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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겨운 삶, 불길한 상상

[귀농통문] 채솟값 폭등에 기후변화…정부 대책은?

가을로 접어들면서 채솟값이 천정부지로 치솟는다. 아는 이는 김치를 담그려고 마트에 갔다가 배추 한 포기에 1만 원, 무 한 개에 5000원인 걸 보고 한참을 망설인 끝에 배추만 딱 한 포기 사 왔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시장에 나가보면 배추와 무뿐만 아니라 채소들 하나하나가 금값이다.

모든 게 장기간 지속된 폭염 탓이다. 가을 농사를 지으려고 종묘상에 들렀을 때 폭염이 휩쓸고 지나간 피해가 얼마나 심각한지 한 눈에 들어왔다. 여느 해 같으면 8월 초순만 되면 수십 종의 잎채소 모종들이 쏟아져 나오기 마련인데, 아는 종묘상을 죄 둘러봐도 모종이라곤 배추와 꽃상추 딱 두 가지뿐이었다. 연유를 물으니, 폭염에 모종이 녹아버리거나 꽃대를 올려버렸기 때문이란다. 한 마디로 모종 농사가 망했다는 이야기이다. 설사 어찌어찌 모종을 구해서 심는다 해도 날이 뜨거우면, 고온 장애로 농사를 망치기에 십상이다. 그러니 채솟값이 널뛰기를 할 수밖에.

그래도 서민들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채솟값이 제아무리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뛰어올라 봐야 친절한 정부가 때만 되면 발 벗고 나서서 수입농산물을 왕창 풀어서 가격을 잡아줄 테고, 그럼 다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 수입농산물이 어떤 경로와 과정을 거쳐서 우리의 식탁에 오르는지 알 필요는 없다. 농약에 절이든 제초제에 담그든 중요한 건 모양과 가격이니까.

그런데 예년과 똑같은 비용으로 김장만 할 수 있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일까? 해마다 우리 농장의 공동체 회원들은 시장의 채소가격이 널뛰기하건 말건 희비가 엇갈릴 일이 없다. 올해에도 8월 말과 9월 초에 농장에 모여서 김장 농사를 넉넉하게 지어놨다. 김치를 담글 때가 되면 소금과 젓갈만 사면 된다. 고추공동체를 만들어 고춧가루도 넉넉하게 빻아놓았고 생강도 알음알음 팔만큼 심어놓았다. 마늘과 양파도 봄에 고자리파리 피해를 봐 양이 넉넉하진 않지만 김장할 만큼은 쟁여두었다.

그런데도 우리의 맘은 썩 편치가 않다. 당장 큰돈을 들여서 모종 농사를 지었다가 날마다 한숨짓고 있을 모종 농가가 눈에 밟힌다. 어디 가서 하소연도 할 수 없는 처지도 문제이지만 내년 농사는 과연 어찌해야 할지 참으로 막막할 것이다. 기후변화를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농사에 평생을 바친 노인들조차 살다 살다 이런 날씨는 처음이라고 입을 모은다. 그러나 그 푸념이 벌써 몇 년째 해마다 되풀이되고 있다. 모르긴 몰라도 모종 농가들은 내년 농사 설계를 어떻게 해야 할지 눈앞이 캄캄할 것이다. 늘 되풀이되는 기후변화는 그렇다 쳐도 농사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농민들의 삶을 생각하면 마음이 더욱 무겁다.

도시인들은 채솟값이 오르면, 농민들이 큰돈을 만지는 줄 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채솟값이 폭등하면 농민들은 죽어난다. 채소 가격이 올라 목돈을 손에 만지는 건 유통을 주무르는 큰손들뿐이다. 시장에서 소비자들이 만 원에 배추를 살 때 농민들은 단돈 1000원에 넘긴다. 배추를 몇백 원에 넘길 때도 있으니, 그럼 이익을 본 것일까?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배추가 비싸지는 건 흉작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시쳇말로 '완판'하면 약간의 돈을 만져볼 수 있다. 하지만 완판의 꿈을 꾸기도 전에 정부가 나서서 수입농산물을 대량으로 풀어버린다. 그러면 농민들은 피눈물을 머금고 밭을 갈아엎을 수밖에 없다. 수확하는 그 순간 빚더미에 앉기 때문이다.

몇 해 전, 나는 괴산에서 절임배추 농사를 짓는 선배의 긴급 요청으로 품앗이를 간 적이 있다. 그해에는 전국 두루두루 배추 농사가 쫄딱 망해서 배추 한 포기에 2만 원까지 치솟았다. 선배가 농사를 짓는 마을에도 피해가 심각했다. 배추 농사의 달인인 선배의 밭을 제외하곤, 눈길 닿는 곳마다 비행접시 배추가 온 밭을 뒤덮고 있었다. 그러나 1만 평 배추 농사를 여봐란듯이 잘 키워낸 선배의 얼굴은 어둡기 짝이 없었다. 어려서부터 한 동네에서 나고 자란 마을 사람 몇 명이 자살했기 때문이다. 먹고 살아볼 요량으로 빚을 내어 배추 농사에 뛰어들었거나, 해마다 절임배추를 주문하던 단골에게 선주문을 받았다가 위약금을 물 돈이 없어 농약을 마시고 생을 마감한 이웃들 생각에, 선배는 무시로 눈물을 찍어냈다. 참혹했던 그때의 기억은 해마다 김장 농사를 지을 때마다 생생하게 되살아나서 마음을 짓누른다.

▲ 가을 김장배추를 수확하는 농민들. ⓒ연합뉴스

풍년을 맞아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다. 가격이 폭락하기 때문이다. 배추 한 포기를 2~300원에 넘긴다고 가정해보라. 농민들은 밭을 갈아엎을 수밖에 없다. 결국, 농민들은 흉년에도 울고 풍년에도 울어야 하는 기막힌 운명과 매년 맞닥뜨려야 하는 신세이다.

그런데도 언론은 연 매출 몇억 운운해가며 '귀농이 답'이라고 떠들어댄다. 그러나 언론이 들이대는 사례들은 하나같이 막대한 자금을 쏟아 부은 시설농이다. 그리고 연매출 몇억 원을 얘기하면서 그만한 규모의 농사를 지으려면 얼마나 큰 비용이 들어가는지는 일언반구도 없다.

내 주변에도 귀농을 택한 벗이 여럿 있다. 그 가운데 가장 잘 풀린 이는 여주에서 닭 농사를 하는 선배다. 선배는 10년 넘게 닭 농사에 심혈을 기울여왔다. 500마리에서 1000마리 안팎의 닭을 뒷산에 풀어놓고 키우는 선배는 사료를 만드느라 1년 열두 달 내내 뼈가 휜다. 단 하루도 쉴 날이 없다. 몸이 아파서 쉬면 당장 닭들이 굶어야 한다. 손수 만든 사료로 닭을 키우려면 1000마리가 한계라며 700마리 내외를 유지한다. 그러면서도 닭에 대해 끊임없이 공부하고 연구한다. 그 노력을 인정받아 '강(强)소농대회'에서 최우수상도 받았고, 전국 각지에서 견학도 온다. 그렇게 해서 선배는 귀농 10년 만에 월 100만 원 정도를 번다. 물론 그 100만 원에는 형수님이 손수 담근 간장과 고추장과 된장과 청국장을 판 돈이 들어 있다.

또 다른 선배는 원주에서 자연농법을 목표로 10년 가까이 기계 힘을 빌리지 않고 비닐과 화학비료와 농약도 쓰지 않으면서 2000평 규모의 밭농사를 짓고 있다. 농기구만으로 밭을 일구다 보니 봄만 되면 3개월 내내 땅을 판다. 주요 생산물은 감자와 옥수수와 고춧가루와 절임배추이다. 그런데도 생활비가 나오지 않아서 짬만 되면 일당벌이를 뛴다.

충주에서 20년 가까이 3000평 규모의 과수원에서 복숭아와 사과 농사를 지어온 친구는 지금도 지조 있게 빚을 불리고 있다. 나는 지금까지도 친구의 과수원에서 나온 복숭아와 사과보다 맛있는 과일을 먹어본 적이 없다. 그 맛에 반한 단골들이 해마다 늘어나서 친구는 수확한 과일 전량을 직거래로 내보낸다. 덕분에 고생한 만큼 제값을 받는다. 그런데도 여전히 해맑은 얼굴로 빚을 불리고 있다.

전국 어디를 가나 대부분의 농민은 엇비슷한 처지로 살아가고 있다. 올해 우리 농장에서는 나를 포함해서 네 명이 고추공동체를 꾸려서 200주의 고추 농사를 지었는데, 농업용 건조기를 장만한 덕분에 말리는 수고를 덜었다. 그런데도 공동체 구성원들은 고추 농사가 너무 힘들다고 혀를 내두르며 내년부터 고춧가루는 그냥 사 먹겠다고 선언해버렸다. 그러면서 고춧가루는 절대로 비싼 게 아니라는 말을 힘주어 덧붙였다.

잠깐의 밭일도 이토록 힘든데, 전업농의 수고는 일반인의 상상을 초월한다. 육체노동을 두루 섭렵한 벗 하나는 "가장 힘든 노동은 누가 뭐래도 농사"라며 농민이 존경스럽다고 했다. 그러면 뭐하는가! 농민들은 평생 사는 게 숨 가쁘다.

귀농 인구가 늘고 있는 건 언론에서 떠벌리는 대박 행진 때문이 아니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삶에 환멸감과 절망감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수의 귀농인은 더욱 암울한 농촌 현실에 무너지고 다시 도시로 돌아간다.

나는 붕괴해가는 농촌 현실이 나날이 두렵다. 고양시에서 300평 규모의 텃밭을 일구면서 해마다 기후변화를 몸으로 겪는데, 올해처럼 기후변화의 파고가 높으면 높을수록 그 두려움이 더욱 크고 깊어진다. 기상학자들은 가까운 미래에 반드시 식량 대란이 몰아닥친다고 입을 모은다. 텃밭에서 기후변화와 맞닥뜨릴 때마다 식량 대란의 예고편을 보는 기분이 드는 것은 혼자만의 착각일까? 일부 기상학자는 2030년대에 세계 인구의 40퍼센트가 굶어 죽게 될 것이라는 최악의 시나리오도 내놓는다.

그래서 우리 농장의 회원들은 이런저런 걱정을 함께 나누며, 채솟값이 널뛰기하는 현상을 예의 주시하게 된다. 농민의 삶이 무너지면 도시는 존재할 수 없으며 우리 아이들에게는 그 어떤 미래도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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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농통문

귀농통문은 1996년부터 발행되어 2017년 10월 현재 83호까지 발행된 전국귀농운동본부의 계간지입니다. 귀농과 생태적 삶을 위한 시대적 고민이 담긴 글, 귀농을 준비하고 이루어나가는 과정을 솔직하게 보여주는 귀농일기, 농사∙적정기술∙집짓기 등 농촌생활을 위해 익혀야 할 기술 등 귀농본부의 가치와 지향점이 고스란히 담긴 따뜻한 글모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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