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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한 나라의 미래를 좌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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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한 나라의 미래를 좌우한다

[생협평론] 마을공화국 '여민동락공동체'

1. 여민동락공동체

농촌의 현실은 암울하다. 수입 개방의 파고와 해마다 널뛰기하는 농축산물 가격 등은 농민들을 절망케 한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농촌공동체' 운동이 태동하기도 했다. 하지만 상당수가 실패로 돌아갔다. 지역민과 호흡하지 못하는 공동체의 폐쇄성이 큰 원인이었다. 전남 영광군 묘량면의 '여민동락(與民同樂)공동체'가 지역사회와 주민 중심의 자주, 자립, 자치의 마을공동체를 목표로 삼은 이유다.여민동락공동체는 작고 가난한 비영리단체다. 소박한 노인복지시설을 운영하면서 농촌 어르신들의 행복한 노후를 위해 동행하고 있다. 폐교 위기의 시골 학교를 살리려 애쓰면서 마을기업과 협동조합을 설립하는 등 농촌의 교육과 문화, 복지와 경제의 부흥을 위해 힘쓰는 일터 공동체다. 특히 지역 주민과 함께 행복을 나누는 '복지 너머의 복지'를 꿈꾼다. 농민들과 더불어 농사를 짓고 밥을 먹으며 작은 시골 학교에 아이를 보내는 것을 원칙으로 농촌의 삶터를 새롭게 살리는 지역 일체형 공동체를 지향한다.

2. '할매손 모싯잎송편 공장'부터 '동락점빵'까지

2009년 '여민동락 할매손 모싯잎송편 공장'을 설립했다. 마을 어르신 13분이 참여해 떡을 만들었고, 40여 분은 작목반을 꾸려 모싯잎을 생산했다. 지역이 쌀 중심이다 보니 일자리가 거의 없었다. 모싯잎송편을 지역 특산품으로 만들려는 움직임이 있어서 모싯잎 재배를 고민했다. 지천으로 모싯잎이 널려 있었고, 재배도 비교적 쉬웠다. 농협에서 대출받아 모싯잎송편 공장을 세웠는데, 입소문이 나면서 점차 판로가 확대됐다. 처음에는 여민동락 후원자를 대상으로 판매했지만, 쇼핑몰을 만들고 지역 축제에 참가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여 불특정 고객을 확보했다. 현재 3억 원 규모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무엇보다 몸이 허락하는 만큼의 노동으로 어르신들의 사회적 관계가 복원됐고, 삶이 풍성해졌다.

마을가게도 만들었다. 사람과 사랑을 잇는 마을가게 '동락점빵'이다. 묘량면은 낙후되어 있어 구멍가게도 없었다. 구멍가게는 주민들의 염원이었다. 먼저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 등 '구매 난민'을 위해 탑차를 이용해 이동식으로 운영하기로 했다. 사회서비스형 유통사업단을 만든 셈이다. 다양한 생필품을 공급하는데 지역 주민들이 구매하고 수익은 다시 지역에 환원하는 구조다. 2014년 동락점빵을 사회적협동조합으로 전환했다. 전남 지역 1호 사회적협동조합이다. 지역 주민들이 이사진으로 참여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경제든 복지든 지역 주민이 참여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는 여민동락의 철학이 담겨 있다. 동락점빵 이동장터는 여민동락공동체 '마을살이의 꽃'이다. 1톤(t) 트럭에 생필품을 싣고 차량 방송을 하며 마을과 들녘을 돌아다닌다. 매주 장터에서 만난 주민들이 300여 명 정도다. 그만큼 사연도 많고 눈물도 깊다.

한 어르신은 소화가 안 된다며 1.5리터(ℓ)짜리 사이다 한 병을 달라신다. 집까지 가져다 드리며 "자꾸 소화가 안 되시면, 사이다 대신 '약'을 드셔야 헌디" 하고 당부까지 하고 나온다. 일주일 뒤 다시 만난 어르신, 다짜고짜 집으로 끌고 가신다. "아니 당최 안 된당께. 한번 봐 주소잉." 그때까지도 텔레비전 리모컨이 안 된다든가, 가전 도구가 안 되나보다 했다. 그런데 아뿔싸! 어르신께서 내민 것은 지난주에 사셨던 그 사이다였다. 사이다 뚜껑을 못 열어서 아직까지 못 드셨다는 말씀. 며칠 전에는 망고주스를 사셨다. 이번에는 바로 뚜껑을 딴 다음 다시 잠가 드렸다. "어르신! 망고주스 제가 따놨으니까, 이렇게 흔들어서 따라 드셔요." 이렇게 산다. 동락점빵은 단순한 이동장터가 아니다. 협동조합 경제사업처럼 보이지만, 집집이 주민들의 살림을 살피고 안부를 확인하는 농촌 복지의 과정이기도 하다. 어르신들의 마지막 삶과 동행하며 우애의 역사를 써나가고 있다. 평생을 농부로 살다가 이제 가장 작고 힘없고 가난한 생의 끝에 와 있는 분들이다. 충만한 삶을 기대할 순 없다 해도, 생의 끝자락에 외롭지 않게 기댈 어깨 정도는 옆에 있어야 마땅하다.

▲ '여민동락공동체 10년 10장면' 카드 뉴스 중. ⓒ여민동락공동체 페이스북

3. 협동조합과 농민 그리고 '공동방아'

지난해 수매가 폭락에 대한 대책회의 때 있었던 일이다. "부모가 물려주신 땅으로는 네 명 식구 입에 풀칠도 하기 어려웠어라우. 농사 양을 늘려야 살 것 같아서 땅 사고 임대하고 인자 논농사 120마지기요. 사람이 없응께 기계 사고 창고 짓고 하다가 도시에서 번 돈 다 바닥났지라우. 7년 지나 남은 건 빚뿐인디 쌀값마저 이라고 똥값잉께 앞이 캄캄하당께요." 농사만큼 보람된 일이 없다며, 30년 가까운 도시 생활을 접고 귀향 7년 차인 이장님의 하소연이다. 결국 도시녀인 아내가 농사 외 다른 일로 생계를 돕는단다. 더불어 행복한 농촌이 오기는 올까? 농촌에서 농사로 밥걱정 않고 사는 게 가능하기나 할까?

그래서다. 2015년부터 사회적협동조합 '더불어 삶'을 만들고 본격적으로 농민 조합원들이 주인이 되어 쌀 수매부터 자체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몇 년 전부터 '공동방아'라는 이름으로 마을 농가의 쌀을 도시의 회원들에게 연결하고 있다. 쌀 주문을 받아 매월 적당한 날에 방아를 찧어서 택배로 공급하는 일이다. 공공기관 몇 곳이 쌀 구입에 참여하면서 공동방아 수량이 점차 느는 추세다. 나락 매입에 대한 협의와 결정은 '동락점빵' 사회적협동조합 이사님들의 몫이다. 대부분 이장님들의 이사로 계셔서 가격 결정이나 품질 보증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다. 생태주의니 자연주의 농법이니, 소농과 고령농도 더불어 잘 살 수 있는 농촌이니 하면서 안간힘을 써왔지만, 좋은 말만큼 현실은 호락호락하질 않다. 당장 농촌 현실에서 살아남기 위한 농민들의 전투가 가혹하리만치 처절한 탓이다.

협동조합 회의 도중 이장님 휴대전화가 울린다. 인근 마을에 사시는 고령 농민인데 쌀값 걱정, 판로 걱정에 한탄을 하시는 모양이다. "어르신 걱정하지 마쇼이잉. 내가 지금 어르신 꺼 3000원 더 쳐서 내 줄라고 이야기 중인께잉", "오매오매 고맙네야. 뭔 일이당가. 그럼 자네만 믿네잉" 하고 끊으신다. 대화가 짠하디짠하다.

4. 비닐하우스 '마을 보따리전'

'장암골 마을 보따리전'은 추수 끝나고 김장철 준비하는 딱 그사이 열린다. 절기로 보면 입동(立冬)과 소설(小雪) 사이다. 벌써 몇 해째 이어지고 있다. 서양식으로 치면 추수감사절이라 해야겠다. "형편이 그렁께 간단히 준비 하드라고잉." 처음엔 그러셨다. 허나 마을마다 분주하다. 간단히 준비해서 조촐하게 잔치를 열자는 소박함(?)은 늘 온데간데없다. 보태다 보면 그때마다 판이 커지고 만다. 새로 김치를 담가 떡국 한 그릇 나눠 먹자 했지만, 김치 담그는 일부터 예사롭지 않다.

며칠 전부터 부녀회장님 차 트렁크에 이집 저집 배추가 모인다. 흰 무도 보이고 빨간 무도 보인다. 누가 봐도 한 집 채소가 아니다. 이장님은 감도 한 포대 내놓으셨다. 재미난다. 하루 전 계란지단 부치고 가늘게 썰어서 담아놓았다. 파도 미리 송송 썰어놓으시고, 김 가루도 빼놓지 않고. 소고기도 삶아서 얇게 찢어놓았다. 떡국 고명용으로 모두 손색없다. '항꾸네' 모이려면 마을회관으로는 턱도 없다. 그간 품앗이학교에서 그린 그림도 전시하고 광주에서 초청한 공연팀의 전통춤과 판소리 공연도 봐야 한다. 밖은 추워서 엄두도 못 낸다. 그렇다고 그럴싸한 실내 공간도 없다. 그래서 택한 게 비닐하우스다. 안성맞춤이다. 탁월했다. 늘 보던 곳이라 만만하고, 난방기 없어도 따뜻하다. 비닐하우스는 농부들에게 안방만큼이나 소중한 또 하나의 집이다. 다용도 전천후 공간 말이다.

마을보따리 문화난장 행사로 곡식을 말리고 보관하는 농사 전용 공간이 이제 미술과 음악이 공존하는 공연장으로 탈바꿈했다. 손을 뻗어보니 춤사위를 방해하지 않을 만큼 공간도 제격이다. 품앗이학교 미술시간에 그린 그림도 걸고, 삐뚤빼뚤 쓴 보따리전 축하 글도 걸었다. 한글 실력이 일취월장한 어르신의 시 한 편도 떡하니 전시했다. 여기저기 화기애애하다. "아따 월암댁 참 잘 그렸소잉", "우리 선상이 잘 갈쳐서 그라요" 하며 대거리도 주고받는다. 배우와 관객이 따로 없이 마당극으로 이어진 판소리 공연은 비닐하우스를 최고의 절정으로 뜨겁게 달구고 만다. 누가 봐도 재미난 전시관이자 미소 절로 나는 공연장이다.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불편하면 불편한 대로 이렇게 산다. 농촌 식으로 말이다. 화려하지 않아도 좋다. 세련되지 않아도 좋다. 그 안에 꾸밈없는 삶이 그대로 있으면 그만 아닌가.

5. 마을학교

여민동락공동체는 속칭 '복지 재벌(?)'이다. 마을 곳곳마다 문어발처럼 마을복지센터를 두고 있다. 23개나 되는 전남 영광군 묘량면 마을회관이 '여민동락 출장소'인 덕분이다. 마을마다 있는 마을회관을 마을복지문화센터로 만들어 마을공동체 안에서 주민들 스스로 우애와 협동의 복지를 이루도록 신명을 돋우는 일, 그게 바로 지역공동체가 여민동락에게 내린 마을복지 심부름이다. 그래서 시작한 게 일명 '장암산 마을학교'다. 여민동락 정면에 482미터(m)의 겸손한 높이로 병풍처럼 펼쳐진 산, 정상 일대가 평평해서 앞마당처럼 다정하고, 산세가 마치 물 위를 떠가는 조각배처럼 생겨 주변의 다른 산들과 뚜렷하게 구별되는 산, 그 산이 바로 마을의 정신과 기운을 대표하고 상징하는 장암산(場岩山)이다.

농한기 때 농촌마을은 마을회관이 시끌벅적하다. 주민들이 공동생활을 하기 때문이다. 한동안 병원에 다니시느라 못 나오시던 동네 어르신들까지 모두 모이니 마을잔치가 따로 없다. 건강 체크와 건강 체조를 한 뒤에는 민요교실까지 이어진다. 진도아리랑과 뱃노래를 배우고, 동네 누구누구 댁 자녀 이야기가 줄줄 이어진다. 특별한 차림이 아니라도, 김자반, 동치미, 그리고 김치 얹어서 함께 준비한 점심 밥상에 더불어 둘러앉으니, 더 이상 즐거울 수 없다.궁극적 목표는 따로 있다. 이런 공감과 연대의 과정을 거쳐 장암산 마을학교의 꿈은 단연 '마을공동체'의 복원과 완성이다. 이른바 마을회관을 실핏줄 거점으로 삼아 마을별 대동회를 활성화하는 것이다. 과거 촌락 사회의 운영을 논의하고 의결하는 자치적인 집회 조직인 대동회다. 과거 대동회에서는 마을의 임원 선출, 예산과 결산 보고, 공유재산의 관리 대책, 규칙 제정, 공부(公賦)의 대책, 임원의 보수 결정, 수리시설과 농로 등 마을 공동의 개발 대책 등을 비롯한 마을 생활 모든 영역에 있어서의 공동이익과 공동행위, 사회적 협동에 관한 문제가 토의, 결정되었다. 의사 진행은 촌락의 공식적 지도자인 이장이 주관하지만, 중요한 일은 유지로 불리는 비공식적인 지도자들과 미리 상의해서 대동회의 공론에 부치는 것이 보통이다.

이러한 대동회를 바탕으로 대동경제, 요새 표현으로 커뮤니티 비즈니스, 마을기업, 협동조합 등의 새로운 농촌 경제의 모델을 발굴, 발전시켜가야 하는 게 바람직하다. 마을학교는 공동체의 성원으로서 이러한 상호부조 정신을 강조하여 사회적 협동을 강화하는 조력자의 역할이자 농촌마을의 희망을 설계하는 공동체의 학습장이다. 돈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물질적 지원 못지않게 공동체적 인간관계 회복을 통한 삶의 질 향상을 중시한다. 장암산 마을학교는 여민동락공동체가 제시하는 공동체 중심, 마을 복지의 아주 작은 시도다.

6. 행복한 퇴임식

모싯잎송편을 만드는 어르신 중 가장 나이가 많은 분이 80세다. 73세부터 시작했으니, 횟수로 8년 차다. 가장 젊은 분은 69세, 대부분이 70대 중반이거나 그 이상이다. 농사는 이제 거의 짓지 않는다. 논농사야 동네 젊은 청년이 기계로 다 해주니, 쌀 사 먹는다 생각하고 기곗값을 주신다. 그런데 어르신들과 하는 일이 늘 그렇다. 시간이 지날수록 숙련 기능이 느는 게 아니라, 병원 갈 일이 는다. 자연스럽게 후임자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다들 아직은 정정하다고 하시지만, 본인들이 느끼기에도 생산량이 많이 떨어졌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다른 떡집에선 하루 만에 끝낼 일을 우리는 이틀이고 사흘이고 걸린다. 만드는 속도가 느려진 거다. 하루에 얼마나 생산하느냐가 제조단가를 결정짓는데, 굳이 이야기하자면 떡 공장 경영에 어려움이 생겼다는 얘기다. "우리는 할 만큼 했제잉. 벌써 7년이 넘었는디. 인자는 좀 젊은 것들(?)로 바꿀 때가 되얐어. 빠릿빠릿한 젊은 새댁(?)들로 말이여." 그래 봐야 60대다. 후임자를 찾는 일은 어르신들이 하시기로 했다. 그런데 후임자 구성이 오래 걸릴 것 같다. 아직은 본인들만 한 사람들이 없단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하하.

10년 차 세월이 가니 동락원 농장에서 일하시는 어르신들 중에도 퇴임(?)하실 분들이 여럿이다. 다들 여민동락 일자리가 생길 때부터 함께했던 어르신들이다. 평생 농사만 짓다 각종 만성질환을 안고 사시는 어르신들. 이젠 어쩔 수 없이 세대교체가 필요해졌다. "월급 받아서 손주헌티 봉투를 줬당께." "지난번 설 때도 세뱃돈을 10만 원이나 담았어라우." "어른 노릇 항께 좋습디다." 그런 말씀들이 떠나질 않는다. 달인들을 위한 '행복한 퇴임식'이란 뭘까? 그게 고민이다.

ⓒ여민동락공동체 페이스북

7. 여민동락공동체의 헌법

여민동락공동체는 처음부터 자립과 자치의 원칙과 취지에 맞게 설립됐고, 지금도 그 헌법대로 활동하고 있다. 첫째, 노동과 생산을 통하지 않은 모든 외부의 기부와 후원은 반드시 그 십 분의 일을 쪼개 더 가난하고 후미진 지역과 단체와 시설에 나누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둘째, 국가의 보조금과 인건비 지원을 받지 않되, 다만 국가의 보조금과 인건비는 재정적 독립과 경제적 자립을 완벽하게 이룬 뒤에 지렛대 역할을 할 수 있는 규모의 감당 가능한 자금만 받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셋째, 아이들을 도시로 유학 보내지 않는다. 마을공동체 활동의 기본은 지역에 '사는' 것이다. 지역사회의 작은 시골 학교에 아이들을 보내는 것을 원칙으로 주민들과 함께 교육과 문화를 살려가야 온전히 주민들과 어울릴 수 있다. 넷째, 농촌 주민들과 함께 농사를 짓고 밥을 먹으며 농부로 사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마을활동가 혹은 지역운동가라 자칭하면서 주민들 속에서 '헌신'만 하는 게 아니라, 이웃으로 함께 살며 주민들의 살림 모양을 닮아가고 농민들에게 여쭙고 의논하고 부탁하면서 온전히 마을구성원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처럼 여민동락은 농촌의 경제, 복지, 교육, 문화의 융합·복합적 접근과 사회적경제의 원칙에 의거해 마을공동체를 살려가고 있다. 여민동락 설립 과정에서도 돈 있는 사람은 돈을, 관계가 풍부한 사람은 관계를, 행정력이 있는 사람은 행정력을 출자하면서 시작했다. 여민동락공동체의 가장 큰 장점은 바로 구성원 간의 절대적인 '신뢰'이자 끊임없는 '학습'이다. 여러 난관도 있고, 일탈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래된 관계의 축적을 통한 신뢰의 확인 없이 공동체는 성공할 수 없다. 지속 가능한 신뢰의 확장은 끊임없는 학습에 기반하지 않고는 오래갈 수 없다. 여민동락공동체는 '월요학당'을 통해 학습하고 성찰하는 걸 게을리하지 않는다. 공동체는 늘 갈등과 반목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평범한 살림살이지만, 그것을 어떻게 조절 통제하고 신뢰로 승화 발전시킬 것인지에 대한 학습과 성찰의 시스템을 정교하게 만드는 것이 핵심이다.

여민동락공동체는 지금 '동락점빵', '할매손송편', '행복일자리 영농협동조합'을 운영한다. '노인주간보호센터'나 '학교살리기' 같은 복지와 교육활동 외에도 다양한 협동조합 유형의 사회적경제를 실천해간다. 협동조합은 한마디로 동업이다. 동업은 실패하기 마련이다. 규모가 크고 사람이 늘어갈수록 그 실패의 가능성은 그만큼 더 커진다. 그래서다. 여민동락이 만드는 협동조합은 지극히 가난한 협동조합이다. 작고 소박하게, 마을에서 사는 주민들이 그 마을에 거점을 두고 만들어가는 구조다. 사람 중심, 마을 중심이라고 해야겠다. 큰돈을 벌 수는 없다. 그러나 큰 위험 없이 큰 행복을 추구하는 걸 목표로 한다. 행여 수익이 생기면 마을기금 혹은 지역사회 공유자금으로 축적한다. 뜻이 좋아야 그 과정이나 결과에 따라 분열하지 않고 다시 시작할 수 있다. 당장의 성과보다 오래도록 길게 궁리하고 신뢰를 축적하는 관계망을 우선시한다. 그래야 온전히 사회적경제 혹은 협동조합이 '좋은 사람들과 좋은 뜻으로 좋은 일을 할 수 있다'는 자부심으로 충만하게 된다. 그러면 무너지지 않는 기업이 된다. '사업'이 아니라 '살림'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좋은 뜻만 있고 '경영 능력'이 없으면 안 된다. 영리기업 이상의 수고와 노동이 필요하고, 부단히 제도와 정책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전문가들과 상의하는 부지런함을 보여야 한다. 워크숍이든 강연회든 아니면 관련 저서와 자료·논문을 접하고, 선진지 견학과 선구자들과 자주 어울려야 가능한 일이다. 그렇게 공부와 경험과 신뢰, 나아가 마을 속에서의 관계가 깊어지고 쌓이다 보면, 새로운 상상력을 통해 또 다른 일을 추진할 수 있는 선순환이 가능해진다. 그것이 바로 협동의 힘이고 협동조합의 긍정성이라고 생각한다.

8. 지방정부는 무엇을 할 것인가

첫째, 공동체 생태계에 대한 '관점과 인식'의 제고다. 현장 주체는 분명 민간이다. 민간의 결사로 공동체 문제를 해결하려는 자율적인 운동이 중요하다. 그래서 민간의 참여로 이뤄가는 공공성의 확장 관점에서 부족한 부분을 지방정부가 지원하는 방향이 옳다. 민간의 자발적이고 자율적인 활동의 바탕이 없이 지방정부의 정책과 제도에 의한 공동체 활성화는 불가능하다. 오히려 지금까지 일부 지방정부가 실적과 과속에 의해 공동체 생태계를 교란시킨 측면도 있는 바, 민간을 행정 행위의 하위 체제로 인식하는 편파적 관점을 개선하는 게 우선돼야 한다. 이는 지방정부가 자원을 가지고 있고, 그 자원을 배분하고 인력 배치를 통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점에서 늘 경계해야 할 대목이다. 지방정부의 공동체에 대한 정책적 지원은 민간의 공익적 사회적경제 활동을 거들어주고, 관행에 의한 저해 요인을 제거해주는 일이 기본이 되어야 한다.

둘째, 작고 강한 모범 사례를 만들어 사회적으로 확산하는 일이 중요하다. 기초지자체는 현장형 모범 사례를 만들어내고, 이를 광역지자체가 사회적으로 확산하는 점진적 단계를 거치는 게 맞다. 광주 광산구는 복지관 어르신들이 중심이 된 노인협동조합이 있고, 청소 환경노동자들이 주축이 된 청소협동조합이 있는데, 이를 모델로 전국적 영향력을 갖는 튼실한 사회적경제 생태계를 구축하고 마을 속에서 협동조합과 공동체에 대한 인식을 널리 확산하는 기회를 만들기도 했다.

셋째, 민관(民官) 협력과 학습 조직의 구축이다. 교육의 질은 교사의 질을 넘을 수 없다 했듯이 사회적경제의 수준은 그 부서의 수준을 뛰어넘을 수 없다. 공무원들이 사회적경제의 사회적 필요에 대한 신념이 있고, 그 분야에 탁월한 전문적 역량을 갖춰야만 정책과 제도의 지원에 있어 다양한 민원 대응력이 생길 수 있다는 건 상식에 해당한다. 사회적경제와 마을공동체 전문 작은도서관을 만들고, 사회적경제 행정 동아리도 만들어서 두루 탐색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민간의 학습조직도 마찬가지다. 학습 없이 진화 없고, 기록 없이 축적 없다. 행정은 민간의 학습 조직을 지원하고, 민관이 함께 공부해가면서 지역 특성과 환경을 분석하고, 장차 중기 지역 단위 사회적경제 종합 계획을 수립할 수 있어야 한다.

9. 우리의 이상은 마을공화국

▲ <마을이 세계를 구한다>(마하트라 간디 지음, 김태언 옮김, 녹색평론사 펴냄). ⓒ녹색평론사
마하트마 간디는 <마을이 세계를 구한다>(김태언 옮김, 녹색평론사 펴냄)라는 책에서 "인도를 살리기 위해선 70만 개의 마을공화국이 필요하다"라고 했다. 마을을 살려야 나라가 산다는 수준이 아니라, 마을이 한 나라의 미래를 좌우하는 현장이라는 뜻이다. 나눔과 배려를 통해 복지와 마을이 만나고 공동체 복지와 공동체 문화, 나아가 공동체 경제와 교육이 이어지는 '마을공화국'의 완성, 그것은 지금까지 제대로 시도해본 적이 없는 복지와 자치의 새로운 접근이자 집단적 지향이다. 마을 안에서 자립과 자치 그리고 직접민주주의의 싹을 틔우는 마을공화국이 우리가 나아가야 할 '공동체 복지'의 미래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사람보다는 물질이 최상의 가치로 대접받고,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은 줄고, 이웃과 나누는 우애와 협동의 여유는 찾을 수 없는 위험사회에 처해 있다. 노동은 더욱 불안정해졌고, 생태환경의 위기는 보다 심화됐으며, 살림의 격차는 극도로 벌어졌다. 오직 '잘살아 보세!'를 외치며 맹렬하게 달리면서 개발과 성장에 몰두하는 동안 여럿이 함께 잘 사는 방법, 공동체 정신은 점점 잊어버리고 말았다는 얘기다.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지금 다들 행복한가? 우리 이웃들은 안녕한가? 우리 사회는 건강한가?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많은 이들이 각자의 분야에서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 오래도록 궁리하고 실천해오고 있다. 사람이 자기 삶의 주인으로 서게 하고, 이웃과 더불어 사는 공생의 지역사회를 만드는 데 지혜를 모으고 있다. 남녀노소 빈부 강약이 제 마당 제 삶터에서 누구라도 차별당하지 않고 서로 돕고 나누는 마을과 일터를 만드는 일로 어울리고 있다. '아이 한 명을 키우는 데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철학으로 보육과 교육을 바라보고, '마을에서 어르신 한 명을 잃는 것은 도서관 하나가 없어지는 것과 같다'는 소신으로 복지를 접근하는 이들도 늘고 있다. 단순히 골목길만 고치는 게 아니라 쓰레기, 범죄, 거짓은 사라지고, 사라진 마을잔치와 웃음과 놀이를 살려가며 변화된 마을과 지역, 그리고 그 바탕을 튼튼히 하는 방향에서 문화와 환경에 관심을 두는 추세다. 그 중심에 주민을 세우고 마을 리더를 키워가며 풀뿌리 자치의 자연력과 사회적경제의 생태계를 조성하여 사람, 삶, 살림의 근본을 제대로 뿌리내리는 일을 우선시하는 지역이 점차 많아지고 있다는 점도 희망적이다. 이제 다양한 범주에서 활동해온 개별들의 실천력을 모아 보다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사회적 확장'을 도모할 필요가 있다. 협동과 연대의 살림살이, 즉 '사회적 협동조합' 등의 주민 조직을 통해 주민들과 함께 사람이 사람답고 사회가 사회다운 공동체를 만드는 데 보다 광범위한 힘을 모아야 가능한 일이다.

우선 민(民)과 관(官)이 협력하여 사람과 사회의 변화를 일궈갈 태세를 갖추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미 여러 지자체에서 선구적인 모범을 착실하게 만들어가고 있다. 바람직하고 다행스럽다. 한 축으로는 협동조합을 통해 우리가 사는 마을의 자연과 인적, 문화적 자원들을 조사하고 체계화해 이를 바탕으로 마을을 위해 일할 사람을 키우고 도와야 한다. 마을 주민들이 스스로 삶터와 일터의 주인공이 될 수 있도록 사회적 가치를 중심에 둔 공익적 활동을 지원해야 한다는 얘기다. 또 다른 한 축으로는 마을 안팎에서 주민과 주민을 잇고, 시민사회단체, 기업, 자치단체를 연결하면서 여러 생각과 자원들이 어울릴 수 있는 나눔과 연대의 공동체, 나아가 자립과 협동의 사회적경제 생태계를 조성하는 일을 지속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주민들 속에 본래부터 존재하던 '더 깊은 선의 뿌리'를 낙관하고, 좋은 사람과 좋은 체제의 선순환을 이뤄가려는 모양새를 갖춰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행복해지고 싶다. 우리는 더불어 살고 싶다. 우리에겐 옹기종기 마을을 이뤄 온 동네가 너나없이 잔치를 열고 마음을 여는 소박한 꿈이 있다. 자치를 통해 복지를 완성하고 협동조합과 마을민주주의를 통해 사람의 사람다움을 키워가고 싶다. 가족·세대 간에 할 얘기가 많아지고, 이웃의 삶이 궁금하고, 우리 아이들을 같이 키우는 넉넉한 사람의 숲, 마을의 숲을 이루고 싶다. 그 마을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가까이에 있다. 모이고 수다 떨고 꿈을 꾸는 사람들, 세상을 바꾸기 위해 '바짝 엎드려' 바닥에서 마을을 살려가고 있는 이들 안에 이미 그 꿈은 현실로 다가와 있다. 그것이 바로 '마을공화국'이다. 그래서 바로 '마을공화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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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지 <생협평론>은 (재)아이쿱협동조합연구소가 펴내는, 협동조합을 다루는 본격적인 전문잡지로서 협동경제·나눔·평화에 대한 의견들이 교환되는 공간입니다. 정보지이자 실천적 교육서로서 협동조합 활동가뿐 아니라 협동조합에 관심 있는 모든 이들에게 유용한 정보를 전달하고, 협동조합을 둘러싼 다양한 사회·경제·문화적 이슈를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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