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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살인자, 남편을 빼앗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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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살인자, 남편을 빼앗다

[구보타 쇼크 10년, 한일 석면 문제 대해부 ⑤]

일본 밀항선을 함께 탄 두 남자, 석면 희생자가 되다

1956년 어느 날 부산항. 당시 15살의 소년 김정안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안내원이 이끄는 배에 올랐다. 일본으로 밀항하려는 사람을 태우는 밀항선이었다. 배에 타니 어두운 선실 안에 이미 몇 명의 남자들이 타고 있었다. 대부분 자신보다 나이가 많았다. 일행 중에는 진주에서 온 열아홉 살의 노중규도 있었다.

그들은 한국이 아닌 일본에서 붙들렸다. 일행은 오무라 수용소에 갇혔다. 노중규와 김정안은 오사카, 센난과 붙어 있는 한난에서 태어난 재일 한국인이었다. 노중규는 1937년 한난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진주에서 보내다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망한 뒤 다시 돌아갈 길을 찾지 못했다. 그러다 결국 입에 풀칠하기조차 어려운 한국을 떠나기로 결심하고 밀항을 결행한 것이다.

김정안도 노중규와 비슷한 길을 걸었다. 일본에서 태어난 뒤 어릴 때 조선으로 갔다가 일이라도 할 수 있는 일본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일본에 연고가 확실하게 있는 그들은 가족들이 일본 정부에 돈(일종의 보석금)을 준 뒤에야 풀려났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의 아버지는 모두 한난에서 석면 일을 한 적이 있거나 하고 있었다. 노중규의 아버지는 한국 전쟁이 발발하던 해인 1950년 질환으로 숨졌다. 당시 한국에 있던 그는 물론 임종도 하지 못했다. 우여곡절 끝에 가까스로 일본에 오는데 성공한 그는 아버지가 만든 동아석면이란 자그마한 공장을 물려받았다.

그는 어머니, 친척, 그리고 1964년 결혼한 재일 한국인 2세 문종순과 함께 아버지한테서 물려받은 석면슬레이트 재활용 공장을 꾸렸다. 나라에 있는 일본 최대의 석면 업체 니치아스에서 슬레이트 부스러기를 모아와 이를 분쇄한 뒤 규슈에테르니트 공장에 납품하는 일이었다.

그 유해성을 잘 알지도 못한 채 죽음의 석면 먼지를 지독히 들이마신 문종순의 남편, 곧 노중규는 1987년 감기 증세로 시작한 흉막중피종으로 1989년 쉰둘의 나이로 숨지고 말았다. 구보타 쇼크 직후인 2006년 센난에서 본격화한 석면 피해 배상 소송에 참여해 남편은 승소를 받아냈다.

"석면 공장 전구에 석면 먼지가…"

아직 고운 자태가 얼굴에 남아 있는 문종순은 올해 일흔셋이다. 남편과 함께 운영하던 석면 공장에서 일하던 때의 모습을 담담하게 털어놓았다. 구보타 쇼크가 터진 날로부터 꼭 10년이 된 지난 6월 29일이었다.

"손수건이나 타올(수건)로 입을 막고 일을 했는데 전구에 석면 먼지가 잔뜩 끼어 불빛이 희미하게 보일 정도였습니다."

그녀는 당시 남편에게 "이건 사람 할 일이 아니다"라며 아무리 목구멍이 포도청이지만 더는 이런 일을 할 수 없다고 불평했다. 예쁜 색시가 보채니 신랑도 업종을 석면 재활용 공장에서 석면 방직으로 바꾸었다. 동아석면은 한때 직원이 20여 명이 이를 정도로 제법 잘 나갔다. 노동자의 4분의 3은 여성이었다. 공장 바로 옆에 일본식 정원을 잘 꾸민 600평의 궁궐 같은 집도 마련했다. 모두들 부러워했다.

하지만 이런 성공한 것 같이 보이는 삶도 남편의 악성흉막중피종 발병과 투병, 그리고 사망으로 풍비박산이 나고 말았다. 석면 방직 공장 경영이라는 매우 거친 일을 40대 후반의 여성이 감당하기 어려웠다. 공장은 곧 바로 쇠락의 길을 걸었다.

석면이 싫어 남편을 떠나

문종순과 판박이 삶을 사는 이는 또 있다. 문종순보다 1년 뒤에 결혼한 올해 일흔하나의 나이인 한고자 씨다. 그녀는 놀랍게도 10살 때부터 석면 공장에서 일했다. 처음 일한 곳은 하마노 석면이란 방직 공장. 키가 워낙 작아 석면 실을 감는 로프 작업을 했다고 한다. 이 공장에는 또래 소녀가 둘 더 있었다.

한 씨는 60년 전의 일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아침 7시부터 12시간을 일했어요. 일주일에 6일 일했죠. 노동기준국에서 근로 실태 조사를 오면 공장에서 그 정보를 미리 알고 우리더러 나오지 말라고 해 그 날은 공장을 쉬었습니다."

'술고래' 아버지 밑에서 자란 그녀는 초등학교를 3학년까지 밖에 다니지 못했다. 어머니가 13살 때 재혼해 어머니를 따라 한난에 있는 니시카와 석면에서 그녀는 스무 살이 될 때까지 일했다. 결혼 뒤 남편은 마츠시마가공소란 석면 공장을 차렸다. 결혼 후에는 그 지긋지긋한 서석면 일을 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그녀는 1988년까지 일해야만 했다.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딸과 아들을 둔 어머니였지만 아이들을 두고 집을 나가버렸다. 가출 뒤 가정부 일을 했다. 남편 김정안이 찾아와 무릎을 꿇고 석면 일을 시키지 않겠다고 빌었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자 모든 것이 다시 옛날로 돌아갔다. 그녀는 또 다시 가출했다. 3번째 가출을 한 뒤에는 사실상 완전 남남이 됐다. 25년의 세월을 홀로 보낸 것이다.

마흔넷에 3번째 집을 나온 뒤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해 글을 몰라 야간 중학교와 야간 고등학교를 다녔다. 지금의 이름 한고자도 당시 담임선생님이 지어준 것이었다. 생명보험 회사에 들어가 보험 설계사가 되어 발이 부르트도록 일했다. 석면 먼지 가득한 공장보다 몇 백 배나 마음에 들었다. 여러 사람 집들을 방문하는 보험 설계사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예순의 정년까지 일하고 은퇴했다.

25년 만에 만난 남편, 몇 달 뒤에 석면 질환으로 숨져

2013년 어느 날 연락을 끊지 않고 지내던 자식들로부터 연락이 왔다. 일흔둘이 된 남편 김정안이 위독하다는 소식이었다. 25년 만에 만난 남편은 이미 한창 때의 모습이 아니었다. 보기가 안쓰러울 정도로 초췌한 모습이었다. 남편은 2002년부터 기침, 가래 증상이 시작됐다고 한다. 하지만 석면을 이기지 못하고 긴 투병 끝에 2013년 숨지고 말았다. 숨지기 두 달 전에 산재 인정을 받았다.

이릴 때부터 석면 일을 해온 그녀도 구보타 쇼크 사건을 계기로 건강 검진을 받았다. 석면 질환의 일종인 흉막플라크(흉막반) 진단을 받았다. 2005년부터 1년에 두 차례 정기 검진을 받고 있다.

한 씨는 생김새나 말과 행동이 한국의 억척스런 어머니상이었다. 센난의 '석면 의인'으로 불리며 인터뷰를 주선한 센난 석면 피해 시민의 모임 유오카 카즈요시 대표도 그녀의 굴곡진 삶과 강인한 삶의 의지를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여성이 아니며 나도 한 씨에게서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고 말했다. (☞관련 기사 : 석면 기업의 후계자, 석면을 쏘다!)

센난 한인 석면 피해 여성들

이미 1984년 일본으로 귀화한 한 씨는 그동안 한국말을 배울 기회가 별로 없었는데 한국말을 제법 했다. 언제 배웠느냐고 물었다.

"한류 드라마 열풍이 일본에서 불 때, 보험 설계사 은퇴 뒤 한국문화센터에서 배웠습니다. 드라마를 한국말로 이해하기 위해서죠."

그녀는 그 뒤 남이섬을 여행해 욘사마(배용준) 모형 사진 옆에서 기념촬영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녀는 1975년과 1980년 시숙이 있던 부산에 아이들을 데리고 간 적이 있어 한국이 낯설지는 않다.

하지만 인터뷰가 끝나자 자신의 신분이 일본에서 노출되는 것을 극히 꺼렸다. 이미 일본인으로 알고 자란 자녀들과 손주들에게 영향을 줄까봐서라고 한다. 그래서 그녀의 일본 이름을 이 글에서 사용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실제로는 전혀 사용하지 않는 한고자란 이름을 쓰기로 했다. 이는 앞서 소개한 문종순 씨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뿌리를 드러내려 하지 않고 자신의 후손들이 자신의 뿌리를 알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이들의 마음이야 오죽하겠는가. 아직도 일본 사회에서 한국인의 피란 것이 당당하지 못하고 차별을 받을 수 있다는 방증이리라. 얼마 뒤면 광복 70돌을 맞는 시점에서 센난 조선인 석면 피해자의 이야기는 재일 한국인의 처지를 다시금 살펴보는 계기가 되고 있다.

▲ 구보타 쇼크 10년이 되는 6월 29일 센난의 한 주민 센터에서 있었던 센난 석면 피해 한인들 인터뷰 모습. 센난 석면 피해 시민의 모임 관계자와 센난 시 전-현직 의원이 여럿 참석했다. ⓒ한국석면추방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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