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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가라

[한윤수의 '오랑캐꽃']<238>

외국인 노동자들이 가진 비자는 대개 비전문취업비자 즉 E-9이다.
이 비자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E-9-2는 제조업 즉 공장에 취직할 수 있다. 이것은 좋은 비자다. 공장은 농장보다 백 배 나으니까. 잔업수당도 받고 일요일은 물론 빨간 날 다 놀고 의료보험도 있고 퇴직금도 나온다. 이 비자로 오면 산업혁명 이후 노동자들이 투쟁해서 확보한 제반 권리를 누릴 수 있다.

반면에 E-9-4는 농장에만 취직할 수 있다. 이건 안 좋다. 잔업수당도 없고 휴일도 제대로 못 찾아먹고, *퇴직금 탈 가망도 거의 없다. 무엇보다 일과 휴식 사이의 경계가 뚜렷치 않아 환장한다. 비닐하우스에는 대개 보일러가 설치되어 있다. 이 보일러가 고장 나면 밤중이라도 일어나 고쳐야지 별 수 없다. 안 고치면 꽃이 다 얼어죽는 걸! 이 비자로 온 사람은 중세시대의 농노보다 나을 게 별로 없다.

이렇게 하늘과 땅 차이가 나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E-9-2로 오려고 별별 노력을 다한다. 뒷돈도 쓰고 몇 달씩 참을성 있게 기다리기도 한다.

그런데도 E-9-2 비자를 갖고 있는 사람이 농장에 오는 수가 드물게 있다.
왜? 바보라? 아니다.
공장으로 오려면 오래 기다려야 하지만, 농장은 금방 올 수 있기 때문이다.

태국인 타와차이는 한국어 시험을 봐서 어렵게 E-9-2 비자를 땄다. 그러나 한국 공장으로 가려고 하니 무려 열 달을 기다려야 한단다. 농장은 금방이라도 갈 수 있고! 급한 김에 빨리 가는 농장을 택했다. 이게 무지하게 잘못된 것이다.

한국에 와 보니 타와치이가 배정된 난초농장은 사장님 한 명에 노동자라고는 타와차이 딱 한 명 뿐이었다.
한심했다. 태국 농촌하고 다를 게 뭐 있는가?
차라리 태국에 남아 있는 게 나을 뻔하지 않았을까?

▲ ⓒ한윤수

어두운 8개월이 흘러갔다. 인근 공장에 다니는 태국인들을 보면 부러워 환장할 지경이었다. 차라리 농장 비자로 왔으면 덜 부러웠을 것이다. 공장 비자로 와서 농장에서 일한다는 것은 속이 뒤집히는 일이었다. 도저히 못 견딜 것 같아서 진짜 미치려고 할 무렵에 농장 일거리가 떨어졌다. 난초가 안 팔려 농장이 문을 닫은 것이다.
직장 이동의 기회가 왔다.
하지만 다시는 농장으로 가고 싶지 않았다.

고용지원센터에 가서 빌었다.
"나 E-9-2로 왔으니 제발 공장으로 보내주세요."
고용지원센터 직원은 정작 아무 말도 안하는데,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태국인 통역이 오히려 더 방방 뛰었다.
"안된다니까! 한 번 농장이면 계속 농장이야."

나는 고용지원센터에 전화해 선처를 부탁했다. 하지만 내 부탁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도 말이 안 먹히고 답답해서 다른 고용지원센터로 전출 간 경험 많은 직원에게 유권해석을 부탁하기도 했다.
그러나 경험 많은 직원 왈,
"외국인노동자를 들여올 때 쿼터가 정해져 있습니다. 비자에 관계없이 공장 쿼터에 배정되면 공장으로 가고, 농장 쿼터에 배정되면 농장으로 가는 겁니다. 현행법으로는 어쩔 수 없어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여기도 안 된다지, 저기도 안 된다지, 한숨 쉬는 내 모습을 지켜본 타와차이가 결국 입을 열었다.
"목사님, 나 갈래요."
"어디로?"
"태국으로."
물끄러미 보다가 나도 말했다.
"그래. 가라."

타와차이는 어제 저녁 비행기로 떠났다.

*퇴직금 탈 가망도 거의 없다 : 농장은 대개 5인 이하다. 5인 이하면 퇴직금 안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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