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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장송곡 초래한 "배고파 못살겠다" 절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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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박정희 장송곡 초래한 "배고파 못살겠다" 절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74> 유신의 몰락, 다섯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세 번째 이야기 주제는 유신의 몰락이다.

유신 체제의 총체적 허구성이 고스란히 담긴 YH사건

프레시안 : 1979년 YH사건은 유신 체제의 몰락을 얘기할 때 빠지지 않고 거론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서중석 : 요즘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은 대부분 YH사건이 왜 그토록 중요한 사건, 큰 사건이라고 내가 얘기하는지 이해가 안 갈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 사람들은 김영삼이건 박정희건 기자들이건 학생들이건 '이건 굉장한 사건이다. 정말 큰 사건이다'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김영삼과 박정희의 극한 대립이 얼마간 완화되는 것 아니냐 하는 순간에 터진 대형 사건, 김영삼과 박정희의 관계를 더 이상 타협적으로 만들 수 없게 한 큰 사건이 바로 YH사건이다.

YH사건과 부마항쟁은 박정희 유신 체제를 파국으로 몰고 간 양대 사건이다. 둘 다 박정희 유신 경제 정책으로 말미암은 사건이라는 것이 공통점이다. 유신 체제가 결국 유신 경제로 인해 파국을 맞게 됐다는 걸 이 두 사건은 얘기해준다고 볼 수 있다.

YH사건은 단순한 노동자 관련 사건이 아니었다. 특정한 업체에서 일한 여성 노동자의 투쟁만 가리키는 게 아니라 한 체제의 성격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거대한 사건이었다. 사회의 여러 층에 엄청난 충격을 줬다는 점에서도 굉장한 사건이라고 얘기할 수 있다.

특히 학생들한테 준 영향이라는 건 대단했다. 1979년 10월 15일, 16일 부산대에서 나온 학생들의 선언문이 말해주듯이 이 사건은 학생들이 부마항쟁을 일으키는 하나의 중요한 계기였다. 그리고 학생들이 나중에 노학 연대를 하고 1980년대에 노동자와 함께 노동 운동을 거세게 펼쳐나가는 데에도 전태일 분신 사건과 함께 이 사건은 큰 추동력이 됐다.

1960~1970년대 경제 발전 또는 경제 성장의 주역이 어떻게 박정희 유신 체제에서 사회의 변방으로 소외되고 그들의 노동 운동과 인권 운동이 박정희 정권의 폭압에 짓밟혔는지를 극명히 보여준 것이 이 사건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유신 체제의 모순, 유신 체제의 총체적 허구성이 이 사건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러한 점에서 박정희 근대화 노선의 파탄, 박정희 경제 정책의 파탄을 극명하게 보여준 사건이기도 하다.

큰돈 빼돌린 사업주, 길바닥에 나앉게 된 YH 노동자들

ⓒ오월의봄
프레시안 : YH사건을 찬찬히 짚어봤으면 한다. YH무역, 어떤 회사였나.

서중석 : 먼저 이 사건에 대해 그 당시 신문에서도 그렇고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이 YH 여공 사건이라고 부르는데, 이 당시 또는 1980년대까지도 일반적으로 사용된 여공이라는 말이 과연 적합한 말인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일제 때 나온 <여공애사(女工哀史)>라는 책이 있다. 일본 여성 노동자들이 공장에서 가혹하게 당하던 실상을 잘 담아 일본인들은 물론 한국인들한테 많은 충격을 준 책이다. 그 <여공애사>의 여공이 50년 넘게 변함없이 사용된 것인데, 사실 이 말은 여성 노동자를 좀 깔본다고 할까 낮춰 보는 말로 사용됐다. 그렇기 때문에 YH 여공 사건이라는 그 당시 표현을 그대로 쓰기가 좀 역겨운 면이 있다. 그렇다고 YH 여성 노동자 사건이라고 매번 쓰면 너무 길어지는 느낌도 들고 해서, 여기서 나는 대개 YH사건이라고 표현하고자 한다. 어쨌건 YH 여공 사건이라는 말이 정확한 표현은 아니라는 점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YH 여성 노동자들의 신민당 농성 사건을 얘기하기 전에 YH무역에 대해 간단히 얘기하고 넘어가자. 한국에서 1960년대에서 1970년대까지 가발 기업이라는 건 수출 산업의 총아였다. 그렇게 된 데에는 1964년 중국이 핵 실험을 한 것이 하나의 계기가 됐다. 한국 가발이랑 중국 핵 실험이 도대체 무슨 상관이냐고 의문을 품는 사람들도 있을 것 같은데, 이렇게 된 데에는 당시 국제 관계가 작용했다. 중국이 핵 실험을 하면서 강대국으로 부상하자 미국은 중국 포위 정책 또는 봉쇄 정책을 훨씬 강화했다. 그러면서 중국 원산지로 돼 있는 쪽에 대해 제재를 가하게 된다. 그래서 중국제 원료를 사용해 미국 시장의 90퍼센트를 장악하고 있던 이탈리아 가발 산업이 몰락한다.

여기에 재빠르게 대응한 인물이 당시 뉴욕의 한국 무역관 부관장이던 장용호라는 사람이다. 이 사람은 1966년 왕십리에 노동자 10명이 일하는 작은 가발 공장을 차렸다. 장용호의 용(Yong) 자와 호(Ho) 자에서 한 글자씩 따서 YH무역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가발은 그야말로 잘 팔렸다. 1970년에는 노동자 숫자가 4000명을 넘어섰다. 노동자 10명으로 시작한 지 불과 4년 만에 그렇게 된 것이다. 국내 최대 가발 업체가 됐고, 기업들의 수출 순위에서 15위를 기록했다. 그래서 1970년 수출의 날에 장용호는 철탑산업훈장도 받았다. 이때 같이 훈장을 받은 사람이 대우 김우중이다. 이 시기에 장용호와 YH무역은 그 정도로 잘나갔다. 그런데 그렇게 되니까 여기저기서 가발 공장을 많이 세웠다. 서로 과당 경쟁을 하면서 가격이 엄청나게 떨어졌고, 그러면서 사양 산업이 돼버렸다.

프레시안 : 노조는 언제 결성돼 어떤 활동을 했나.

서중석 : 그런 속에서 1975년 5월 YH무역에 노조가 설립됐다. 그때는 노동자 숫자가 2000명이 채 안 됐다고 하는데, 그중 900명 정도가 노조에 들어왔다. 노조의 첫 활동은 성과를 거뒀다. 뭐냐 하면 상여금 문제였다. 회사는 그때까지 관리직 사원들한테는 상여금을 100퍼센트 지급했지만 생산직한테는 한 푼도 주지 않았다. 노조가 그것에 맞서 싸워서 회사 창립 이래 처음으로 50퍼센트 상여금을 쟁취할 수 있었다.

YH무역은 노동자 숫자를 계속 팍팍 줄여버렸다. 1978년에는 550명으로 줄였다. 이렇게 했는데도 YH무역은 1977년에 여전히 100대 기업 안에 들어갔다. 어떻게 해서 이게 가능했느냐. 본공장의 경우 휴업 같은 걸 통해 노동자들을 대거 나가게 하는 등의 방식으로 인원을 계속 줄이면서 하청 공장으로 작업 물량을 빼돌린 것이다. 우리나라 기업들이 항상 하던 수법, '갑질'을 여기서도 한 것이다. 그런 가운데 빚은 계속 불어나게 된다. 다른 기업들과 똑같이 YH무역도 이런저런 사업으로 무리하게 막 확장했는데, 그게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니까 회사는 결국 1979년 3월 30일에 '4월 30일 자로 폐업하겠다'는 공고문을 붙였다. 이때 장용호는 15억 상당의 회사 물품을 미국에서 외상으로 수입한 뒤 그 대금을 지불하지 않았다고 한다. 막대한 외화를 해외로 빼돌린 것이다.

노조에서는 회사를 살리기 위해 여러모로 노력하는 동시에 폐업에 맞서 강경 투쟁을 했다. 농성도 벌이고 그랬는데, 그러다가 여성 노동자들은 두들겨 맞기도 하고 머리채도 잡히는 등 고초를 겪으며 어려운 투쟁을 이어갔다. 이렇게 싸우자 정부와 회사가 일단 한 걸음 물러서는 듯했다. '4월 30일 자 폐업' 방침을 조금 변경하는 식으로 나왔다.

그렇지만 결국 노동자들을 속인 노동청과 경찰서, 무책임한 회사 때문에 여성 노동자들은 거리로 쫓겨날 상황에 놓이고 말았다. 노동자들은 7월 30일 또다시 농성에 들어갔다. 그러자 8월 6일 회사는 폐업을 하겠다고 다시 공고했다. 8월 8일부터는 전기도 끊고 물도 끊고 식사 제공도 중지하겠다고 통보했다. 그에 더해 8월 9일에는 기숙사를 폐쇄하겠다, 그리고 8월 10일까지 퇴직금과 해고 수당을 받아 가지 않으면 법원에 공탁하겠다며 노동자들을 윽박질렀다.

"배고파 못살겠다" 여성 노동자들의 절규, 박정희 경제 파탄의 민낯

프레시안 : 신민당사에는 어떻게 해서 가게 된 것인가.

서중석 : 여성 노동자들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를 여러 가지로 논의했다. 농성장을 옮겨 계속 싸우기로 했는데 어디로 갈 것인가, 그게 문제였다. 주한 미국 대사관이나 공화당사도 생각해봤지만, 거기는 들어가기가 힘들었다. '그러면 신민당에 가보자. 기댈 곳이 거기밖에 없지 않느냐', 이렇게 결정한 것이다. 그래서 8월 9일 노동자들이 면목동에 있던 YH 공장에서 마포에 있던 신민당사로 몰래 옮겨 갔다. 여성 노동자들은 그날 오전 9시 30분에 신민당사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신민당사에 간 여성 노동자 숫자가 자료에 따라 170여 명, 180여 명, 200여 명 등으로 조금씩 다르게 나오는데, 처음에 들어간 숫자는 170여 명인 것 같다. 어쨌건 여성 노동자들은 신민당사 4층 강당으로 올라갔다.

YH 여성 노동자들이 신민당사로 옮겨 가고 있을 때 문동환, 고은, 이문영 같은 사람들이 상도동에 있는 김영삼 신민당 총재 집에 찾아갔다. 동시에 일어난 일이다. 이 사람들이 찾아와서 YH 여성 노동자들을 도와달라고 하자 김영삼은 시원스럽게 답했다. "당사나 우리 집은 누구에게나 개방돼 있으므로 찾아오면 이야기를 듣고 선처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때 김영삼은 신민당사가 농성 장소가 될지는 몰랐다고 한다. 그냥 호소하러 오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시원하게 말을 한 건데 알고 보니 당사에 농성하러 온 것이었다, 이 얘기다. 하여튼 신민당은 YH 여성 노동자들을 강당에서 자게 하고 모포 같은 것도 사주고 설렁탕, 비빔밥도 시켜서 끼니를 해결해줬다고 한다.

프레시안 : 농성장이 된 신민당사 분위기는 어떠했나.

서중석 : YH사건에 대해서는 당시 동아일보가 보도를 잘했다. 사실 민주 노조의 활동에 대해 언론들은 이 사건 이전에도 그랬고 이 사건 이후에도 그러는데 당국과 마치 짠 것처럼, 정권이 하라는 대로 왜곡해서 아주 나쁘게만 기사를 쓰거나 또는 대부분은 아예 안 써버렸다. 그 점은 동아일보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동아일보가 놀랍게도 1979년 8월 11일 자하고 13일 자는 잘 썼다. 기사도 그렇고, 강제 진압이 있었던 8월 11일 자에 실린 두 장의 사진도 인상적이었다. 11일 자 1면하고 7면 사회면에 실린 그 두 장, 그중에서도 특히 끌려가면서 닭장차에서 울부짖는 여성 노동자들의 모습을 담은 7면 사진 그건 영원히 잊을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정말 많은 사람한테 대단한 울림, 깊은 인상을 준 사진이었다. 그 점에서 동아일보가 우리 언론사에서 잊을 수 없는 보도를 이 이틀 치에서는 했다고 본다.

YH 여성 노동자들의 신민당사 농성에서 강제 해산까지 상황을 당시 동아일보 기사를 중심으로 살펴보자. 9일 오전 신민당사 4층에 올라간 여성 노동자들은 "배고파 못살겠다 먹을 것을 달라", "우리를 나가라면 어디로 가란 말이냐", 이런 플래카드를 내걸고 노래를 부르고 눈물을 흘리면서 폐업 조치 철회를 요구했다. 10일 밤 10시 40분경 노동자들은 농성장에서 긴급 총회를 열고 "경찰이 강제로 해산시키려 한다면 최후의 한 사람까지 모두 죽음으로 맞서겠다"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사실 8월 10일 이날 오전에 이미 박정희 정권은 청와대에서 강제 해산을 결정한 상태였다.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이 회의가 끝난 후 '투신조'와 '할복조'로 나뉜 여성 노동자들은 일제히 울음을 터트리고 비명을 지르며 창틀에 매달리거나 사이다병을 깨서 들고 창밖을 향해 "정부 측은 뭣 하느냐", "우리를 나가라면 어떻게 살란 말이냐" 등의 구호를 외쳤다. 이때 감정이 격앙된 여성 노동자들 중에는 기절한 사람들도 있었다. 기절한 노동자들은 병원으로 실려 갔다. 창틀에 올라선 여성 노동자들 중에는 바깥에 있는 사복 경찰들을 향해 "물러가지 않으면 뛰어내리겠다"고 소리치는 이들도 있었다. 그야말로 심각한 상태에 이른 것이다.

그래서 김영삼 총재 등이 설득했다. 김영삼 총재는 여성 노동자들을 창틀에서 내려오게 한 다음에 "내 이름 석 자와 신민당의 이름을 걸고 조속히 여러분의 정당한 요구를 관철시키겠다"고 이야기해서 여성 노동자들의 환호와 박수를 받았다.

▲ 신민당사에서 끌려나와 닭장차에 실려 울부짖는 YH 여성 노동자의 모습을 전한 동아일보 1979년 8월 11일 자 7면. ⓒ동아일보 갈무리


"까불면 다 죽인다", 무지막지한 강제 진압으로 희생된 김경숙

프레시안 : 이 사건에 관한 자료를 읽을 때마다 개인적으로 떠오르는 단어가 있다. 르포 작가 박수정이 쓴 <숨겨진 한국 여성의 역사> 중 최순영(사건 당시 YH 노조 지부장) 인터뷰 부분에 나오는 '빵계'다. YH 노동자들은 밤 10시까지 일하면 야식으로 '보름달' 빵을 하나씩 받았는데, 그 빵을 모아 시골에 있는 가족에게 소포로 부쳐주는 계가 '빵계'였다. 장시간 노동으로 매일매일 몸이 파김치였을 텐데, 야근으로 배고픔이 밀려왔을 텐데 그 빵을 아껴 고향에 보내는 마음을 지닌 이들이었다. '빵계'를 모든 YH 노동자가 한 것은 물론 아니지만, 표현 형태는 다를지라도 그 마음은 그리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이 시기에 YH만이 아니라 다수의 여성 노동자들은 가난한 집안 살림에 입 하나 덜고자, 남자 형제들을 공부시킬 수 있도록 한 푼이라도 보태고자, 또는 몇 년간 돈을 벌어 집안 형편 때문에 제대로 하지 못한 공부를 다시 하고자 시골에서 올라온 10대, 20대들이었다. 그것을 위해 병영 같은 공장에서 철야와 야근을 버텨낸 이 사람들을 빼놓고는 한국의 고도성장을 말할 수 없다.

그렇지만 이들에게 돌아온 건 쥐꼬리만 한 임금과 '공순이'라는 비하였다. 그것에 더해 YH무역에서는 여성 노동자들의 피땀을 바탕으로 부를 축적한 자본가가 그걸 빼돌리고, 말로는 '수출 역군', '산업 전사'라고 치켜세우던 국가는 여성 노동자들을 핍박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로 인해 거리에 나앉게 된 상황에서 결국 신민당사까지 오게 된 YH 여성 노동자들은 그곳에서 달을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당시 신문에서는 '투신조'와 '할복조'라는 무시무시한 느낌을 주는 말을 썼지만, 이 여성 노동자들이 얼마나 절박한 심정이었을까를,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내몰았는가를 살피는 것이 우선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시 돌아오면, 박정희 정권은 YH 여성 노동자들의 호소에 어떻게 응답했나.

서중석 : 드디어 11일 새벽 2시경, 철제 방패와 방망이로 무장한 수백 명의 기동 경찰이 들이닥쳤다. 이들은 먼저 2층에 올라가서 총재실 문을 부수고 비서실 문을 파괴했다. 그리고 김영삼 총재 등이 있는 회의실 문을 박차고 들어가서, 그 자리에서 대책을 숙의 중이던 김 총재 등을 회의실 한쪽으로 몰아붙이고 방망이를 휘두르며 한 명씩 멱살 같은 걸 잡고 끌어냈다.

진압 경찰은 무지막지한 폭력을 휘둘렀다. 현역 의원이자 신민당 대변인이던 박권흠은 머리와 얼굴을 방망이로 맞아 피투성이가 됐다. 나중에 이 모습이 사진으로 크게 나오기도 한다. 황낙주 신민당 원내총무는 다리와 어깨를 얻어맞았다. 국회의원만 두들겨 맞은 게 아니었다. 진압 경찰은 국회의원뿐만 아니라 취재 기자, 당원 등을 가리지 않고 주먹으로 때리거나 발로 옆구리 등을 찼다. 이때 두들겨 맞아 다친 기자가 12명이나 됐다. 그러면서 경찰은 심한 욕설과 "까불면 다 죽인다" 등 폭언을 마구 퍼부었다.

그렇게 2층을 짓밟은 경찰은 여성 노동자들이 있던 4층으로 막 밀어닥쳤다. 절박한 심정으로 창틀에 올라섰다가 김영삼 총재의 설득으로 행동을 중지했던 여성 노동자들은 경찰이 밀어닥치자 사이다병을 들고 일제히 울부짖으며 저항했다. 이때 여성 노동자들 중 일부는 깨진 유리창 조각이나 사이다병으로 자살을 기도하려 했다고 당시 보도됐다. 또한 일부 여성 노동자들은 창문을 주먹으로 깨고 뛰어내리려 했으나 경찰에 막혔다. 그러면서 불과 10여 분 사이에, 어떤 글에는 작전 개시에서 끝날 때까지 23분 걸렸다고 돼 있기도 한데, 경찰은 여성 노동자들을 모두 당사 밖으로 끌고 나갔다.

경찰의 강제 진압 과정에서 한 여성 노동자가, 김경숙 양인데, 중상을 입고 인근 병원에 옮겨졌지만 바로 숨졌다. 김경숙 양의 죽음에 대해 경찰은 '스스로 동맥을 끊고 투신자살했다'고 발표한 것으로 신문에 보도됐다. 그러나 2008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는 김경숙의 부검 보고서와 시신 상태 등을 근거로 해서 손목에는 동맥을 끊은 흔적이 없고, 오히려 곤봉과 같은 둥근 물체로 가격당한 상처가 손등에 있었으며 머리 뒤편에서 치명적인 상처가 발견됐다고 발표했다.

하여튼 그렇게 해서 끌려 나간 여성 노동자들은 기동 경찰 버스 안에서도 창문을 부수고 울부짖으며 연행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당시 사진에 담긴 유명한 장면이다. 한편 여성 노동자들의 농성을 이런 식으로 강제 해산시킨 정부와 여권은 '여공들의 신민당사 농성 배후에 불순 세력이 있다'면서 그걸 규명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말기적 발악"에 경악한 신민당 "국민의 분노가 무섭지 않은가"

프레시안 : 당사를 침탈당한 야당은 어떤 반응을 보였나.

서중석 : 야당은 분노했다. 예컨대 박용만 의원 같은 사람은 "국회의원이 경찰한테 구둣발로, 몽둥이로 두들겨 맞는 처지에 더 이상 국회의원을 할 수 없다"고 하면서 의원직 사퇴서를 내기도 했다. 신민당은 YH 사태를 "국기를 뒤흔드는 전대미문의 폭거"로 규정했다. 신민당 의원들은 바로 농성에 들어갔다. 4층 강당 연단에 "8·11 폭거는 말기적 발악이다", "국민의 분노가 무섭지 않은가" 같은 대형 플래카드를 붙이고 당사 현관 입구에는 검은 천을 길게 늘어뜨려서 이 사태에 조의를 표했다. 당사 정면에는 "신민당 의원들은 지금 이 시간 박정희 정권의 온갖 탄압과 폭거에 항거하여 농성 중이다", "밤이 깊을수록 새벽이 가깝다" 같은 커다란 플래카드도 내걸었다. 이러한 농성에 참여한 의원이 42명이나 됐다. 신민당 전체 의원의 3분의 2나 참가한 것이다. 대단한 숫자였다. 서울뿐만 아니라 대구, 광주에 있는 신민당원들도 농성에 들어갔다.

미국도 박정희 정권의 강제 진압을 비판했다. 8월 14일 미국 국무부 대변인은 YH 여성 노동자들의 농성을 강제로 해산시킨 것에 대해 "한국 경찰의 지나치고 잔인한 폭력 사용을 개탄하며 적절한 문책을 바란다"고 논평했다. 그러자 바로 한국 정부에서는 '이거 내정 간섭 아니냐'고 반발했다. 신민당 농성은 강제 해산 18일째이던 8월 28일 의원 총회와 고 김경숙 양 추도식으로 막을 내렸는데, 18일 농성은 의정 기간 중 최장기간이라고 한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백일흔다섯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권 서평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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