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최근 제출된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의 보고서가 꽤나 충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모양이다. 올 2월 17일자(인터넷 판) 영국의 <가디언> 지에는 중국으로 탈출했다가 임신한 상태로 북한으로 강제 추방된 어느 여성의 사연이 실려 있다. 증언에 따르면, 그 여성의 아이는 세상에 태어나기는 했으나 단지 아빠가 중국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의혹만으로 출생 후 곧바로 잔혹하게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도무지 믿기지는 않지만, 북한이 공식적으로 떠받드는 극단적인 좌파 민족주의 이념을 배후에 두고 생각하면 저 '민족적 순혈성'에 대한 집착이 낳은 만행은 어쩐지 자연스러워 보이기까지 한다. 3대 세습이나 얼마 전에 공개적으로 벌어진 장성택 처형 사건도 그렇지만, 처참한 인권 침해가 구조적으로 일상화되어 있는 북한의, 특별히 북한다운 상황을 단적으로 상징해 주지 않을까 싶다.
한편 지금 남한에서는 바로 그와 같은 야만적 인권 침해 국가 북한을 추종한다는 혐의를 받고 있는 통합진보당과 이석기 의원에 대한 단죄 여부와 정도를 놓고 심각한 사회적 갈등이 벌어지고 있다. 틀림없이 내란음모 사건이나 진보당에 대한 해산 청구 소송은 국정원의 대선개입 의혹을 덮으려는 현 정권의 정치적 공작 차원에서 시작된 일이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 진보 정치 주류의 북한에 대한 모호한 태도는 명백한 사실이고 국정원이나 검찰이 그들에게 덮어씌운 혐의도 완전히 근거가 없지는 않다는 것이다. 참으로 곤혹스러운 상황이 아닐 수 없다.
현 집권세력의 음모적인 '조작'과 '과잉'에 맞서 민주적 법치국가의 근본 틀을 지켜내야 한다는 과제야 너무도 분명하다. 그러나 [동시에] 어쩌다 한국의 진보 정치가 이토록 절망스럽게 '종북'의 덫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되었는지를 근본적으로 성찰하여 그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과제 또한 조금도 덜 절실해 보이지는 않는다. 두 과제가 결코 모순될 것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한국 진보는 그 안의 모든 세력이 스스로가 채운 이념적 올가미 때문인지 지금 완전히 길을 잃고 헤매며 어느 하나도 제대로 완수해 내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국 진보는 지금 어디로 가야 하는가?
어떤 면에서 지금 상황은 민주화 직후의 80년대 말과 90년대 초의 상황과 닮은 데가 있다. 그 민주화 항쟁을 주도했던 이른바 486 세대는 대부분 어떤 식으로든 마르크스-레닌주의와 김일성주의의 세례를 받았고 또 바로 그 틀 안에서 자신들이 온 삶을 걸고 참여했던 운동의 정체성과 의미를 한갓된 '부르주아 혁명'쯤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시기 즈음해서 갑자기 그들이 이상 사회쯤으로 여기고 있었던 동독의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더니 소련마저 해체되었고, 그 여파로 북한도 초유의 위기를 겪는 등 엄청난 세계사적 지각 변동이 일어났다.
당연하게도 지금 우리 진보 정치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그 세대의 이념적 좌표 또한 크게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때도 그들은 진보 세력이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애타게 물으며 답을 갈구했었다. 나는 한국의 진보 정치가 지금과 같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것은 이 때 했어야 할 발본적인 이념적 성찰을 제대로 하지 못한 데에 가장 큰 원인이 있다고 여기는 편인데, 지금이라고 제대로 그 일을 잘 해낼 수 있을지 걱정이다.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리고 동구 여러 나라들에서 (서구에서는 이미 오래 전에 거쳤던 시민혁명을 사회주의/공산주의 혁명 이후에 뒤늦게 이루어내었다는 의미에서) '만회 혁명'(하버마스)을 일으켰던 '시민사회'의 정체가 궁금하던 차에, 다름 아닌 그 시민사회가 진보 운동의 새로운 대안을 제시한다는 주장을 담고 있는 책이었다. 당시의 나에겐 너무 생소하기만 했던 이론과 주제를 다룬 두꺼운 영어책을 대충이라도 읽고 이해해 보려고 꽤 긴 시간을 고투했던 기억이 새롭다.
내가 결국 시민사회를 학위 논문 주제로 삼았던 데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던 이 책이 원저가 나온 지 20년도 더 지난 지금 우리말로 번역되어 나왔다. 그러나 너무 늦었기는커녕 어쩐지 아주 시의 적절하게 출간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시민사회와 정치이론>의 새삼스러운 번역 출간이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우리 진보 정치가 이미 오래 전에 끝냈어야 할 성찰과 자기혁신을 지금이라도 새롭게 시작해야 할 필요와 그 나아가야 할 방향을 일깨워 주는 듯해서다.
2. 이 짧은 글에서 방대한 분량의 책 내용을 그 얼개만 그려보려 해도 벅찰 것이 틀림없다. 우리 사회의 맥락을 염두에 두면서 이 책이 제시하는 새로운 급진민주주의/진보 기획의 기본 방향만 짤막하게 소개해 볼까 한다.
한국의 진보 정치는 왜 지금과 같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려 있을까? 앞서 했던 지적을 좀 더 구체화 시키자면, 그 주범은 우리 진보 세력 일반의 '민족'과 '계급'에 대한 지나치게 완고한 집착이 아닐까 싶다. 그동안 한국 사회에서 민족-진보와 계급-진보는 지겹도록 싸우며 상호 불신을 키워 와서는 지금은 서로 거의 적대적이기까지 되었는데, 문제는 단순히 둘 중 어느 쪽이 더 옳은가를 따지는 데 있지 않다. 또 흔히 지적하듯이, 그 둘 중 민족-진보가 더 큰 세력을 형성하게 되었다는 사실에도 있지 않다.
한국 진보 정치가 민족이든 계급이든 모두 사실은 진작 버렸어야 할 낡은 패러다임들을 계속해서 부둥켜안고는 오히려 그 각각을 급진화하는 방향으로만 나아왔다는 것, 바로 여기에 가장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그리고 이는 우리 진보 세력 일반의 지적 게으름과도 깊은 관련이 있을 것 같다.
<시민사회와 정치이론>이 제시하는 관점에서 단순화시켜 말한다면, 사실 그 낡은 패러다임들과의 결별은 구소련과 동구가 몰락하고 북한이 결정적 위기에 처했던 그 때부터 벌써 이루어져야 했었다. 그리고 진보 세력은 바로 그 '역사적 공산주의'(발리바르) 체제를 해체시키고 사회의 민주화를 추동했던 시민사회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했다. 놀랍게도 그 시민사회는 또한 라틴 아메리카의 여러 나라들에서 이루어진 민주화의 원동력이기도 했다. 비록 이 책이 직접 다루고 있지는 않지만, 한국이나 대만 및 필리핀 같은 동아시아의 국가들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어디 그 뿐인가. 이 시민사회는 무엇보다도 서구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우리는 아직 문턱조차 넘지 못했지만) 복지국가가 성공적으로 안착되면서 나타난 숱한 모순들을 해결할, 그리고 여러 차원의 이른바 '신사회운동'의 문제 제기들을 수용할 잠재력도 가지고 있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이 새로운 급진민주주의 기획에서는 사회의 진보를 추동하기 위한 규범적 잠재력은 더 이상 계급이나 민족 따위의 추상적이고 허깨비 같은 거대 주체들 속에 있는 것일 수 없다. 그것은 서로 소통하고 연대하며 모든 성원의 존엄성이 보장되는 인간적 삶의 관계를 추구하는 '생활세계'로서의 시민 사회 속의 일상적-해방적 저수지에 있다. 그리고 사회 진보의 평가 잣대도 단순히 사회 성원들 사이의 분배적 불평등의 해소 같은 것이 아니라 모든 시민의 인간적 존엄성의 보호와 실현을 담보할 '더 많은 인권'과 '더 많은 민주주의'다.
물론 여기서 인권과 민주주의는 단순히 서구 자유주의 전통의 틀 속에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그 한계를 넘어서 참여민주주의적, 공화주의적 계기들을 함께 포함할 수 있는 더 높은 수준에서 이해된다. 다시 말해 인권과 민주주의는 서로가 서로를 전제하고 서로가 서로를 강화하는 그러한 관계에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런 이해는 이 새로운 진보 기획이 전통적인 급진적 해방 기획이 빠지곤 했던 성급하고 과도한 국가주의의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준다.
이 기획의 '자기제한적 급진주의'는 국가에 의해서도 또 경제 쪽으로부터도 시도되는 인간적-민주적 생활세계에 대한 식민화의 시도에 맞서 그 힘들을 제어하기 위한 정치적 개입과 재갈 물리기를 시도한다. 하지만 결코 스스로 절대권력화하여 국가와 경제 위에 군림해서 지배하려는 오만의 함정에 빠지지는 않으려 하는 자제력을 갖고 있다. 이 시민사회의 정치는 그 핵심에서 '영향력의 정치'일 뿐이다.
저자들은 우리에게 아마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당신들은, 멀리는 4·19 혁명에서부터 지금의 진보 세력이 주도했지만 스스로는 그 의미를 오해하고 있는 87년 6월 항쟁을 거쳐 가까이는 '광우병 촛불'에 이르기까지 세계의 다른 어떤 지역이나 나라들에 비해서도 매우 찬란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한국 시민 정치의 유구한 전통을 새로운 시민사회 개념과 이론틀 속에서 재해석하고 재구성하는 데에서만 미래의 진보 정치가 나야가야 할 길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당신들이 지금껏 고집해오던 노동과 시민의 이분법 따위가 들어서서는 안 된다. 노동운동 또한 노동자들의 인간적 존엄성을 지켜야 한다는 시민사회의 일상적인 해방적 저수지에서 발원하는 규범적 잠재력이 발현된 결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3. 원저가 나온 지 20년이 넘었다. 때문에 <시민사회와 정치이론>의 많은 내용들은 그 성격상 이후 역사의 전개 양상에 비추어 평가받아야 할 많은 측면들을 가지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이 책 출간 이후 전 세계에서 더욱 더 기승을 부렸던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부정적 영향력은 시민사회 중심의 영향력 정치를 통한 사회의 인간화와 민주화를 위한 프로젝트가 세계의 여러 지역에서 거둔 성공을 번번이 무화시키거나 왜소화시킨 것처럼 보인다. 사회적 양극화 문제나 경제민주화 같은 과제에 대해 시민정치적 관점에서 더 심도 깊은 고민이 덧붙여져야 할 것이다.
하버마스는 <사실성과 타당성>에서 시민사회의 정치와 함께 무엇보다도 민주적 법치국가의 해방적 잠재력에 더 많은 초점을 두었더랬다. 꼭 하버마스와 같은 방식은 아니더라도, 우리의 새로운 '시민적 진보'의 기획은 제도화된 정치에 의해 번번이 배신당하곤 하는 자기제한적 급진주의에만 만족하지 말고 정치 사회, 나아가 국가의 근본적인 민주적 재구성이라는 문제에도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싶어 하는 이야기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언급한 이 책의 한계들을 극복하는 일은 물론이거니와, 특히 우리 시민 정치 전통을 나름의 방식으로 재해석하고 재구성하는 작업은 전적으로 우리 스스로의 몫이다. 그 동안 적지 않은 시도들이 있었고 또 성과도 없지는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솔직히 아직 갈 길이 멀다. <시민사회와 정치이론>의 새삼스러운 번역 출간이 한국의 시민적 진보의 이념을 새로이 이론화하고 실천적으로 착근시켜 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주체들을 더욱 더 분발할 수 있도록 하는 촉매 역할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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