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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0년 보수의 벽이 깨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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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0년 보수의 벽이 깨지다

[장현근의 중국 사상 오디세이] "공부는 깨침"이라 말한 왕양명

세상에 변하지 않는 진리가 있을까? 종교인들에게 이 질문은 터무니없이 들릴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없고 해본 적도 없었을 테니. 그래서 정치를 '변화하는 생물'이라 여기는 정치인이 종교를 믿는다는 말은 믿기 어려운 일이다. 진리와 변화의 실상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학자가 종교를 믿는다는 말도 믿을 수 없다. 그런데 놀랍게도 종교인이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들은 불변의 절대 진리가 있다고 생각하며 일생을 살아간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모든 것은 변한다는 사실을 생각할 수 없게 만드는 수구의 벽에 갇혀 사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세상이 바뀜을 긍정하는 순간 자신의 인생이 무너진다고 생각하는 두려움 때문이다. 정치란 이 두려움을 이용하여 수구의 벽을 세움으로써 지배를 정당화하는 질서체계가 아닌가.

진리는 마음 밖에 있지 않다

왕수인(王守仁, 1472-1529)의 고민은 깊어갔다. 주자는 사람의 본성(性)이 곧 하늘의 이치(理)이니 삼라만상은 모두 절대 진리인 천리를 믿고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주자학이 관학이 된 뒤 정치인이건 학자이건 격물치지(格物致知) 공부를 통해 천리를 구현하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생각해선 안 되었다. 바뀌는 걸 두려워하면서 그저 과거시험 공부를 하며 살 뿐이었다. 왕수인도 '사물을 파고들어 앎에 이르기' 위하여 사흘 밤 사흘 낮을 쉬지 않고 대나무를 쪼개보며 이치를 알려고 매달렸다.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결국 알 수 없는 고통으로 큰 병만 얻었다.

과거시험에 합격하지 못함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낙방을 걱정하는 것이 오히려 부끄럽다는 왕수인의 초기 벼슬길은 쉽지 않았다. 중국 역사상 가장 부패했던 환관 유근에게 죽임을 당할 고비를 몇 번 넘기고 간신히 귀주성 용장역승(龍場驛丞)으로 좌천되어 말단 공무원 생활을 하게 되었다. 양명동(陽明洞)에서 공부와 묵상에 전념하던 양명은 1508년 서른여섯 살에 큰 깨침을 얻었다. '내 마음이 곧 진리다.'

양명은 문명서원 등 여러 교육기관을 설립하고 공부의 깊이를 더해갔다. 절대 진리가 마음 밖에 있다고 생각했던 주자는 학생들의 노트에 잘못 필기된 부분을 일일이 고쳐주었으나 양명은 아예 노트를 가져오지 못하게 했다. 공부는 치양지(致良知), 즉 내 마음 속의 양지(良知)를 찾아 넓혀가는 것이지 필기를 통해 외우거나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는 이유에서다. 학생들은 기숙사로 돌아가 부지런히 선생님의 말을 베끼면서 되새겼다. 그것이 <전습록(傳習錄)>이다. 양명의 책들은 이런 선생의 말씀, 편지, 비문, 시, 상소문 등을 모은 것이다.

도를 깨친 용장(龍場)에서 멀지 않은 구이양(貴陽) 남쪽엔 십리하탄(十里河灘) 아름다운 경관을 굽어보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공학당(孔學堂)이 서있다. 정치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석 자 평평한 땅도 없다는 이 산악지역에 거대한 유학 교육기지가 설립된 것은 왕양명과 관련이 있다. 나는 화려한 건물군, 공자의 입상과 양명의 좌상을 보면서 공산주의와 공자의 결합이란 기묘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리고 6백 년 전 양명의 고민이 아직도 해결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어쩌면 수구의 벽은 영원히 깨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절망감도 일었다.

▲ 구이양의 공학당 전경. ⓒ장현근

열린사회와 모든 존재의 평등, 그리고 내 마음의 자유를 감싸주는 세상이 열리지 않는 한 체제와 관념의 변화가 인생을 망가뜨릴 것이라는 두려움의 벽에 갇힌 사람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집단 스크럼을 짜고 변화를 갈망하는 사람들을 나쁘다고 공격할 것이다.


양명은 구이양에서 '마음 밖에 사물도 없고, 마음 밖에 진리도 없음'을 깨쳤으나 그 과정은 녹녹치 않았다. 공맹의 유학을 뿌리로 하고 정주 성리학을 공부했으며 도교 서적도 깊이 읽었고 특히 불교에 대한 성취는 대단하였다. 결국 육상산의 영향을 크게 받은 셈이 되었으나 '마음의 실체', 즉 '사유하는 내 존재 자체'를 깨친 그에게 특정한 스승의 계보를 엮기는 어렵다. 그의 제자와 제자의 제자들은 선생이 고심참담하게 가르친 학귀자득(學貴自得), 즉 "공부는 스스로 깨치는 것"임을 자각하고 열심히 공부하고 또 그렇게 얻은 지식을 실천에 옮기려 노력했다. 수제자 왕간(王艮)은 미천한 신분이었다. 그는 백성들이 일용하는 것이 도라고 주장하며 스승보다 더 멀리 나갔다. 그가 연 태주(泰州) 학파는 중국역사상 최초로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의지를 강조하기에 이르렀다. 이탁오는 남녀평등을 주장할 정도였다.

마음속의 적을 깨뜨려라

양명은 앎을 앞세우는 기존 유학의 주장을 깨고 지행합일을 강조했다. 제자들도 열성적으로 스승의 주장에 동참했다. 천 오백년 동안 보수의 벽을 세우고 사람들의 정신을 통제하던 유교 이데올로기는 위기에 처했다. '내 마음에 옳지 않다고 생각되면 그것이 공자의 말이라도 옳은 것이 아니다.' 공자의 말을 절대 진리로 여기던 유교 사회에서 이 말은 파천황이다.

공자의 말이 틀릴 수도 있다? 양명 자신은 공자를 부정하는 데까지 나가지 않았으나 후예들은 전통적 지배-복종의 구조를 흐트러뜨리기에 충분한 주장을 했다. 부패와 타락으로 흔들리는 명나라에서 양명좌파의 주장은 불길처럼 번져갔다. 사상의 해방이 올 것인가? 그리고 세상은 바뀔 것인가? 아니었다. 유교, 불교, 도교를 융합한 문예부흥사조는 시대를 너무 앞서갔고 기존 관념을 수호하려는 거대한 스크럼에 갇혀 좌절하고 말았다.

제자들이 인간의 내면을 스스로 깨쳐가면서 한걸음 더 멀리 간 것은 양명학으로 볼 때 당연한 추세였겠으나 양명이 예상한 바는 아니었다. 양명은 제자들을 거느리고 거대한 사상학파를 구성하여 사회개혁에 앞장 설 시간이 없는 삶을 보냈다. 내 마음의 자유를 설파하면서도 그의 삶은 자유롭지 못했다. 명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했으며, 나라를 위해 일생을 바쁘고 힘들게 살았다. 그의 후반기 삶은 수많은 반란, 즉 '산중의 적을 깨뜨리는' 데 소모되었다. 위추위(余秋雨)의 얘기대로 문과 무에 능한 사람은 많으나 문무에 정통해 극한까지 능력을 발휘한 사람은 왕양명뿐일지도 모른다. 젊어서부터 활쏘기와 말타기에 능했으며 병법에도 달통해 반란 진압의 공으로 신건후(新建侯), 즉 제후의 반열에 올랐고 학문의 성취를 인정받아 문성공(文成公)의 시호를 받았으니 공맹(孔孟)이나 주륙(朱陸)이 이루지 못한 공적을 당대에 달성한 셈이다.

▲ 왕양명을 기리기 위해 구이양에 세워진 양명사. ⓒ장현근

나는 양명의 글을 읽고 그를 생각할 때마다 바쁜 관료생활을 하면서도 충분히 공부했다는 점에 감동하고 '마음의 적을 깨뜨리며' 살아간 참된 용기에 감동한다. 황종희는 <명유학안(明儒學案)>에서 양명과 그의 제자들 대부분이 "맨 손으로 용이나 뱀과 싸울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마음의 적을 부숴가며 도덕인격의 평등이란 새로운 생각에 도달했으나 군주전제를 부정하는 정치적 평등까지 가지는 못했다. 정치적 평등이 꼭 도덕사회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모든 사회구성원이 천리가 보존된 자신만의 양지를 확충할 수 있게 된다면 산중의 적보다 더 무서운 마음의 적을 깨뜨릴 수 있을 것이다. 두려움에서 생기는 수구의 벽을 무너뜨리고 변화와 개혁에 동참하게 될 것이다.

변화에 대한 두려움은 사욕에서 비롯된다. 마음의 적은 사욕이다. 왕양명은 양지를 불러내 사욕을 없애고 내 마음에 순수한 천리만 존재하게 만드는 네 가지 극기공부를 제시한다. 첫째는 정좌하여 숨을 고르고 생각하는 것이요, 둘째는 성찰하여 사욕을 극복하는 것이요, 셋째는 아직 싹트기 전에 방지하고 싹이 나면 바로 없애는 것이요, 넷째는 생사를 전혀 염두에 두지 않는 것이다. 양명은 폐병으로 신음하면서도 마음의 적을 깨뜨리는 지행합일의 실천으로 난을 평정했다.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목의 배 위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하실 말씀이 없느냐는 제자들의 질문에 "이 마음이 빛나고 밝은데 무슨 말을 더 하랴!"라고 대답했다.

주자학을 지배 이데올로기로 선택한 조선에서 양명학은 금기였다. 유학은 많은 경우에 학문으로 살아나지 않고 정치로 살아난다. 장유는 <계곡만필(谿谷漫筆)>에서 중국에는 실심으로 학문하여 성취한 사람이 있는데 조선학자들은 생각이 옹졸하고 정주학만 소중히 여긴다면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인간의 본성도 이 마음이요, 감정도 이 마음이며, 육체도 이 마음이라. 생명도 이 마음이며, 천리도 이 마음이요, 인욕도 이 마음이다."

기이하다. 세상에 완전히 똑같은 사물은 하나도 없고 바뀌지 않는 존재는 하나도 없는데 왜 사람들은 불변의 진리가 있다는 생각을 고집하며 사는 걸까. 너무 오랫동안 주자학에 갇혔던 역사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해서일까. 마음의 적을 깨뜨리고 저 귀머거리들의 귀가 열리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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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현근

용인대학교 중국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중국 길림 대학교 문학원 및 한단 대학교 등의 겸임교수이다. 중국문화대학에서 '상군서' 연구로 석사 학위를, '순자'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유가 사상의 현대화, 자유-자본-민주에 대한 동양 사상적 대안 찾기에 몰두하고 있다. <중국 사상의 뿌리>, <맹자 : 이익에 반대한 경세가>, <순자 : 예의로 세상을 바로잡는다>, <성왕 : 동양 리더십의 원형>, <중국의 정치 사상 : 관념의 변천사> 외 다수의 저서와 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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