런 말이 있다. "법을 따르고 불변의 원칙을 지키며 예를 드높이고 풍속을 바꾸면 훌륭한 법치를 이룰 수 있다."
그렇다고 사마광의 개혁이 성공한 것도 아니다. 왕안석의 학문, 즉 형공신학(荊公新學)은 수양을 중시하고 군주의 마음을 바로잡는 것을 정치의 핵심으로 여기는 성리학과 같은 맥락을 지니고 있다. 본성에 관한 논의나 왕도를 존중하고 패도를 천시하는 주장 등도 사마광과 다를 바 없다. 예컨대 왕안석은 <왕문공집> 왕패(王覇) 편에서 "인의로 몸을 수양하고 정치를 바꾼다면 천하에 왕자의 교화가 실천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실천을 중시한 왕안석이었지만 그 또한 성리학자들처럼 인간의 내부로부터 해결책을 찾으려 했던 것이다.
오늘날 개혁을 주창하는 모든 사람들이 비슷한 길을 제시하는 것을 보면 개혁의 본래 모습은 항상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사마광과 후대 성리학자들의 비판을 통해 우리는 왕안석의 개혁에서 무엇이 문제였는지를 알게 된다. 근원적인 한계는 군주전제라는 시대적 한계 때문이겠지만 개혁가 자신에게서도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왕안석은 정부재정의 확충을 위해 세금을 늘림으로써 사실상 백성들의 재물을 빼앗는 꼴이 되고 말았다. 단기간에 수십 개의 개혁정책을 내걸고 빠른 성공을 위해 비판에 귀를 닫아버린 것은 정치의 기본을 망각한 것이다. 개혁의 효과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동원되는 사람들은 아첨꾼이나 소인배가 많을 수밖에 없으며 이는 왕안석 개혁의 결정적 패착이었다.
개혁의 성패는 역시 사람에게 달려 있다. 개혁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추동하는 힘의 문제이며 힘은 사람에게서 나오기 때문이다. 왕안석은 깨끗하고 지성이 넘치는 군자였다. 그러나 그의 개혁이 '나만 옳다'는 고집에서 나온 것이어서 동지를 잃고 말았다. 그 자리를 소인배들이 차지했다. 심지어 왕안석의 동생 왕안국은 형이 집에서 여혜경(呂惠卿)과 밀담을 나누자 창밖에서 시끄럽게 퉁소를 불어대며 얘기를 방해했다. 왕안석이 "그 문란한 정나라 음악 좀 그치는 게 어떠냐?"라고 나무라자 동생은 "이 아첨꾼을 좀 멀리하시는 게 어떻소?"라고 응수했다. 개혁의 성공은 소인배를 멀리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개혁은 사람다운 세상을 만들려는 의지가 바탕이 되어야 하며 개혁가의 백성에 대한 사랑이 전제되어야 한다. 개혁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을 매국노나 반동으로 몰아붙이는 태도는 백성을 아끼는 개혁가라고 볼 수 없다. 개혁은 성공이든 실패든 책임이 뒤따른다. 수많은 민중들의 운명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개혁이 가져올 이익만 나열하지 말고 그것이 가져올 폐단도 얘기해야 한다. 그리하여 국민들의 광범한 동의를 구해야 한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국민에 대한 절절한 사랑에서 나온 것임을 설득해야 한다. '천재지변도 두려워 않고 조상도 본받지 않고 사람들의 말도 동정하지 않은 채' 자신의 주장만을 무조건 밀어붙여 아들까지 죽게 만든 왕안석 스타일의 개혁은 반드시 후회를 부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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