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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는 왜 한국인의 '노예근성'을 주목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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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박정희는 왜 한국인의 '노예근성'을 주목했나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44> 5.16쿠데타, 세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여섯 번째 이야기 주제는 5.16쿠데타다. <편집자>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이야기 마당 1∼3] 한국전쟁
[이야기 마당 4∼8] 친일파
[이야기 마당 9∼15] 학살
[이야기 마당 16∼31] 해방·분단

[4월혁명, 여섯 번째 마당] 국민 죽이고 '야당 탓' 대통령, 미국도 안 지켜줬다

[4월혁명, 일곱 번째 마당] '참변은 너희 탓' 떠넘긴 대통령, 결국 쫓겨났다

[4월혁명, 여덟 번째 마당] '일본과 일전불사' 대통령, 속셈은 따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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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혁명, 열 번째 마당] 결정적 순간, 야당 지도부는 비겁했다

[5.16쿠데타, 첫 번째 마당] 박정희 쿠데타 연재는 왜 그 신문에서 사라졌나

[5.16쿠데타, 두 번째 마당] 오랜 꿈 이룬 '박통'…대한민국은 짓밟혔다

프레시안 : 5.16쿠데타 주도 세력은 정권을 잡은 후 '혁명 이념'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그런데 이들이 명확한 이념을 갖고 쿠데타를 일으켰다고 보기 어렵다는 지적도 있다.

서중석 : 5.16쿠데타를 일으킨 소위 주체 세력이라고 하는 사람들의 정치적 이념이 뭐냐에 대해 써놓은 책이 사실상 거의 없다. 쿠데타를 시작한 것이 1960년 9월(충무장에서 쿠데타 결의)이라고 한다면 1961년 5월에 이르기까지 자기들끼리 세미나를 하면서 '이렇게 정권이 잘못됐고 사회가 잘못 돌아가고 있으니까 이런 나라, 이런 사회를 만들어보자', 이와 같은 구체적 논의를 했을 법한데 그런 게 잘 안 나온다.

이집트의 나세르 쿠데타(1952년) 같은 걸 보면 장교들끼리 '어떤 국가를 만들 것인가'에 대해 상당히 오랫동안 숙의한다. 그러면서 아주 강한 반제 민족주의 성향을 보인다. 5.16쿠데타는 북아프리카나 중동 지방에서 그 당시에 있었던 쿠데타 유형들하고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중남미형 쿠데타, 그야말로 정권을 잡고 진보 세력을 치기 위한 쿠데타에 더 가까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쿠데타를 기획한 육사 8기생들이건, 행동대 그러니까 군을 이끌고 온 육사 5기생들이건 이 사람들에게 극우 반공주의, "반공 태세를 재정비·강화"한다는 '혁명 공약' 1번, 그걸 빼면 공통되는 이념이 정말 뭐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권력욕, 이것도 이 사람들에게 공통적이기는 하다. 이런 걸 빼면 중요한 동기라고 할까, 어떤 나라를 세우려고 한다든가 하는 것이 불분명하다. 반공을 제외하면 무(無)이데올로기에 가까운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난 이승만 대통령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반공을 빼면 그분도 어떤 국가를 만들려고 했는가 하는 게 불분명하다. 그 양반에 관한 자료를 참 많이 읽었는데, 아무리 읽어봐도 그분이 어떤 사회, 어떤 국가를 만들려고 하는가가 잘 나오지 않는다. 뻔한 얘기 빼놓고는 없다. 그러고는 요지부동, 처음부터 끝까지 똑같은 건 반공이다. 반공, 그건 분명하다.

주체 세력의 정치 이념? 반공을 제외하면 무이데올로기에 가깝다

프레시안 : 쿠데타 지도자인 박정희 소장은 어땠나.

서중석 : 제일 중요한 인물이 박정희라는 분인데, 그러면 이분은 뭘 좀 가지고 있었느냐. 이건 아주 중요하다.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박정희 소장한테 정치 이념이란 것이 있었느냐. 이 점에 대해선 딱히 얘기하기가 좀 그렇다. 쿠데타 직전에 쓴 글을 지금까지 아무도 찾아내지 못한 것 같다. 쿠데타 직후에는 글이 몇 편 있다. 예컨대 1961년 6월 27일과 28일 <조선일보>에 특별 기고를 했다. 이게 나중에 <지도자 도(道)>라는 아주 짤막한 책자에 들어가 있다.

처음에 쓴 글을 보면 이렇게 돼 있다. '한국인이 타율에 지배받던 습성이 제2의 천성이 되었다'는 식으로 규정하고 그걸 상당히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이른바 식민 사관 가운데서 타율성론하고 저열한 민족성론을 들고나왔다. 타율성론은 식민 사관에서 '우리가 옛날부터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아서 굴종적이다', 그런 얘기를 하는 것이다. 저열한 민족성론은 식민지 근성이라든가 노예근성, 당파성, 아부와 굴종만 하고 자립성이 약한 근성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것 아닌가.

박정희 이분은 이런 생각을 굉장히 강하게 갖고 있었다. 그러니까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일제 식민 사관에 기반을 둔 저열한 민족성론, 식민지 근성을 고쳐야 한다는 주장, 그리고 극단적인 반공 노선 같은 것을 제외하면 박정희 소장한테 무엇이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프레시안 : 그런 생각을 드러낸 것은 <조선일보> 기고만이 아니다.

서중석 : 이분이 쿠데타 직후의 생각을 드러낸 것은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발행한 <최고회의보>라는 것을 통해서였다. 이걸 봐도 반공을 빼놓고는 별 내용이 없다. 창간호가 1961년 8월호라고 해서 나오는데 이걸 보면 '4.19 이후 반공 국시를 소홀히 하여 국가 존립의 위기를 자초했다'고 돼 있다. 장면 정권이 그렇게 했다는 주장이다. 1961년 10월호에는 '우리 민족의 활로'라는 글이 실려 있다. 난 여기에 이분의 '혁명 이념'이 들어 있지 않겠느냐고 생각했는데, 여기에도 아주 강한 반공 의식만 드러나 있다. '우리는 섣불리 통일을 서두름으로써 공산당의 계책에 빠져서는 안 된다.' 그러고는 투철한 민족정신을 가져야 한다고 돼 있는데, 글 자체에서는 이것(민족정신)이 뭔지를 잘 알기가 어렵게 돼 있다.

그다음 <최고회의보>에는 '8.15 해방과 우리 민족'이란 제목의 글이 실려 있다. '국토 양단과 민족의 분열이라는 비극과 불행을 초래한 현실의 원인은 첫째로 두말할 것도 없이 우리 민족 자체에 있다.' 이것도 약간 놀라운 주장이다.

프레시안 : 어떤 면에서 그러한가.

서중석 : 1950년대에 나온 중요한 글들에는 대개 '우리나라가 분단된 건 미국과 소련이라는 외세에 의해서'라고 돼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순전히 소련의 흉모에 의해 그렇게 된 것이라는 식으로 소련한테만 책임을 물었다. 그런데 이 양반은 그게 아니라 '우리 민족 자체에 있다. 우리 민족성에 문제가 있어서 이런 일이 생긴 것이다'라는 쪽으로 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다른 사람들하고는 다른 자신의 독특한 주견을 가진 분이다.

이 글의 뒤에 가면 이렇게 돼 있다. '지금 북한 땅은 소련 주구들에 의한 철저한 세뇌 교육으로 말미암아 민족의식은 거의 마비되어 가고 있다.' 여기서도 민족의식이 뭘 가리키는 건지 명확히 알 수는 없는데, 짐작이 조금 가는 점은 있다. 하여튼 강한 반공 의식을 드러내면서 민족정신, 민족의식이라는 말을 쓰는 정도임을 볼 수 있다.

이 양반은 1962년 11월호 <최고회의보>에 '임인년을 보내며'라는 글을 썼다. 여기에도 아주 강렬하게 장면 정부를 비난하는 이야기를 빼고는 별로 내용이 없다. '민주적 국시를 반역하여', 장면 정부가 그렇게 반역했다는 것이다. 장면 정부가 민주적 국시를 반역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조국을 공산 괴뢰 집단에게 넘겨주고자 한 반국가 행위자'라고 장면 정부를 비난하면서 '이 정권을 심판해야 한다'고 나온다. 이게 무슨 정치 이념이 될 수도 없거니와 사실과는 너무나도 다른 주장 아닌가.

▲ 박정희 전 대통령은 현대사에서 평가가 극명하게 엇갈리는 문제적 인물이다. 사진은 2011년 11월 14일 박 전 대통령 생가(경북 구미) 부근에 세워진 고인의 동상 제막식 모습. 박근혜 대통령이 밝은 표정을 짓고 있다. ⓒ연합뉴스

일제 식민 사관과 박정희의 세계관

프레시안 : 장면 정권은 4월혁명 후 치러진 선거를 통해 합법적으로 탄생했다. 또한 이승만 정권, 박정희 정권과 마찬가지로 반공을 중시했다. 그런 장면 정권을 '민주적 국시를 반역한 친북 반국가 행위자'로 몰아가는 건 억지 주장이다.

서중석 : 이런 것들 말고도 이분 주장과 관련해 아주 중요한, 그래서 여러 책에서 인용되는 게 있다. 하나는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직접 쓴 <우리 민족의 나갈 길>이고 또 하나는 소설가 이병주가 쓴 <대통령들의 초상>이다. 박정희는 1962년에 <우리 민족의 나갈 길>을 썼고 1963년에 <국가와 혁명과 나>라는 책을 썼다. 둘 다 여러 사람이 집필에 참여했다. 그렇긴 하더라도 박정희의 생각이 두 책에 상당히 들어 있어서, 박정희가 어떤 사람인가를 알게 하는 데 그 이후에 나온 책들보다는 이 두 권의 책이 상당히 유용하다.

<국가와 혁명과 나>는 1963년에 나와서 그런지 윤색이 많이 돼 있다. 그런데 어투조차 아주 투박하게 돼 있는 게 바로 <우리 민족의 나갈 길>이다. 제목도 재미나지만 박정희 이분의 생각이 가장 잘 드러나 있는 게 이 책이라고 생각한다. 박정희는 '혁명 이념'이라는 말을 1960년대 내내 무척 많이 쓴다. 그걸 위해 5.16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이 사람의 정치 이념 또는 '혁명 이념'을 제일 잘 알 수 있다면 이 책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박정희 이분이 이것 이상으로 솔직하게 쓴 것은 없다.

프레시안 : <우리 민족의 나갈 길>에는 어떤 내용이 담겼나.

서중석 : 머리말을 보면 핵심은 두 가지다. 유신 체제와도 긴밀히 연결되는 부분이 있다. 하나는 민족성 이야기다. 머리말에 '첫째로 지난날 우리 민족사상에서 악의 유산을 반성하고', 이런 대목이 나온다. 나쁜 유산이 우리 민족사에 많았다는 것이다. 이 민족성 이야기는 유신 체제에서는 많이 안 나오지만, 일제 때 친일파와 일본 관학자들이 많이 주장한 것이다. '이조 당쟁사, 일제 식민지 노예근성 등을 깨끗이 청산하여 건전한 국민도(國民道)를 확립하는 일이다.' 이 사람한테 혁명은 이것이더라. 인간 혁명이 있지 않고서는 사회 재건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본문에 우리 민족이 얼마나 당쟁이라든가 나쁜 민족성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이야기가 자세하게 나온다. '이러이러한 것들이 일제의 식민 사관이다'라고 우리가 많이 가르쳤던 그런 사항이 아주 많이 들어 있다. 물론 이 시기에 다른 사람들도 식민 사관에 많이 젖어 있을 수 있었다. 식민 사관을 털어버릴 만한 여건은 아직 안 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박정희 이분은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것을 자기의 중요한 정치 이념, '혁명 이념'이라고 보고 있고 이게 바로 인간 혁명과 직결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 역사를 굉장히 부정적으로 본 것이다. 물론 나중에 가서 쓴 책에서는 달라진다. 이선근 같은 사람이 관여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우리 역사 훌륭하다'고 한다.

그다음에 머리말에서 중요한 말을 또 하나 하고 있다. '직수입된 민주주의가 한국 현실 속 깊이 뿌리박히지 못하고 실패한 해방 후의 역사가 교훈하듯이 한국화된 복지 민주주의의 토대를 구축해야 한다.' 여기서 복지 민주주의가 무슨 말인지 잘 알 수가 없는데, 앞에 있는 '한국화된'이라는 말은 중요하다. '복지'라는 말을 빼면 된다. '한국화된 민주주의',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유신 시대에 그렇게 많이 듣던 '한국적 민주주의'다. 이게 바로 그거다. 직수입된 민주주의, 서유럽 민주주의는 우리나라에 안 맞는 것이라는 주장을 이분이 여기에서 하고 있다. 그 부분에 대해서도 뒤에 여러 번 나오고, <국가와 혁명과 나>에서도 또 여러 번 강조된다.

프레시안 :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말이 울려 퍼진 유신 체제는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아주 먼 시기였다.

서중석 : 그렇다. 가령 '혁명기에 있어서 민주주의' 같은 데에서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서구적인 민주주의가 아닌 즉 우리의 사회적, 정치적 현실에 알맞은 민주주의를 해나가야만 된다고 생각한다.' 머리말에서 한 말을 다시 한 번 명시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렇게 설명한다. '바로 이러한 민주주의가 다름 아닌 행정적 민주주의다.' 이 양반이 다른 데서는 영어 안 쓰는데 여기서는 영어까지 써줬다. administrative democracy.

부제가 '혁명기에 있어서 민주주의가 행정적 민주주의'다. 일부 정치학자가 이걸 주목해서 설명하고 그랬다. 뒤에 이걸 또 설명하는 대목이 들어 있다. 뭐냐 하면 '민주주의를 정치적으로 당장 달성할 것이 아니라', 이것이다. 이 양반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걸 하자고 하면서 그건 민주주의가 아니라는 걸 사실상 여기서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양반의 기본 생각은, 유신 때도 그렇고, 민주주의가 우리한테 당장 필요한 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자기가 하려는 건 민주주의인데 그 민주주의는 한국적 민주주의다, 이런 식으로 두 가지 논리를 항상 동시에 주장한다. 여기서도 그렇다.

'민주주의를 정치적으로 당장 달성할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과도기적인 단계에 있어서는', 유신 시대에도 이런 말을 참 많이 썼다. 그 방법으로서 민주주의를 '행정적으로 구현해야 할 것', 이런 주장을 편다. 초점이 바로 거기에 있다.

1960년대에는 이걸 '행정 정치', '행정 독재'라고도 불렀다. 행정적인 처리라는 건 지시를 내려서 해나간다는 것이다. 주로 그걸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정치학자들 중에는 '이 시기 인도네시아 지도자인 아흐메드 수카르노의 교도 민주주의(guided democracy)를 이런 식으로 바꿔 얘기한 게 아니냐',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이건 1970년대에 가면 선명하게 '한국적 민주주의', 유신 체제로 나온다. 하여튼 시기에 따라 대응하는 방법은 달랐지만, 박정희가 줄기차게 1950년대 또는 그 이전 언젠가부터 이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10.26 그 순간까지 견지하고 있었던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볼 수 있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식민 사관 + 극단적인 반공 노선 + 군인 정신

프레시안 : '행정적 민주주의'라는 주장은 중국의 쑨원이 틀을 잡고 장제스가 발전시킨 군정(軍政)-훈정(訓政)-헌정(憲政)론과도 닮은 구석이 있다. '혁명 직후 군정, 즉 군사 독재를 하고 그 후엔 헌정으로 바로 가는 대신 국민의 정치 수준이 낮은 만큼 훈정을 편다'는 것인데, 현실에서는 독재를 뒷받침하는 논리로 쓰였다. (관련 기사 : 역사적 관점에서 본 중국의 개혁 개방)

서중석 : 비슷한 점이 있다. 이제 <대통령들의 초상>에 나오는 대목을 살펴보자. 이병주는 여기 말고 다른 데에서도 이와 비슷한 주장을 했다. 이병주는 당시 <국제신보> 주필 겸 편집국장이었다. 1960년 1월 박정희가 부산 군수기지사령관이 된 후, 이병주는 황용주 <부산일보> 주필한테서 '박 사령관을 만나자'는 연락을 받고 몇 번 함께 만났다. 황용주는 박정희하고 대구사범학교 동기다. 박정희가 쿠데타 생각도 있고 하니까 언론계 인사를 만나려 한 건지, 유명한 친구니까 만나려고 한 건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럴 때 이 사람은 '나라가 이러면 되겠느냐', 이런 이야기를 여러 번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놈 저놈 모두 썩어빠졌다'고 열변을 토하는데, 황용주는 박정희를 이때만 해도 가르치려고 했다고 돼 있다. '민주주의란 게 어떤 것이다' 이야기하면, 박정희가 강한 어투로 '민주주의고 나발이고 집어치워. 그런 쓸데없는 소리 말고 술이나 마시자'라며 또 술잔을 드는 식이었다.

한 번은 박 장군하고 황용주 사이에 격론이 벌어졌다고 한다. 박 장군이 또다시 일본의 1932년 5.15쿠데타, 1936년 2.26쿠데타를 일으킨 장교들을 들먹이면서 찬사를 늘어놓으니까 황용주가 '너 무슨 소리 하냐. 그자들은 천황 절대주의자들이고 케케묵은 국수주의자들 아니냐'고 했다. 그러니까 박 장군이 '일본의 군인이 천황 절대주의 하는 게 왜 나쁘냐. 국수주의가 어째서 나쁘냐'고 흥분했다고 한다.

프레시안 : 이때 황용주가 '그런 국수주의자들이 일본을 망쳤다'고 주장하자, 박정희는 '국수주의자들의 기백이 오늘의 일본을 만들었으며 우리는 그걸 배워야 한다'고 강하게 반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중석 :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 쿠데타를 바로 이 2.26쿠데타하고 많이 연결해 설명하지 않나. 소장 장교들이 1932년 5.15쿠데타 때는 수상을, 1936년 2.26쿠데타 때는 대신이던 사이토 마코토 등을 죽이고 그러지 않나. 사이토 마코토는 3.1운동 직후 조선 총독으로 왔던 그 사람이다. 어쨌건 군국주의에 심취한 소장 장교들이 일으킨 쿠데타들인데, 청년 장교들 사이에 퍼져 있던 국가주의, 국수주의, 천황 절대주의를 강조하는 황도파 일본 군인 정신이 잘 드러난 사건들이다. 그와 함께 실질과 능률을 절대시하는 군국주의 파시즘, 반의회주의, 반서구주의가 강렬하게 표출된 쿠데타들이지 않나.

이런 쿠데타에 대해 박정희 장군이 굉장히 강한 친연성을 주장했다. 아까 얘기한 우리 민족의 이른바 '저열한 민족성', '식민지 근성' 같은 문제점에 대해 인간 개조, 인간 혁명 같은 걸 한편으로 들고나오는 것도 이분의 '혁명 이념'이 되고, 극단적인 반공 노선이야말로 중추라고 볼 수 있다. 그와 함께 또 하나 중요한 것이 만주군관학교 시절부터 굳건히 견지하고 있던 군인 정신이다. 이게 바로 박정희가 1960년대에 계속 얘기하는 '5.16 혁명 이념'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마흔다섯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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