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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미국 논쟁, 자급자족이냐 대외 팽창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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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미국 논쟁, 자급자족이냐 대외 팽창이냐

['전쟁 국가' 미국] '제국의 두뇌 집단' 미 외교협회(CFR) ②

미국이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주된 목적은 자유와 민주주의의 수호가 아니었다. 세계를 미국 주도의 단일한 자본주의 체제로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미국 금융과 제조업 및 농업의 대외 진출이 주된 목적이었다. 이러한 미국의 전쟁 목표는 미국 정부가 수립한 것이 아니었다. 미국의 금융가, 대기업가, 그리고 이들을 위해 복무하는 국제변호사와 학계 인물들로 구성된 외교협회(CFR : Council on Foreign Relations)라는 민간 조직이었다. CFR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전쟁과 평화 연구(The War and Peace Studies)'라는 대규모 연구 프로젝트를 통해 2차 대전 후 세계 정치경제 질서의 밑그림을 만들어냈다. 2차 대전 이후 세계는 대체로 이 밑그림에 따라 재구성됐다.

미국의 마르크스주의 사회학자 로렌스 슢과 윌리엄 민터가 공동 저술한 <제국의 두뇌 집단 : 외교협회와 미국의 대외 정책(Imperial Brain Trust : The Council on Foreign Relations and United States Foreign Policy)>을 바탕으로 CFR이 미국의 대외 정책에 미친 영향을 몇 회에 걸쳐 알아보기로 한다. 이 책은 1977년 먼슬리리뷰(Monthly Review)에서 간행됐다.

CFR의 초기 활동(1930년대까지) : 고립주의를 분쇄하라

창립 후 CFR의 첫 주요 활동은 미국 최초의 외교전문지 <포린어페어즈>를 발간하는 것이었다. 1922년 9월 계간지로 창간된 <포린어페어즈>는 첫 호 1000부를 시작으로 그해 겨울호 2700부, 1923년 봄호 5000부, 그리고 1945년에는 1만 7000부를 발간할 정도로 높은 성장세를 기록하면서 가장 권위 있는 외교전문지로 자리 잡는다. 또한 CFR은 연구그룹과 토론그룹으로 나뉘어 당면한 세계정세와 미국의 대외정책에 관한 모색을 해나갔다.

그러나 1920~30년대 CFR의 최대 당면 과제는 당시 미국 사회를 지배했던 고립주의(불개입주의)를 극복하는 것이었다. 금융가와 대기업들의 조직인 CFR은 미국 경제의 활로를 대외 팽창에서 찾았던 반면 내수 기반의 중소기업과 대부분의 미국 국민들은 국내 개혁을 통한 위기 극복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CFR의 목표는 거대 금융과 대기업이 지배하는 국내 사회경제적 구조의 현상을 바꾸지 않은 채 수출 등 대외 팽창을 통해 경제의 활로를 뚫는 것이었다. 예컨대 CFR 회원인 이사야 보우만은 1928년 "끊임없이 팽창하는 우리 산업계의 위기(즉 공급 과잉)를 피하기 위해서는" (미국 제품의) 수출, 그리고 해외 원자재의 확보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 <제국의 두뇌 집단: 외교협회와 미국의 대외정책>, 로렌스 슢·윌리엄 민터 공저
또 미국의 이해관계는 전 세계에 걸쳐 있으며 "북으로 북극해, 남으로는 사모아, 동과 서로는 중국에서 필리핀, 라이베리아, 탄지에르"에 이를 정도로 영국에 필적할 만한 세력권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의 영토적 팽창이 영국에 필적할 만큼 넓어지지 못한다면 우리의 총체적 경제역량과 상업관계는 영국을 따라잡을 수 없을 것"이라는 게 그 이유였다. 한마디로 미국은 보다 더 공격적인 대외정책을 펼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미국 국민은 이러한 CFR의 견해에 동조하지 않았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1차 대전의 경험. 1917년 윌슨 대통령은 세계의 민주주의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1차 대전에 참전했지만 그 결과는 정반대였다. 세계는 더 혼란스러워졌고 새로운 전쟁의 위험성이 커진 것이었다. 특히 1920년대 후반부터 일단의 수정주의 역사가들이 미국 참전의 진정한 이유는 미국의 금융가 및 군수산업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하면서 미국의 대외 개입에 대한 국민들의 반감은 높아만 갔다.

역사가들의 주장은 1934년 제랄드 나이 상원의원이 주도한 '군수산업조사특별위원회'(Nye Committee : 일명 '죽음의 상인 특위'로 불림) 조사에서 사실로 드러났다. 1934년 4월부터 1936년 2월까지 200여 명의 증인을 소환해 93회의 청문회가 벌어진 이 조사에서 미국의 참전은 J.P. 모건 등 금융가들이 영국, 프랑스 등 연합국에 빌려준 막대한 전쟁자금을 회수하기 위해 윌슨 정부에 압력을 가한 결과라는 것이 밝혀졌다. 조사에 따르면 당시 미국 금융계는 영국에 23억 달러 상당을 대출했으며 독일에 대한 대출은 2700만 달러에 불과했다. 만일 영국이 패한다면 이 엄청난 대출금을 고스란히 떼일 판이었다.

즉 미국의 참전은 민주주의를 위한 전쟁이 아니라 미국 자본가들의 이윤을 위한 추악한 싸움이라는 점이 드러난 것이었다. 스메들리 버틀러 장군의 <전쟁은 사기다>(1935년)라는 책도 바로 이 상원 특위의 조사 결과에 근거한 것이었다. 미 상원은 1936년 초, 이 특위의 조사 활동이 윌슨 대통령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특위 운영 자금을 봉쇄했고, 조사 활동은 돌연 중단됐다. 그러나 미국의 반전 여론은 거세졌고 이에 따라 1935년부터 1939년까지 4차례에 걸쳐 '중립법'이 제정됐다. 해외 전쟁에 대한 미국의 참전뿐만 아니라 교전국들에 대한 무기 판매나 자금 대출도 금지하는 내용이었다.

다른 하나는 1929년 대공황 발발에 따른 미국 내 민족주의적 경향의 강화였다. 미국의 내수기업과 노동자들은 고율의 관세를 통해 국내 시장을 보호할 것을 요구했다. 결국 1930년 할리-스무트관세법이 통과됐고 미국의 보호주의 경향이 강화됐다.

미국의 자급자족이냐, 대외 팽창이냐

이에 따라 1930년대 초 미국에서는 자급자족이냐, 대외 팽창이냐를 둘러싼 대논쟁이 벌어졌다. 즉 미국은 세계 다른 지역들과 정치·경제적 관계를 끊은 채 서반구(아메리카대륙)만의 자급 자족적 제국으로서 번영과 평화를 누릴 수 있다는 측과 세계와의 전면적 자유무역을 해야 하며 이를 위해 세계의 정치적 문제들에 깊숙이 관여해야 한다는 측의 대논쟁이 벌어진 것이다.

<포린어페어즈> 창간 이후 50년간(1922~72년) 편집인을 역임한 해밀턴 피시 암스트롱은 이 논쟁에 대해 "향후 10년간 미국 대외정책의 정치 경제적 방향을 결정지을 결정적 시금석"이라고 말할 정도로 중대한 논쟁이었다. 실제로는 80여 년이 지난 현재까지 미국의 군사력에 바탕을 둔 해외 진출이 미국의 대외정책의 기조로 자리 잡게 되는 결정적 계기였다.

자급자족을 대변한 사람은 역사가 찰스 비어드(1874~1948년)였다. 그는 미국이 1890년대 이후 잘못된 전제 아래 대외정책을 운용해 왔다며 미국의 내부 개혁을 통해 경제 위기를 해소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대부분의 정치가 및 주류세력들이 농업 및 제조업 상품의 과잉 생산이 문제이며 따라서 잉여 생산물의 수출만이 살길이라고 생각한 것은 잘못이라는 얘기다.

실제로 미국은 스페인전쟁이 벌어진 1898년 이래 '문호 개방'이라는 이름 아래 공격적인 수출 진흥 정책을 추구해 왔다. 그러나 비어드는 적절한 국내 정책(또는 개혁)을 통해 과잉 생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합리적인 계획경제를 통해 부의 분배를 고르게 하면 대다수 서민의 소득이 향상되고 이들의 소비 증가를 통해 과잉 생산을 해결하는 동시에 미 국민들의 생활 수준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경제 문제에 관한 민주적이고 집단적인 결정을 통해 완전고용과 번영을 이룰 수 있다면서 정부는 대외 무역과 투자를 통제해 미국이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국가나 지역에 경제적으로 의존하거나 과도하게 연루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정한 부의 분배를 통해 국내 수요를 창출하는 한편 해외 시장에 대한 과도한 의존을 줄임으로써 미국의 자급자족과 경제적 독립을 확보하자는 게 비어드의 핵심 주장이었다.

비어드는 1934년 <국내에서의 문호 개방>이란 책에서 이러한 자신의 주장을 정리했다. 즉 대외 문호 개방이 아니라 국내 문호 개방을 통해 경제 위기를 극복하자는 것이었다. 그의 주장은 사회주의 정책은 아니었다. 국가 경제정책에 대한 산업 및 금융자본의 배타적 독점을 타파해 국민 모두에게 경제 발전의 혜택이 돌아가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당연히 CFR은 이 제안에 강력히 반대했다. 그동안 금융 및 대기업이 누려온 미국경제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을 포기하라는 주장이었기 때문이다.

찰스 비어드의 예언 : 무한한 대외 팽창은 불가능하다

1930년대까지 미국 최고의 역사가로 존경받았던 비어드는 미국의 2차 대전 참전을 반대했고 끝까지 이러한 불개입주의(고립주의)를 고수했다. 나아가 루즈벨트 대통령의 2차 대전 참전은 국민을 속인 것이라고 맹비난했다 (루즈벨트는 1940년 대선 때까지도 전쟁 불참을 대선 공약으로 내세웠으나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참전의 명분을 얻게 됐다). 이 때문에 그는 파시즘 옹호자로 몰렸고, 루즈벨트를 공개적으로 비난한 '불경죄'를 범하면서 사실상 학계에서 매장됐다.

비어드가 재조명되기 시작한 것은 베트남전쟁의 실패로 미국의 과도한 해외 군사 개입이 초래한 문제점이 드러난 1960년대 이후다. 특히 2003년 부시의 이라크전쟁 이후 일방적 군사주의의 위험성이 재차 드러나면서 해외 개입의 위험성에 대한 비어드의 경고를 되돌아보는 학자들이 늘고 있다. 이런 점에서 그의 주장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 2003년 5월 1일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이 항공모함 애이브라험 링컨호에서 이라크 전쟁 종전을 선언했다. 그러나 미군은 2011년이 돼서야 이라크에서 철수했으며, 2015년 현재 이라크는 여전히 혼란스럽다. ⓒ프레시안 자료사진

비어드는 일찍부터 미국 정치를 경제 투쟁의 관점에서 바라봤다. 그는 1913년 펴낸 <미국 헌법의 경제적 기원>이란 저서에서 건국의 아버지들이 헌법을 제정한 주된 동기는 민주주의보다는 자신들의 경제적 이득을 위한 것이라는 독창적 해석을 내놓았다. 즉 헌법 제정의 주요 목표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통상 및 산업의 진흥, 사유재산 보호, 경제발전을 위한 금융기관 설립이었다는 것이다. 1913년 창립돼 미국의 중앙은행 역할을 하는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는 정부 기구가 아니라 민간 금융가들의 주도로 창립된 민간기구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미국의) 헌법은 본질적으로 경제에 관한 문서이다. 그 기본개념은 재산에 관한 기본권은 정부에 우선하며, 대다수 국민의 도덕적 비판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이다"

비어드에게 정치란 경제 엘리트 간의 다양한 이해관계를 조정하기 위한 거래의 과정일 뿐이었다. 1860년대의 남북전쟁은 건국에 이은 2차 미국혁명으로서 북부의 산업자본주의가 남부의 농업경제를 압도한 것이었다. 이후 1870~1900년은 산업화가 급속하게 진행되면서 거대 자본이 형성되고 일반 국민은 가난으로 내몰리는 탐욕과 착취의 시대였다.

그에 따르면 1930년대 미국의 대외정책은 국내 정책의 연장이었고 국내 정책의 핵심 목표는 상업 이익의 증진이었다. 상업 이익의 증진을 위해서는 미국의 과잉 상품 및 과잉 자본이(1차 대전 이후 미국의 세계 최대의 채권국이 됐다) 해외로 진출해야 했다. 다시 말해 산업 및 금융 자본의 이익 증진이 최우선 목표였으며 일반 국민의 복리 증진은 뒷전으로 밀려난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미국은 세계 어디서든 미국의 상업적 이익 보호를 단 한 번도 거부한 적이 없다...미국은 건국 당시부터 세계열강이었으며, (상업적 이익 보호를 위해) 필요하다면 언제나 자신의 힘을 사용했다"

비어드는 1차 대전의 경험을 통해 (거대 자본의) 경제적 이익을 최우선 목표로 하는 대외정책의 위험성을 깨달았다. 당초 그는 참전을 찬성했다. 독일 군국주의의 팽창을 저지하고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 참전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전후 독일과 러시아의 비밀 외교문서들이 공개되면서 민주주의를 위한 전쟁이라는 윌슨의 주장은 거짓으로 드러났다. 1920년대 수정주의 역사가들은 1차 대전은 민주주의를 위한 전쟁이 아니라 미국의 경제적 이익을 위한 전쟁이었다는 연구 결과를 속속 내놓았다. 유럽 서부전선에서 수백만 젊은이들이 죽어가는 동안 미국의 은행가와 무기 상인들은 연합국에 대한 군사 물자와 전쟁 자금 대출로 떼돈을 벌었다는 것이다.

1930년이 되면서 비어드는 미국의 1차 대전 참전은 잘못이라고 판단했다. 대다수 미국인들도 같은 생각이었다. 윌슨의 국제주의는 사기였다는 게 드러난 것이다. 남북전쟁 이후 미국은 급속한 산업화로 국내 시장이 포화되고 잉여 자본이 넘쳐났으며 이에 따라 상업제국으로서 해외로 팽창해야 하는 압력 또한 늘어났다. 기존의 정치구조(산업 및 금융자본의 경제에 대한 독점적 지배)를 유지하면서, 즉 국내 개혁을 회피하면서 미국의 번영을 유지하려면 해외 교역 및 투자의 무제한적인 팽창이 필요해진 것이다. 이것이 바로 1890년대 이후 미국 정치의 핵심이었다. 1898년 스페인전쟁, 1917년 1차 대전에 참여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이런 점에서 미국의 국내 정치와 대외 정책은 긴밀한 연관 관계에 있었다. 즉 국내 정치의 곤경을 회피하려면 해외 팽창이 불가피했던 것이다. 유산계급의 특권을 보장한 헌법의 기본구조에 대한 의문 제기를 피하기 위해 대외 문호개방을 추진한 것이다.

비어드의 꿈은 "미국이 노동자들의 공화국이 되는 것"이었다. 1차 대전 참전은 비어드를 비롯한 진보주의자들(progressives)의 이러한 꿈을 깨버렸다. 국내 개혁을 통해 진정 민주적이며 보다 평등하고 인간적인 사회를 건설할 기회를 빼앗아 버린 것이다. 1차 대전 종전 10년 후 발생한 대공황은 바로 그 실패의 결과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비어드는 대공황이라는 위기를 통해 그 꿈을 다시 실현하고자 했다. 그래서 루즈벨트의 뉴딜을 열렬히 지지했다. 그러나 루즈벨트도 윌슨과 마찬가지로 국내 개혁을 피하기 위해 해외 팽창을 택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있었다. 비어드는 1898년, 1917년과 같은 대재앙이 되풀이돼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1931년 일본이 만주를 침략하고, 1933년 독일에서 히틀러가 집권하면서 세계는 새로운 전쟁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비어드는 미국이 국내의 구조적 개혁을 외면하고 해외 팽창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 할 것을 우려했다. 그는 1930년대 내내 미국은 아시아, 유럽 문제에 끌려들어갈 것이 아니라 국내 문제 해결에 전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윌슨의 1차 대전 참전과 같은 어리석음을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는 만일 미국이 전쟁을 하려거든 민주적 논의 과정을 거쳐야 하며 몇몇 정치인들이 밀실에서 결정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 세계 2차 대전 당시 미국과 일본의 태평양 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 <진주만>의 한 장면. ⓒ터치스톤 픽처스

하지만 1890년대 말 이후 미국의 주류세력은 미국 경제의 해외 진출만이 유일한 살길이며 이를 위해 필요하다면 군사력도 사용할 수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비어드에 따르면 "대외정책과 국내정책은 동전의 양면이다. (현재 미국은) 정치가들이 규정하는 국익에 따라 제조업, 금융, 농업 부문에서 국내 시장의 수요 부족에 직면해 있으며 따라서 해외시장으로 진출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즉 1930년대 미국 정치경제 엘리트들은 미국의 대외정책이 "상업적 팽창이냐, 아니면 침체와 쇠퇴냐", "세계의 강국이 될 것인가, 경제적 몰락인가"라는 양자택일에 직면했다고 보았으며, 여기에서 미국의 경제 잉여를 수출하는 것이야말로 바로 최대의 국익이라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매킨리(1897~1901년) 이후 후버 대통령(1929~1933년)까지 미국의 일관된 전략은 '경제적 팽창주의'였으며 이를 위해 "세계 모든 지역의 문호를 개방해야 하고, 필요하다면 정치적 강압에서 군사력 사용에 이르기까지 정부의 모든 수단을 동원"하려 했다. 세계 모든 지역이 미국의 상품과 투자를 받아들이도록 문호개방을 함으로써만 미국은 번영할 수 있고 기존 국내 질서를 영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비어드는 다음 다섯 가지 이유를 들어 미국의 대외 문호개방은 실현 불가능한 목표라고 반박했다.

1. 무한한 경제적 팽창은 불가능하다. "어떤 외환체제, 어떤 통상진흥 정책을 쓴다 해도 무한한 기술 발전에 의해 생산되는 제품들을 무한정 받아들일 시장을 확보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2. 미국이 문호개방을 강요할수록 이에 대한 저항도 늘어날 것이다. 즉 다른 나라들이 미국의 요구에 무작정 응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영속적인 갈등을 초래할 뿐이다. "(각 나라에는) 이상과 충성심, 열정과 정치적 전통, 인종과 국민들의 발전과 충돌이라는 국민문화가 있다"는 점을 간과한, 지나치게 단순한 목표다.

3. 외국의 문호개방을 위한 미국의 노력은 결국 미국을 군사주의로 내몰 것이다. 문호개방에 대한 반대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군사력을 동원해야 하기 때문이다. "국부의 상당 부분과 에너지를 전쟁 수행과 전쟁 준비에 투입하는 나라는 스파르타가 될 것"이며 민간 부문과 문화가 "군사적 목표와 군사적 심성의 노예가 될 것"이다.

4. 인종적, 종교적으로 분열돼 있고 개인의 자유를 숭상하는 미국의 고유한 정치문화와 사회 구성은 대외 팽창 전략에 적당하지 않다. 즉 대규모 군사력 동원에 적합하지 않다. "오랜 왕정, 국교, 확고한 귀족층이 없는" 미국은 통합력, 자기희생, 권위에 대한 자발적 복종과 같은 전통이 없다. 따라서 군사력에 의해 국제질서를 유지하려는 힘들고 오랜 투쟁을 견디지 못할 것이다. 미국은 로마제국이나 영국 제국과는 다르다

5. 해외 문호개방은 미국의 진정한 국익이 될 수 없다. 미국의 최고의 국익은 모든 미국인들에게 인간다운 삶의 수준을 제공하는 것이어야 한다. 오로지 경제성장만을 추구하는 것은 이러한 고려를 외면하는 것이다. 미국의 진정한 국익은 "국가를 방위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개인과 사회의 덕성을 고취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 쪽으로" 경제적 목표를 설정하는 것이다.

비어드는 미국의 안보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대규모 군사력이 필요치 않다고 지적했다. 태평양과 대서양 등 두 개의 대양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외부로부터의 침공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 점은 스메들리 버틀러 장군도 이미 지적한 바 있다.

또한 유럽 및 아시아 시장에 접근하지 않고는 미국의 번영을 이룰 수 없다는 국제주의자들에 대해 미국의 방대한 국내 시장도 아직 제대로 개발돼 있지 않다고 반박했다.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미국 경제위기의 원인은 국민적 부나 자원, 생산능력, 인구가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인구의 상당수가 구매력 있는 소비자로 기능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는 부의 불균등한 배분에 의한 것이므로 해법은 간단하다. 극소수가 독점하고 있는 부를 국민 모두에게 공정하게 재분배하는 것이다.

그는 도덕적, 인도주의적 이유를 들어 해외에 개입하려는 국제주의자들에 대해서 미국 국내에도 버림받고 고통받는 형제들이 많이 있다며 이들을 먼저 돌보라고 충고했다. "이른바 '백인의 짐'을 앞세워 해외의 유색인종들을 돌보겠다는 사람들은...국내에도 그러한 도덕적 의무를 실천할 수 있는 대단히 많은 여지가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라는 것이다. "1천만 명의 실업자를 비롯해, 거지와 노숙자, 소작인과 날품팔이 등 미 국내에도 수많은 고통 받는 사람들이 있다는(그리고 아직도 이들의 고통을 덜어주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지난 5000년간 전쟁을 일삼아온 유럽과 아시아의 문제들을 우리가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뻔뻔스러운 일"이라는 얘기다.

마지막으로 비어드는 "미국 정치가들은 국내에서든 해외에서든 미국의 힘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 미국이 힘을 행사할 경우 예기치 않은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미국의 경제력과 군사력으로도 세계를 미국의 계획대로 만들어낸다거나 다른 국가들의 행동을 통제하는 것은 결코 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불개입주의의 패배, 개입주의의 승리

비어드의 이러한 지적은 2차 대전 후, 특히 냉전 종식 이후 이라크 침공 등 미국의 일방적 군사주의가 초래한 세계적 혼란, 그리고 미국 국내의 사회경제적 후퇴 등을 예견한 예언자적 발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1930년대 당시 국내 개혁이 우선이라는 비어드의 주장은 주류세력에 의해 거부된다. 그리고 해외 팽창이 급선무라는 주류세력의 입장은 CFR의 주도에 의해 관철된다.

우선 CFR은 1932년 <포린어페어즈>에 에드윈 게이의 '대공황' 논문을 게재했다. 게이는 이 글에서 미국의 경제적 자급 자족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대공황은 원인은 미국 국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국제적이며, 세계 최대 채권국인 미국의 번영은 세계의 교역 증진과 번영에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는 그 이유였다. 그는 이어 1차 대전은 세계의 번영에 미국이 국제적인 정치적 책임을 갖고 있음을, 또한 미국과 다른 나라들이 경제적 상호의존 관계에 있음을 보여주었다면서 “미국의 은자의 나라가 돼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 지난 1929년 10월 24일, 증권시장의 갑작스런 붕괴로 충격을 받은 많은 사람들이 뉴욕 금융가인 월스트리트에 운집해있다. ⓒhttp://lancasteronline.com

이어 CFR은 루즈벨트 대통령 취임 후인 1933년 11월 23~24일, 뉴욕에서 자급자족에 관한 토론회를 개최했다. 월스트리트 은행가이자 CFR 부의장(1933~36년)과 의장(1936~44년)을 역임했으며 루즈벨트 대통령 및 코델 헐 국무 장관과 상당히 가까웠던 노먼 데이비스가 주도한 것이었다. 존 포스터 덜레스가 주재한 이 토론회에는 헨리 스팀슨 전 국무 장관, 오그덴 밀즈 전 재무 장관, 헨리 왈라스 농무 장관, 루이스 더글라스 예산처 장관, 허버트 파이스 국무부 경제 고문, 대기업 대표, J. P. 모건 등 금융계 대표와 하버드대, 시카고대, 콜럼비아대의 학장 및 경제학 교수들, 그리고 언론인 월터 리프먼 등 주류세력의 쟁쟁한 인사들이 참석했다.

회의 결과는 정부 지도자들에게 전달되는 한편 <포린어페어즈>에 두 편의 논문으로 실렸다. 하나는 1934년 1월에 발표된 리프먼의 '자급자족 : 몇 가지 단상들'로, 그는 자급자족은 자유를 위협한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그는 중앙 계획을 통해 사회 질서를 유지하려면 인간의 행동이 예측 가능해야 한다, 인간 행동의 예측 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배급제이다, 배급제는 사회의 병영화를 초래한다. 따라서 자급자족은 미국 사회의 현실적 대안이 될 수 없다는 논리로 자급자족에 반대했다. 다른 하나는 같은 해 4월에 발표된 휘트니 셰파드슨의 글로 그는 미국은 자급자족을 이룰 수 있으나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하며 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방안이라고 주장했다. 해외 진출만이 유일한 대안이라는 것이다.

한편 루즈벨트 대통령은 1933년 11월 미국의 국제경제 관계에 관한 조사기구를 설립해 이 문제를 연구할 것을 명령했다. 위원 7명 중 3명은 CFR 회원이었으며 특히 이사야 보우먼과 비어즐리 럼은 록펠러 가문의 오랜 측근이었다. 수개월의 연구 끝에 위원회는 부분적 자급자족도 허용해서는 안 되며, 그 대신 수출 증대와 세계 교역 확대를 통해 공황을 탈출할 수 있다고 결론 내렸다. 이를 위해 고율의 관세를 내리고 호혜적 무역협정을 위한 협상을 서둘러야 한다고 권고했다. 또한 민간 기업의 대외 경제 활동에 대한 정부의 개입은 최소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루즈벨트는 국내 개혁에 의한 공황 탈출이라는 당초의 민족주의적 접근을 포기했다. 1934년 수출입은행법, 무역협정법을 통과시키는 등 해외교역 팽창에 의해 국내 경제 문제를 해결한다는 전통적 해법으로 복귀한 것이다. 결국 비어드 등이 주창한 고립주의(불개입주의) 노선이 패배하고 국제주의(개입주의) 노선이 득세한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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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규

서울대학교를 나와 경향신문에서 워싱턴 특파원, 국제부 차장을 지내다 2001년 프레시안을 창간했다. 편집국장을 거쳐 2003년부터 대표이사로 재직했고, 2013년 프레시안이 협동조합으로 전환하면서 이사장을 맡았다. 남북관계 및 국제정세에 대한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연재를 계속하고 있다. 현재 프레시안 상임고문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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