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無甘露王如來(나무감로왕여래)', 南無千百億化身釋迦牟尼佛(나무천백억화신석가모니불)' 등 불교용어가 적힌 크고 작은 종이들 스무 장 정도가 가로로 길게 달려 세차게 불어대는 바람에 어지러이 나부낀다. 그 앞 땅바닥에 소반 두 개가 놓여 있는데, 한 곳에는 짚신 세 켤레와 종이로 만들어진 검은색 한복 세 벌이 가지런히 놓여있고, 다른 상에는 여성용과 남성용의 울긋불긋한 종이 한복 두 벌과 사과와 배, 감이 올려진 접시 하나 그리고 북어 한 마리를 올려놓은 접시 하나가 놓여 있다. 바닥에는 종이로 만든 버섯 두 켤레가 놓여있다. 궁금한 얼굴을 하고 들여다보고 있으니 바쁘게 오가던 보살님이 말을 건넨다.
"왼쪽의 한복 2벌은 돌아가신 아기 엄마와 죽은 태아를 뜻하고, 오른쪽의 검은 한복 3벌은 죽은 사람을 데리고 오가는 사자(使者)를 뜻해요."
세상 떠난 엄마에게 절하는 7살 아들
2년 전 이날(음력으로 1월 6일), 가습기 살균제 피해로 현주 씨가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7개월 동안 품고 있던 태아는 엄마보다 4일 먼저 떠났다. 살아남은 그녀의 남편 성우 씨와 유치원에 다니는 아들 재상이 그리고 현주 씨의 시댁과 친정 부모님이 이날 개명사에 모여 그녀와 아기의 혼을 달래는 진혼제(鎭魂祭)를 지냈다. 원통한 영혼이 이 땅을 떠나지 못하고 있을지 몰라 잘 달래어 하늘로 보내주려는 취지다. 영혼을 데리러 저승사자 3명이 왔고 같이 먼 길을 떠나야 하기 때문에 노잣밥을 넉넉히 준비했다고 말씀하시며 보살님이 밥과 국을 소반에 내려놓으신다.
스님의 진혼 독경 그리고 춤꾼의 바라춤이 한 순배 돈 후, 망자의 가족들은 돌아가며 절을 올렸다. 이때 재상이도 불려 가서 절을 올렸다. 아빠는 재상이의 무릎을 꿇리고 엎드리게 해주었다. 재상이가 엎드린 머리맡의 제상 위 작은 액자 속에서 현주 씨가 옅은 미소를 띠고 있다. 결혼 전에 찍은 사진이라고 했다. 그 옆에는 '亡 夫人淸州郭氏賢珠(망 부인청주곽씨현주)'라고 쓰인 제문이 세로로 붙었다.
이 세상 누구에게도 얼굴을 보여주지 못했던 재상이 동생은 사진도 이름도 없다. '亡 順興安氏落胎靈駕(망 순흥안씨낙태영가)'라고 쓰인 제문만이 한 생명이 이 땅에 잠시 왔다 갔음을 말해줄 뿐이다. (靈駕(영가)는 '영혼이 타는 곳', 다시 말해 '사람의 모든 근원'이란 뜻이란다). 아기의 제문은 엄마와 손을 잡고 있는 듯 현주 씨 제문과 나란히 놓였다. 마지막으로 황망한 표정으로 밖에 내내 서있던 현주 씨의 친정아버지가 잠시 절당에 들어가 먼저 부처님 앞에 한 번 그리고 딸의 제상 앞에서 두 번 절을 올린다.
사찰 주변으로 울려 퍼지는 독경소리, 바람에 나부끼는 종이 소리, 바라춤 음악 소리, 춤꾼의 소복이 스치며 내는 소리 그리고 남은 식구들의 울음 소리와 한숨 소리··· 그 소리들 사이로 서러운 현주씨의 영혼이 그리고 가여운 아기의 영혼이 가만이 가만이 달래졌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 천수를 다하기는커녕 빛도 보지 못한 한 영혼이 한쪽 손은 엄마의 손을 꼭 잡고, 다른 한쪽 손은 사자에게 손을 잡힌 채 마지 못해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떼면서 짧지만 한 많았던 이승을 떠나고 있었을 것이다.
▲ 아내와 둘째 아기의 진혼제를 지내는 날. 성우 씨가 아들을 목말 태운 채 아내와 아기가 입고 먼 길 떠날 종이한복을 바라보고 있다. 오른쪽 작은 상에는 먼 길을 안내할 사자를 상징하는 검은 종이한복 3벌이 놓여있다. ⓒ환경보건시민센터 |
성우 씨는 임신한 상태였던 아내 현주 씨에게 이상이 생긴 날을 2011년 1월 17일로 기억하고 있다. 현주 씨는 '배가 자주 뭉치고 몸이 붓는다'고 했었다. 기침, 가래, 호흡곤란, 열 그리고 가슴 통증을 호소했다고, 지난해 봄에 이루어진 한국환경보건학회의 방문조사에서 답했다. 그날 곧바로 다니던 산부인과로 갔는데 '별 이상이 없다'고 했다. 그리고 약 2주일이 지난 2월 1일 오후. 갑자기 숨이 차다고 하여 119 구급차를 불렀고 대학병원 응급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현주 씨는 다시 집에 돌아오지 못했다. 2월 3일 저녁 현주 씨가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환자 면회가 안 되는 곳이라 밖에서 대기하는 보호자를 위해 산모 뱃속의 아기 박동소리를 스피커로 들려줬는데 2월 4일 갑자기 박동소리가 희미해졌다. 급히 제왕절개 수술을 했지만 아기는 죽어서 나왔다. 엄마의 폐 기능이 크게 떨어져 태아가 가사(假死)상태에 처한 것이라고 의료진이 설명해주었다. 엄마 현주 씨의 상태는 더욱 나빠졌다.
폐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할 경우 강제로 산소를 주입하여 혈액을 순환시켜 호흡하게 하는 기계인 에크모가 두 번 가동됐다. 마지막에는 에크모를 24시간 계속 돌렸다. 결국 2월 8일 현주 씨의 호흡이 멈췄다. 키 165센티미터, 몸무게 75킬로그램. 술, 담배도 전혀 안 하고 건강했던 그녀의 마지막 일주일은 그렇게 참혹했다. 2008년 3월 1일 결혼하여 그 해 9월 아들을 두었고 얼마 후면 결혼 3주년을 맞을 터였다. 둘째를 낳고 오순도순 행복한 가정을 꾸려 나갈 서른넷 생일을 앞둔, 대한민국의 평범한 주부였던 현주 씨는 그렇게 유명을 달리했다.
시아버지의 광화문 영정 시위…"우리 며느리를 누가 죽였노"
현주 씨가 떠난 지 6개월이 지난 2011년 8월 31일. 보건복지부 산하 질병관리본부는 원인미상 폐 손상으로 산모들이 사망한 사건의 원인이 가습기 살균제라고 밝혔다. 뉴스를 접한 성우 씨는 망연자실했다. 감기에 걸리지 말라고, 아파트 공기 좋지 않다고 성우 씨가 직접 인터넷에서 찾아 구입했고 손수 가습기 물통에 넣어주곤 했던 가습기 살균제 '세퓨'가 원인이었다.
덴마크산이라던 그 수입제품이 아내와 아기를 죽게 했단 말인가. 2011년 11월 말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대회'가 열린 서울 중구 정동 프란치스코 회관 4층 강당 입구. 한 노인이 다가와 피해자 기록지에 적었다.
"우리 며느리를 누가 죽였노."
부산에서 올라온 그 노인은 현주 씨의 시아버지였다. 가을비가 제법 내리던 그 날, 그는 광화문 사거리로 자리를 옮겨 열린 기자회견장에서 내내 현주 씨의 사진액자와 하얀색, 얼굴 없는 영정 하나를 내내 들고 서 계셨다.
지난 11월 1일 국회에서 열린 환경부 국정감사에서 민주당 장하나 의원은 질병관리본부로부터 전달받은 가습기 살균제 피해신고 사례가 모두 541건이고 사망자는 144건이라고 밝혔다. 환경보건시민센터와 질병관리본부로 접수된 사례를 모은 것인데, 서울대보건 대학원에 맡겨 진행되는 판정과정에는 이들 신고사례 중 상당수가 제외되어 있다.
신고자와 연락이 끊긴 경우도 있고, 신고자가 조사를 거부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제 와서 돈 몇 푼 받겠다고 그 참혹한 기억을 떠올리기 싫다', '이미 가슴에 묻었다. 다시 거론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가 대부분이다. 태아 사망 신고사례들은 인과관계와 판정 자체가 아예 불가능한 경우로 제외되어 있다. 대부분 산모와 함께 사망했거나 산모라도 살리기 위해 조기출산을 시도했지만 사산한 경우들이다.
문제는 산모가 공기를 호흡하는 과정에서 노출되었던 가습기 살균제 성분이 뱃속의 태아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조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엄마의 폐 기능을 저하시키고 폐를 망가뜨린 가습기 살균제 성분이 태아에게는 직접적 영향을 주지 않았을 가능성과 탯줄을 타고 태아에게 직접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 모두 존재한다. 즉, 사산의 원인이 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직접적 영향일 가능성과 간접적 영향일 가능성이 모두 있다. 환경보건시민센터로 접수된, 태아 관련 신고 사례 중에 태아 사망이 모두 3건인데 1건은 산모와 함께 사망한 경우고 2건은 산모는 생존하고 태아만 사산한 경우다. 가습기 살균제와 관련성을 생각하지 못해 신고하지 않은 유사 사례가 더 많을 것이다.
가족 4명 모두가 피해 신고된 태은 씨네의 경우, 실은 신고자 수가 5명이다. 산채로 태어나지 못한 셋째, 즉 태아 사망 사례가 하나 더 있기 때문이다. 피해자 대회에도 나오고 가끔 전화 통화하는 태은 씨는 항상 '피곤하고 쉰듯한' 목소리가 난다.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한 이후의 현상이다. '엄마가 늘 쉰 목소리를 내고 폐렴에 기침을 달고 살 정도로 심각한 영향을 받았는데 여리디여린 태아는 어떻게 되었겠느냐'는 태은 씨의 물음은, 가습기 살균제 피해 사건에서 아직 밝혀지지 못한 여러 의문 중 하나다.
다행히 산모와 태아가 모두 생존한 사례이긴 하지만 엄마의 호흡상태가 좋지 않아 조기 분만했는데 아기의 건강이 좋지 않은 경우도 있다. 또 멀쩡히 잘 자라는 경우도 없지 않다. 태어난 아기의 상태가 좋지 않은 경우, 뱃속에서 가습기 살균제에 의한 직접 영향 때문일 수도 있고 엄마의 호흡 기능과 심장 기능이 떨어져 생긴 간접적 영향일 수도 있다. 대부분의 피해 사례가 가습기 살균제 역학조사가 알려진 2011년 8월 31일 이전에 발생한 경우들이다. 임신 때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하다가 출산 후에도 계속 사용했기 때문에 영유아 환자의 경우 태아 때 가습기 살균제의 직접 영향을 받았는지 구분하기 어렵다. 하지만 태아 사망 사례가 있기 때문에 태아의 직접 영향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환경오염은 어머니 자궁 속에서 시작된다"
엄마에게 노출된 환경오염 문제가 태아에게 그리고 출산 결과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인류는 20세기에 알게 되었다. 지구촌 최악의 환경오염 사건인 일본 미나마타병과 독일 탈리도마이드베이비 사건들을 통해서다. 이전까지는 태아는 탯줄이 보호하며 나쁜 물질을 걸러낸다고 믿어왔다. 그러다 선천성 미나마타병 환자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엄마가 섭취한 수산물에 들어있던 수은이 탯줄을 타고 태아에게 직접 전달되어 뇌와 장기에 치명적 영향을 주었고 그 결과 뱃속에서 아기가 죽거나 태어나더라도 뇌성마비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미나마타병 사건 발생 후 십 수 년이 지난 후인 1970년대 후반에야 겨우 밝혀졌다.
탈리도마이드는 페니실린으로 유명한 독일의 제약회사 그뤼넨탈이 제조한 신경안정제 '콘테르간'의 주성분이다. 1960년 전후 독일에서 산모들의 입덧 완화제로 처방되었는데 이 약을 복용한 산모들에서 태어난 5000여명의 아이들이 죽었고, 5000명이 넘는 아이들은 팔다리가 짧거나, 귀가 없거나 손가락이 기형인 채로 태어났다. 태아에게서 뇌와 팔다리 귀와 손가락 등이 형성되는 3개월 전후의 중요 시점에서 엄마가 언제 탈리도마이드를 먹었느냐에 따라서 태아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판명되었다.
처참한 결과를 낳은 미나마타병과 탈리도마이드사건을 통해서야 사람들은 임신 기간 동안 약 복용을 최소화하고 안전한 음식물을 섭취해야 한다, 특히 임신 3개월 전후로는 매우 조심해야 한다는 상식을 갖게 되었다. 수 천, 수 만 명의 태아성 미나마타병과 탈리도마이드 베이비 피해를 통한 '피의 교훈'이다.
조만간 발표될 가습기 살균제 피해 신고 사례에 대한 조사결과에는 신고된 태아 사례에 대한 판정은 포함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신고는 접수되었지만 실제 판정 대상이 아니다. 이름도 없고, 주민번호도 심지어는 성별도 모른다. 산모가 사망했거나 환자인 경우 병원기록이 있지만 태아의 것이 아니다. 산모가 건강한 경우는 아예 아무런 자료도 제출 받지 않았다.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는 것이다.
조사위원회는 수백 명의 이름이 있는 사람들, 기록이 있는 사람들의 판정을 해내기에도 벅찬 상황이다. 직접적인 인과관계를 밝히는데 주력했던 초기의 역학조사와 동물실험도 그랬다. 태아 피해의 관련성을 밝히기 위해서는 새끼를 밴 쥐를 대상으로 별도의 노출실험을 해야 한다. 가습기 살균제는 이미 판매 금지되었기 때문에 앞으로 태아 피해 사례를 신고 받아서 연구 또는 조사할 가능성은 없다. 이대로 가다간 가습기 살균제 태아 사망 사건은 '영구미제'될 우려가 크다.
가습기 살균제가 팔리던 때에 대한민국 국민 800만 명 이상이 이 제품을 사용했다. 신고되지 않은 수십, 수백 건의 태아사망 사건이 가습기살균제 노출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 있다. 화학물질안전관리와 살균제성분과 같은 '바이오사이드' 물질의 관리를 책임지는 환경부가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와 생활용품 건강 영향 문제를 전담할 '환경보건센터'를 세워 이 문제를 차근하고 철저하게 다뤄야 한다.
특수한 존재이긴 하지만 태아는 엄연한 생명이고 인간이다. 지하철에서 임신부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미덕은 임신부가 안전하게 아기를 낳을 수 있는 사회환경을 만드는 일로 확대되어야 한다. 태아성 미나마타병의 원인을 밝혀낸 공해병 전문가 하라다 마사즈미 박사는 생전에 이런 말을 남겼다.
"환경오염은 어머니 자궁 속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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