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에도 이런 몰상식한 사람이 많은데, 그게 뭐냐면, 지역 도시에서 상경했다고 하면 꼭 "시골에서 올라왔구나!" 한다. 음, 정작 난 시골에 살아볼 생각조차 안 해봤는데 말이지. 그러니까, 진짜 시골말이다. 농사짓는 곳, 밭매는 곳, 물고기를 낚는 곳. 이런 곳은 서울의 한 구 단위 수준의 도시에서 올라온 나에게도 일종의 노스텔지어다. 어릴 적 외할머니가 계신 시골을 가끔 방문할 때의 기억 외엔 견뎌가는 삶으로서 실재하지 않았던 현실. 소똥 냄새, 비포장도로, 재래식 화장실, 거머리, 참깨밭, 개구리 정도의 단어와 연계된 기억이 파편적으로 재생될 뿐이다.
마치 외국 여행처럼 방문하곤 한 시골은 갈 때마다 좋았다. 냄새가 좋았고, 조용함이 좋았고, 푸름도 좋았다. 먹을거리가 이렇게 가깝다는 사실은 어린아이에게도 경외감을 주곤 했다. 유년기를 그곳에서 보낸 어머니는 지금도 시골로 내려가고 싶어 하신다. 그런 말씀을 들을 때마다 가끔 생각해보곤 했다. '나도 내려간다면 어떨까?'
빡빡한 도시 생활에 지친 누구나 귀농 생각을 한 번은 했을 것이다. 영농인이 워낙 줄어든 탓에 요즘은 정부에서도 적극적으로 귀농하는 젊은이를 지원한다. 좋은 환경에서 좋은 음식 먹고 유유자적 살아간다는 데 지원까지 좋다. 음, 그것 괜찮네. 그래서 내가 내린 답이 뭐였느냐면, 난 도저히 못 간다. 가면 아마 한 달 안에 미쳐버릴지도 모르겠다, 정도다.
<까칠한 이장님의 귀농귀촌 특강>(백승우 지음, 들녘 펴냄)을 보고 내가 왜 그런 생각을 가졌는지 알았다. 내 생각을 보다 정명한 문장으로 엮을 수 있게 됐달까. 이 책은 서울의 명문대를 졸업하고, 좋은 직장 잘 다니다 외환위기 사태 즈음 무작정 도시생활을 때려치우고 시골로 내려간 저자가 십수 년의 농촌 생활 경험을 바탕으로 진짜 시골 삶이란 무엇인지를 정리했다. 단순히 시골에서 살기만 하는 엘리트도 아니다. 농촌 공동체를 결국 뚫고 들어가 마을 이장님이 되셨고, 이곳저곳 강의도 자주 다니신다. 채소 농사를 십 년 넘게 지은 베테랑 영농인이다.
이런 저자가 쓴 책은 한 마디로, 귀농에 대한 환상을 깨준다. 그렇다고 무조건 "농사짓기 힘들어 죽겠다"는 건 아니다. 농촌의 매력도 만만찮게 풀어놨다. 도시 사람이라면 깊게 생각해보지 않았을 내용을 상세히 풀어준 덕분에, 독자가 농촌에서 '살아간다는 것'의 진짜 모습을 최대한 정교하게 고민해보도록 했다.
저자의 글솜씨가 워낙 좋다. 구수한 구어체로 자유무역협정(FTA)이 농촌에 미친 영향을 이야기하고, 시골 생활이 도시 생활과 어떻게 다른지, 그리고 그 다름이 삶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어떻게 바꾸는지 설득력 있게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내가 시골에서 살 수 없는 이유는, 책에 따르면 농촌형 공동체 생활에 어울리는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라는 게 내 결론이다. 농촌은 파편화된 도시와 본질에서 다르다. 소농이 하는 농사일은 아무리 해도 끝이 없다. 밭매고, 씨 뿌리고, 제초하고, 거두고, 다시 밭을 일군다. 이뿐이랴. 그 사이 집안일 하랴, 먹거리 만들랴, 장에 나가랴, 새로운 농사 정보를 얻으랴 정신없다. 이러니 혼자서는 절대 일을 못 한다. 자연히 이웃의 도움이 필요하다. 따라서 강력한 공동체가 형성된다. 이 '강력함'이라는 건 책을 봐야 제대로 실감 난다. 한번 서울에서 내려왔다면 죽을 때까지 '서울댁'으로 불리는 논리, 병이 나면 꼭 누구네 집 손녀가 일하는 병원을 들러야 하는 정서. 한마을 사람들이 모두 서로 아는, 그래서 생판 모르는 남의 집안 대소사에 가서도 누군가가 나를 알아보는 경험이 실재한다. 현재 도시에서는 절대 경험할 수 없는 일이다.
공동체에는 공동체가 체화한 나름의 논리가 있다. 따라서 법이고 이성이고, 이따위 도시의 잣대만 고집해서는 제대로 농촌에 정착할 수 없다. 귀농에 실패하는 사람들의 큰 실패 원인이 여기서 불거지는 마찰이다. (제대로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난 물론 진작 알고 있었지. 차가운 도시 남자는 시골에서 살아가기 영 헛헛한 법이다.
도시 사람이라면 생각해보지도 않았을 문제들도 흥미롭게 책에 소개된다. 시골에서 '길'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얼마나 큰 갈등을 일으킬 수 있는지 소개하는 대목이 대표적이다. 시골에서는 아무 생각 없이 다니는 길이 실은 누군가의 사유지일 가능성이 굉장히 크다. 저자는 이 이야기에서 일제 강점기~해방 이후 제대로 된 토지개혁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역사적 사실을 끄집어낸다.
귀농을 준비하는 사람이라면 꼭 읽어봐야 할 책이다. 이 책은 어떤 땅을 사는 게 좋은지, 집을 지을 때는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 등 귀농 정착에 가장 필수적인 일에서부터 귀농하는 사람이 가져야 할 자세, 농사에 임할 때 고려해야 할 점 등을 상세히 알려준다. 하지만 워낙 편안하게 이야기를 풀어가는 저자의 솜씨 덕분에 전혀 지루하지 않다.
시골 이야기를 통해 더욱 깊고 넓게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을 제시한다는 점도 책의 장점이다. 농민 기본소득 보장제의 필요성을 설명하는 대목이나 농민의 가장 무서운 적인 풀(잡초)이 지구에는 어떤 존재인지를 이야기하는 대목을 보면,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런 이유로 저자는 현재 시골이 떠나가는 젊은이들, 새로운 귀농 인구의 유입 등의 이유로 이제야 봉건시대를 지나 근대로 진입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 새로운 농촌을 위해 "장가가는 데 애먹지 않아도 되는 농촌 총각을 키워내는 일"이 필요하다고 말하며,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현대 자본주의 경제의 속도에 맞는 사람의 시간을 따라가는 길을 갈 것이냐, 아니면 자연의 길을 갈 것이냐를 우리 농촌, 나아가 우리 사회가 선택해야 한다는 묵직한 이야기를 던진다.
책을 읽고 나면 밥상에 오른, 혹은 식당에서 먹은 음식이 다르게 보인다. 새삼 느끼는 일이지만 농사는 진정 위대한 노동이다. 어떤 노동보다 자연에 가까이 있고, 누구보다 앞장서 자연의 거대한 힘에 맞선다(반복하지만, 그래서 나약한 나란 인간은 절대 시골에 정착하지 못할 것이다). 한국은 국가적 사명이었던 도시화, 공업화를 위해 시골의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했다. 우리가 오늘 누리는 풍요는 그 희생 위에 이룩되었다. 새삼 ‘영농인에게 고마움을 갖자’고 말할 것까진 아니지만, 이 경이롭고 고단한 노동의 시간을 이겨낸 저자에게서는 쉽게 말하기 힘든 진짜 고수의 힘이 느껴진다. 포스가 언제나 함께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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