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안보의 기초가 허물어지고 있다. 눈과 귀를 의심케 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잇따라 발생하면서 군과 정부에 대한 신뢰가 총체적으로 무너지고 있기 때문이다.
충격적인 사건이 이어지면서 '군대 얘기'는 급속히 전사회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주변에선 "정말 군대에 아들 보내기 싫다"는 말을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다. 다음 달 첫돌을 맞이할 아들을 둔 필자의 아내 역시 예외는 아니다. "여보, 20년 후에는 군대에 안 가도 될까?"
군대 내에 유무형의 폭력이 관습화되고 만연하다 보면, 그 피해자는 네 가지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거나 직면하게 된다. 상당수 병사들이 그렇듯 대개의 경우는 꾹 참는다. '더러워도 참자. 국방부의 시계는 오늘도 지나간다'고 자위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제대가 문제의 끝이 아닌 경우도 있다. 7월 10일 밤 11시 경 경북 모 부대에서 근무하다 이날 전역한 이모 상병이 23층 아파트에서 투신자살을 한 것처럼 말이다.
7월 27일 22사단과 3사단에서 두 명이 목매 숨진 것처럼 군 복무 중에 자살을 시도하는 경우도 많다. 국민권익위원회에 따르면 2001년 이후 매년 60명에서 100명 가까운 병사들이 자살로 사망한다고 한다. 그런데 그 추세는 감소가 아니라 증가이다.
4월 7일 발생한 윤 일병 사망처럼 호소할 곳도 없이 참고 견디다가 전우에 의해 타살되는 경우도 있다. 보다 극단적으로는 22사단에서 총기 사건을 일으킨 임 병장처럼 총구를 아군에게 돌릴 수도 있다.
그런데 인내와 자살과 타살과 살인은 그 경계의 차이가 희미하다. 선임병의 가혹 행위를 꾹 참았다가 자신이 선임병이 되면 후임병에게 보복하는 경우를 다반사로 볼 수 있다. 이게 부대 내에 뿌리내리게 되면 '부도덕한 병영에서 도덕적인 개인'이 되기란 거의 불가능해진다. 극단적으로는 피해자가 보복할 수 있는 물리적 수단, 즉 실탄과 수류탄을 갖게 되면 언제든 가해자로 둔갑할 수 있다.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선 민주주의의 위기라고도 볼 수 있다. 신성하다는 국방의 의무는 이미 계층에 따라 차별적으로 적용되어 온 지 오래이다. 고위층과 재력가의 아들은 이런저런 루트로 군복무를 피하거나 군대에 가더라도 편한 곳으로 가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제대로 보낸 고위층 가정이 화제가 될 정도로 '유전면제'라는 인식이 사회에 만연해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꼭 짚어야 할 문제가 있다. 정책 결정에 가까이 있는 사람일수록 국방의 의무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경향이 강하다보니, 군대 문제는 '남의 문제'로 간주되기 일쑤라는 것이다. 병영 문제가 심각할수록 돈과 힘 있는 사람들은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군 복무 면제를 통해 문제를 회피하려고 한다. 반면 속절없이 아들을 군대에 보내야 하는 가정은 병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정책 결정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한마디로 민주주의 핵심인 대표성의 위기이다.
승진과 책임의 불일치도 심각한 문제이다. 지휘관들은 아랫사람이 잘하면 이걸 승진의 발판으로 삼으려 하고, 부대에 잘못이 생기면 그 책임을 부하에 돌리기 바쁘다. 장교들이 하늘에 있는 별을 따는 게 관심의 초점이다 보니 동료들은 경쟁자로, 부하들은 승진의 발판으로, 상관은 잘 보여야 할 대상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승진에 누가 될까 봐 부대 내 각종 사건 사고를 축소·은폐하는데 여념이 없다는 것은 새삼 재론할 필요도 없는 현실이 되어 버렸다.
최근 잇따르고 있는 충격적인 사건은 군의 자기정화 능력이 한계에 봉착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여 '셀프 개혁'이 아니라 문민이 주도하는 민주적 개혁 방안이 나와야 한다. 군에 대한 문민통제 확립이야말로 자유민주주의의 요체이자, 더 이상 늦출 수 없는 과제가 되고 있다.
그 출발점은 의외로 가까이에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윤 일병 사망 사건을 두고 "잘못이 있는 사람들에 대해선 일벌백계로 책임을 묻겠다"고 했다. 그런데 1차적으로 책임을 물어야 할 사람은 대통령의 바로 옆에 있다. 윤 일병에 대한 가혹 행위 및 피살을 사건 발생 다음 날 상세히 보고받고도 쉬쉬해온 당시 국방장관이자 현재 청와대 안보실장인 김관진이 바로 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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